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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9화 (9/475)

〈 9화 〉 9화 : 특별 대전(?戰)…… 아니, 대전(大戰)? (1)

* * *

하루가 시작된 지 두 시간밖에 안 됐는데, 한 이틀 정도 밤을 새운 느낌이다.

나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무투회가 열리는 광장으로 향했다.

물론 싸우러 가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대전 구경하러 가는 것이다.

몸 컨디션도 영 아니라서 정말로, 조금도 내키지 않지만, 어제 나온 얘기가 있어서 반드시 가야 한다.

어제 집으로 돌아가던 중, 메린이 갑자기 생각났다며 말을 꺼냈던 것이다.

“너 내일 내 대전 보러 와라.”

“……내가 왜.”

지나치는 사람마다 나와 메린을 보고 히죽거려서, 나는 거기에 화를 내느라 기운을 다 쓴 상태였다.

정말 놀랍게도, 메린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조금도, 모래 한 알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녀석이 정말로 다른 사람 눈치를 안 본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메린은 내 대꾸에 한숨을 쉬었다.

“몰라서 묻냐? 너 아직 검술 훈련 중이잖아. 다른 사람 움직임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내일 여러 자세 보여줄 테니까 와.”

“……싫다면?”

“내일 대전 끝나는 대로 그 몸으로 직접 체험하겠지.”

세간에선 이런 걸 협박이라고 한다.

그리고 방금처럼 목숨에 대한 협박은, 앞에 ‘살해’가 붙으면서 죄질이 더 커진다.

재판이 열리면 십중팔구 감옥행일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공정한 재판관 따위 없는 작은 마을이었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은 평범한 불량배가 아니라 메린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기 전에, 오늘밤 세상이나 나 둘 중 하나를 끝장내달라고 한 번 더 간절히 기도했다.

당연히 아무 의미도 없었다.

게다가 오늘도 빌어먹게 날씨는 좋다.

“하아…….”

마을을 탈출한다는 최후의 수단도 막혀버렸으니, 얌전히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분명 엄청난 시선을 받을 텐데……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다.

하지만 다행히 내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관객석에 들어서자마자 양옆에서 뿜어져 나온 환호성과 함성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와아아아!”

“조져버려! 그렇지잇!”

“역배율은 승리한다아아아!!”

……무투회 대전 결과를 놓고 도박한다더니 진짜인가봐.

근데 불법 아니었나?

아무튼 남의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고, 관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내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아예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

혈기 넘치는 전사를 보기에도 바빠 죽겠다는 것처럼, 대전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크어억!”

공격을 받은 남자가 땅을 구르며 가벽에 부딪혔다.

물론 피 한 방울 튀진 않지만, 그래도 치명적인 타격이었는지 남자가 몇 번 움찔거리더니 축 늘어졌다.

“이예아아아!”

거구의 남자가 한 손으로 커다란 칼을 휘두르며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나는 두 손으로도 들기 힘들 정도로 큰 칼인데, 몸집이 큰 만큼 팔 힘도 강한 모양이었다.

갑옷으로 싸여 있어서 보이지는 않아도, 팔뚝이 내 머리만 한 걸 보니 근육도 장난 아니겠지.

남자가 투구를 벗고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역시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 왕궁에서 온 여자와 함께 온 기사인가?

“꺄아아아! 너무 멋있어어! 여기 좀 봐줘요!”

“눈 마주쳤어! 꺄아아아아, 날 봐주셨다고!”

“웃기지 마, 이 지지배야! 날 보신 거야!”

……여자들이 난리를 치고 있다.

내 옆에 앉은 아가씨도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환호하고 있다.

정말 여자들은 ‘기사’를 좋아하는구나.

내가 보기엔 얼굴이 길쭉하고 턱도 갈라져 있는 게, 딱히 잘생긴 것 같진 않은데……

아니, 이 마을은 팔뚝 근육이 곧 얼굴이지.하하, 나도 참.

근데 또 그렇게 따지면, 도축업자로 일하는 폴 아저씨가 그 나이 먹도록 혼자인 게 말이 안 된다.

머리카락도 있는데.

……흠, 여자들 눈에는 저게 잘생겨 보이나?

기사가 물러나자, 이번에는 사회자가 아닌 촌장님이 단상에 올라왔다.

촌장님은 흰 수염을 한번 스윽 문지르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다음은 특별 대전입니다. 이번에 우리 마을을 방문하신 율리아 공주님의 요청으로 진행되는 것이니 어느 때보다도 좋은 대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선수 입장!”

관객석이 일제히 술렁거렸다.

아무래도 원래 계획에 없던 대전인 것 같다.

그보다도, 그 사람이 율리아 공주님이었다고?

내가 알기로 율리아 공주는 국왕 폐하의 막내딸이면서, 태어나면서부터 창조주에게 바쳐진 사람이다.

