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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1화 : 내가 용사라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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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는 빛과 하늘, 바다와 땅, 식물과 짐승을 만드신 후, 인간을 만드셨다.
엘프, 드워프, 인어, 그 밖의 수많은 몬스터와 요정들은 전부 자연적으로 생겨났다.
오직 인간만, 창조주께서 손수 빚으신 것이다.
그 뜻은 무엇이겠는가?
저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하늘을,
적당히 따뜻한 봄 햇살을,
싱그러운 풀내음을 한껏 담은 바람을,
모두 인간에게 선물하셨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처럼 축복이 가득한 날에 집안에 틀어박혀서 일하는 건
결단코! 해서는! 안 될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신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한껏 즐기는 게, 신께서 직접 빚은 피조물인 인간이 행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목소리에 한껏 열정을 담아 소리 높이 외쳤다.
마을 사제님도 이렇게 열성 있게 선포하진 못할 것이다.
봐라, 누구보다 예배에 열심히 나가는 아버지도 내 신실한 목소리에 감동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잖아.
즉, 성공……!
“그리고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는 자식놈을 벌하는 게, 부모이자 신도의 신성한 의무이지.”
……은 개뿔, 어림도 없었다.
젠장할, 역시 안 되는 건가?
결국 이런 화창한 날씨에 또 집에 틀어박혀서 필사나 하는 게 내 운명이야?
아니, 필경사(???) 아들이라고 맨날 양피지에 깃펜 잡고 있어야 된다는 법이라도 있냐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세상 멸망한 듯이 비탄에 젖어 있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생각 같아서는 서른 장 필사하라고 하고 싶지만……”
아버지가 드물게 인자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는 잘 못 보던 따스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내가 자기 전에 엄마가 머리맡에서 지었던 그 미소와 닮아 있다.
설마, 드디어 아버지가 모성에 눈을 뜬 것인가?
뭐, 남자지만.
“젊은 놈을 방 안에 틀어박히게 했다고, 나중에 네 엄마에게 잔소리 듣겠지.”
아버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건…… 이건 나가서 놀아도 된다고 허락하려는 게 틀림없다!
우오오, 기다려라, 호숫가의 아름다운 아가씨들!
그간 숨겨왔던 내 매력을 마음껏 뽐내 주겠어!
나는 미리 감사 인사를 마음에 담고 아버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버지는 내 얼굴을 부드러운 눈길로 보다가,
갑자기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예전에 사슴 사냥할 때, 화살 쏘기 전에 지었던 표정이다.
망했다.
“아하하하하! 아니, 그게 통할 줄 알았어? 너 바보 아냐? 푸하하하하!”
내 말이 끝나자마자, 메린이 배를 잡고 바닥을 굴렀다.
정말로 공처럼 바닥을 굴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여자애라서 참았다.
절대 내가 질 것 같아서 피한 게 아니다.
“시끄러! 넌 베 짜기 땡땡이치다 왔으면서 뭐 잘났다고 웃냐?!”
“야, 어딜 갖다 대냐? 난 솔직하게 하기 싫다고 말하고 온 거거든? 하루종일 베틀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단 양 치는 게 훨씬 더 좋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마을 바깥의 목초지, 외벽까지도 넘어선 완전 바깥이다.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내 근처에서 양떼가 서로 부대끼며 풀을 뜯는 중이다.
굉~장히 느긋~한 얼굴로 되새김질하고 있는 양의 얼굴을 보니, 내 신세가 한심해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날씨가 좋으니 밖에 나가고 싶다며 조른 나를, 아버지는 정말정말 자비롭게도 양치기 일을 하라고 보내 버렸다.
물론 알고 있다.
내가 원하던 것은 다 갖추고 있다.
여기도 바깥이고, 주위엔 자연이 있다.
단지 옆에 있는 게 귀여운 여자애들이 아니라 메린 녀석이라는 게 문제지.
