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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최약체는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되었다-268화 (268/334)

〈 268화 〉 원왕 회의 (4)

* * *

[그만하게.]

염제 안데르센 베르산도가 도제 세이렌 실리비안과 풍제 에린 캠벨을 다그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선 다시 나를 쳐다보는 염제.

[두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대의 목적일세.]

“내 목적?”

[왜 그대는 제르베르 황국의 아카데미에 머무르고 있는 것인가? 그대는 뭘 상정하고 있나?]

도제가 말할 땐 노인정에 온 귀염둥이 신입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염제가 다시 말을 꺼내니 분위기가 엄숙한 청문회처럼 돌변했다.

“아카데미를 좋게좋게 다니고 싶어서.”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군.]

“거짓말은 아니야. 당신들한테 안 좋은 감정 품고 뭘 숨기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안경을 한 차례 들쳤다.

[좋은 감정도 없겠지. 지금 우리한테 말할 게 아니라는 건가?]

화염의 형상이지만 날 노려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알면 됐어.”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원왕들과 신뢰감을 쌓은 것도 아니니까. 애당초 이들 모두가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게 느껴진다.

물론 이들을 악신 토벌대의 전력으로 포섭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어차피 나는 이 회의의 일원이 됐으므로 앞으로의 기회는 내 편이었다.

여기서 벌써 내 패를 전부 까는 건 섣부른 행위일 터.

[질문을 달리하지.]

순순히 물러나는 염제.

애당초 이들이 날 원왕 회의에 초대한 건 내 심기를 거스르기 위한 게 아니었다. 나와 불필요한 갈등을 조성해봤자 자기들에게만 손해일 뿐.

염제는 그런 리스크를 짊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작년부터 벌어졌던 일련의 마족 출현 사건, 앨리스 캐럴 사건, 도로시 하트노바 폭주 사건…. 그 모든 사건을 해결한 주요 인물은 자네일세. 그러한 모든 위험을 막는 것이 자네가 아카데미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라고 봐도 되겠는가?]

‘적당히 돌려서 물었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염제가 말한 것뿐만 아니라, 나는 이미 「앨리스 토벌전」 때 원왕들 상대로 소중한 사람들 편을 들어주는 정 많은 인상도 심어 주었다.

이런 평범한 인간성을 보여 준 일도 내가 아카데미에 남으려는 이유에 힘을 실어 준다.

[그럼, 지금까지 벌어졌던 사건들은 모두 예지해 왔던 건가?]

“맞아.”

[알겠네.]

이들의 두뇌가 어떤 사고방식을 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넘어가는 걸 보니 역시 이들은 내게 불리한 추궁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를 하지.]

[내가 물으려던 거야.]

풍제 에린 캠벨의 바람 분신이 끼어들었다.

[너랑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어.]

“그럴 거면 직접 나와서 얘기해.”

[…뭐?]

아까부터 신경 쓰였다.

“당신, 여기 있잖아.”

기둥 뒤에 공간 있다. 거기 있잖아, 너.

원왕에겐 [심리 간파]가 먹히지 않는다. 풍제 같은 인간이 저리 숨어 있어도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어서 지레 겁이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원왕들이 모여 있을 때 풍제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만드는 편이 안전하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아, 왠지 그럴 것 같더라니….]

도제 세이렌은 헛웃음 소리를 냈다.

[그렇군.]

[흐음.]

뇌제 자울과 염제 안데르센은 날 바라보았다. 풍제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보다 내가 그걸 알아챘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나저나 다들 분신을 보낸 상태라 기존의 마나 감지력이 발휘되지 않는 건가. 풍제가 여기 있을 줄 확신하진 못했고 예상만 했다는 눈치였다.

쟤들 사이에 오고 간 이야기라도 있었나?

[제법이네.]

휘우우우우.

연녹빛 바람으로 이루어졌던 작은 여자애의 형상이 사라지고.

어두운 기둥 뒤에서 여자아이의 외모를 가진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녹발. 한쪽 눈에 낀 안대. 마치 사냥꾼 같은 복장을 한 그녀는 바람 마력이 흐르는 신비로운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력량을 한계까지 약하게 조작했어. 완벽하게 숨었다고 생각했는데…. 대단하네.”

