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44화 : ……라고, 숲이 말하였습니다 (1)
* * *
바깥의 괴상한 소리를 듣고서도, 레볼트는 여전히 느긋하게 대답하며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지금 바쁜데. 나중에 다시 오면 안 돼?”
“어머, 놀러 온 게 아니라 너 잡으러 왔다니까? 집 부수기 귀찮아. 그냥 얼른 나와~”
……저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참 대단하다.
그보다 이 목소리, 설마 또 그 변태인가?!
“싫어.”
“너 이름값 하는 건 좋은데, 진짜 귀찮으…… 응? 오드르, 뭐하려고?”
“먹어치워라.”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문과 그 주변 벽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휑하니 뚫려버린 벽 너머로, 여러 명의 마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역시 자기도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안녕, 자기야~”
“젠장, 역시 저 개변태였어!”
“개변태, 라니, 아흣!……자기도 참, 보는 눈도 많은데~”
진짜 돌겠네.
변태 마녀 옆에 서 있던 흑갈색머리 마녀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헛기침을 했다.
“너와는 이걸로 두번째 보는 거군. 레볼트와 함께 있었으니 죄상은 들었겠지? 쟤는 어쨌든, 너에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하마.
……순순히 우릴 따라와라. 나쁘게 대하진 않을 거다. 또,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내 이름을 걸고 보증하지.”
“풉, 네 이름을 걸면 뭐가 달라지니? 재판을 뭐하러 받아? 어차피 개 되는 판결밖에 더 나오겠어?”
레볼트가 옆에서 이죽거리자, 흑갈색머리 마녀, 오드르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닥쳐! 남의 집 사내를 훔치고, 의식을 치르기 직전인 아이를 밖으로 빼돌리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대놓고 행패를 부려? 네 성질을 봐서 여태껏 봐주었지만, 더는 안 돼!
질서의 이름으로 명한다! 체포에 응해라, 레볼트!”
질서의 마녀가 소리 높여 외치는 명령을 듣고, 레볼트는 하늘 높이 웃음을 터뜨렸다.
반항의 마녀는 붉은 기운이 흐릿하게 섞여 있는 두 눈을 부릅뜨며, 당당히 선포했다.
“꺼져! 나는 레볼트! 모든 규율, 모든 시류(??), 모든 관습에반역하며! 나를 속박하는 모든 것에저항하는 마녀다!
다른 마녀면 몰라도, 네 년 말에는 절대 따를 수 없어!”
레볼트가 허공에 손짓하며 손가락을 퉁기려는 순간, 오드르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인 것처럼, 레볼트의 팔이 공중에 우뚝 멈추었다.
“흥. 발악하긴. 너희 셋 다 연행하겠다.”
“흐흐, 흐흐흐! 멍청하긴.다리를 묶었어야지!”
“……!”
아까부터 움직이던 레볼트의 다리가 더 빠르게 움직이며, 발로 바닥에 무언가를 그렸다.
바닥이 단단한 탓에, 내 눈에는 그녀가 뭘 그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녀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걸 보니 마법진이 분명했다.
“막아!”
“늦었어!”
레볼트가 마법진에 대고 힘차게 발을 굴렀다.
쿵!
그와 동시에 오드르와 다른 마녀들이 무언가 당기는 시늉을 했다.
보이지 않는 끈이 레볼트의 손뿐 아니라 다리, 몸과 목까지 완전히 묶어 허공에 매달아버렸다.
하지만, 그건 전혀 소용없는 짓이었다.
왜냐면……
“이 숫자를 상대로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 어림도 없……”
오드르는 말을 다 맺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레볼트가 아닌, 그 뒤에 있는 우리를 향했다.
“이건……!”
“흐흐흐흐! 셋을 연행하겠다고 했겠다?그 말에 저항하마! 넌 나 하나만 데려가는 거야!”
왜냐면 그녀의 마법은, 나와 메린을 위한 거니까.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마녀들은 당황해하면서도 그저 보고만 있었다.
이미 발동한 마법은 그들도 멈출 수 없는 듯했다.
“안녕히 가세요, 아가씨, 부스러기 씨. 내 대신 ‘그들’에게 안부 전해주고.”
그 말을 끝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
눈을 뜨자, 완전히 달라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빽빽하게 자라 있는 나무들 사이로, 주황빛과 검푸른빛이 뒤섞인 하늘이 살짝 엿보였다.
머리가 푹신하면서 굉장히 차갑다.
