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소녀검성-2화 (2/47)

〈 2화 〉 #001 나약하디 나약한 육신

* * *

1화

의문의 소녀가 변방의 도시 베일렌에 모습을 드러내기 정확히 닷새 전.

제국과 맞닿은 국경선의 남쪽,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숲에는 여럿의 기사가 말을 몰고 있었다.

말들이 우거진 수풀을 가르고 작게 나 있는 숲길을 조용히 걸었다. 다그치지 않고, 소란을 끌지 않게끔 그저 조용하게.

그리고 그것은 발걸음 뿐만이 아니라 서로 속삭이는 말소리까지도 그러했다.

잘 포장해서 말한다면 은밀하고 신중하다 일컬을 수 있겠다만, 어찌 보면 좀스럽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꾸물거리는 모양새였다.

“얼마나 더 걸립니까?”

“거의 다 왔으니 보채지 마라. 다섯 번째 물어본 걸 알고는 있나?”

“……마음가짐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지 말입니다.”

실베스터 파티의 마왕 토벌 이후, 말도 타고 다니지 않는데 스스로 기사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자유기사’인가 뭔가 하는 우스꽝스러운 부류가 생긴 모양이지만—

"마음가짐은 무슨. 전쟁터에서나 통할 변명을."

"후우, 후우…. 못 들었습니다?"

그들은 ‘진짜’ 기사였다.

황제 휘하의 귀족에게 직위를 하사 받고, 그에 마땅한 봉급과 주택을 할양 받는 기사.

혹자는 그들에게 귀족의 더러운 뒤처리나 도맡는 쓰레기들이라 욕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용병들이 그러했다— 아무래도 일단 그 말에 시기와 질투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대체로 기사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그 자부심을 나타내며, 당당히 거니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지금, 이토록 긴장하여 손까지 떨어대는 신참 기사의 모습에서 그런 명예로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말이다.

“잭슨, 좀 진정하라니까. 뭐 괴물을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냅둬. 신참들이 다 저렇지.”

공포 때문은 아니었다.

그 떨림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의 이름을 말하자면, 그것은 다름아닌 ‘경애’.

우상을 향한 선망하는 마음이었다.

"후우."

손이 떨려온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고, 샘솟는 혈류를 주체하지 못해 숨이 가빠왔다.

오랫동안 바라 마지않던 만남인 것이다.

‘그래, 나도 기사다. 그분과 마주설 수 있는 기사야…….’

신참 기사는 심호흡하며 말에서 내렸다.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랐으니, 복장을 점검하고 문을 두드려야만 했다.

‘종자를 못 데려온 건 불편하지만, 그분께서 원치 않으신다면야.’

어디를 가도 환영받을 제국의 영웅이 이런 외지에 은거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하던데, 그가 어수선한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는 곧 주변을 돌아보았고, 가장 먼저 하얀 오두막을 시선에 담았다.

대충 보기에 방이 두개쯤 있어 보일 법한 작은 오두막이 그곳에 있었고, 그 앞에서 다른 기사들이 오두막을 바라보며 잡담을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질투나게도, 그들은 지금의 이 장소가 상당히 익숙한 듯 보였다.

“언제 봐도 참… 좀 더 크게 지으셔도 됐을 텐데 말이야.”

“좀 더? 좀 더는 무슨. 편지 한 통이면 폐하께서 황실의 별궁 하나를 통째로 하사하실 텐데."

"그것 뿐이냐? 별궁의 방 하나를 금은보화로 채워 주실 걸? 세상의 온갖 미녀… 는 모르겠지만, 그것 빼고는 전부 다 주실 거라고.”

“……그건 그래. 뭐, 그분 성정에는 이런 게 맞는 거겠지.”

“큭큭, 아니면 그게 싫어서 도망쳐 왔던가.”

듣기로, 그들은 실베스터와 모종의 연이 있는 기사들이라고 했었다.

그의 이야기를 책과 이야기로만 접한 신참 기사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모든 기사들의 우상인 그분과 같은 전장에서 같은 적을 마주했다니!

그의 검은 둔하지만 강렬하며, 눈앞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찰나의 순간 목을 가져간다고 몇 번이고 음유시인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더랬다.

그 작은 오두막도, 신참 기사에게는 강대하기 그지없는 순백의 성채처럼 보여왔다.

‘……그래, 저 안에!’