툭 내뱉듯 나를 칭찬하는 그녀는 풍제 에린 캠벨이었다.

에이첼은 풍제가 여기 있었다고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까닭에 잠깐 놀랐으나, 금방 표정을 갈무리했다.

레벨 1이었던 건 최대 마력량을 감춰서 그랬던 것이었다.

‘대마법사 수준의 마나 감지력을 감안했나.’

난 그냥 상태창 띄워져서 안 것뿐이었다.

일단 덤덤하게 풍제와 눈을 마주했다.

‘근데 언제부터 숨어 있었냐, 쟤?’

내가 화이트클락 공작가에 이르기 전부터 이 저택에 있었던 건 분명해 보였다.

안 그랬으면 진작 내가 알아챘을 테니까.

‘내가 오늘 올 줄 알고 여기 온 것 같은데.’

즉, 내 행보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건가. 내가 알아챌 수 있는 범위의 밖에서.

…영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치사하네요, 캠벨. 저도 빙제님과 실물 대 실물로 뵙고 싶었는데…! 이기적이에요!]

“넌 빙제랑 불건전한 짓할 생각밖에 없잖아, 소아 성애자.”

[으, 음해하지 마시죠? 그럴 리가 없잖아요?]

풍제 에린 캠벨은 도끼눈으로 도제를 바라보곤 바람 분신이 있었던 자리에 앉았다.

나는 풍제에게 물었다.

“왜 여기 있었어?”

“널 다시 한번 직접 보고 싶기도 했고, 아직 네 능력이 의심되기도 했으니까.”

풍제 에린 캠벨은 머리에 쓴 사냥꾼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난 네가 싸우는 건 직접 본 적이 없어. 내가 봤던 건 오로지 네가 보여준 결과물뿐. 내가 봤던 건 예상보다 한참 낮은 마력량을 가졌던 네 모습이었지. 최대 마력량을 조작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엄청 신중하네. 확신이 들 만한 상황도 한 번 더 의심하다니.

“그런 마나 감지력을 가졌으면 의심할 것도 없겠군.”

결과적으로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착각해줬지만.

그건 넘어가고.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최근에 제르베르 황국의 황무지에서 마족 군대를 처리했지?”

황무지라면, 마족 사령왕을 토벌할 때의 얘기였다.

“어떻게 안 거야?”

“풍문으로 들었어.”

“응…?”

이건 뭔 소리야?

“무슨 소린지 이해 못한 것 같네. 바람은 자유로워. 어디로든 갈 수 있지. 난 바람이 보고 들은 걸 전해 들을 수 있어. 이 세상에 벌어지는 이변도 쉽게 알아챌 수 있지.”

“그러냐….”

말도 안 되는데, 저 사람이 말하니 당연한 것처럼 들렸다.

저 정도는 되어야 풍제도 하는 거구나…. 원왕 기준 빡세네.

“그때의 전투는 메르헨 아카데미에서 마족들을 토벌해왔던 일과 관련이 있나?”

“있다고 하면?”

“시기적으로 아주 적절해서 묻고 싶은데.”

풍제 에린 캠벨은 무감정한 얼굴로 물었다.

“최근 요정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어. 그 원인이 마족과 관련 있다고 생각해?”

요정은 예상 못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2학년 2학기 파트, 「요정 대전」.

철의 요정 라크닐의 계획을 막으려다 실패한 요정들이 라크닐을 막기 위해 여태 힘을 비축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슬슬 때가 되긴 했지.

‘얘네도 요정 움직이는 건 알고 있었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요정 대전」과 원왕은 아예 관계가 없었는데.

당연하게도 사건의 무대는 제르베르 황국이다. 아마 원왕들은 황국이 「요정 대전」에 잘 대처하는지 지켜보기만 했을 것이었다.

즉, 「요정 대전」 같은 시나리오를 편하게 해결하자고 원왕들에게 도움을 구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도움을 구한다면 원왕들을 내 뜻대로 이용하는 셈이 되니까. 그 사실을 이들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을 테니, 결코 좋은 꼴은 못 보겠지.

“나도 구체적인 정황은 몰라. 나라도 전지한 건 아니야.”

“…….”

