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58화 : 반으로 갈라져서 죽어!!
* * *
얼마간 누워서 버티다가 다시 눈을 뜨고 상체만 일으켰다.
여자애가 우는 소리에 마음이 동해서 마지못해 일어난 거지, 절대 귓가가 자꾸 쾅쾅 울려서 그런 게 아니다.
……그나저나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지키다니, 역시 사제는 사제구나.
일어나긴 했지만, 머릿속이 익어버리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이 나고 어지러워서 제대로 고개를 들 수는 없었다.
말을 하고, 듣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기적이 아닐까?
“……지금 상황 좀…….”
“마일린이 방금 벼락을 쏘았는데 새대가리가 피했고, 새대가리가 정신사납게 날아다니면서 깃털을 날려대고 있어. 마일린이 그걸 바람으로 다시 돌려보내면서……”
“아니, 전체…… 전체 상황, 임마…….”
“아직 마일린이 새대가리를 상대하고 있어. 땅에 돌아다니던 시체들은 다 없어졌고. 한쪽 구석엔 오베이가 여기저기 물어뜯긴 채 누워 있어. 로나 말로는 살아 있다던데.”
……그 아저씨도 목숨줄은 질긴 모양이다.
위슨은 물어보나마나, 악마가 아직 살아 있으니 여전히 의식불명 상태이겠지.
“근데 야, 카엘. 마일린은 대마법사 아니었어?”
마법을 쓰는 사람이니까 마법사라고 해도 되긴 할 거다.
시선만 겨우 살짝 올려서 메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대마법사인데 악마랑 막상막하야. 저 새대가리가 센 거냐, 아니면 마일린이 약한 거냐?”
“……막상막하……? 젠장…….”
시선 끌려고 일부러 적당히 상대한 게 아니었던 건가.
그래도 막상막하라면……
아직 승산이 있다.
우리가 어떻게든 가세한다면……!
“으…….”
빌어먹을, 열 때문에 머리가 잘 안 굴러가.
……그러니, 굉장히 무모하고 직선적인 방법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로나…… 위슨 쪽 정령…… 아직 있어……?”
“네? 네.”
“스라소니…….”
“네? 어, 불러올까요?”
제대로 고개를 끄덕인 건지 모르겠지만, 발소리가 저쪽으로 멀어지는 걸 보니 고개가 움직였던 모양이다.
곧 다리에 보드라운 느낌이 들며, 작게 야옹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드니 작은 새끼 스라소니가 앉아 있었다.
“쇠약의 저주인가. 반나절도 채 남지 않았군. 악마에게 당했나?”
“……보기만 해도…… 아는 거냐…….”
“달리 없지 않나? 저주를 풀고자 한다면 필히 저 악마를 멸해야 할 터.……찬찬히 그대의 말을 들을 여유는 없겠군.”
스라소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대는계약자의 친우이니, 힘을 아끼도록 내 특별히 연결하겠다.……발화(??)는 불요(?)하다. 내 두부(??)에 손을 올리라.”
시키는 대로 손을 올렸다.
오, 부드러워.
“……쓰다듬지 마라.”
앗.
나도 모르게 그만.
……손바닥에 느껴지는 보드라움을 만끽하고 있는데,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건을 이르라.’
“……!”
마법에 걸렸을 때 머릿속에 왱왱 울렸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지난 기억을 상기할 때 목소리까지 들리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들리지 않는, 그런 묘한 느낌이다.
‘나를 떠올리며, 내게 전하고자 하는 말을 떠올려라.’
으음…….
‘이렇게……?’
‘그렇다. 이제 용건을 이르라.’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무엇인가?’
생각만 하면 되는데도, 왠지 모르게 심호흡을 하게 되었다.
‘아침이 다시 돌아왔는데, 왜 정령은 아무도 안 오는 거지?’
마일린이 그랬다.
이 일대는 따로 격리된 상태라서 바깥에 있는 정령들이 오지 못한다고.
그러나 지금은 그 붉은 밤이 없어졌으니 정령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것 아닌가?
친구라는 마일린이 저렇게 고전하고 있는데, 왜 그냥 보고만 있는 건가?