흙냄새가 코 안에 가득 들어오는 걸 보니 흙바닥에 누워 있는 모양이다.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거지?
설마 나 혼자인가?
희미한 두려움을 느끼며 주변을 살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흰색 셔츠를 입은 사람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 게 보였다.
“아.”
메린이다!
네 발로 기듯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메린!”
……다행이다.숨은 쉬고 있어.
나는 그녀의 뺨을 가볍게 치며 계속 이름을 불렀다.
서너 번쯤 불렀을 즈음, 그녀가 눈을 살짝 찡그리는 게 보였다.
“으……”
메린이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를 도와준 후, 나는 녀석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냐?”
“아으, 어지러…….”
그 외에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메린은 세차게 고개를 흔든 후, 주변을 한 번 쭉 둘러본 다음, 나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야, 여기 어디냐?”
“숲.”
“너도 모르는구나.”
어지럼증이 가신 후,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주변엔 나무밖에 없다.
눈에 띄는 표식도, 기시감이 느껴지는 무언가도 없다.
대체 레볼트, 그 마녀는 우릴 어디로 날려버린 거야?
뭐, 실시간으로 소식을 주고받는 등, 편리한 마법을 펑펑 써대는 마녀들이 아직 안 오는 걸 보면 추적하기 어려운 곳인 모양이다.
“……”
마지막에 보았던 레볼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온몸을 꽁꽁 묶인 채 공중에 매달리면서도,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네던 모습이.
내 대신 ‘그들’에게 안부 전해주고.
그들…… 누굴 말한 거지?
네이멜과 요정들?
뭐, 지금 상황에서 의지할 건 네이멜밖에 없긴 하지만…….
“응?”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나와 메린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날았다.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카엘, 저쪽.”
메린이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색색의 나비가 부산스럽게 날면서 어느 한곳을 향하고 있다.
우리 주위를 돌던 나비도 그 방향으로 조금 날아가더니, 제자리에 멈춰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쪽으로 한 걸음 다가가자, 나비 역시 조금 나아가더니 도로 멈춰 섰다.
이거 꼭……
“따라오라는 것 같은데?”
“그렇지……? 가 보자.”
누가 파 놓은 함정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비들이 한 곳으로 날아가고 있다는 신비로움에 현혹된 걸까?
우리는 나무 사이를 헤치며 나비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시야가 탁 트인 곳으로 빠져나왔다.
“여긴…….”
위슨이 데려왔던 그 꽃밭이었다.
주위가 저녁 어스름에 잠겼다는 것 말고는 이전과 똑같았다.
꽃밭과 나비가 있고, 중앙에는 나무가 있으며, 그 나무 주위에는 샘이 파져 있다.
엄폐할 만한 게 없으니 마녀들을 피해 숨을 수는 없지만……
뭐, 숲에 있는 것보단 낫겠지.
바닥에 주저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하늘에 그나마 남아 있던 노란빛이 사라졌다.
이제 해가 완전히 져버린 것이다.
푸르스름한 하늘에 하나 둘 별이 뜨기 시작하면서 사위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서 밤을 새야 되나……?
“……어라?”
어째, 주변이 더 밝아진 것 같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고개를 내리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밤이 깔리고 있으니 꽃들도 검푸른색에 덮여야 하는데, 오히려 더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방인이 밤의 샘에 당도했구나.”
“그대, 어인 일로 숲을 헤매느냐?”
“그대,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
낮게 깔린 목소리가 웅웅 울려퍼졌다.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선은 분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카엘.”
메린은 검 자루를 쥔 채 경계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라도,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할 순 없을 것이다. 목소리에 아직 적의는 없는 것 같은데…….
‘검 뽑아.’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
갑자기 허리에서 진동이 느껴져 시선을 내렸다.
허리춤에 꽂힌 검이 작게 진동하고 있었다.
‘뽑으라니까.’
속삭이는 목소리에 이끌려,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르릉, 쇳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반 철검이 아닌, 널찍한 검신을 가진 검이었다.
빛이 반짝이는 모습을 형상화한 듯한 가드, 그리고 가드 중앙에 박힌 수정.
선포식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성검이었다.
근데 이게 지금 왜 나오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앞을 향하고,
눈앞의 광경에 숨을 삼켰다.
나비 혼자 꽃밭을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꽃이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녹색,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등등, 가지각색의 연기 같은 것들이 꽃 위를 날아다니며 빛나고 있었다.
“마침내 목도하는가.”
