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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59화 (59/475)

〈 59화 〉 59화 : 숲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답니다 (1)

* * *

새까맣던 시야가 갑자기 붉게 빛나는 느낌이 들었다.

잘 들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올려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다.

……아니, 정말로 본 적 없는 천장이었다.

어디야, 여기.

고개를 돌리니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커튼도 활짝 젖혀 있어서 햇살이 마구마구 방 안을 내리쬐고 있다.

창가엔 본 적 없는 화분이 있고, 방 한편엔 처음 보는 책상, 그리고 벽에는 낯선 모자가 걸려 있다.

진짜 누구 집인지 감도 안 오는데.

“짹짹.”

열어 놓은 창문으로 참새가 들어온 모양이다.

작은 날갯짓 소리를 내며, 작은 새는 당돌하게도 내 코에 앉아서……

“오, 깼냐?”

“으와아아아악!!”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앉아, 베개를 방패 겸 둔기 삼아 내밀었다.

내가 갑자기 움직인 탓에 파랑새는 내 코에서 떨어져, 신음 대신 째짹 하고 울며 침대 위를 몇 바퀴 데굴데굴 굴렀다.

“갑자기 뭔 지랄이야, 돌았냐?!”

“오, 주여, 이게 뭔 해괴망측한 일이랍니까! 망령 자식, 썩 물러가라!”

저, 저 파랑새, 저 놈 저거 그때 분명히 사라졌었는데!

빛이 되어서 위슨의 목으로 들어간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근데 왜 내 눈앞에 도로 살아나 있는 거지?!

헉.

설마……!

“여, 여기 저승인가! 나 죽은 거야?!”

“진짜 돌았나보군.”

그때, 침대 맞은편 문이 끼익 열리며 메린이 고개만 쏙 내밀었다.

녀석은 굳은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곧 표정을 풀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난 또 미친 줄 알았네. 왜 괴성을 지르고 난리야?”

쟤가 있는 걸 보니 저승은 아니구나!

그럼 이 놈은 뭐야?!

무덤덤한 얼굴로 침대 옆 의자에 앉는 메린에게 물었다.

“메메메, 메린, 이이이 놈, 왜 여기에……! 아아아니아니, 그 전에 여기 어디야?!”

“여기? 누구더라? ……몰라, 아무튼 어떤 마녀 집이야. 묘지에서 제일 가깝다고 해서 이쪽으로 왔어.”

“그그그, 그럼 이 놈은?!”

“얘? 위슨이 데리고 다니던 정령이잖아. 기억 안 나냐?”

“아니, 그게 아니라……!”

젠장, 당황해서 그런지 말이 제대로 안 나온다.

그보다 아직 머릿속이 빙빙 도는 게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정리가 안 돼!

짹짹, 파랑새가 짧게 울더니, 내 머리 위에 올라앉아 정수리를 콕콕 쪼았다.

“아하~ 너 그때 내가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었군? 이거 미안해서 어쩌냐, 전혀 아니었는데.”

“무, 뭐?”

“그땐 그냥 깃든 거야. 그 애의 망가진 울림통을 잠깐 대신했을 뿐이라고. 일시적이었다 이 말이지.”

“세상에…….”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내 손에서 베개가 떨어지며 몸이 축 늘어졌다.

“놀래긴. 소리의 정령으로서 힘만 좀 있다면 당연한,”

“이딴 놈이랑 아직도 계속 같이 다녀야 한다니! 위슨이 너무 가엾잖아! 이제 겨우 걔가 저주받은 주둥이에서 해방되나 했는데!!”

삐이이!

갑자기 귀가 울린 탓에 두 귀를 틀어막은 채, 침대에 다시 쓰러졌다.

……저거 역시 저주받은 주둥이잖아!

잔향이 아직 남아 있는 귓속으로 메린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내가 보기엔 네 입이 저주받은 주둥아리 같은데.”

“시끄러…….”

……부당한 소리폭행 때문에 기껏 모은 기운이 다 빠져버려서, 도로 누워야 했다.

나른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나왔을 때는,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였다.

“……”

……그러고보니 나, 옷 다 갈아입고 있네.

아니 뭐, 정신 잃고 있었으니 불평은커녕 고마워해야 될 일이지만……

……그래도 속옷까지 갈아입고 있는데 신경이 쓰이지 않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다행히, 내 그런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의문점은 금방 해결되었다.

방을 나서자마자 빨래더미가 든 바구니를 한아름 안은 중년 남자와 맞닥뜨린 것이다.

바구니 속엔 내가 입고 있던 옷들도 슬쩍 엿보였다.

“……음?”

남자는 나를 보자마자 두 눈을 끔뻑이더니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어이고, 용사님, 일어나셨네요. 아직 더 쉬셔야 할 텐데 더 누워 계시지 않고.”