신참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기사들이 오두막 앞에 도열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자, 어서."

"...예!"

너무나도 영광스럽게도, 그들이 이 문을 두드리는 영예로운 일을 자신에게 맡기겠다고 한 것이다.

무언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은 그 광신적인 동경 앞에서 아무런 힘을 얻지 못했다.

그저 그 일을 양보한 자신의 선임 기사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낼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신참 기사는 다른 기사들과 눈빛을 한 번씩 마주하며 숨을 가다듬었고, 마침내 그 문 앞에 섰다.

몇 번의 심호흡을 반복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문을 두드렸고—

—콰아앙!!

“어어어어억!!”

굉음과 함께 ‘발사’된 문에 쳐맞아, 괴성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컥, 커헉...."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눈길 하나 주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아마도 복귀하면 삼 주 정도는 신전 신세를 지게 될 것이 분명한 몰골이었다만.

그들의 시선은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중년인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만 좀 찾아라! 네놈들은 질리지도 않느냐?!”

육십대의 나이임에도 벌써 하얗게 새어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새벽색의 강인한 눈동자.

몇 번이고 찾아왔고, 몇 번이고 퇴짜를 맞은 그들은 다시금 경애를 담아 그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론하르트 경.”

실베스터 론하르트, 검성의 이름을.

—다그닥, 다그닥.

“아, 씨발.”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미리 말해 두건데, 나는 썩 욕지거리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아니다.

젊을 적에는 주변 사람의 영향을 받아 그런 시절이 있기도 했다지만, 무릇 벼도 여물수록 고개를 숙이듯 나도 허리가 숙여지니 입을 여물게 되더라.

단순한 이유다.

소드마스터고 검성이고 나발이고 오십견과 요통엔 장사 없는지라, 등신들과 언쟁하기보다는 그래 네 말 맞다 병신아 해 주고 커피나 한 잔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혼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는 몸에 좋지 않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면 몸이 나빠지면 나빠지지 좋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 말발굽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차마 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개새끼들.’

어쩐지 산등성이에서 저 소리가 울리기 시작할 때부터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더라니, 어김없이 목적지는 이 집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놈들이 할 말도, 매번 다르지만 대충 맥락은 매번 같다.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아니, 이놈의 나라는 내가 없으면 해결할 수 있는 게 없나?

오랜 생각이었다.

아니, 오래되다 못해 요즘은 대충 보름에 한 번 정도는 생각하는 것 같다.

이유?

저 씹새끼들이 보름에 한 번씩 찾아오니까.

‘……아니, 욕은 참아야지. 지난번에 물리치료사 소녀도 욕하지 말랬으니.’

후우.

후우…….

심호흡이다. 그래, 소수를 세자.

소수는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지는 고독한 숫자…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라고, 이것도 물리치료사 소녀가 말해 줬던가…….

아니, 이건 마을의 신관이 말해 줬던 것 같다. 아마도.

“나이를 먹으니 원.”

기억이 점점 가물가물해진다. 나도 결국 사람인 이상, 늙을수록 무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무뎌지고, 흐려지고… 스러진다.

굳이 어딘가에 나서서 참견하고 싶은 마음도 점차 사라져 갔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정말 말로 타이르자. 진심을 다해 대화로 마음을 전한다면, 이제는 그만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은가…….

—똑똑똑.

하지만.

‘무리하지 마세요. 갑자기 화내지도 마시구요! 이쪽은 혈압약이고, 이쪽은…….’

노크 소리가 들린 한 순간, 가끔 집에 찾아오는 물리치료사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래, 그녀는 항상 내 건강을 걱정하고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고는 했다.

화를 내면 혈압에 좋지 않으니, 되도록 참으라고도 말했었다.

그런데…….

—똑똑똑.

‘미안허이, 물리치료사 처자.’

자네가 틀렸어.

사람이 화를 참으면 오래 못 산다.

모름지기 스트레스는 제때 제때 발산해줘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확신한다.

'지금이 아니면, 도대체 그게 언제냐고.'

나는 적당히 돌맹이 차는 감각으로 문을 걷어찼다. 너무 강하게 차면 맞은편에 있는 놈이 죽어 버릴 테지.

기억을 떠올리자. 전성기의 기억을.

딱... 문만 날리는 감각으로.

—콰아아아앙!

다행히도, 감각은 적중했다.

