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031 삥 뜯으면 정답이 나와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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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보통, 아카데미의 교수진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정말로 그다지 없는 일이다.
각자의 강의와 연구가 바쁘기에 대부분의 업무는 서면으로 처리되는 편이며, 그조차 귀찮은 교수들은 자신의 조수나 조교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여 회의조차 대리로 처리해 버리는 일도 적잖이 있다.
가끔 교장이 소집한 대회의에는 꼼짝없이 모두가 출석해야 하겠으나, 그녀는 출장을 떠나 자리를 비운 지 이미 몇 개월.
실상 그들을 묶어 놓을 존재가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가 성립한 사실은 그야말로 이변이라고 말해야 하리라.
기사학과.
마법학과.
행정학과.
그 세 갈래로 나뉘는 거대한 가지의 교수들은 각자의 학과에 대한 자부심과 자립심이 있었고, 서로의 그러한 프라이드를 존중했다.
그렇기에 대체로 학과의 일은 그 학과 내에서 마무리하며, 다른 학과의 교수와 동일한 일을 토론하는 일 자체가 많지 않다.
대체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옆 학과에 무슨 사고가 생기든 참견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니까.
그렇기에 이 모임은 어제 부로 끝이 났어야만 했다.
2차 시험이 끝나면 남는 것은 필기 시험을 포함한 ‘반 배정 시험’ 뿐.
그 시험은 기존 입학생들과의 비교를 위해 매년 같은 수순을 밟아 왔기에, 더 이상 논의할 것도 없었다.
분명 그랬어야 했건만—
교수들은 한 가지 논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문제의 그 두 번째 시험.
작일, 논의가 끝났어야 했을 그 시험의 변경에 대한 일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갑자기 과목 변경이라니요! 필기를 앞서서 치르겠다? 문제가 유출되면 어찌 하시려는 겁니까?!”
진녹색 정장을 고아하게 차려 입은 늙은 교수가 탁상을 내리치며 노성을 토했다.
행정학과— 그 중에서도 역사학의 교수, 레논이었다.
다른 행정학과의 교수들도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행정학과의 입장은 잘 알고 있소만, 현 사정이 너무 복잡하다오. 양해해 주시오.”
기사학과, 수석 검술교관 베네투스가 대꾸했다.
행정학과는 다른 두 학과들과 판이하게 다른 입학 과정을 거치기에, 당연하게 나오는 불만 중 하나임을 잘 알고 있었다.
흔히 ‘1,2차 시험’이라 불리는 전국의 입학시험은 기사학과와 마법학과만 치르는 시험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전선에 나서는 기사와 탁상공론을 나누는 행정가가 똑같이 검을 들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기사의 무기가 철이고 마법사의 무기가 이적이듯, 학자의 무기는 논리.
그 시험의 종류에 차이를 두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사와 마법의 2차 시험이 끝난 뒤 치러지는 반 배정의 필기시험은, 학과를 가리지 않고 전체가 동일하게 시행된다.
그런데 그러한 시험을 행정학과만 빼고 미리 보겠다는 것은 분명 행정학과의 입장에서는 불공평을 주장할 수 있을 만한 일이었다.
한 번으로 족할 것을 두 번 감독해야 하며, 문제 유출 등의 트러블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베네투스는 자신도 짜증나는 상황이라는 양, 혀를 한 번 차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허를 찔렸지. 응시생이 재학생을 제압하는 일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소.”
“허라고 할 만한 것조차 아니지요. 그저 신입생의 수준을 얕보았을 뿐이지 않습니까?”
“비가 내려 강물이 되고, 강이 바다로 흐르는 진리를 눈으로 보아야만 아시오? 올해 아이들은 그런 수준이요. 강이 하늘로 오르고, 새싹이 땅으로 꺼지는 것을 예언하지 않은 다음에야 그 정도일 줄 어찌 알았겠소.”
