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2화 : 내가 용사라고? (2)
* * *
이상을 먼저 감지한 건, 역시나 메린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멍하니 풀밭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메린이 흠칫 놀라며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걸터앉아 있던 바위 위에 올라서더니, 까치발까지 서서 양떼 너머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
뭘 보는 거지?
녀석의 시선을 따라가봐도,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저 멀리 펼쳐진 숲과, 그 너머에 있는 높은 산이 보일 뿐이다.
“……!”
갑자기 메린이 숨을 삼키더니, 바위에서 홱 뛰어내렸다.
“왜?”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휘파람을 불었다.
저건 양에게 돌아오라는 신호인데?
양들이 매애 울면서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너 뭐해? 아직 돌아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지금이 갈 때야! 잘 들어, 카엘! 너 빨리 저 양들 끌고 마을로 돌아가!”
가끔 그녀가 비슷한 장난을 치며 날 겁주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메린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말투 역시 평소와 달리 굉장히 다급했다.
“뭐해, 빨리 안 움직여?! 엉덩이를 차 줘야 갈 거냐?!”
“아,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휘파람을 불고 지팡이를 위로 쳐들어서 휘둘렀다.
양들이 내가 휘두르는 지팡이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마을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하자, 메린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쟤가 또 왜 저러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양떼 너머 숲속에서 흙먼지가 피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무언가, 굉장히 좋지 않은 것이 엄청난 숫자로 몰려오고 있다.
등골이 서리며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녹색과 갈색의 생물들이 숲을 헤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몬스터……!”
몬스터가 마을로 쳐들어오고 있다.
종류는 뭔지 몰라도 어쨌든 몬스터인 게 분명하다.
빨리 마을에 알려야 돼!
나는 다시 마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마을엔 자경단도 있고, 무엇보다 메린이 있다.
마을 누구보다 강한 메린이 있으니 무사히 몬스터를 격퇴……
“……”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래, 메린이 있었지.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지?
어디긴, 몬스터 쪽으로 뛰어갔지!
양치기용 지팡이만 들고!
“저게 미쳤나?!”
나는 다시 돌아서서 목청껏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들리지 않는지 나무 지팡이를 든 채, 달려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서 있었다.
“메리이이이인!”
다시 한번 불러보아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안 들린다고?
평소엔 이 거리에서 자경단원 아저씨와 인사도 나눴었는데?
설마 저 녀석, 안 들리는 척하는 건가?!
나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새 몰려온 양떼가 앞을 막아서 지나갈 수가 없었다.
헤치고 가려고 해도 양떼는 태평하게 메에 울면서 오히려 더 달라붙었다.
제길, 지팡이 때문인가?
“에라이!”
들고 있던 지팡이를 마을 쪽으로 던졌다.
예상대로 양들이 지팡이가 날아간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나는 그 틈에 메린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렸다.
메린은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아직 저만치 떨어져 있는데도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저 녀석, 다 들리면서 무시한 거였어.
녀석이 나를 향해 빽 소리질렀다.
“너 미쳤어?! 왜 다시 와, 빨리 마을로 가라고!”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지! 죽을 셈이야?! 빨리 와!”
나는 그녀의 팔을 냅다 잡고 다시 뛰……고 싶었는데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설마 이 녀석, 다리에 힘주고 버티는 건가?
아니, 뭔 힘이 이렇게 세?!
“야, 이…… 뭘 버티고 서 있어, 빨리 도망치자고!”
“너나 가. 난 안 가.”
그렇게 말하며, 메린은 내 팔을 손쉽게 뿌리쳤다.
그 탓에 서너 발자국 밀려났다.
다시 돌아본 그녀의 얼굴엔 소름이 돋을 만큼 아무 감정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밀리면 안 돼.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더 크게 소리질렀다.
“너 진짜 죽고 싶어서 그래?! 뭐, 결혼하느니 죽겠다 이거야?!”
“그래! 잘 아네!”
두 눈을 부릅뜬 그녀의 눈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차라리 이게 낫다.