지금쯤 다른 녀석들은 여자애들이랑 호숫가에서 낚시하고 수영하며 놀고 있을 텐데.
왜 나만 이렇게 성실하게 일해야 하는 거지?
그보다 왜 실패한 거지?
완벽한 이론이었는데!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는데, 옆에서 메린이 또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야, 사내 대장부가 당당해야지, 졸렬하게 핑계를 치냐? 핑계 칠 거면 제대로 치던가. 예배 때마다 퍼 자는 새끼가 창조주를 들먹이면 먹히겠냐고. 쯧쯔, 그러니 네가 그 꼴이지. 어휴, 등신.”
졸렬하다니?이런 폭언은 참을 수 없다.
이걸 참으면 진짜로 남자를 관둬야 한다.
그보다 비겁하게 정론으로 공격해?!
나는 들고 있던 긴 지팡이를 녀석에게 겨누었다.
“뭐? 졸렬해? 그 꼴? 이게 여자라고 봐줬더니……!”
나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절대로 때리려던 건 아니고, 그냥 겁만 주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니 녀석이 자신의 지팡이로 내 정수리를 갈긴 건 천부당 만부당한 짓이다.
참고로 내 지팡이는, 메린이 내 손을 쳐버린 탓에 저 멀리 날아갔다.
“어때? 이제 너네 아버지가 만든 둔덕이 훌륭한 산이 됐겠구나.”
그녀가 지팡이를 어깨에 대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래, 퍽이나 고맙다. 답례로 내 저주나 먹으렴. 하이씨, 더럽게 아프네…….”
비실비실 일어나서 지팡이를 다시 주우러 갔다.
왠지 굉장히 비참한 기분이다.
성인식도 치른 남자가 동년배 여자애 하나 못 이기다니.
물론 나 말고 다른 남자애, 아니 어떤 남자도 쟤는 못 이긴다.
메린은 마을 무투회에 나갈 때마다 우승하는 애다.
그것도 마을 ‘유소년’ 무투회가 아니라, 현직 전사도 참가하는 무투회에서.
근데 마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다 알면서도, 나를 ‘여자도 못 이기는 등신’ 취급하고 있다.
억울해! 부당해!!
내가 지팡이를 다시 주워서 돌아오니, 메린은 내가 앉아 있었던 큰 바위에 걸터앉아서 무언가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제길, 자리도 뺏겼어.
“뭐 보냐?”
“양.”
“아, 그래.”
대화할 맘이 없는 모양이다.
뭐, 나도 바로 방금 전에 머리에 혹 만든 녀석이랑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떠들 만큼 좋은 성격은 못 된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야, 카엘.”
“왜.”
“넌 어른이 되면 뭐하고 싶냐?”
이건 또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 메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양을 보는지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네가 알아서 뭐하게?”
“그냥.”
“……”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필경사, 그러니까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나도 그 일이나 하며 살 거라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필경사였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필경사였다.
그러니 나도 당연히 필경사가 되겠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메린이 코웃음을 쳤다.
“별 생각없을 줄 알았어. 하긴, 다들 그렇게 살긴 하지.”
“뭐? 다들 생각없이 산다고? 너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멍청아, 생각없는 건 너 하나고. 내 말은, 다들 아버지가 하던 일을 물려받는다는 거야.”
나는 메린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한 거잖아?”
“그래,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딸은 어머니의 일을 이어받지. 참 당연한 이치야.”
……얘가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걸까?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메린은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넌 좋겠다. 아버지 일 물려받을 수 있어서.”
아. 그런 건가.
메린은 부모님이 안 계신다.정확하게는, 살아 계시지 않는다.
그녀가 걸음마를 막 떼었을 즈음에 마을에 갑자기 몬스터가 쳐들어왔고, 약초꾼이었던 그녀의 아버지가 제일 먼저 희생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두 달 뒤에 그녀의 어머니가 늑대에 물려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부모님 일을 물려받지 않고 사는 사람도 많다.