“핑계일 뿐 아닙니까. 당대의 현인들은 폭군 알레오가 제위에 오르기 전에 폭군이 될 것임을 알았으며, 정복왕 아샨테가 천하를 내달릴 줄 알았습니다. 만인의 태양조차 그러할진데, 어찌 일개 아이들의 수준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십니까?”
“태양과 달이 저물어도 다시 차오르리라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논밭의 새싹이 황금빛으로 여문 벼가 될 수 있을지는 농부조차도 모르는 일이지.”
“멍청한 수수께끼 문답이나 나누고자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 아닙니다. 베네투스 교관!”
“나도 알고 있소.”
베네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레논의 짜증 섞인 힐난의 시선이 그에게 곧바로 향했으나, 베네투스는 그저 혀를 몇 번 차는 것으로 대응할 뿐이었다.
“양해해 주시오. 기존 규칙대로 시험을 치렀다간, 동이 트기도 전에 광장에 시체가 쌓일 거요. 우리로서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조율할 수가 없소.”
“……그 정도 수준입니까?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고 한들 숫자 앞에 무력하다. 기사학과에서 제일 번저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까.”
“그거야 주제 모르고 깝치다가 뒈지지 말라고 해 주는 말이고!”
베네투스 옆에 앉아 있던 여기사가 코웃음치며 대꾸했고, 베네투스는 그녀를 째려보며 침묵시켰다.
결국 그녀가 입을 닫고 고개를 돌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베네투스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여우가 백 마리가 모인들 호랑이 하나를 잡을 수 있겠소?”
“수준 차이가 그 정도로 납니까?”
“재학생을 무력으로 때려눕히는 괴물이 한 해에 다섯이나 나올 줄 누가 알았겠소.”
진실로, 그것은 결코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몇 년에 한 번, 그것도 한 기수에 한 명 정도다.
그야— 쌓아온 시간이 그러하지 않은가.
기본적으로 재학생이 나이도 많고, 아카데미에서 보낸 시간 동안 밖에서는 상상도 못할 수련을 쌓는다.
그런 재학생을, 그저 재능의 크기만으로 짓눌러 버리는 것이다.
왜 노력은 포함하지 않냐고?
정말 우스운 질문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순간, 아카데미의 재학생이 몇 년간 행한 노력은 일순간에 거품으로 변해 버리지 않던가.
그 괴물들의 노력만 진짜 ‘노력’이고, 패배한 재학생의 노력은 가짜라는, 그런 논리가 되어 버린다.
그런 끔찍한 재능의 괴물이 한 해에 다섯.
하나만 있어도 골이 아픈 ‘예외처리’가 다섯이라는 것이다.
한참을 한숨과 침묵만이 감돌았고, 그것을 깬 것은 마법학과의 고속마법 교수, 금작화의 로뎀이었다.
샛노란 머리칼을 반짝이며, 그나마 희망차게 생각하자고 말을 꺼내었다.
“무력으로는 넷이에요. 한 명은 지성이었지요! 말로서 녀석을 멈춰 세우더니, 아예 논파시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렸다더군요.”
“……일레프의 후계자 말이군요. 망할, 그 마탑주 인간은 특례입학도 시킬 수 있으면서 왜 햄스터 무리에 고양이를 던져놓는답니까?”
“우린들 압니까. 4대 검식의 직계가 올해만 셋이오. 게다가 검성의 방계도 있지. 마탑의 미친 할망구 기분을 맞춰 줄 여유는 우리도 없소.”
“조금 기분 풀자고 한 얘기였는데요.”
“절망밖에 없소. 마탑주의 수양딸이 예외자면 예외자지, 그들보다 약할 것 같소?”
“그건 좀 조졌네요!”
“언행을 좀… 바르게 하시오. 로뎀 교수.”
“제게 그러실 거면, 교장선생님께도 말씀해 보시지 그래요?”
“마녀들이란…….”
몇 명의 한숨과 웃음이 오가고, 회의장의 적막은 조금이나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가장 상석에 앉은, 교장을 대신하여 이 자리에 있는 사내는 회의록을 덮으며 마지막으로 의견을 정리했다.