‘부르는 자가 없으니 오지 않는 게지.’
‘아니, 꼭 그래야 돼? 여기 정령들의 집 아니야? 악마 싫어하면서 왜 알아서 나서지 않는 건데?’
개미도 집을 부수려고 하면, 상대가 누구든 마구 깨물고 난리를 친다.
근데 한낱 개미보다, 경우에 따라선 인간보다도 상위 존재인 것처럼 고상한 척은 다 하는 정령 놈들은, 왜 제 집이 이 모양이 되도록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것인가?
애초에 베르메가 그 난리를 피웠을 때, 정령 놈들이 나섰다면 이렇게까지 사단이 나진 않았을 것을……!
머릿속에서 낮은 너털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씁쓸한 기색이 묻어 있는 웃음이었다.
스라소니의 굵직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인간이여. 정령은 만물이다. 본연의 상태로는 이치를 벗어날 수 없다. 물이 제 의지대로 흐름을 거스르고, 바위가 스스로 뜀박질을 하던가?’
‘하지만 너희는……’
‘우리는 짐승의 형체를 취함으로본연의 상태를 벗었다. 그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지. 그럼에도 본성에 반(反)하지는 못한다.’
즉, 자연에 있는 정령을 움직이려면 다른 자의 의사가 필요하다.
엄청나게 큰 불꽃을 피운다거나, 어떤 장소로 빠르게 가도록 해달라고불러야 한다.
‘그럼 내가 부르면 되나? 성검이 있으면 모습도 보이니까…….’
‘성검? 그대가 지닌 검 말인가?그 검은 영안(??)을 대신하는 모양이지? 허나 그대는 정령을 부를 수 없다. 그들은 응하지 않을 게다.’
‘아니, 왜……’
‘그대의 음성에는 아무 힘도 없다. 영(?)에게는 닿지 않아. 그대가 영(?)의 음성을 청(?)하지 못함과같으니.’
이런.
역시 난 안 되는 건가.
‘그럼 위슨이나 마일린이 너희와 의사소통이 되는 건……’
‘제 눈과 음성, 귀에 힘…… 마력이라 했던가? 그를담아 행하는 것이다. 계약자는 조금 다르지만, 지금 그게 중요하진 않을 터.’
……아무튼 마력이 없으면 불러봤자 듣지 않는다는 건가.
결국 우리 중에 정령을 부를 수 있는 건 저 하늘 위에서 바삐 다니고 있는 마일린밖에 없다는 거군.
하지만 마일린은 지금 정령을 부를 수 없다.
그럴 틈이 있었다면, 진작에정령들과 합세해서 까마귀 새끼를 없애버렸겠지.
그렇다면……
‘……그럼 스라소니 네가 대신 정령들에게 전해.’
‘플레마다. 무엇을 전하라는 것인가?’
‘하나, 마일린에게 놈의 움직임을 한순간이라도 멈추라고 전해달라고 해줘.
둘, 사람 하나 거뜬히 나를 수 있는 새를 둘 보내달라고 해줘.’
‘새? ……뭘 하려는 것인가?’
뻔한 걸 묻는다.
나는 시선을 들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새끼 스라소니, 정령 플레마를 마주보았다.
‘까마귀를 하늘에서 떨어뜨릴 거다.’
칼자루를 가능한 힘 있게 쥐며 전했다.
거의 철푸덕 엎드리다시피 한 채, 퍼덕거리는 날갯짓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제법 높이 올라온 탓에 주변 공기가 차갑다. 춥긴 하지만, 그 덕분에 열 때문에 뜨거워진 몸과 머리가 조금 식은 듯했다.
더럽게 춥지만.
“……”
저 아래에는 마일린과 까마귀 악마가 아직 싸우고 있다.
막상막하라는 말이 무색하게, 마일린은 악마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기에만 급급해하고 있다.
수십 명의 마녀와 한 판 치르느라 힘을 많이 소진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내 부탁이 전해지긴 했을까?
마일린이 악마의 움직임을 묶어야 시행할 수 있는데.
뭐, 이렇게‘새’가 오긴 했으니 전해졌겠지.
