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2화 (22/475)

〈 22화 〉 22화 : 수문장 아닌 수문장 (1)

* * *

호숫가의 나무집 안.

“……”

나와 메린, 그리고 로나는 좁아 터진 방 안에 한데 모여, 집주인과 한 시간째 대치 중이다.

이 아저씨, 여간 마음이 상한 게 아닌지 기껏 정성을 다해 차린 음식도 먹지 않고, 우리를 노려보기만 하고 있다.

이래서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재차 간곡히 부탁했다.

“아저씨, 제가 때린 것도, 쟤가 맘대로 집을 뒤진 것도 사과드렸잖아요. 그러니 이제 화 푸시고 좀 드세요.”

“……”

“마, 맞아요, 형제님! 메린 님이 형제님 드린다고 얼마나 정성스럽게 구우셨는데요. 분명 사죄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을 거에요.”

“……”

로나도 나를 거들어주었지만, 아저씨는 의혹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아니, 로나의 말을 듣고 의혹이 더 짙어진 것 같다.

그럴 만하지.

‘사죄의 마음을 한가득 담아 생선을 구웠다’는 녀석이, 덤덤한 얼굴로 옆에서 차를 홀짝이고 있으니까.

나라도 안 믿겠다.

아저씨가 메린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머지 우리 둘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희 말야, 말만 좋게 늘어놓는다고 다 되는 줄 아냐?”

“그럴 리가 있나요.”

나 자신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 자부하고 있다.

내 대답을 들은 아저씨가 인상을 쓰며 또 물었다.

“그럼 왜 내가 네놈들이 만든 음식을 안 먹는지도 알겠군?”

“당연하죠.”

“말해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손발 묶여서 토라진 거잖아요.”

“알면 풀어, 이 미친놈들아아아!!”

우와, 목소리 엄청 커!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저씨는 소리를 빽 지르고서 다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지금 아저씨는 처음 기절했을 때 그대로 손발이 꽁꽁 묶여 있는 상태이다.

호수 중앙에서 여기 나무집까지 단숨에 온 사람이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

게다가 지금처럼 아무 여지도 주지 않고 적대적으로 나오니 절대 풀어줄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그럴 리가.

“’마녀의 숲’에 어떻게 가는지 알려주면 풀어드린다니까!”

“내가 미쳤냐, 그걸 왜 알려줘! 알려준 다음에 날 죽이려는 거 모를 줄 알아?!”

“우리가 무슨 양아치 강도인 줄 알아요? 나 참, 사람을 뭘로 보고!”

“이딴 짓 하는 놈들이 강도가 아니면 뭔데?! 지랄 말고 이거나 풀으라고!!”

음, 아무래도 단단히 토라진 것 같은데.

그래도 이 아저씨가 ‘마녀의 숲’에 가는 법을 알긴 아는 것 같다.

아, 그렇지.

이렇게 얘기가 안 통할 때는 공적 서류를 보여주는 게 제일이다.

배낭에서 율리아 공주에게 받았던 양피지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자, 이걸 보세요, 아저씨.”

“뭘 들이미는 거냐! 저리 안 치워?! 난 서명 안 해! 죽어도 안 할 거다! 이 망할 놈들, 털어먹을 게 없어서 이젠 내 몸까지……!”

“뭔 소리야,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저씨 몸 팔아봤자 뭐 얼마나 나온다고!

……아니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후우……, 진정, 진정하자.

흥분해선 제대로 설득이 안 돼.

나는 심호흡을 한 후, 목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 이 맹약서에 따라 드래곤 퇴치의 협력을 구하러 ‘마녀의 숲’에 가는 중입니다. 첫 만남이 좀 험악하긴 했습니다만, 그건 정말 진심으로 사죄드릴 테니 저희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

아저씨는 눈을 끔벅거렸다.

그리고 내가 내민 양피지를 이리저리 보더니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너, 임마, 젊은 놈이 강도질도 모자라 사기까지 치려 드냐? 성실하게 살아, 성실하게! 드래곤은 무슨 얼어죽을!”

