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화 〉 올드렉으로 (2)
* * *
귀가 먹먹했다. 아벨이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동승자인 뷔엘, 즉 론자이너스 강사에게 신경을 쏟고 있는 까닭이었다.
올드렉행 마차들은 일제히 연륙교를 횡단해 대륙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뷔엘과 얘기한 바, 그는 감독관으로서 순번이 앞서는 마차에 탑승했다고 했다.
‘하필….’
운이 나빴다고 봐야 할지, 좋았다고 봐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저기, 말 안 하려 했는데요. 두 분 혹시 싸우셨어요?”
떠들면서 눈치를 보던 아벨이 드디어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까부터 분위기 왜 이래? 자자, 얼마나 좋은 날이야. 소풍 가는 기분으로 으쌰으쌰 가야죠! 다 같이 한 팀인데!”
“마음에 드는 친구네. 소풍 가는 기분이라, 좋지.”
아벨의 뭣 모르는 격려에 론 강사가 호응했다.
한편, 로앤나는 과자만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음?”
딱히 꾸민 것 없는 로앤나의 왼손에서 유달리 약지에 끼인 반지가 돋보였다.
눈을 돌려 아벨의 왼손을 쳐다보았다. 이쪽도다.
“하핫. 이거이거, 아이작 선배님께서 눈치채신 것 같군요.”
천연덕스럽게 반응하는 아벨. 녀석은 내 눈알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지켜보고 내 생각을 알아챘다.
아벨의 왼손 약지엔 로앤나의 것과 똑같은 반지가 끼여져 있었다. 녀석은 왼손을 들더니 반지를 한껏 내보였다.
엄청 자랑하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죠~, 이미 보였다면 어쩔 수 없겠네요!”
“너희 둘, 사귀냐?”
“정답입니…!”
퍼억!
로앤나는 아벨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아프겠다.
아벨은 뒤통수를 부여잡고 “끄으으.”하고 신음하더니 로앤나를 노려보며 불만을 토했다.
“아까부터 왜 자꾸 때리는데?!”
“조용히 좀 있어, 능글이 새끼야….”
로앤나의 호흡은 불규칙적이었다.
무표정 속 상기된 뺨. 굳이 [심리 간파]를 쓰지 않아도 로앤나가 무슨 심리인지는 손바닥 보듯 훤히 들여다보였다.
‘놀랄 일도 아닌데.’
두 사람이 연인 관계가 된다는 건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내가 몰랐겠냐.
“연애라…. 한창 좋을 때구나.”
“오오. 강사님, 이런 거에 관대하시네요? 우리 교관님이었으면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연애는 무슨, 쯧쯧’하고 혀나 찼을 텐데.”
“교내 연애는 지향하는 편이라서. 출생이 다른 두 남녀가 한 자리에 만나 가족 다음으로 깊은 연을 맺는 것. 참으로 아름다운 현상이지 않나?”
“전 강사님처럼 포용력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하핫.”
바로 아부 모드에 들어가는 아벨.
론 강사는 연애 욕구에 구애 받지 않는다. 관심도 없을 테고.
‘좋을 때구나’라는 말조차 그냥 어디서 주워들어서 써먹은 말일 것이었다.
“한데, 반지를 끼는 이유는 뭐지?”
“예? 그거야…, 얘한테 임자가 있다는 걸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잖아요? 나름대로 만족감도 있고?”
로앤나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과자만 짧게 끊어 먹었다.
“제발 좀 닥쳐.”라는 자그마한 속삭임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와 마차 끄는 소리에 스몄다.
“연애라는 구속력 없는 계약을 증명하기 위해서라. 계약엔 실체가 없으니, 가히 합당한 이유군.”
론 강사는 팔짱을 끼더니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이작 학생?”
“예.”
“그래서 루체 학생에게 반지를 줬나?”
“…뭐?”
화살을 내게로 돌리는 론 강사. 아벨과 로앤나는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루체 학생이 항상 왼쪽 약지에 소중히 끼고 다니는 반지. 누가 보아도 아이작 학생이 준 게 확실해 보이던데. 설마 아니라고 발뺌하진 않겠지.”
날 놀리려고 아벨한테 그딴 질문을 했던 거냐…?
“그게 그런 의미였군. ‘이 여자가 내 여자다’라는, 누구도 넘보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 자기 짝이라는 증표. 아주 마음에 들어. 자네도 청춘이다, 이 말이군.”
아벨은 팔꿈치로 로앤나를 쿡쿡 찌르더니 “거 봐라, 루체 선배 맞았지?”하고 속닥거렸다.
얘네 둘은 쓸데없이 내 커플링에 대해 논의했던 모양이었다.