아직 실력이 녹슬진 않은 모양이다.

좀 녹슬었으면 시끄러운 놈들의 머릿수를 하나 줄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 때는 이미 문을 걷어찬 이후였다.

“어어어어억!!”

직후, 문 뒤편에 서 있던 놈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저만치 처박히는 것이 시야에 스쳤다.

좀 불쌍하기야 하다만.

저 정도야, 나 때는 하루면 털고 일어났으니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후, 내 시선은 또 건방지게 나를 찾은 기사 놈들을 향했다.

"후우, 이 빌어먹을 놈들..."

대충 보기에, 지난번과 비교하여 인선은 이번에도 바뀌지 않았다.

먼 옛날 나와 함께 전장에 섰던 종자들이었다.

이제는 기사가 되어 내 앞에 섰지만, 이렇다 할 감상은 없다.

빌어먹게도 성가신 짜증만 남을 뿐이다.

추억이나 감상을 이용하는 회유만큼 같잖은 것이 또 없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안녕은 니미. 니 애미는 안녕하냐?”

“지난달에 돌아가셨습니다.”

“……아.”

그건 몰랐네.

순간 죄책감이 살짝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알 바냐.

내 양심은 이미 둥글둥글해져 털까지 뽀송뽀송하게 난 지 오래였다.

“어쨌든, 그만 좀 찾아와라! 네놈들은 질리지도 않느냐?! 날 좀 내버려 두란 말이다!”

“안 질립니다! 아니, 그리고 방금…….”

“으으디 어린놈의 새끼가 목청을 높여!!”

“……….”

“씁! 눈깔 인마!”

아, 뒷목이야.

나이를 먹어서인지, 화 내는 일 하나하나가 이제는 골이 아플 따름이다.

‘망할, 진짜…….’

마음 같아서는 눈앞의 놈들을 싹 다 도륙내고 잠적해 버리고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그럴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썩 좋은 생각은 아니리라는 것을.

인륜이고 나발이고 하는 병신같은 논제를 떠나서, 지극히 실리적인 이유였다.

그런 짓을 하면, 황제는 좋다구나 하고 ‘그대의 죗값을 치르라!’라고 지랄하며 나를 어떻게든 찾아내어 전선에 세울 것이 분명할 테니까.

그리고 아마 죽은 저 친구들은 세상 사람 누구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게끔 잊혀지겠고 말이다.

그런 인간이다. 황제는.

“아무튼, 오랜만에 뵙습니다. 론하르트 경.”

놈은 곧 어께를 으쓱이더니 내게 고개를 숙였다. 같이 온 다른 기사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랄…. 오랜만은? 보름만이다, 이 자식아.”

“아십니까? 그 보름이 저에게는 15년 같았습니다. 대장님.”

“쌧바닥 놀리는 건 기사가 아니라 재정부 관료 같구나, 아주?”

“에이, 그런 씹새끼하고 저를 비교하시면 안 되죠.”

말론은 자연스레 웃으며 머리늘 긁적였고, 그 꼴에 나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젊은 것들이랑 말다툼할 나이도 아니고, 구태여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해가며 저항할 나이도 지난 지 오래란 말이다.

이 나라 대장군이 내 후임이다. 개새끼들아.

“말론, 난 늙었다. 지쳤어. 이제 나랏일에 개입할 나이가 아니란 말이다.”

“아직 정정하신 것 같던데요.”

말론은 곁눈질로 저만치 날아간 다른 기사 놈을 흘겨봤다.

대충 보기에 갑옷이 반딱반딱한 게, 딱 봐도 서임식도 얼마 지나지 않은 신참인 듯 했다.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문 두드리고 쳐맞아 날아간 놈도 신참인 것 같았다.

“어린 놈이 엄살이 심하네. 나 때는 말이야, 드래곤에 깔려도 삼일이면 일어나고 그랬다.”

“대장, 요즘 아이들은 그걸 꼰대라고 부릅니다.”

“꼰대는 또 뭐야. 니미럴, 요즘 말은 어려워서.”

마을에 가는 건 기껏해야 보름에 한번이고, 사람은 만나지를 않으니 요즘 말을 알 턱이 있나.

나는 머리칼을 헝크러뜨리며 대충 집 안으로 돌아가 잡히는 잔을 들이켰다.