어라라?

나는 로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놀란 눈으로 아저씨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형제님, 드래곤 깨어났어요. 미드랜드에서 종도 쳤는데 못 들으셨어요?”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하는 거냐! 미드랜드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먼데 종소리가 들려? 개소리 말고 얼른 이거나 풀어!”

……듣고 보니 또 그렇네.

공주는 그 종소리가 ‘바깥 이종족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상식적으로 그게 산맥이나 그 너머까지 들릴 리가 없잖아.

왜 거기선 이상하다는 생각을 전혀 못한 거지?

“……카엘 님, 카엘 님,”

갑자기 로나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이 분 이상해요.거짓말의 냄새가 나요.”

“……뭐? 뭔 냄새?”

사람 말에서 냄새가 난다고?

……처음 듣는 소리인데.

“전 알 수 있어요. 이 분, 지금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원리는 모르지만, 어쨌든 로나는 사람의 거짓말을 알아챌 수 있는 모양이다.

뭐…… 종소리는 어쨌든, 나도 율리아 공주가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진 않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집주인 아저씨는 고의든 아니든 거짓말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종소리는 진짜 좀 수상하긴 하지만.

“그래서 그런데, 제가 한 번 진실을 끌어내볼게요.”

“응? 뭘 하려고?”

로나는 대답하지 않고 헤실 웃더니, 자신의 배낭에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작은 망치, 작은 못, 바늘…….

……뭐야, 이 보기만해도 이상하게 소름 돋는 물품들은?

“잠깐, 로나, 진짜 뭐 하려는 거야?”

로나는 망치와 못을 들고 활짝 웃었다.

“진실의 의식이요!”

“……”

뭔가, 굉장히, 안 좋은 예감이 든다.

로나가 웃는 얼굴은 벌써 몇 번이나 봐서 익숙한데, 이번엔 왠지 느낌이 다르다.

꼭 메린이 웃는 걸 봤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하, 하하하. 에이, 설마.

얘는 사제잖아.

……그래도 요전번 일도 있으니 일단 물어나 보자.

“저기, 로나, 그 의식 어떻게 하는 건데?”

“음, 일단 이 못을 손가락 마디에 대고요……”

으악, 이런 미친 씨발?!

“됐어, 로나, 설명 안 해줘도 돼! 그보다 그거 몽땅 도로 집어넣어! 아니, 버려!”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거야, 아니, 그전에 신전에서 왜 이딴 걸 가르치는 거야, 미친 거 아니야?!

괜히 사제들이 둔기만 휘두르는 게 아니었어!

역시 그냥 고문이 좋은 거잖아, 자비는 개뿔!

로나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네에? 왜요? 이럴 때야말로 사제인 제가 창조주의 자비를 보여줄……”

“손가락에 못 박는 게 어디가 자비라는 거야?!”

“무, 뭐야?! 역시 미친놈들 아니야! 살려줘! 여기 미친놈들이 사람 잡으려고 해요! 살려줘어어!”

아저씨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기겁하면서 또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단히 묶인 밧줄 때문에 그저 도마 위의 물고기처럼 펄떡거릴 뿐이었다.

로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도 죄라서 참회하지 않으면 죽은 후에 받을 영혼재판 때 불리해요. 물론 스스로 깨닫고 참회하는 게 제일 좋지만, 악마 때문에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 자체를 깨닫지 못할 때가 많아요! 이건 있죠, 거짓말을 하게 하는 악마를 쫓아내는 의식이랍니다."

그 ‘거짓말을 한다’는 판단은 누가 어떻게 내리는 거냐고 묻고 싶다.

로나 본인은 ‘거짓말을 알아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게 참인지 거짓인지 어떻게 알아?

로나는 내 속마음도 모르고 계속 말을 이었다.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은 후에 가능한 벌을 받지 않도록 기회를 주시는 거에요! 이 의식은 사악한 악마를 쫓아내고, 또 형제님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줄 뿐 아니라,이후에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해준답니다! 봐요, 자비롭지 않나요?”