“어쨌든, 본 교감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번 시험은 예외를 두기로 하겠습니다. 행정학과 또한 문제 유출을 막기 위해 새벽부터 아침까지 조금만 일정을 서둘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전투 필기?”
“생소하네요. 뭔가 아세요?”
“뭔들 알겠냐. 필기시험이 뭔지도 모르겠다. 시험지? 이걸 뭐 어쩌라는 거냐?”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인데…….
난생 처음 보는 형식의 문서였다.
쓰여 있는 것은 1부터 10까지의 숫자, 그리고 각 숫자에 하나씩 질문이 쓰여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 답을 빈 칸에 쓰라는 건가?
내가 종이를 뒤집거나 기울여 가며 이 영문모를 종이 낭비에 개탄하고 있을 즈음, 소니아는 역시 뭔가 알고 있는지 능숙하게 시험지를 살폈다.
“금작화와 상수리나무가 지니는 마법적 효능과, 그 수액을 3.17대 6.83으로 섞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상수리나무의 자리를 미루나무로 대체했을 때 어떤 증진을 기대할 수 있는지 쓰시오……. 와, 말도 안 되게 어려운데요.”
“나는 네가 어느 나라 언어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국 공용어 맞냐?”
“그야 당연히… 여기 맨 뒷장에 유의사항이 쓰여 있네요. 특이한걸요.”
나는 소니아의 말대로 시험지의 마지막 장을 살폈다.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1. 제한시간은 새벽, 첫 번째 종이 마지막으로 울릴 때까지.
2. 제한시간이 끝날 때, ‘증표’를 하나 이상 소지한 자의 시험지만을 채점한다.
3. 각자가 사용한 ‘증표’를 사용하여 문제 하나의 답을 알아낼 수 있다.
4. ‘증표’는 응시생 상호간의 동의를 통하여만 양도할 수 있으며, 응시생 간의 무력 투쟁은 공평하고 공정한 결투 외에는 금한다.
5. 각자가 획득하고 사용할 수 있는 ‘증표’는 최대 다섯 개이다.
6. 제한시간이 끝날 때, ‘증표’를 둘 이상 소지할 경우 이후 시험에 있어 추가점으로 적용하거나 일정 수준의 부상을 지급한다.
7. 규칙으로 명시되지 않은 모든 행위를 용인한다.
“뭔… 복잡해서 원. 이게 뭔 소리냐?”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이 시험지를 풀어야 한다는 거죠. 1차 시험에서 준 증표를 쓰면 답 하나를 알려 준다는 거고… 다른 사람이랑 결투해서 증표를 더 뺏으면 확실한 정답을 더 알 수 있다는 거에요.”
“아, 그래?”
거 참, 제국 제일의 석학이라는 놈들이 모여서 쓴 안내문이 뭐 이따위인지.
이렇게 심플하고 단순하게 설명해 주면 좀 좋나?
노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그냥 딱 이거 아냐.
쥐어 패고.
패면 답이 나온다.
그런데…….
“그런데 이건 뭐냐?”
나는 안내문의 다섯 번째 줄을 가리켰다.
증표는 다섯 개까지만 지닐 수 있다니?
“말 그대로겠죠? 그렇게 막아 두지 않으면 열 개를 전부 모아서 올백이 펑펑 쏟아져 나올 테니까요.”
“그럼 좀 곤란한데….”
“네?”
“그럼 남는 건 어떻게 하냐?”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잡히는 것들을 바닥에 쏟아냈다.
팅, 팅, 팅그르르르…….
나무와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이고 연신 반복해서 울리고, 그 중 하나는 소니아의 발치에까지 굴러가 넘어졌다.
황금색의 동전처럼 생긴 인장.
중간에는, 빛나는 창의 인장이 새겨진 증표.
이른바, 이 시험에서 이르는 ‘증표’ 였다.
소니아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디서 났어요?”
“삥뜯었어.”
“누구한테…?”
“…소매치기?”
아마? 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