“……하아…….”
하얀 입김은 새어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 몸은 추워 죽겠다고 온 몸으로 외치고 있다.
몸에 열이 올라서 더 추운지도 모르겠다.
……아직 한참 버텨야 되는데.
몸의 떨림이 전해졌는지,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이 들어가며 메린이 속삭였다.
“카엘.”
“……아직, 괜찮아…….”
객관적으로는 딱히 괜찮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난 괜찮아야 한다.
적어도 저 아래에서 날뛰는 까마귀를 떨어뜨리기 전까진.
……그러고보니 내 작전을 듣자마자 메린 녀석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반대를 했던가.
너 미쳤냐? 지금 그 꼴로 그러겠다고? 네가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차라리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는 그녀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죽을 뿐이다.
악마에게 가장 유효한 무기가 이 성검이니, 내가 나서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개고생을 하게 만들다니 절대 용서 못한다!
이판사판이다, 새대가리 잡놈 새끼, 반드시 조진다!
플레마를 통해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얼굴을 한 번 찡그리더니, 무언가를 다짐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럼 나도 갈게. 지금 네 상태론 검을 쥐는 게 고작이야.
뭐……?
내가 네 손을 받쳐줄게.
머리가 멍한 탓에, 무슨 소리인지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이해한 건지, 별 이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건 여기 이렇게, 새로 변한 정령의 등에 같이 올라탄 뒤였다.
“……잘될까?”
“이제 와서 걱정되냐?”
그야 실패하면 너나 나나 죽을 테니까.
기운이 모자란 덕분에, 내 입 밖으로 나온 건 말이 아닌 입김뿐이었다.
메린이 몸을 더 밀착시켰다.
그녀는 몸 상태도 멀쩡하고, 눈도 나보다 훨씬 좋으니 저 아래의 상황이 훤히 보이고 있을 거다.
아마 슬슬 때가 가까워진다고 느낀 거겠지.
“네가 할 건 걱정이 아니야.”
내 허리를 더 바짝 감으며, 그녀가 속삭였다.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덕분에 추위가 조금 가시는 듯했다.
“목표만 생각해. 거기서 눈을 떼지 마.”
정령이 크게 날갯짓을 하더니,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마일린과 거리가 좁혀지면서, 내 눈에도 까마귀 악마와 마일린의 모습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에게 부탁한 건 단 하나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악마의 움직임을 묶어달라는 것이다.
“……!”
그리고 그녀는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악마의 손톱에 자신의 배를 내주면서.
마일린은 악마가 발버둥치는 반동으로 악마에게서 떨어진 후, 붉은 피를 흘리며 추락했다.
악마는 그녀가 건 속박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움직임이 큰 걸 보아 곧 놈은 다시 자유를 찾을 것이다.
아주 잠깐의 속박.
찰나의 멈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일류 전투사제에겐, 그 정도의 틈이면 충분한 것이다.
“멸하여라!!”
마일린이 추락하기 시작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사제의 금빛 철퇴가 악마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우리 두 사람이 탄 새가 지상으로 추락하는 악마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대로 쫓아가기만 해선 늦는다.
“준비됐냐?”
“……아마도.”
“기절만 하지 마라.”
새가 한순간 몸을 뒤집었다.
메린은 나를 한 팔로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성검을 쥔 내 손을 꽉 잡은 채,
새의 등을 박차고 뛰었다.
순식간에 땅이 점점 커지며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곧바로 의식을 잃어버릴 것 같다.
그러니 버텼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버텼다.
찌릿한 통증과 함께 비릿한 내음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금방이라도 땅이 얼굴을 들이밀어 머리싸움을 걸어올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봐야 할 건 땅이 아니다.
저 아래, 땅보다도 더 빨리 내 시야를 채우고 있는 시커먼 놈이다……!
“카엘!”
내 손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힘을 받아 전하듯이 검 자루를 꽉 쥐자,검신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래로 떨어지던 까마귀의 두 시뻘건 눈이 뜨였다.
놈의 두 눈이 나와 메린을, 성검을 포착한 후, 경악에 찬 듯 크게 떠졌다.