아니.

“전혀.”

“으…… 역시 신의 뜻을 전하는 건 어렵네요…….”

오, 창조주시여.

진짜로 이런 걸 당신의 자비라고 가르치시는 겁니까?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로나는 내가 반대해서 그런지 억지로그 의식을 치르려 하진 않았다.

다행이다. 얘네 수장인 누구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성격은 아니라서 진짜 다행이다.

나는 깊이 안도한 후, 아저씨를 향해 단호히 말했다.

“자, 제가 아저씨 구해줬으니까 빨리 협력해주세요.”

“지랄 마!!”

……음, 자꾸 이러면 강제로 입을 열도록 할 수 밖에 없는데. 하지만 사제들의그 의식을 집행하고 싶진 않다.

나는 내 방식을 쓸 것이다.

“메린, 가서 새 한 마리만 잡아와 줘.”

“새? 크기 상관없지?”

“어. 다 자란 새면 아무거나 상관없어.”

메린은 더 묻지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가끔은 저 무심함이 편해서 좋긴 하다.

잠시 후, 메린은 목이 이상하게 돌아가 있는 새를 내게 건넸다.

나는 날개깃 하나를 뽑아 빤히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메린, 아저씨를 붙잡아.”

메린은 달리 묻지도 않고 곧바로 아저씨의 상체를 단단히 붙들었다.

“무, 뭘할 속셈이냐?! 놔! 이거 놔, 이 염병할 놈들아!!”

아저씨는 머리와 몸을 마구 버둥거렸지만 메린의 단단한 힘을 이겨내진 못했다.

나는 아저씨의 다리 하나를 붙잡고, 신발을 벗겼다.

으, 냄새. 호숫가에 살면서 씻지도 않았나.

나는 한손으로 코를 쥐고, 이번엔 로나를 돌아보았다.

“로나, 이 아저씨 다른 쪽 다리 좀 잡아줘.”

“아, 네.”

로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저씨의 나머지 다리를 꽉 붙잡았다.

아저씨가 마구 소리를 질러댔지만, 두 아가씨는 전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맡은 일에 충실히 임했다.

정말 믿음직스럽다.

절대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야.

“쯧. 아저씨가 나쁜 거에요.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럼 하지 마, 미친놈아!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말라고! 사람 살려! 누가 좀 살려줘요!!”

정말이지, 이런 비인도적인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아저씨의 맨발을 꽉 붙잡고,

깃털로 발바닥을 살살 쓸기 시작했다.

“푸히햐하하하하!”

효과는 굉장했다!

아저씨는 몸을 마구 비틀며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캬하하하학, 야, 이 놈아, 히히히, 하하하하, 뭐하는 거, 야하하하학!”

“가르쳐줄 때까지 간지럽힐 겁니다.”

“아~하하하하, 너, 햐하하하학, 캬캭, 네가, 네가 제일 미친놈이었구나아아! 꺼져! 절대, 절대 말 못해애애애! 끄아하하하아아아! 아아아악!”

그렇게 한동안 아저씨의 웃음소리가 나무집 바깥 호수까지 울려퍼졌다.

그로부터 약 이십 분 뒤, 결국 항복한 아저씨는 바닥에 엎어져 부들부들 떨었다.

“……휴. 겨우 끝났군.”

예로부터 간지럼은 남녀노소 무론하고 효과적인 심문 방법이다.

버틸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이 아저씨는 꽤 강적이었다.

이렇게 오래 버틴 건 간지럼 따위 전혀 안 타는 우리 아버지 말고는 처음이다.

어쨌든 이걸로 끔찍한 꼴을 보지 않고도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로나를 돌아보았다.

“어때, 로나? 꼭 피를 볼 필요는 없어. 폭력 없이도 해결할 수 있다는 거, 잘 봤지?”

“네! 굉장해요, 카엘 님! 저, 간지럼을 의식에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와아, 고통이 아닌 행복한 웃음으로 치유하다니, 저 감격했어요!”

딱히 치유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것도 고통은 고통이다.