그리고 중앙의 나무 앞에는 초록빛 말이, 물가에는 푸른빛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 외에도 붉은빛 도마뱀, 모래빛 거북이, 청록색 새 등등, 짐승 형태를 띈 것들이 그 주변에 모여 있었다.
“이방인이여,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 중 누가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저들이 다 함께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들은 누구지?”
메린이 옆에서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아, 쟤 눈에는 지금 나 혼자 성검 들고 허공에 말하는 것처럼 보이겠구나.
젠장, 쪽팔려!
하지만 참아야 한다.
“……”
다행히 메린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두 발짝 정도 뒤로 물러나지만 않았다면 녀석의 배려심에 깊이 감격했을 텐데.
그래, 맞아!
녀석은 내가 저 앞에 있는 존재들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준 거야.
그래, 그런 거라고.
절대 내가 미친놈처럼 보여서 뒤로 빠진 게 아니라고.
쟤도 목소리 다 들었는데 설마 그런 나쁜 생각을 했겠어?
……아무튼,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을 무시하고 앞만 주시했다.
목소리가 다시 웅웅 울렸다.
“우리는 물과 불꽃, 대지와 바람, 소리와 빛이라. 우리는 만물이며 숲의 자녀이자 어머니이나, 그대는 이리 부를 것이다. 정령, 이라고.”
길게 이야기했지만 결국 정령들이었다.
정령들은 거창한 소개를 마친 후, 고고(高古)한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그대는 여기에 무엇을 찾으러 왔는가?”
“우연히 온 건데……. 근데 이 문답 꼭 해야 돼?”
“만사에 존재하는 것은 필연뿐. 그대가 이곳에 온 것도, 우리가 묻는 것도 모두 필연일지라.
증표를 가진 이방인이여, 답하라. 그대는 무엇 때문에 헤매는가?”
여기에 온 건 나비를 따라온 것이고, 애초에 레볼트가 나와 메린을 이 근처로 날려보냈기 때문에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령들이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성검의 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사명을 받았어. 성검을 가지고 드래곤을 물리치라는 사명. 나는 이 섬에, 사명을 위한 협력을 구하러 왔다.”
“그대는 검은 여인에게서 이미 약속을 받았다. 어이하여 이곳에 머무르는가?”
……역시 알고 있었구나.
눈에만 안 보일 뿐이지 세상 전역을 두루 다니는 존재들답게, 내가 베르메에게 확약(??)을 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닷새 뒤에 열릴 희생의식을 묵인하라.
어린 소년을 제물로 바치는 걸 못 본 척해라.
그러면 마녀가 힘을 보탤 것이다.
그게 베르메의 제안이었다.
누구 말처럼, 사명을 생각한다면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도장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난……
“……수락할 수 없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사명만 바라보며 달려갈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다.
설령, 당장은 온 힘을 다해 눈을 돌리더라도, 나는 분명 ‘아이를 희생시켰다’는 사실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필요한 희생이었다고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영웅이 아니니까.
“그러하다면, 어이하여 망설이고 있는가?”
“무작정 쳐들어가도 소용없으니까.”
“아니, 그대는 방도를 찾는 게 아니다.그대는 선택을 망설이고 있다. 깨닫고, 답하라. 어이하여 망설이고 있는가?”
응? 내가 선택을 망설이고 있다고?
위슨을 구할 방법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그 앨 구하는 것 자체를 망설이고 있다는 소리인가?
내가?
내가……
“……”
……위슨을 선택해도, 정말로 되는 걸까?
그 아이는 착하고 친절하지만, 말을 못한다.
드래곤 토벌에 큰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른다.
주문을 외울 수 없으니, 인어 나라의 위치를 알려준다는 장치를 작동시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녀는 어떤가?
손짓 하나로 자유롭게 공간을 이동하고, 대상을 포박하고, 순식간에 얼음장벽을 만들거나 불을 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사욕을 이루는 것만 보며 사는 족속이다.
십 년이 넘게 같이 살던 아이를 기쁘게 제물로 바치려고 할 정도로.
사람이 아닌 그들과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하지만 일 년 안에 드래곤을 잡아야 하잖아.
그렇다면 역시 강한 마법을 다루는 마녀가 필요한 거 아냐?
강한 마법.
강한 힘.
뛰어난 실력.
난 그 어느 것도 갖추지 못했으니까, 그걸 보충하는 게 의무 아닌가?
“……그렇구나.”
정령들의 말이 맞았다.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정말로 마녀들의 지원을 거절해도 되는지, 마음을 따라 위슨을 선택해도 되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건 내가……
“……내가 약하니까. 마녀의 힘 없이 드래곤을 물리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으니까.