바쳐졌다고 해서 무슨 산제물이 된 건 아니고, 그냥 평생 사제로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예언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아는데…… 내용이 뭐였더라?

아무튼 율리아 공주님은 사제이긴 하지만, 왕족이라서 여전히 공주 신분이 유지되고 있다.

근데 그런 분이 왜 갑자기 이런 벽지(??)로 온 걸까?

그때 들에서 봤을 때 용사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무언가 또 계시라도 받은 걸까?

어쨌든 신을 섬기는 성직자가 요청한 대전이라니.

대체 어떤 대전일지 궁금하다.

“……오.”

먼저 등장한 것은 메린이었다.

그녀도 뭘 하는지 전혀 듣지 못했는지, 대전장 중앙에 서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다음 등장한 것은 우리 마을 자경단장님이었다.

대장님은 무언가 들은 게 있는지, 뭔가 탐탁치 않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뭐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냥 평소처럼 일대일 대전 같은……

“……엥?”

선수가, 계속 들어온다.

자경단장님에 이어, 자경단원 아저씨 세 명, 검술 사범님, 그리고 사범님 밑에서 검술 수련하는 학생들 등등,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 전에 이겼던 거구의 기사까지 대전장 안에 들어섰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하나만은 확실하다.

지금 저 대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아직 탈락하지 않은 참가자들이다.

설마 난전으로 한 번에 끝낼 셈인가?

나는 촌장님을 쳐다보았다.

촌장님 역시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부터 특별 대전을 시작합니다. 목표는 단 하나, 지난 무투회 챔피언인 메린 소더를 쓰러뜨릴 것! 챔피언을 먼저 쓰러뜨리는 자가 새로운 챔피언이 될 것입니다!”

“뭐야?!”

경악에 찬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관객석의 술렁거림도 더 커졌다.

나만 이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촌장님은 잠시 귀머거리가 되기로 한 모양이었다.

눈을 질끈 감더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럼, 시……”

“잠깐! 멈춰요!”

나도 모르게 입에서 멋대로 말이 터져나왔다.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려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주위가 아닌 촌장님만 보려고 애썼다.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진행을 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저 녀…… 메린 소더가 연속 우승자라고 해도 이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당장 물러주세요!”

촌장님은 얼굴을 찌푸리기만 할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회장 전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카엘 말대로야! 이건 비겁해!”

포목점 주인아저씨가 침묵을 깨고 크게 외쳤다.

그러자, 아저씨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한 마디씩 소리치거나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당장 집어치워!”

“이게 무슨 무투회야! 개싸움도 이렇겐 안 해!”

“여자애 하나를 열 몇 명이서 뭐하려는 거야! 부끄러운 줄 알아라!”

정말 다행이다.

마지막은 개인적으로 좀 이상하지만, 어쨌든 우리 마을이 이렇게 상식적이다니, 감동이야!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끼며 촌장님을 보았다.

촌장님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왠지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촌장님이 이런 극악한 방법에 찬성했을 리가 없지.

아무리 촌장님이 뚝심 좋은 사람이라도 왕족의 명령을 거역할 순 없었을 것이다.

즉, 모든 원흉은 왕성에서 온 저 율리아 공주이다.

그보다 신을 섬긴다는 여자가 뭐 저런 끔찍한 생각을 다 한대?

평소에 쌓인 게 많나?

“조용!”

“……!”

커다란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며 머릿속까지 뒤흔들었다.

저절로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다시피 했다.

머리가 멍하다 못해 어지러웠다.

“큭……!”

이를 악물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주 약간 머릿속이 맑아졌으나 여전히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멍텅한 기분이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 관중들도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만 어지럼증을 느낀 게 아니었어!

이건 단순히 목소리가 크다고 되는 게 아니야.

무언가 술수를 부린 게 분명해!

나는 다시 촌장님 쪽을 쳐다보았다.

촌장님 역시 넋이 나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일전에 엄청난 기세로 촌장님을 압박하던 그 외지인, 율리아 공주가 서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관객석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하지만, 메린 소더는 처음 무투회에 참가한 이래로 계속 우승을 거머쥐었다면서요? 아마 이번에도 필히 그녀가 우승을 하겠지요. 왠지 그런 느낌이 드네요.”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야?

우승 많이 하는 거랑 지금 이 개판이랑 뭔 상관이 있다고?!

율리아 공주의 말은 이어졌다.

“지난날, 엄청난 빛줄기가 솟은 게 보였어요. 그리고 신께서 바로 계시를 주셨지요. 용사가 나타났으니, 변방의 마을로 향하라고. 그리고 저는 그 계시대로 이곳에서 용사를 보았답니다. 촌장님은 다른 사람이라고 하셨지만…… 흔히 있는 착오이겠지요. 제 눈에는 메린 소더, 그녀가 용사, 드래곤을 쓰러뜨릴 자로 보이니까요.