꽤 체력도 많이 쓰니까, 잘못하면 탈진도 오고, 숨 막혀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뭐, 제일 후유증이 적은 방법일 것이다.

적어도 사제님들의 의식보단 몇 배는 더 낫다!

“아, 그래도,”

꺅꺅거리며 환호하던 로나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건 간지럼을 전혀 안 타는 사람에겐 효과가 없겠네요. 으음…… 웃음으로 치유하는 카엘 님의 의식도 좋긴 하지만……. 역시 사람을 가리지 않고 효과를 볼 수 있는 저희 의식이 훨씬 좋은 것 같아요.”

“……어, 그래…….”

큭, 실패했어!

설마 효율성을 중시할 줄이야!

……그래도 또 하나의 선택지를 가진 게 어디야?

좋게 생각하자.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저씨는 기력을 회복한 후, ‘마녀의 숲’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룬이 새겨진 돌 위에 서서, 박수를 세 번 치고, 이렇게 말하는 거야. ‘나를 데려가주시오!’ 라고. 그럼 맞이하러 누가 나올 거야.”

“……흐음…….”

룬은그 자체가 힘을 가진 문자이다.

그러니 마법을 다루는 마녀들이 돌에 새겨서 무슨 장치를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다.

……그런데도 어째 좀 불안하다.

이걸 그대로 믿어도 될까?

거짓말을 알 수 있다던 로나의 얼굴을 흘긋 보았다.

그녀는 아주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왜, 못 미더워? 직접 해보면 알 거 아니냐. 난 더 할 말 없다!”

그 말대로 직접 해보는 것 말곤 확인할 방법이 없다.

우리 중에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할 수 없구만.

나는 약속대로 밧줄을 풀어주었다.

“거짓말이면 로나 사제님이 진실의 의식 진행할 거에요.”

“……걱정 마, 진짜니까.”

우리는 나무집에서 나와, 아저씨가 알려준 호숫가 어느 지점으로 향했다.

“오, 이거구나.”

평평한 돌 위에 어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쉽게도 나는 룬을 읽을 줄 몰라서, 돌에 적힌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저씨가 말한 대로 글자가 새겨진 돌 위에 섰다.

“정말로 하려고?”

메린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역시 그녀도 아저씨의 말이 탐탁치 않은 듯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정말 거짓말이라면, 제가 바로 의식을 집행할게요!”

그러나 메린은 여전히 석연치 않은 듯한 표정이다.

이럴 땐 이 녀석의 직감을 따르는 게 맞긴 한데…….

녀석은 팔짱을 낀 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갑자기 내 팔을 잡아 끌어내린 후, 자신이 돌 위에 올라갔다.

“네가 하려고?”

메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가 더 뭐라 하기 전에 박수를 크게 세 번 치고 외쳤다.

“나를 데려가주시오!”

그러자 갑자기 사방에서 마구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호수면이 일렁이며 물결치기 시작했다.

돌에 새겨진 룬이 푸른 빛으로 빛나기 시작하면서, 메린의 몸이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누가 맞이하러 온다더니, 그냥 저대로 ‘마녀의 숲’으로 날아가는 건가?

그러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메린의 몸이 엄청난 기세로 하늘 높이 올라간 다음, 호수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메린!”

아무리 메린이더라도 저 높이에서 무사하진 못할 텐데!

그때, 일렁이던 호숫물 바깥으로 커다란 뱀이 튀어나오더니,

"샤아아아!"

입을 쩍 벌리고 메린을 집어삼켰다!

“메리이이인!”

이게 뭔……!물 속에 뱀이 있었다고?!

그보다도 역시 속임수였나!

나무집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 빌어먹을 놈이 문 앞에 서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 멍청한 놈들! 내가 네놈들을 가만 둘 줄 알았더냐?! 이곳이 네놈의 무덤이다, 용사!”

……분위기가 아까와는 전혀 다르다.

근데 내가 용사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큭, 이 자식, 처음부터 우릴 속였구나! 내가 용사인 건 또 어떻게 알았지?!”