놈이 우릴 인식했을 땐, 이미 성검이 놈의 몸을 꿰뚫은 뒤였다.
“캬아아아악!!”
지글지글 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악마는 귀청 떨어질 듯한 새된 비명을 지른 후, 바들바들 떨며 나를 쳐다보았다.
역시 찌르는 걸로는 부족한가!
나머지 한 손을 칼자루를 향해 뻗었다.
빌어먹을, 바람이 너무 세서 안 올라가!
“……!”
메린의 왼손이 날아와, 칼자루째 내 손을 덮고 꽉 쥐었다.
두 손에서 느껴지는 굳센 힘을 빌어 칼자루를 잡고, 외쳤다.
“뒈져버려어어어!!”
검신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놈의 가슴에 난 상처가 벌어졌다.
한차례 더 새된 비명을 지르고서도 놈은 여전히 움직였다.
“아직, 아직이다! 용사아아아!!”
침과 검은 피를 튀기며 놈이 크게 팔을 휘둘렀다.
놈의 날카로운 손톱이 내 머리를 쪼개려고 날아왔다.
메린이 내 두 손을 꽉 쥔 채 팔을 위로 쳐들었다.
성검이 놈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며, 내 머리를 노리던 놈의 손까지 똑 잘라버렸다.
“끝이다!!”
그녀가 힘차게 외치며 팔을 내리자, 성검이 악마를 수직으로 베어버렸다.
완전히 절반으로 갈라진 놈의 몸이 축 늘어지며 하얗게 불타기 시작했다.
까마귀 악마 나베리우스는, 그대로 하얀 유성이 되어 지상에 떨어졌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아주 크고 넓은 구덩이가 파였다.
“……”
……그리고 나와 메린은, 정말로, 정말로 바닥에 닿기 직전에 다시 새가 잡아줘서,사뿐히 땅 위에 내릴 수 있었다.
아……
진짜 쫄려 죽을 뻔했네…….
이제 끝났겠지……?
“야, 아직 안 끝났어. 저 놈 아직 덜 사라진 거 같다고.”
“……시……바…….”
거 새끼 진짜 더럽게 끈질기네!!
메린이 날 붙잡고 질질 끌며 구덩이 중심으로 내려갔다.
……진짜 놈이 두 조각난 채로 아직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녀석의 부축을 받으며, 놈을 내려다보았다.
“크, 크흐흐……! 과연, 용사라 할 만하구나……! 쿨럭!!”
나베리우스의 입에서 검은 피와 연기가 푸왁 터져나왔다.
죽어가는 건 맞긴 한 듯했다.
내가 더 쪼갤 필요는 없겠지.
서서히 빛에 삼켜지면서도 놈은 여전히 떠벌릴 힘이 남아 있는지 말을 이었다.
……두 조각 난 입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게 좀 기괴하다.
“허, 허나…… 크크큭!! 네놈의 얼굴, 네 년의 얼굴……! 이 눈으로 보고 동포에게 확실히 전하였노라……! 크크, 크크크크!
본관이 직접, 네놈의 숨통을 끊지 못하는 건 원통하나…… 쿨럭쿨럭! 그래도,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리라!”
죽어가는 거 맞아?
왜 이리 말이 길어?
“처음으로, 악마에게 이긴 기쁨, 잠시간만 누리도록 해라……! 크, 크크, 크하하하하!”
기운이 없긴 하지만 잘못된 정보는 반드시, 그리고 신속히 수정해야 한다.
나는 고개 대신 손을 내저어주었다.
“넌…… 두 번째야, 등신아…….”
“뭐?”
“우린 저번주에…… 아스모스랑 싸워서…… 이겼거든……? 등신 잡놈 새끼야…….”
“……”
“……”
“커흐어어어어얽!!”
갑자기 놈이 검은 피 한 다발을 쏟아내더니 고개가 푹 꺾였다.
그때까지 천천히 놈의 몸을 삼키던 밝은 빛이, 순식간에 놈을 태워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아잇, 드러워.”
악마가 토해낸 피가 튀었는지 메린이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고개들 힘도 없다.