그러니 분명 이 정도는 거뜬히 이길 겁니다. 그렇죠?”

내 평생 여러 헛소리를 듣고, 또 직접 말하기도 했지만 저 정도로 엉망진창인 소리는 처음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용사의 강함을 시험한다는 건가?

서너 명도 아니고 열 몇 명을 혼자 상대하게 하는 게 무슨 시험이야?!

물론 저 녀석은 괜찮겠지만, 어쨌든!

게다가 아직도 메린이 용사라고 착각하고 있고!

그런데 이상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메린이 아닌, 내가 용사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물론 못 믿는 사람이 더 많지만, 어쨌든 내가 그 용사의 성검이란 걸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온 마을에 다 퍼져 있다.

그런데도 공주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니.

그렇다면 내가 직접, 지금이라도 쟤가 아니라 내가 용사라고 밝혀야 한다.

그럼……

“……윽.”

……그럼, 내가 저 안에 들어가게 되나?

아직도 몸이 욱신거려 죽겠는데, 한 명도 아니고 열 몇 명을 한꺼번에 상대한다고?

가능할 리가 없다.

애초에 나는 저기 있는 검술 사범님 한 명도 이기지 못했다.

물론 무투회장에선 아무도 죽지 않는다.

하지만 열 몇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내가 숨 쉴 틈도 없이 두들겨 팰 텐데, 그걸 견딜 수 있을까?

그 공포를 겪고도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견디지 못한다.

여기 있는 사람 그 누구도 견딜 수 없을 거다.

……저기 서 있는 메린을 제외하곤.

메린은 그 고블린과 오크 떼 사이에서도 무쌍을 펼친 녀석이다.

분명 인간 열 몇 명쯤은 거뜬히 이기겠지.

“……아니야.”

어쩌면 이건 메린에겐 큰 기회인지도 모른다.

저 미치…… 아니, 공주님의 눈에 들면, 분명 용사로서 왕성에서 귀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어차피 이 마을은 저 녀석에겐 너무 좁은 곳이었으니까.

……그러니,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어때?

“……아니, 아니야. 그딴 게 문제가 아니잖아……!”

스스로에게 일갈했다.

저 녀석이 여기서 이길지 말지의 문제가 아니야.

그 이전의 문제잖아!

아무리 저 녀석이 사람 미치게 만들 정도로 눈치 없고 힘만 더럽게 세더라도, 내 몫의 짐을 떠맡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걸 모른 척해선 안 된다.

용사이기 전에, 사람이 그래서는 안 되는 법이다!

각오를 다졌다.

머리는 여전히 어지럽고, 팔다리도 욱신거리고 부들부들 떨렸지만,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후…….”

율리아 공주의 차가운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시작’을 외치기 전에, 내가 먼저 소리쳐야 돼!

문득 메린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불쾌한 듯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이 마주쳤다.

관객석과 대전장은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데도, 왠지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메린의 입꼬리가 위를 향했다.

그녀는 슬며시 미소지으며, 왼쪽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었다.

쉿.

“……?”

조용히 하라고?

나는 멀뚱히 서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람이 기껏 각오를 다지고 일어섰는데, 저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이야……?

메린이 칼집에서 검을 뽑더니, 기사처럼 칼끝을 땅에 대고 수직으로 세웠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안 그래도 엄청 시시했는데, 이제야 좀 재미 보겠네요!”

거울을 안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내 표정은 아침에 아버지가 지었던 그 표정 그대로일 것이다.

뜻은 약간 다르지만.

내 표정에 품은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쟤 미쳤나?

내가 충격에 빠져 있는 동안, 율리아 공주가 하늘을 찌르듯이 높이 웃었다.

“용사다운 패기로군요! 그럼 시작하세요!”

공주가 호령했지만, 메린을 마주한 참가자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주춤거렸다.

그녀의 실력은 어쨌든, 지금 저 남자들은 아가씨 한 명을 우르르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메린이 우락부락하고 듬직한 체형인 것도 아니니, 그림상 굉장히 불명예스러운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나 싶었는데, 갑자기 메린이 큰 소리로 웃었다.

"꼴랑 여자 한 명한테 쫄아서 못 덤비는 거야? 나 참, 마을 앞날이 훤하구만? 댁들 그러고도 사내야? 그 가랑이에 달린 거 그냥 떼버리는 게 어때?"

"뭐야?!"

어머나, 세상에, 쟤가 진짜 왜 저런대?!

경악에 빠져 있는 중에, 메린이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한꺼번에 덤벼라, 잡졸들아! 한 방에 다 날려주마!”

주저하던 대전자들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나는 확신했다.

쟨 진짜 미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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