〈 244화 〉 사령왕 토벌전 - 막간 (1)
* * *
황야엔 여운처럼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곳 어딘가.
사라라락, 거리며 신성력이 뭉치더니 천족의 형상을 갖추었다.
[후우.]
뷔엘이었다.
한숨을 깊게 내쉰 그는 지면에 드러눕고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궁극의 얼음 원소 마법에 휩쓸리며 뷔엘의 몸은 잠시 소멸하고 말았으나, 불사의 가호 덕분에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뷔엘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빙제 아이작은 마법의 흔적을 지우고 떠난 듯했다. 다만, 마법의 여파로 넓은 황야엔 때 이른 한풍이 맴돌았다.
[무궁빙설경] 덕분에 황야에 극적인 이변은 없었다. 단지 백골의 헥세크가 나타났던 큰 균열만이 남았을 뿐.
칼가르트와 그의 군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리 뛰어난 재생 능력을 갖췄어도 9성급 얼음 원소 마법을 맞고 멀쩡할 리 없을 테니,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칼가르트의 힘으로 건조된 지하 왕국도 사라졌을 것이었다.
[굉장하네. 저런 인간이었구나….]
감탄사를 내뱉는 뷔엘.
정말, 감탄하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었다.
인간을 얕봤다. 자신이 무지했음을 인정했다.
최고위 천족을 몇 명 정도 데려와야 빙제에 필적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빙제가 보여준 힘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으니. 심지어 뷔엘이 보았던 것도 빙제의 최고 전력이 아닐 것이었다.
[구경하길 잘했어.]
뷔엘은 벌떡 일어나 그 자리를 떠나갔다.
찬바람이 부는 황야를 걸으며, 뷔엘은 지하 왕국에서 칼가르트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 ‘우린 천신을 대적하지 않는다. 네놈이 여길 찾아올 이유도, 우리와 싸울 이유도 없을 텐데?’─ ‘칼가르트, 너희와 난 크게 다르지 않다. …마족 중에서 유일하게 고결해지려 한 자가 있었다고 들었다. 시간조차 주무를 수 있는 강함을 갖췄으면서도 너희의 신에게 봉인 당하지 않았나.’─ ‘그게 어쨌다는 거냐?’─ ‘난 그의 의지를 존경한다. 고결함은 쟁취하는 것이니까.’─ ‘…천인은 그들끼리 고결하다고 자만하는 종족이 아니던가? 네놈은 마치 스스로가 고결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군.’─ ‘그렇다. 나는 고귀한 자이나, 고결하지 않다. 그러니 고결해지고자 하는 것이다.’
당시, 칼가르트는 뷔엘의 의중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 ‘네놈은, 천신 티아누스에게 대적할 셈인가?’
천신 티아누스.
천상 세계의 주관자. 천족이 매일 찬양하며 섬기는 신을 의미했다.
최고위 천족 뷔엘이 자신이 섬겨야 할 신을 죽이려 드는 건가. 이를 타락이 아닌 고결해지는 행위라고 여기는 것인가.
칼가르트는 필시 그런 의문을 품었으리라.
뷔엘은 하얀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목적을 상기한다.
뷔엘이 바라는 것은 천신의 죽음. 그는 역모를 꾸미고자 했다.
이를 위해선 ‘신살(神殺)의 권능’을 지닌 악신의 협력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뷔엘은 악신의 대리인인 메피스토를 찾아갔고.
마족의 방해꾼인 빙제를 처리하기로 메피스토와 거래를 맺었다.
파멸의 악신 네피드는 부활의 때가 이르기 전에 빛의 아이를 해치우려고 했다.
뷔엘은 악신을 돕고 싶어도 빛의 아이에게 직접 해를 가할 수 없었다.
신성력을 가진 자들끼리 서로를 해하면 생명력을 강제로 공유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천족끼리 동족 다툼을 벌이지 못하도록 천신이 그리 설계한 것이었다.
빛의 힘을 다루지 않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빙제가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으리라.
그렇다고 인간이 빛의 아이를 해치우려 해봤자 페어리테일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요정의 가호에 가로막히고 말 터.
하물며 빙제가 있는 이상 빛의 아이를 잡아두려 해봤자 위험만 초래할 뿐이었다.
결국, 빛의 아이를 죽일 수 있는 건 가호를 내린 요정 당사자, 혹은 마족뿐.
방해꾼인 빙제만 처리하면 마족이 빛의 아이를 죽이는 건 수월해질 것이었다.
[빙제라….]
세계멸망급 마법을 가뿐히 사용했던 빙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괴물을 처리한다? 절로 코웃음이 튀어나올 만큼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꼭 그렇진 않았다.