풍제는 내 의중을 꿰뚫어 보려는 듯했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아쉽네.”

풍제는 그 한 마디만 남기고 입을 다물었다.

……

그 후로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도제의 치근거림과 내 인간성을 파악하기 위한 염제의 몇 가지 질문, 뇌제와 풍제의 침묵으로 내 초대식 아닌 초대식이 끝을 맺었다.

다들 인사를 마치고 분신을 거두었고, 원탁 회의실엔 나와 풍제 에린 캠벨, 에이첼 화이트클락만이 남았다.

잠시간, 정적. 에이첼은 먼저 나서지 않고 잠자코 날 기다렸다.

뭐라 말이라도 꺼낼까, 하다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풍제와 친한 것도 아니고, 친해질 의사도 없었으니 굳이 더 얘기를 나눌 필요는 없다. 이제 돌아가야지.

“하나 물을게.”

그때 풍제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

“…….”

풍제는 내 앞에서 잠자코 나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목각 인형처럼 무감정한 표정이었지만, 바람 마력이 흐르는 눈동자엔 은근한 진중함도 엿보였다.

자기가 왜 여기 왔는지, 진짜 이유를 드러내려는 모양이었다.

“너, 정체가 뭐야?”

뜬금없네. 정체가 뭐냐니…. 빙의자 특성상 자주 듣는 질문이긴 한데, 여기서 갑자기?

풍제는 내 가슴팍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른 녀석들도 알았을 거야. 네 안에 있어선 안 될 것이 있어.”

“알아.”

“안다고?”

도로시에게 들었던 눈 많은 미지의 괴물 얘기가 뻔했다. 나도 안다.

그게 뭔지는 모른다. 지금은 단지 게임 개발사 힉스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게 뭔지 물으려는 거면 포기해라. 나도 잘 모르니까.”

나는 풍제를 제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풍제가 말했다.

“그거, 도로시 하트노바가 폭주했을 때 되려고 했던 결과물이야.”

“…….”

발이 멈춰졌다.

표정 관리가 어렵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건지 온전히 사고할 수 없었다.

고개를 뒤로 돌려 풍제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도로시 하트노바가 역사상 두 번째로 별빛 마력의 보유자가 되었단 건 너도 알 거야.”

별빛 마력의 보유자는 기록에 따르면 두 명이다.

이 세계에서 여러 지식을 접하며 알게 되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설정집엔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이 세계만의 지식, 역사 따위를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전부 다룰 순 없는 노릇이었고.

요정과 계약했던 자들의 기록 또한 시나리오와 별 상관이 없는 내용이었으니.

그래서 설정집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는 기록이라고 납득해 왔다.

“일반적인 원소의 힘이 아닌, 별개의 독특한 힘을 다루는 부류를 요정이라고 부르잖아. 전부 미지의 존재들이지만, 그중 특히 미스터리한 녀석이 별의 요정 스텔라야. 별빛의 힘을 다루는 요정.”

풍제 에린 캠벨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으나,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별빛 마력의 보유자는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됐어. 그 시기에 천재지변이 세계를 덮쳤지. 그리고 도로시 하트노바가 폭주했던 원인은 아마도 별빛 마력을 남용해서였을 거야. 이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해?”

“…….”

“스텔라는… 천하의 빌어먹을 새끼일지도 몰라.”

풍제는 아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그녀의 안대 탓에 눈은 보이지 않았다.

“요정들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해 물어본 것도 그런 맥락이었어.”

“…….”

“너…, 도로시 하트노바 좋아하지? 남자 대 여자로서.”

“응.”

“그렇다면, 별의 요정도 쫓고 있지 않아?”

“그런 얘기라면 더 할 필요 없다.”

오즈의 나라에서 도로시 게일을 구했던 별의 요정.

악신을 상대로 한 이 장기판에서 도로시는 희생을 치렀고, 그건 예정된 일이었다.

즉, 도로시를 콕 집어 힘을 준 스텔라가 이 장기판에 개입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여정에서 기어이 살아남아 종착지에 이른다면.

어쩌면 나는, 스텔라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언젠가 만날 것 같아서.”

그 말을 남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풍제는 더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에이첼이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와 함께 지하실을 나섰다.

메르헨 아카데미로 돌아갈 때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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