“누굴 바보로 아냐? 요즘 세상에 그 맹약서를 가지고 다닐 놈은 용사밖에 없어!”

……음, 그렇군.

다음부턴 더 조심하자.

스스로에게 다짐한 후, 검을 뽑아 놈을 향해 겨누었다.

역시 칼집에서 나온 건 평범한 철검이었다.

으윽, 이거 그 뱀에게 통해야 할 텐데……!

“후하하하, 나를 직접 상대할 셈이냐? 고블린도 제대로 상대 못하는 허약한 놈이?"

"……!"

내가 싸우는 모습을 모종의 방법으로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놈은 호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쯧. 함정으로 네놈만 골라 죽이려 했는데, 저 여자가 감이 좋군. 뭐, 오히려 잘 됐지. 그 꼬맹이 사제도 치운 후, 네놈을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놈이 말을 마치자, 땅에서 흙무더기들이 여기저기 솟아올랐다.

송곳처럼 솟아오른 흙덩이가 인간 형태로 깎인 후, 서서히 나와 로나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로나가 굳은 표정으로 철퇴를 거머쥐었다.

“카엘 님, 여긴 제게 맡기고 메린 님을 구하세요. 아직 소화되지 않았을 테니 서두르시면 구할 수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너 혼자서 이 놈들을 어떻게 상대하려고!”

"전 괜찮아요. 이런 무리 사냥쯤은 거뜬하니까요! 그러니까 얼른 가세요!"

……이것도 사냥 취급이야?

아니, 그래도 역시 로나 혼자만 이 놈들을 상대하게 하는 건 도의에 어긋난다.

그렇다고 메린을 저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고…….

젠장, 어쩌지?!

“후하하하하하! 하나든 둘이든 별 차이 있을 것 같으냐! 실컷 놀아준 후, 내 귀여운 서펀트의 먹이로 삼아주지!”

“큭…… 저 자식……!”

그때, 호수에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아니, 무언가 물 속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쳐올랐다!

느닷없이 일어난 일에 나와 로나, 심지어는 함정을 판 저 놈까지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정체가 뭐지?

태양마저 가릴 정도로 거대한 게, 저 호수에 있었단 말인가?

천상에 닿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높이 떠오른 그림자는, 둥근 해 안에서 윤곽만 슬쩍 보여주었다.

“저건……”

길게 똬리를 튼……

뱀?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다시 거대해지며 태양을 도로 가려버렸다.

떨어진다아아!!

황급히 로나를 데리고 뒤쪽으로 달아났다!

쿠우웅!

뒤편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나면서 흙먼지가 사방에 퍼졌다.

잔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우와.”

우리 두 사람과 저 망할 나무집 사이에, 엄청나게 큰 뱀이 짜부라져 있었다.

조금이라도 뒤로 물러나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저 살에 깔리거나 살 조각 맞을 뻔했다.

그나저나 굉장히 높은 데서 떨어져서 그런지, 뱀의 상태가 매우 처참하다.

몸 일부가 뚝 잘라져 있을 뿐 아니라, 주변 여기저기에 살 조각이 막 튀어 있다.

그리고 뚝 잘라진 단면으로 붉은 피와 함께 엄청 굵고 길다란……

“우욱.”

“앗, 카엘 님, 괜찮으세요?!”

로나가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젠장, 왜 괜히 저걸 봐서!

지금 구역질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아, 잠깐, 저게 물속에서 나왔다는 건…….

“영차.”

“……”

음, 예상했다.

메린이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뭍으로 나왔다.

나는 옷의 물기를 짜며 다가오는 그녀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옷이 상해서 드문드문 속살이 보이긴 해도 생채기 하나 없다.

저 이빨 무시무시한 뱀한테 삼켜지면서 살짝 긁히지도 않았다니 말이 돼?

너무 어이가 없어서 녀석의 지금 행색이 민망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메린은 어딘지 개운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휴! 간만에 큰 거 잡았네. 야, 이거 오늘 저녁으로 어떠냐?”

“싫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