“왜? 너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잖아? 양치는 게 좋다며, 그냥 쭉 양치기로 살아.”
“싫어. 난 자경단에 들어가고 싶단 말야.”
“……”
메린이 자경단에?
갈색머리를 땋아 내린 소녀가, 마을 외벽을 부수는 커다란 오크의 목을 단칼에 댕겅 썰어버리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우와, 무서워.”
“뭐?”
“아니,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열심히 하렴. 너라면 반드시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
다행히 우리 마을은 여자도 자경단원이 될 수 있다.
그녀의 무시무시한 힘이 나 같은 약자를 쥐어 패는 게 아니라, 지키는 데에 쓰인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 온 힘을 다한 격려에도 기분이 풀어지지 않았는지 샐쭉한 기색이었다.
“……아니, 못해. 오늘 촌장님이 그러시더라. 나보고 튜르랑 결혼하래.”
튜르는 촌장님의 아들이다.
지난주에 같이 성인식을 치른, 또 다른 소꿉친구……가 아니라 나에게 있어 숙적인 놈이다.
아무튼 그 놈도 성인이 됐으니, 차기 촌장으로서 결혼 상대를 골라야 할 때이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진짜 어이없네.
“세상에, 촌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너무하시네.”
“어? 너, 너도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아니, 아무리 빠를수록 좋다고 해도 그렇지, 튜르가 불쌍하지도 않나?!”
와. 몸이 공중에 떴어!
아무래도 메린이 지팡이로 내 발을 훑은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갑자기 눈 한 가득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메린은 내가 엉덩이를 문지르는 동안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퍽이나 불쌍하겠다. 얌전히 부인 노릇이나 하며 처박혀 살아야 하는 나도 불쌍하고. 둘 다 불행하네, 이거. 하, 썩을. 내가 그러고 어떻게 살아?”
그 말에 백 번 공감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부인을 평생 봐야할 튜르가 그보다 열 배는 더 불쌍한 것 같다.
물론 속으로만 대꾸해주었다.
나도 목숨은 아깝다고.
“그럼 싫다고 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마을 어른들이 죄다 그러라고 박수치고 있는데 내 뜻이 통하겠냐?”
우와, 사람들 진짜 나쁘네.
그렇게 이 녀석을 며느리로 들이고 싶지 않은 건가?
메린 정도면 예쁘장한 얼굴이다.몸도 늘씬하고.
내 또래 놈들은 방앗간집 누나가 더 예쁘다고 하는데, 그 누나는 가슴이 사람 머리만큼 클 뿐, 얼굴은 평범하다.
쯧, 가슴에 홀린 애송이들 같으니라고.
또, 메린은 전에 딱 한 번 먹어봐서 아는데, 요리도 그럭저럭 잘하는 편이다.
마을 축제 때마다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몰라도 요리 준비를 돕는 걸 몇 번이나 봤다.
수틀리면 주먹부터 나가는 게 문제인데, 그건 우리 마을 여자애들의 공통 특성이니 뭐……
물론 나는 얘랑 결혼하느니 차라리 사제가 될 것이다.
누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빨래처럼 두들겨대는 여자랑 결혼하고 싶어하냐?
머리를 다쳐서 물리적인 기억상실을 겪었다면 또 몰라.
……근데 얘는 왜 그 얘길 나한테 한대?
“그래서, 뭐, 나보고 어쩌라고.”
“그냥 그렇다고.”
그 말을 끝으로 메린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왠지 그녀의 어깨가 굉장히 축 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생겼으니 기운이 없어질 만도 하지.
하지만 나에겐 무어라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없으니까, 그걸 포기해야 할 때의 감정이 어떤지 모른다.
그런 내가 섣불리 뭐라 한두 마디 하는 건 그냥 매를 버는 꼴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나도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하늘은 맑고, 땅은 푸르르며, 양은 평화롭게 되새김질하고 있다.
오늘도 아무 일 없이, 하루가 흘러갈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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