……나는 영웅이 아니니까.”
영웅은 강한 마음으로 아이를 희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영웅은 강한 힘의 유혹을 뿌리치고 아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웅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그만큼 강하고 능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영웅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성검을 가졌을 뿐인 시골 촌놈 A다.
나에겐 사명과 목숨을 저울질하여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를 감당할 배짱은 없다.
카엘 님이 용사가 되신 건, 그럴 만한 자질을 갖추었기 때문이에요.
어린 사제님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창조주여, 대체 날 뭘 보고 고르신 겁니까?
“그대는 약하다.”
정령들이 단언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살짝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대와 함께 길을 떠난 여인보다 약하고, 그대의 손을 잡은 소녀보다 약하며, 그대가 구하려 하는 소년보다도 약하다. 그대는 약하다.
……허나,”
정령들의 말은 이어졌다.
“그대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으리라 알면서도, 여인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인의 모욕에 분개하며 맞섰다. 두려움에 빠진 소녀를 위로하고, 소녀의 마음을 우려하여 고통의 방법을 쓰길 거부했다.
이방인이여, 어이하여 그리하였는가?”
“엉? 그건…… 그러고 싶어서.”
“어이하여 그리하길 원하였는가?”
“아니, 난 그냥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을 보고 분개하는 건,
위험에 빠진 녀석을 돕는 건,
어린애가 누군가를 고문하려는 걸 막는 건,
불안해하는 아이를 격려하는 건 전부 다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하는……
‘아니. 그건 고집이야.’
마음속의 내가 말했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사람인데, 너는‘도리’를 지키길 고집하고 있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도 사람이고, 이기적으로 살아도 사람인데.
‘왜 고민하면서, 벌벌 떨면서도 고집하는 거지?’
영웅도 아니면서.
그렇게 덤덤히 물었다.
……무척 간단한 이유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했었으니까.
알겠니? 카엘.
따뜻한 목소리가 다독였었다.
우는 나를 달래며 엄마가 말했었다.
맨날 맞고 다녀도, 툭하면 열 나서 골골대도 괜찮아. 엄마는 네가 이거 하나만 지켜주면 돼. 좋은 사람이 되렴.
훌쩍. ……애들이 때리고 놀려도 꾹 참는 사람?
그건 등신 호구란다. 엄마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있지, 네 앞에서 누가 괴롭힘 당할 때, 그걸 말리고 맞서는 사람이야. 네가 대신 맞더라도 말야.
결국 맞는 거잖아. 똑같네, 뭐.
다르지! 네가 괜히 등신처럼 쳐맞고 올 때 엄마가 화냈잖니? 하지만 네가 다른 사람을 위해 나선 거라면, 한 대도 못 때리고 쳐맞기만 했다 해도 엄마는 네가 무척 자랑스러울 거야!
엄마는 말했다. 누구나 인정하는‘좋은 사람’이 되라고.
‘착한 사람’은 등신처럼 당하기만 할 뿐이니 절대 되지 말라는 현명한 말씀도 하셨지.
……그래서 그렇게 해왔다.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으니까.
엄마가 돌아가신 지금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저 동기가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어릴 땐 그저 엄마의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지금은?’
“……내가 되고 싶어.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길 원하고 있다.
‘왜?’
“글쎄……”
……되게 가까이에 반면교사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그런 거.
물론 목숨이 아까우니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짧게, 일정한 박자로 공기가 떨렸다.
마치 웃음소리 같았다.
“……그대는 약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는 대신 여인을 지키길 택하고, 마(?)를 대적하였다. 그대는 그것을, 그저 사람이고 싶기에 그리하였다고 하는가.
그렇기에 택함을 받은 것이겠지. 카엘 에스트렐, 성검을취한용사여.”
나무 근처에 몰려 있던 정령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만, 왠지 정령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들리지 않는 선율이 빨라지며 나무를 기점으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내 뒤쪽에 있던 메린이 내 옆에 바짝 다가온 게 느껴졌다.
완전히 주변을 덮어버린 빛 속에서, 정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사를 이끄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라. 그대, 용사여, 우리의 기억을 보아라. 그리고 길을 택하여라.”
눈부신 빛이 우리 두 사람을 삼켰다.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
풍경이 보였다.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건지, 감고 있는데 저게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눈앞에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숲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호수, 또 그 호수 중앙에 있는 섬이 보였다.
그리고 빗자루를 탄 한 여자가, 그 섬 안으로 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