씁쓸하고 미지근한 게 목을 넘기는 게, 아무래도 먹다 남은 맥주인 것 같았다.

나는 대충 소파에 몸을 뉘이며 손을 휘적였다.

더 이상 입을 여는 것도 귀찮았고, 일어서서 놈들을 맞이하는 것도 힘겨웠다.

“오늘도 또 같은 용건이겠지. 두고 가라. 어차피 뭘 기대하고 온 것도 아니잖냐.”

“그건 그렇죠. 임무니까 오는 거지. 뭘 기대하겠습니까?”

“이 새끼가?”

“겸사겸사 대장 얼굴도 보고 말입니다.”

“……….”

빌어쳐먹을 관료 놈들과 말싸움을 관둔 지도 십수 년이라, 이제는 누군가에게 뭐라 쏘아붙일 말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자, 이겁니다. 이번에도 태워먹진 마시고요."

"선처해 보마."

말론은 다른 기사들이 바깥에서 들여온 상자를 생색내듯 거실의 구석으로 밀어 넣고는, 품에서 황실의 인장이 찍힌 서신 하나를 꺼내어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누군가는 황제의 친필 서한을 가보로 남긴다는 말도 들은 것 같다만, 내게는 호화로운 불쏘시개의 일종일 뿐이다.

"황제 서신을 태우는 건 반역죄인 거 아시죠?"

"목 치던가. 법대로 해라."

말론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서신을 테이블 중앙으로 옮겨 놓았다.

꼭 보라는 양 사과 하나를 모서리에 걸쳐 놓는 것은 덤이었다.

그리고는, 구석에 옮겨놓은 상자에서 이것저것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일단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이번에 황제께서 보내신 메델론산 장어랑, 굴이랑, 아… 이건 복분자주네요. 이거 저 가져도 됩니까? 슬슬 둘째 볼 때인데.”

“가져가라. 가져가.”

“감사합니다. 뱀술은 이미 오면서 마셨어요. 좋던데요.”

“아이고, 두야…….”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나는 이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선물 따위, 어차피 하도 보내서 이제는 질릴 지경이었으니 아쉬울 것도 없다.

‘저 서신의 내용도 대충 예상이 가고.’

어디 국경지대의 무엇에 문제가 생겼으니, 대충 좀 도와 달라는 내용일 것이다.

한… 삼 년쯤 전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적은 없지만.

......

그래도 아직 바뀌진 않았을 것이다.

'뻔하지, 뭐.'

정말로 급한 일이었다면, 요직에 앉아 있는 엉덩이 무거운 놈들 중 하나가 직접 왔을 테다.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조아리고…….

항상 그래 왔으니까.

‘늙은 몸을 부려먹을 생각밖에 안 하는 놈들…….’

쯧.

내가 김 빠진 맥주를 세 모금쯤 들이킬 무렵, 말론은 익숙하게 허리를 숙이고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물러났다.

내가 놈을 쉬이 용서하는 만큼, 놈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한 번 정한 것은 웬만해선 굽히지 않는다.

특히, 사내새끼가 찾아와 하는 부탁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어떨까.

­ 다그닥, 다그닥.

기사 녀석들의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 갈수록, 점점 찾아오는 적막에 오늘따라 저 서신에 눈이 갔다.

“나이를 먹으니 감수성만 늘어가는군.”

사람을 못 봐서 그런가.

사람이 지겹고, 분쟁이 싫어서 숨어들었다.

그럼에도 과거의 영광과 과거의 시끌벅적함이 가끔이나마 그리워지는 것은 특별한 추억이 있어서일까.

혹은, 그저 세월의 풍파에 따른 변덕일 뿐일까.

이리도 경험 많은 기사라 칭송받으면서도, 나는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하지 못했다.

“끄응.”

어쩌면, 수많은 선배 기사들이 나이를 먹어 은거하면서도 결국 아카데미나 기사단 교관으로 기어 나오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나도 그런 나이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편지 정도야 뭐.”

몇 년에 한 번쯤 찾아오는 변덕이나 자비 쯤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편지의 인장을 뜯었다.

붉은 용과 방패가 새겨진 인장이 거칠게 뜯겨졌고—

그 다음 순간.

“………!!”

푸른, 그리고 시리도록 차가운 섬광이 내 시야를 뒤덮었다.

그것은 찰나의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광폭한 불꽃과 함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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