“안방마님으로 평생 얌전 떨며 사느니 차라리 저 놈들이랑 싸우다 죽을 거야! 어차피 난 부모도 형제도 없어! 누구 하나 손해보는 거 없잖아?!”
“이 멍청아, 그걸 말이라고 해?! 사제님이 널 얼마나 아끼셨는데! 검술 사범님은 또 어떻고?! 그 사람들 마음에 대못 박을 생각이냐?! 촌장 마님이 싫으면 딴 사람이랑 결혼하면 될 거 아냐!”
벌써 몬스터가 저만치 앞에 와 있었다.
서서히 녀석들의 생김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크에 고블린이 뒤섞여 있다!
나는 다시 메린의 팔을 붙잡고 마을을 향해 뛰려고 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할, 진짜 힘 무지막지하게 세네!
그때, 메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 진짜 바보구나. 아니면 나를 바보로 보냐?”
분이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아무 잔물결도 없는 고요한 호수처럼,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다.
“누가 나랑 결혼하겠어? 어렸을 때부터 다들 무서워하기만 했는데.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아?”
“……”
그건 사실이었다.
메린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목검을 잡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늘 혼자였다.
같이 칼싸움 놀이를 하기엔 너무 강했고, 술래잡기를 하기에도 너무 빨랐다.
고아인 그녀를 가엾게 여기며 잘 대해주던 어른들도, 그녀가 어느 날 홀로 거대 멧돼지를 잡은 뒤부터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왜 메린이 꽃다운 나이에 다른 여자애들처럼 치장하거나 춤을 추지 않고, 호숫가에서 놀지 않고, 혼자 양이나 치고 있겠는가?
압도적인 힘을 가진 사람은 고립된다.
통제할 수 없다며 두려워한다.
사람의 껍데기를 쓴 무언가로 인식한다.
서로 돕고 지탱해야 살아남는 이 마을에서, 그녀는 늘 혼자 서 있었다.
혼자, 버려져 있었다.
……웃기는 사람들이야.
힘쓸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찾는 주제에.
이 녀석을 제대로 알려고도,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은 주제에!
가만 보면 이 새끼도 웃기네.
나한테는 거리낌없이 반박하고 고집 피우면서, 마을 어른들이 다 찬성한다고 그걸 가만히 있어?
그럼 납득했다는 거 아냐.
그렇게 ‘그게 제일 좋다’고 스스로 납득했으면서 이제 와서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쇼를 하고 자빠져 있다고?!
빌어먹을 자식, 절대 가만 안 둬!
“……잖아.”
“뭐?”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그녀가 되물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힘껏 외쳤다.
“나랑 결혼하면 되잖아!!”
정수리를, 그것도 혹이 산만큼 부풀 정도로 세게 맞은 효과가 지금 나타나는 것 같았다.
저질렀구나.
격정 뒤에 찾아온 이성이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렸다.
청혼을 해버렸다.
그것도 마을 최고의 왈가닥이자, 어릴 때부터 나를 빨래 두들기듯이 패던 여자에게.
분명 머리를 두 대나 맞은 탓이다.
이래서 아이들 혼낼 때 머리를 때리면 안 되는 것이다.
메린의 눈이 커지며, 우리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지금 위급한 때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으랴아아앗!”
갑자기 메린이 몬스터들을 향해 돌진했다!
“야, 이 미친년아! 내가 그렇게 싫냐?!”
튜르와 결혼 얘기가 나돌 때는 비장하게 서 있더니, 나랑 결혼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뛰쳐나갔다.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죽음을 환영하러 갔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그래도 내가 튜르 그 녀석보다는 매력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분명 그 녀석 주위에 여자가 많은 건, 걔가 잘생겨서 그런 게 아니라 걔가 촌장님 아들이라 그런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크윽…….”
절로 다리가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아,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다.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마주해버린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 차라리 쟤처럼 여기서 죽자.
적어도 용감한 청년이라고 다들 기억해주겠지.