아직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지만, 계획대로 잘 풀린다면 반 년 안에 빙제를 처리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해볼 만했다.
그렇다고 빙제의 주변 사람을 인질로 잡는 식의 추악한 짓을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뷔엘은 고결해지기 위해 천신을 살해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누군가의 희생이 요구된다거나, 자기 뜻을 거역하는 자가 앞길을 막는 게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도 가능한 한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그래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계획만 망치고 제 무덤을 파는 꼴이 되리라.
결국, 빙제 아이작은 악신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희생양이었다.
대의를 위해.
뷔엘은 빙제를 처리하겠다고 다시 의지를 가다듬었다.
* * *
[Level Up!! Lv이 154로 상승했습니다!] [스탯 16을 획득합니다!] [업적 [되찾은 안식]을 달성했습니다! 보너스 스탯 10을 추가로 획득합니다!]
[ 상 태 ]
이름 : 아이작
Lv : 154
성별 : 남
학년 : 2
칭호 : 빙제
마력량 : 73550 / 143800
- 마력 회복 속도(A+)
“졸린가 보구나.”
“조금.”
헬리제 교단이 마련해준 마차 내부.
졸음이 몰려와 고개가 까딱거렸다. 생체 시계가 정확히 맞춰지기라도 한 것인지, 새벽 시간대만 되면 몹시 졸렸다.
동거했던 앨리스는 그런 내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사역마가 아닌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리로 오렴.”
“…고맙다.”
앨리스는 내 옆에 앉고서, 내 머리를 살며시 자기 무릎으로 끌어당겼다. 그리 앨리스의 무릎베개를 벴다.
이 녀석이 순전히 내 편이라고 생각하니 그다지 거부 반응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앨리스를 바라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마차가 덜컹덜컹 흔들려도 뒤통수가 푹신하니 잠이 솔솔 몰려왔다.
시야에 비치는 큰 흉부 너머 앨리스의 부드러운 미소가 얼핏 보였다. 표정이 꼭 자상한 엄마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앨리스는 내 배를 간지럽게 쓰다듬었다.
“애기야, 자장가 불러줄까?”
“…흡?”
앨리스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묻자, 큼직한 흉부가 내 호흡 기관을 푹신하게 감쌌다.
기분 좋게 숨이 턱 막혔다.
앨리스의 팔을 툭툭 치자 그녀는 다시 허리를 곧추세워 내 얼굴에서 흉부를 떼었다.
“어머, 미안하구나. 잘 안 보였단다.”
처진 눈썹 끝과 은근한 미소.
시치미를 떼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조심해….”
도끼눈을 뜨고 경고했다. 앨리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내 머리칼과 귓가를 어루만졌다.
잠들기 전, [천리안]을 발동했다.
로펜하임 남작가에 황실 기사단이 들이닥쳤다. 사역마를 타고 날아온 별동대였다.
아드리안 로펜하임 남작은 수도 브얀스로 압송되는 것 같았다. 이브 로펜하임과 감금됐던 아이들은 사건 조사를 위해 저택에 남게 된 듯 보였다.
다음은 카르네다스 백작령.
그곳도 피해 없이 무사했다. 뒤펜도르프의 제3군단장, 아자벨 실버울프가 활약해준 덕분이었다.
‘저렇게 생겼구나.’
강해 보이네. 레벨이 궁금해진다.
레벨 172의 어둠, 바람 속성인 중간 보스 흉린-몰리카르테를 쓰러뜨렸을 정도이니 필시 그만한 강자일 것이었다.
뒤펜도르프에 관한 이야기는 기사단장 모르칸에게서 많이 전해들었다.
4명의 군단장 중 아자벨 실버울프가 내게 호의적이라기에 그녀에게 이번 임무를 맡겼다.
남은 3명의 군단장은 아직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아직 얼굴도 안 보인 새로운 왕을 무작정 따를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신중하고 합리적인 판단이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뭐, 충성 문제는 왕위 즉위식 때 해결하자.
‘아카데미는, 역시 안 닿네.’
여전히 메르헨 아카데미까진 [천리안]이 닿지 않았다.
그쪽으론 악룡-오르키스가 찾아갔겠지. 녀석은 레벨 174의 어둠, 번개 속성이다.
위험하긴 하지만 도로시와 루체, 뇌신조 파티라면 충분히 발라줬으리라.
어서 그 애들이 보고 싶었다.
‘이제… 레벨은 154.’
레벨은 154까지 올랐다. 사령의 칼가르트와 그의 수하들을 해치우며 일반 업적 [되찾은 안식]을 달성해 보너스 스탯도 얻었다.