“아이작 선배님, 대답이 없으신데요? 시인하시는 겁니까?”
즐거운 화젯거리라는 듯, 아벨은 킥킥 웃으며 추궁했다.
여기서 ‘내가 루체에게 준 반지는 왼손 약지에 끼어야 효과가 발휘되는 반지일 뿐이다’, ‘연애 목적으로 준 반지가 아니다’ 따위의 변명을 늘어 놓아봤자 추해질 뿐이다.
누가 순전히 그런 말을 믿겠는가.
‘애초에 루체한테 연애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는 안경을 들치고서 태평하게 웃었다.
“별로 하고 싶은 얘기는 아니네요. 쓸데없는 얘기는 관두죠.”
알아서 해석하라는 의미였다.
“꽉 막힌 대답이네요….”
“재미없군.”
어째 이 녀석들, 호흡이 척척 잘 맞는다. 얘네 오늘 처음 본 사이 맞나?
“아, 론 강사님도 여자친구 있으세요? 아니지, 아니지. 결혼하셨죠?”
“태생부터 그런 게 있었던 적은 없다. 아무도 내 수준에 걸맞지 않았거든.”
“예? 아….”
의기양양한 태도로 자신을 포장하는 론 강사.
‘결국 모태 솔로란 얘기잖아.’
아벨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아끼려는 눈치였다.
거기서 이야기는 끝이 났다.
……
“아이작 선배님, 다 왔습니다! 올드렉!”
“그러네.”
아벨은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마차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인 채 콧김을 훅훅 내뿜었다. 잔뜩 흥분한 모습이었다.
로앤나도 흥미가 가는지 아벨과 함께 창밖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흥분했군, 아벨 학생.”
“당연히 흥분하죠! 우리 같은 남자들의 로망이잖습니까, 여기! 제르베르 황국에서 길드 문화가 가장 크게 번창한 곳! 모험가들의 도시, 올드렉인데!”
수많은 마차들의 행렬이 길을 메웠다.
올드렉은 제르베르 황국 동남쪽에 위치해 메르헨 아카데미와 가까운 편이다.
아벨 말대로다. 이곳은 모험가들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의 방학 컨텐츠 중 하나인 길드 퀘스트는 대개 올드렉에서 받는 편이었다.
‘길드 퀘스트…. 추억이네.’
별 생각 없이 재밌게 게임했던 지난 날이 문득 그리워졌다.
“이야, 마차가 정말 많네요!”
“대항전에 출전하는 아카데미는 총 다섯 곳이니까. 많을 만 해. 이 인원을 전부 수용할 수 있나?”
아벨의 감탄사에 로앤나가 반응했다.
아카데미 대항전은 황실에서 개최하는 대규모 행사로, 참여하는 아카데미는 총 다섯 곳이다.
올드렉의 일부를 통째로 빌리므로 숙박 시설이 부족할 일은 없다.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정차하고 마부가 외쳤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차 문을 벌컥 열어 젖힌 뒤, 아벨은 헤실거리며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뒤따라서 나와 론 강사, 로앤나도 하차했다.
올드렉의 텅 빈 대형 광장. 학생들은 교직원의 통솔에 따라 한 자리에 모였다.
인원 체크 후, 우리는 각자 숙소를 배정 받았다.
대항전 참가자와 관중은 머무르는 숙소가 달랐고, 두 숙소의 거리는 먼 편이었다. 황국이 그리 체계를 만든 것이다.
‘루체랑 카야, 앨리스도 관중 숙소겠고.’
걔네는 내 지시에 따라 관중으로 참가했다.
안전하게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것이 목표인 이상, 내 동료들이 행동 제약을 덜 받는 관중이 되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내일부터 아카데미 대항전이 시작된다. 최상의 컨디션을 갖추기 위해 오늘은 쉬는 데 전념하도록. 이상.”
냉철한 인상의 교수, 페르난도 프로스트가 확성기에 대고 말했다.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차분했다.
아카데미 대항전은 매번 종목이 바뀐다. 무슨 종목일지 예측하는 건 무의미하다.
결국, 오늘은 자유 시간이었다.
“그럼 해산해라.”
페르난도 교수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 올드렉 처음 와봐!”
“완전 설레….”
“오길 잘했다, 히히.”
학생들은 저마다 힐링하러 온 듯한 분위기였다.
아카데미를 떠나 새로운 장소에서 3박 4일간 머무르게 되니까. 마치 수학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겠지.
학생들이 흩어져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학생들마다 위치 추적용 팔찌가 장착된 상태였기에, 그들이 어딜 가든 교직원들은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이작 학생.”