엄마는 분명 만나자마자 내 뺨을 때리시겠지만, 뭐, 어때.
“……잠깐.”
여기서 죽으면 쟤랑 같이 죽는 게 되잖아?
그것도 단 둘이서 마을 바깥에 나가 있다가.
“……”
마음이 다시 차분해졌다.
머릿속이 맑게 개이며 다시 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 사람은 함부로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더라도 끝까지 포기해선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데서 쟤랑 같이 죽는다니 절대 안 돼!!
어떻게 해서든 여길 살아서 빠져나가자!
나는 고개를 들고 앞을 보았다.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메린이 앞서 달려간 방향을 보고,
“……진짜 미쳤네.”
경악에 찬 감상을 남겼다.
메린은 분명 양치기용으로 쓰는 긴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근데 지금 그녀는 칼을 휘두르고 있다.
거기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팔이 잘린 고블린이 마구 울부짖고 있다.
근처에 칼이 떨어져 있지 않은 걸 보니, 저 놈이 아마 칼 주인이겠지. 그렇겠지.
……지팡이로 팔을 잘랐다고? 말이 돼?
아니, 지팡이로 칼을 빼앗은 다음에 그 칼로 잘랐겠지.
암, 그럼.
“……”
저렇게 우글거리는 무리를 상대하면서?
진짜 인간 맞아? 인간 맞지만.
아무튼 그녀를 여기서 빼내어 도망쳐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다.
아무리 메린이 탈인간급 실력을 가졌다 해도, 사람 한 명이 군단을 상대할 수는 없다.
쟤도 생물인 이상 체력이 있고, 체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윽……”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해야 쟤를 빼낼 수 있지?
그녀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칼을 휘두를 때마다 오크의 팔이, 고블린의 목이, 또는 허리가 댕겅 잘려선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그 탓에 마을을 향하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나 같은 평범한 놈이 섣불리 다가갔다간, 저 무리를 뚫긴커녕 덥썩 잡아 먹힐 것이다.
어떻게든 그녀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틈을 만들어야 한다.
틈을 만들려면?
당연히…… 주의를 끌어야 한다.
그것도 멀리서. 확실하게.
다행히 내게는 멀리서 놈들을 공격할 수단이 있다.
양치기라면 다들 가지고 있는 방법이다.
나는 허리춤의 가방에서, 중앙에 작은 가죽을 댄 긴 끈과, 매우 쓴 가루가 들어있는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가죽에 대고, 끈 양쪽 끝을 잡은 뒤 빠르게 빙빙 돌렸다.
흔히 말하는, 슬링이다.
“아무나 맞아라!”
끈을 놓자, 주머니가 하늘 높이 붕 뜨며 날아갔다.
곧 주머니가 어느 한 놈의 머리에 맞고 파앙 터졌다.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가루가 희뿌연 연기가 되어 주위에 퍼졌다.
늑대 쫓을 때 쓰는 거긴 한데, 저놈들도 코가 있으니 통하겠지.
뭐, 메린도 코가 있긴 하지만…… 알아서 하겠지.
“이쪽이다, 이 머저리들아!”
나는 목청껏 외치며, 이번에는 돌멩이를 쏘아 두 마리 정도 머리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크와아아아! 저 새끼가! 잡아 족쳐버려!”
우렁찬 포효와 함께 몬스터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마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내가 가다가 죽든, 아니면 마을이 때맞게 알아차리고 나를 구해주든, 메린은 진득하게 붙어 있는 놈들을 없앨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무사히 살아남을 것이다.
……근데 생각보다 이거, 심장 떨려서 죽을 것 같은데.
뒤통수에 살기등등한 시선이 마구 박히고, 땅이 마구 울려대고 있으니까 압박이 장난이 아니야!
진짜 장난 아니야!
당장이라도 다리가 풀려서 넘어질 것 같다고.
나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아까 두고 온 양떼가 점점 가까워졌다.
저 거리라면 분명 마을에서도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릴 거야! 살았어!
턱.
“아.”
돌뿌리에 발이 걸렸다.
망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