“아, 그…… 하도 누워 있었더니 등이 아파서…….”

정말로 등과 허리가 뻐근해서 더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책상을 빌려서 수첩에 기록이라도 할까 했지만, 깃펜을 들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은 탓에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온 것이다.

그보다 용사님이라니, 듣기 쑥스럽구만.

내 말을 들은 남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럴 만도 하죠! 제가 중간에 옷 갈아 입혀드렸을 때 말고는 쭉 같은 자세로, 하루 넘게 주무셨으니 오죽하시겠어요?”

“아, 선생님이셨군요. 다행이다…….”

섬 바깥 호수보다도 더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를 향한 남자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느껴져, 나는 재빨리 헛기침을 한 후, 말을 걸었다.

“저기,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빨래까지 해주시고.”

“어이구, 그런 말씀 마세요. 용사님이 베푸신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요. 엄밀히 따지면, 저는 그저 옷만 갈아 입혀드린 거니 돌봐드린 것도 아니고요.”

“예……? 그럼 누가…….”

남자는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용사님 동료분들이죠. 사제님이 어찌나 안절부절 못하시던지……”

“……저 그렇게 상태 안 좋았습니까?”

“어제는 저도 정신이 없어서…… 그저 열이 좀 있으셨다가 어제 저녁쯤에 내렸다고만 들었습니다. 자세한 건 저 안쪽에서 동료분께 직접 들으시지요.”

“아, 예,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남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갔다.

다리가 뻑적지근한 탓에 천천히 걸어가는데, 뒤에서 남자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남자는 얼굴 가득 깊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예……?”

“용사님 덕분에저희 모두, 다시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군데군데 빛이 바래 있다.

아마 내 아버지보다도 더 나이 많겠지.

그런 나이 지긋한 사람이 눈물 어린 눈으로 내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곳에 갇혀 있었는지 모른다.

마녀들을 적대할 때도 나는 오직 위슨을 구할 생각만 했을 뿐, 이들을 염두에 두진 않았다.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알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감사를 받아들이기엔, 나는 너무 소심했다.

“……감사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냐면 저는 그저…….”

“압니다. 위슨이었나? 그 아이를 구하려고 싸우셨죠. 아는 사람을 위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고개를 저으며 건넨 내 말을 뚝 끊어버린 후, 남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저는 속박에서 풀려났죠. 저를 데리고 있던 마녀가 용사님 손에 죽었거든요. 다른 노예들도 모두 어제부로 자유를 찾았습니다.”

“……”

“용사님이 저희를 위해 싸우시지 않았더라도, 저희가 용사님 덕분에 살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 마세요.

용사님, 당신은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용사님이 부담스러워하셔도 전 계속 감사드릴 겁니다. 제가 죽을 때까지 쭉 감사드릴 테니 각오하시죠!”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껄껄 웃었다.

……나 참. 기력이 없으니 안 그래도 풍부한 감성이 더 자극을 받는 것 같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감추려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거, 안 받으면 여기서 못 나갈 것 같네요. 예~ 감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유를 찾으신 것 축하드려요. 어렵게 되찾은 삶,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랄게요.”

진심을 다해 축복을 빌어준 후, 무슨 대답이 또 나올지 몰라서 재빨리 집 안쪽으로 향했다.

바구니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힘차게 감사하다는 말이 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가리킨 곳은 부엌이었다.

화덕 위에 올려진 솥을 들여다보던 메린이, 내 인기척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돌렸다.

“어라? 벌써 나왔냐? 등이 아프면 엎드려서 누워 있지, 뭐 하러 나와?”

“……희한한 데서 예리하네. 뭐, 티라도 나냐……?”

평소엔 눈치 더럽게 없으면서, 어떻게 이런 것만 항상 잘 맞추는 건지 모르겠네.

메린은 내 퉁명스러운 반응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어. 너 지금 엄청 구부정한 상태로 휘적거리는 게, 요전에 봤던 움직이는 시체 같아. 딱 촌장님 허리 다치셨을 때랑 똑같은데?”

“……”

굉장히 객관적인 분석 결과였다.

덤으로 그 나이 많은 할아버지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게 서글펐다.

왠지 모르게 맥이 빠진 나는, 조심조심 기지개를 켠 후 테이블에 앉았다.

“배고파?”

“아니, 별로…… 다른 애들은?”

메린은 솥에 다른 재료들을 넣으면서 대답했다.

“로나는 약초 캐러 갔어. 위슨은 정리할 게 있다며 지 집이 있던 데로 갔고.”

“마일린은?”

“마일린? 글쎄? ‘부엉이탑’에 있겠지. 로나에게 치유 기도 받고 몸 추스르자마자 거기 갔으니까.”

……마일린도 무사히 살아남았구나.