숙소로 향하려는 때였다. 론 강사의 부름에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사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내일 대항전, 기대하고 있으마.”
“뭐…?”
그 말을 남기고, 론 강사는 손을 흔들며 인사하더니 감독관 집합소로 떠나갔다.
겉으로 듣기엔 응원과 격려일 뿐이었다. 그러나 말한 이가 나를 해치려는 놈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냥 해 본 말인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선 전투할 때 말고 뷔엘과 부딪힐 일이 없었다.
그래서 저놈의 말버릇, 행동 패턴 따위를 제대로 파악하기엔 사전 지식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입을 열었다.
“체셔.”
[니옹?]
내 옆에 작은 중절모를 쓴 보라색 고양이의 머리가 나타나 둥둥 떠다녔다.
괴묘-체셔의 머리였다. 나머지 부위는 투명화 상태라 안 보이는 것이었다.
“론 강사 감시하면서 수상했던 점,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어?”
[니오옹…. 이 몸의 지루하고도 꾸준한 스토킹 결과, 그런 건 없었지. 내 귀여운 발바닥에 대고 맹세할게.]
괴묘는 앞발의 투명화를 풀고 뽀송뽀송한 발바닥을 내보였다.
무시했다.
‘단순히 심증만으로 뷔엘을 추궁해도 얻을 건 없어.’
주요 시나리오를 앞둔 시점이다.
천신을 후방에 둔 불사신 상대로 괜한 해프닝을 벌여봤자 리스크를 짊어질 사람은 나뿐이었다.
“…계속 감시해줘. 조금이라도 수상한 정황이 보이면 곧바로 보고해.”
[분부대로.]
머리만 떠다니던 괴묘-체셔는 잿빛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어느덧 나는 아카데미 대항전의 참가자 숙박촌에 이르렀다.
숙박촌은 아름다운 외관을 뽐냈다. 전생이었다면 데이트 코스로 손꼽힐 만한 곳이었다.
여러 아카데미에서 온 다양한 교복 차림의 학생들은 숙박촌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즐거워했다. 그 탓인지 관광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고개를 들면 우뚝 솟아 있는 핫센 화산의 위엄이 시야에 담겼다. 저 화산 덕분에 올드렉은 온천 관광지로도 유명했다.
달밤의 서늘한 바람이 피부를 간질였다. 이런 데서 마음 편히 캔맥주 하나 들고 돌아다니면 그만한 힐링이 또 없을 텐데.
참… 유유자적한 생각이다.
“놀고 싶어지지?”
“아앗!”
별안간 귓가에 아름다운 음색이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라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내게 말을 건 여학생과 한 발자국 거리를 벌렸다.
마녀 모자를 머리 뒤로 넘겨 고정해둔 예쁘장한 여학생이 입을 가리고 능청맞게 웃고 있었다.
느흐흐, 하는 특유의 웃음소리. 도로시였다.
“놀라는 거 귀여워…!”
“선배…?”
오늘은 마주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에? 완전 얼빠졌네, 이 녀석. 누나 보니까 반가워?”
도로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교스럽게 물었다.
심리는 안 읽혀도 그녀에게서 들뜬 기색이 또렷이 비쳤다.
“교직원 숙소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선배, 감독관이잖아요?”
“누나는 특별 임무를 받았거든! 그래서 숙소도 다른 데 배정 받았어!”
한 손을 허리에 올리고 다른 손을 가슴께에 얹으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하는 도로시.
특별 임무를 받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이라도 느끼는 걸까.
“특별 임무가 뭡니까?”
“너랑 같이 있는 거. 정확한 표현으로는, 널 전담해서 통제하는 거.”
아, 그렇구나.
바로 납득이 갔다. 그럴 만도 하지.
“여긴 아카데미가 아니고, 넌 우리 아카데미 소속인데 신분이나 파워가 어마어마한 녀석이잖아? 그래서 널 특별 감독할 사람을 정해야 했거든.”
메르헨 아카데미에서 그나마 내게 대적할 만한 사람을 꼽으라면 도로시뿐.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래서 선배가 그 역할을 맡았다?”
“그렇지! 신속히 기뻐하도록.”
“…만세.”
“느흐흐, 맥 빠지는 반응이네! 그래도 기뻐하려는 노력은 이 누나가 높게 평가하지.”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도로시.
대충 호응했지만, 진심으로 기뻤다.
도로시를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제 뭐 할 거야?”
“일단 숙소부터 갈 겁니다.”
“참고로 누나 오늘 너랑 같은 숙소다?”
“그거 좋네요.”
“니히히.”
우리는 나란히 발걸음을 옮기며 수다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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