이제 잔여 스탯은 총 141.
어찌 보면 여유롭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아직 부족하기도 한 애매한 양이었다.
시나리오가 언제 어떻게 꼬일지 모른다. 게다가 뷔엘과의 싸움이든 요정 대전이든 모두 철저하게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뷔엘이 벌써 움직일 줄 몰랐네.’
사령의 칼가르트가 예정보다 일찍 나온 까닭이겠지. 그 정보는 큰 수확이었다.
뷔엘은 천신 티아누스를 대적하려는 천족.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선 마족과 결탁하고, 마족이 이안을 수월하게 해치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뷔엘의 뜻을 따르는 천족들도 있다. 결국, 전투를 벌여야 할 천족은 뷔엘의 세력.
놈들은 이안의 신성력으로 해치울 수 없다. 원소 저항력도 미친 수준이다.
즉, 유효타를 먹이는 데엔 육탄전을 벌이거나 순수한 무구의 힘을 빌리는 게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뷔엘은 불사의 가호가 지켜 주고 있으므로, 별 짓을 다 해도 해치울 수 없다.
물론 영영 아무런 짓도 못하게 할 방법도 있겠으나, 이는 자살 행위다.
아직 뷔엘의 모반 계획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으니, 이때 뷔엘이 자폭 행위로 천신에게 자기 처지를 원격으로 보고하면 끝장이었다.
천신은 천족을 건드린 자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니까. 배드 엔딩 「신의 심판」을 맞이할 위험이 컸다.
그리 되면 인간계에 간섭해선 안 된다는 조약을 어긴 뷔엘도 형벌을 받게 되겠지만.
뷔엘은 반역의 때를 나중으로 미루면 될 일. 반면에 나는 악신을 막지 못 하는 결과를 떠안게 될 것이었다.
어쨌든, 뷔엘은 [한빙지옥] 한 방 맞은 것 정도는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놈이 두려워하는 건 무력화니까.
즉, 이 시기에 우리가 서로를 건들면 사실상 이득 없는 치킨 게임에 불과해진다.
천족 시나리오에 이르렀을 때 뷔엘 문제를 해결해야 할 터.
그리고.
‘천신 티아누스….’
명계의 명왕처럼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 중 한 명.
신적인 존재와의 마찰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내가 건드려야 할 신은 오로지 이 세계에 강림할 악신뿐.
생각을 정리한 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앨리스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 조금만 잘게.”
“응, 좋은 꿈 꾸렴.”
금세 나는 잠에 빠졌다.
* * *
마차 내부엔 빛 가리개가 씌워진 램프가 미약한 불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앨리스 캐럴은 잔잔히 호흡하는 아이작을 홀린 듯이 바라보며 반곱슬 청은발을 살살 쓸어내렸다.
9성급 원소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던 위엄 있는 대마법사.
그토록 놀라운 힘을 지닌 존재가, 지금은 자기 무릎에 곤히 잠든 귀여운 소년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풀벌레가 찌르르, 거리는 소리.
문득 제 곁에서 살아가라던 아이작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아무리 굳은 의지를 가지고 희망을 품어보려 노력해도, 끝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모든 걸 포기했던.
악몽 같았던 한때의 현실이.
이 남자 덕분에 뒤바뀌었단 생각이 들 때면 언제고 마음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고 만다.
앨리스의 입가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아이작의 감촉을, 체온을 만끽했다.
지금 같은 둘만의 시간이 좀 더 오래가길 바라면서.
이윽고…, 아이작이 몸을 뒤척였다.
“…흐읏.”
돌연 아랫배에 따스한 온기를 느낀 앨리스는 몸을 움찔 떨면서 옅은 신음을 흘렸다.
당황한 그녀는 눈을 뜨고 아이작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작의 얼굴이 앨리스의 샅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호흡할 때마다 촉촉한 숨결이 허벅지를 타고 옷감을 스르르 넘어와 아랫배를 간지럽혔다.
앨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바짝 오므렸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화끈거림이 올라와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
부끄러웠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앨리스는 특유의 자상한 미소를 짓고 아이작의 뒷머리를 살살 쓸어내렸다.
“체셔, 망 좀 봐줄래?”
[니옹, 이미 보고 있어.]
마차 위에서 괴묘-체셔가 대답했다.
아이작이 숨을 내쉴 때마다 앨리스는 연신 오싹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어차피 특별한 일이 없다면 주인님의 잠을 방해해선 안 된다.
앨리스는 애써 신음을 참아내며 아이작의 숨결을 견디기로 했다.
“오늘 잠자긴 글렀네.”
앨리스는 웃는 얼굴로 나지막이 혼잣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