배가 푹 꿰뚫렸는데도 목숨을 건지다니.

목숨줄이 긴 건지, 마법을 깨우치면 다 그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

내가 더 묻지 않자, 메린도 말없이 식사 준비를 계속했다.

솥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

이따금 들리는 똑똑똑, 도마에서 무언가 잘게 써는 소리,

달그락거리는 소리……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언젠가 들었던 그 따뜻한 소리들을 듣고 있자니, 저절로 몸이 테이블 위로 가며……

“헉.”

……깜빡 졸았다!

여기 계속 앉아 있다간 또 잠들 것 같다.

기왕 일어났는데 좀 깨어 있어야지.

나는 크게 하품을 한 후, 다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좀 나갔다 올게.”

“뭐? 너 아직 기운 없잖아. 괜히 밖에서 픽 쓰러지지 말고 얌전히 있지?”

“그 정돈 아니거든?! 집 앞에만 잠깐 나갔다 올 거야.”

어차피 이제 곧 해가 질 거다.

좀 떨어진 곳까지 후딱 다녀오기엔 기운도 없고,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 이 집이 섬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함부로 나다니다간 길 잃은 미아가 돼서 개쪽당하겠지!

“아, 맞다.”

부엌을 나서기 전, 나는 메린에게 깜빡 잊었던 걸 물어보았다.

“야, 메린. ……나, 많이 심각했냐?”

“뭐가? 너 싸우는 거? 뭐, 부족하긴 해도 끔찍하게 심각하진 않았어.”

“아니, 임마, 그거 말고.……나 열 났었다며. 심각했었나 해서.”

“아~ 그거.”

메린은 요리의 간을 맞추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로 안 심각했는데? 너 지난 겨울에 앓던 것보단 훨씬 덜했어. 왜?”

“아니, 뭐…… 로나가 많이 걱정했다던 것 같길래.”

“야, 걔는 신전에 있었잖아. 끙끙 앓는 사람 본 적이나 있겠냐? 그래서 좀 놀랐겠지.”

음, 그럴싸하군.단번에 납득했다.

하긴, 병 하나 앓아본 적 없는 사람은 누가 기침만 조금 해도 놀라기 마련이니까.

약간 무거웠던 마음이 곧바로 가벼워지는 걸 느끼며 부엌을 나섰다.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가, 다시금 기지개를 쭉 폈다.

긴 숨을 내쉬고, 상쾌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고, 어딘가 멀리서 까악까악하는 소리가………왜 들리지?!

까마귀 다 없앤 거 아니었나?!

……아무튼, 그럭저럭 평화로운 초여름 오후였다.

“……근데 진짜 여기 어디쯤이지……?”

내가 한번이라도 가본 집은 딱 세 군데이다.

드와트의 집, 옵센의 집, 위슨의 집.

뭐, 엄밀히 따지면 레볼트의 집도 가긴 갔지만……

“……”

……레볼트.

좀 이상하면서도 큰 힘이 되어줬던 마녀였지.

……그 높이에서 의식을 잃은 채 떨어졌으니 역시 죽었겠지?

그 묘지에 묻혀 있을까?

내일이라도 찾아가봐야겠다.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달래듯, 집 주변을 슬슬 걸어 다니며 무언가 눈에 익는 게 없는지 살펴보았다.

한 바퀴 반을 돌았을 즈음, 이 주변은 아니고 좀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집이 눈에 들어왔다.

지붕 생긴 것도 그렇고,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든다.

“……저거 그 변태 집인가?”

변태 엘프 마녀의 집 같은 곳에, 웬 수척한 남자가 현관 앞에 나와 쓰레받기를 툭툭 털고 있다.

그러고보니 그 마녀는 아직도 감옥에 있나 모르겠네.

“어? 카엘 님?”

밝은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자, 로나가 두 팔 가득 소쿠리를 안은 채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소쿠리에는 잎사귀, 뿌리, 열매 같은 게 잔뜩 담겨 있는데, 냄새가…… 굉장히 진했다.

인사하려고 숨을 들이켰을 때 그 냄새가 목을 타고 넘어오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얼굴 보자마자 거칠게 기침하는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우앗, 카엘 님, 괜찮으세요?! 아직 나오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괘, 괜찮아, 괜찮아…….”

기겁해하는 로나를 향해 손을 저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다행히 냄새가 심한 만큼 코가 죽는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내가 방금 한 기침은 코의 마지막 단말마가 아니었을까?

그보다 나 이제 다른 냄새 못 맡게 되는 건 아닐까?

양치기 호신용으로 쓰던 쓴 가루도 저 약초들에 비해선 향긋한 편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근데 그 약초들 뭐야?”

“기력회복에 좋은 것들이에요! 카엘 님 드시라고 따왔어요. 특히 제가 추천하는 건 이거!”