사실 조금 전부터, 안 그래도 멀리 들리던 목소리가 아예 들릴락말락하고 있다.
“……야. 이제 끝났지……?”
“엉? 어. 아마 그럴걸.”
끝났구나.
드디어.
그 단 두 마디의 뜻이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철그렁,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카엘!”
“………………미안, 더는…………”
더는 안 되겠다.
뒷일을 부탁해.
……라고 끝마치고 싶었는데.
얄궂게도 내 의식이 먼저 잽싸게 막을 내려버렸다.
숲은 누구든 받아들인다.
몬스터도, 짐승도, 벌레도……
……도무지 쓸데없는 꼬맹이도.
특히 해가 지는 이 시간엔 더더욱 반겨줄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이 되길 기다려 숲으로 들어왔다.
숲 속 깊이깊이, 앞이 깜깜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걷고 걸었다.
그러다 제법 큰 나무에 기댔다가, 그냥땅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른다.
집에 어떻게 돌아갈지는 걱정도 안 된다.
어차피 안 갈 건데 뭐하러 걱정해.
흙바닥의 차가운 촉감이 느껴지고, 썩기 시작하는 낙엽의 내음이 물씬 풍겼다.
안 그래도 얼굴이 욱신거렸는데 잘됐지.
쉬지 않고 걷느라 다리도 아프니 그냥 이대로 자버리자.
눈을 감았다.
저 멀리서, 낄낄대며 웃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곧 내 바로 근처에서 먹을 게 알아서 굴러왔다며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 쓸데없는 나라도, 이렇게 누군가의 저녁거리가 될 수 있다.
좋은 건지 슬픈 건지 모를 웃음이 지어졌다.
적어도 아픈 걸 느끼기 전에 죽여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비명소리가 울렸다.
마구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들렸다.
뭐, 늑대인간이라도 나타났나?
아무렴 어때.
한차례 소란이 끝난 후, 다시 조용해졌다.
늑대인간도 나한텐 관심이 없나보다.
저벅, 저벅.
작은 발소리가 들리며, 무언가 내 볼을 쿡쿡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안 먹을 거면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갔으면 좋겠다.
쿡쿡.
……쿡쿡쿡쿡쿡쿡쿡쿡.
“아아아악! 그만해, 임마!!”
“……뭐야. 역시 살아 있잖아.”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 내 시야에, 주홍빛 눈동자가 비쳤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듯한 눈동자였다.
“……아.”
눈이 홱 떠졌다.
어두운 공간이지만, 가느다란 달빛이 새어들어오는 덕분에 아무것도 안 보이지는 않는다.
깜깜한 걸 보니 밤이고, 머리와 등이 푹신한 걸 보니 베개를 베고 침대에 누워 있는 것 같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머리도 멍하고, 온 몸엔 기운이 하나도 없다.
……그냥 도로 잘까?
“……?”
무심코 움직인 손가락에 무언가 가느다란 것이 닿은 듯했다.
가만히 시선만 움직여서 그쪽을 보니, 뭔가 길다란 게 주렁주렁 달린 둥근 물체가 침대 위에 올려져 있다.
……아니, 둥근 물체는 무슨.
사람 머리잖아.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내 머릿속은 멍하고, 조명은 저 있으나마나 한 달빛밖에 없다.
……하지만 어렴풋하게 보이는, 살짝 보이는 옆 얼굴의 윤곽만으로도 누구인지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메린.”
움직임이 없다.
자느라 안 들리나보다.
내 입에서 제대로 소리가 안 나왔을 수도 있고.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조금 움찔거릴 뿐,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없다.
잘됐지, 뭐.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 속으로 중얼거린다.
……또 네 덕분에 살아 돌아왔구나.
어쩐지 꿈에 옛날 일이 나오더라.
너와 처음 말을 텄던 그때 일이…….
중얼거리는 동안, 내 입은 저절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 자.”
손을 내려놓고, 다시 눈을 감았다.
저 아래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가는데, 왠지 내려놓은 손이 따스한 온기에 감싸이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 온기를 잡으려 손을 구부리는 순간,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