그녀가 싱글벙글 웃으며 보여준 건, 흡사 두 다리 달린 사람 몸뚱이처럼 생긴 뿌리였다.

“뭐야? 맨드레이크?”

“땡! 인삼이에요!”

로나는 혼자 까르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맨드레이크보단 효능이 약한데, 지금 카엘 님이 드시기엔 이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애초에 맨드레이크를 혼자 뽑을 수도 없고요.”

이게 인삼이구나.

숲에서 간간이 봤던 것 같긴 한데, 이것도 약초로 쓸 수 있다니 전혀 몰랐네.

근데 왜 도감에 안 실려 있지……?

“……근데 카엘 님, 진짜 벌써 일어나셔도 돼요? 아직 얼굴빛도 별로 안 좋은데……. 어제 엄청나게 아프셨고…….”

그녀는 굉장히 걱정하는 눈빛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꽤 어지간히 놀랐던 모양이다.

나는 일부러 더 밝게 웃어주었다.

“괜찮아! 아직 기운 없긴 하지만, 네가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넌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어제 내가 앓은 건평범한 수준이라고.”

“네? 그게…… 평범하다고요……?”

응? 어째 로나의 두 눈이 충격에 빠진 듯했다.

머리라도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그녀는 아연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소쿠리를 안은 팔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놀랄 일인가?

사제들도 감기 정돈 걸릴 거 아냐?

“차가운 물수건이 금방 데워지고…… 열에 들떠서 혼자 헛소리하고…… 그러면서도 덜덜 떨던데…… 그게…… 평범해요……?”

“평범한데?”

기침도 안 나올 정도로 호흡이 약해지지 않았으니 뭐,평범한 수준이다.

그러고보니 지난 겨울엔 정말 심했지.

그땐 나조차도 진짜 죽겠구나 싶었으니, 뭐…….

근데 다른 사람들도 그 정도는 하지 않나?

나 말고 또 몸 약한 건 촌장님 댁 다섯째 따님인 슐 누나밖에 없었는데, 이 누나도 환절기 때마다 열 나서 끙끙 앓곤 했다.

그래도 뭐, 거의 일주일 내내 뻗어 있는 나와 달리, 그 누나는 이틀이면 일어났지만.

……응?

생각해보니까 내가 유독 더 심하게 앓았던 것 같기도 한데?

으으응?

“……오, 주여, 부디 당신의 종을 굽어살피소서……!”

“……”

로나는 내 말에 간절한 표정으로 기도하며 성호를 긋고 있었다.

뭔가…… 뭔가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다.

기분이 이상해.

내가 한숨 쉬는 걸 보는 메린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모르겠네.

짧게 기도를 마친 로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메린 님이 굉장히 침착하시길래 일부러 더 그러신 줄 알았는데, 세상에!

위슨 씨가 우리와 같이 다니겠다고 하신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요. 영양제랑 자양강장제 같은 거 팍팍 먹여달라고 해야겠어요!”

으윽.

듣기만 해도 입이 써지는 것 같다!

근데……

“위슨이 우리랑 같이 다닌다고?”

“네. 왜요? 카엘 님은 싫으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이제 굳이 섬을 나갈 필요가 있나?”

이전에 내가 위슨을 데리고 나가려 했던 건, 여기 있으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남자인 이상, 언젠가 마녀들에게 잡아먹힐 운명이었으니까.

실제로 거의 죽을 뻔했고.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집에 있는 중년 남자가 ‘모든 노예들이 자유를 찾았다’고 했으니, 적어도 잡아먹힐 걱정은 없어졌다.

자신을 옥죄며 학대하던 마녀도 없다.

목에 저주를 걸었던 그 마녀가 없어졌으니, 어떻게 치료만 받으면 말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섬엔 전설의 대현자 마일린도 있다.

여기 있으면 목을 치료한 후, 그녀에게 마법을 배우며, 정령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

섬 바깥을 구경하고 싶으면 그 다음에 해도 될 텐데.

그런데 굳이 지금 위험을 무릅쓰고 섬을 나가겠다니.

로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이유를 물어도 그냥 웃기만 하시던데요. 음, 카엘 님이라면 알려주시지 않을까요?”

“나? 너한테도 안 알려준 걸 나한테 얘기할까?”

여기 있으면서 위슨과 곧잘 어울린 건 로나 같은데.

……아니, 위슨이 아니라 파랑새였나?

아무튼 또래에게도 비밀로 부친 걸 나에게 순순히 밝힐 것 같진 않다.

“카엘 님은 말 잘하시니까 캐내실 수 있겠죠! 내일 물어보세요!”

“……나 말 잘하진 않는데. 그래, 내일 물어보지, 뭐.”

어차피 내일도 이 섬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라고 채근하는 로나에게 등을 떠밀리며, 나는 내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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