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60화 : 숲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답니다 (2)
* * *
다음날 아침, 몸은 한결 가뿐해져 있었다.
미열도 없으니 완전히 다 나은 거겠지.
내일 당장이라도 섬을 떠나려면 떠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만나봐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아침식사를 마친 후, 묘지로 가기 전에 먼저 ‘부엉이탑’…… 흑단나무에 가기로 했다.
흑단나무를 거쳐서 가는 게 길을 덜 헤매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마일린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밖을 나서니 해는 이미 완전히 떠올라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일어나 있을 시간이다.
또, 지금 신세를 지고 있는 집은 그럭저럭‘번화가’에 위치한 건지,흑단나무로 가는 중에 다른 마녀의 집들을 제법 많이 지나치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길을 가면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인사를 받게 되었다.
“용사님이시죠! 안녕하십니까!”
“아, 예, 안녕하세요…….”
정말로,
“하이고, 용사님 아인교! 이리 꼭~ 뵙고 인사드리고 싶었심더!”
“아, 예, 반갑습니다…….”
굉장히,
“어이구, 용사님! 아직 피곤하신 거 같네요. 답례로 제가 꼭 안마 한 번 해드리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오늘밤…….”
“마음만 받겠, 아니, 괜찮습니다! 사양할게요!!”
부담스러웠다.
그보다 마지막 뭐야,왜 밤에 안마를 해주겠다는 건데?!
마녀보다 더 무섭다고!
……아무튼 그런 식으로 많은 인사를 받았더니, 흑단나무 앞에 도착했을 땐 진이 다 빠져 있었다.
아직 점심도 안 됐는데.
그나저나, 굉장히 조용하다.
그래도 여기가 광장 비슷한 곳이니까 누구 한 명은 있을 줄 알았는데.
나무 안에 들어가 있나?
힐끗 바라본 나무의 정문은 여전히 뻥 뚫려 있었다.
임시 문이라도 달아 둘 줄 알았는데.
슬쩍 안쪽을 엿보았지만,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
이렇게까지 아무도 없을 수가 있나?
심지어 로비는 로나가 박살낸 그 상태 그대로 있다.
아무리 마녀끼리 대전(大戰)을 펼쳤다곤 해도, 설마 마일린 빼고 다 죽었을까?
“으음…….”
밖에서 불러볼까?
혹시 알아? 누가 나올지.
나는 나무 바깥으로 나와, 최대한 숨을 들이쉬고 외쳤다.
“마이,”
“까꿍!!”
“꺄아아아아아!!”
………………시, 심장 멎는 줄 알았네.
너무 놀란 나머지 다리가 풀려버렸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진짜 악랄하다.
소리도 없이 바로 뒤에 와서 놀래키다니, 암살자냐고.
“어휴, 이 정도로 놀라 자빠지다니.”
……어라? 이 목소린…….
나는 불평할 마음도 싹 사라진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환청이 들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게 이 목소린……
보라색 단발머리가 특징적인 마녀의 목소리였으니까.
“그래 가지고 내 아가씨를 잘 모실 수 있겠어요? 이거 영 못 미더운데.”
“……!”
흑단나무의 꼭대기층 하늘에서 떨어졌던 반항의 마녀, 레볼트가 나를 불만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 레볼트?!”
“네. 레볼트랍니다. 부스러기 씨, 당신 혼자 왔어요? 아가씨는?”
메린을 찾아 두리번두리번거리는 모습은 정말, 영락없이 그 이상한 마녀가 맞는데.
하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그때, 베르메가 그 높이에서 휙 던져버렸는데도 살았다고?
“왜 그래요? 꼭 죽었다 살아난 사람 보듯이 보네?”
그야 댁이 딱 그런 사람이니까!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어어어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에요?! 혹시 유, 유령인가?!”
“어머, 유령이라니, 무례하시네요!”
레볼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번 홱 넘긴 후,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건 마체(??)랍니다!”
“……엥?”
뭐야, 그게.
레볼트는 내가 멍한 표정을 짓는 게 유쾌한 듯이 혼자 킥킥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몸이라고요. 마법으로 물을 모은 다음, 내 모습을 비추고 있답니다.”
“……무, 물이요?”
“네. 물. 만져보실래요?”
그녀는 별 주저하는 것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그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폭 건드려보았다.
뭔가 물컹~한 느낌과 함께, 작은 거품소리가 들렸다.
“……우와.”
“훗훗훗, 신기하죠? 마법의 힘이랍니다! 뭐, 항상 마법을 전개하고 있어야 돼서 빨리 피곤해진다는 게 단점이지만.”
“어…… 그럼 당신, 내가 아는 그 레볼트 맞는 거죠?……살아 있는 건가요?”
내가 생각해도 좀 멍청한 질문이긴 하지만, 묻고 싶었다.
물로 된 레볼트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미소 지었다.
“네. 이제 뭘 먹지도 못하고, 자고 일어날 때마다 주변이 물바다가 되고, 누군가와 몸을 섞을 수도 없지만……
……나는 고통을 기억하고, 분노를 기억하고, 아가씨의 온기를 기억해요.
내 눈으로세상을 보고, 손으로 만지며,나로서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레볼트는 살아 남았답니다.”
중간에 이상한 말이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그녀는 여전히 내가 알고 기억하는 그 마녀가 맞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누군가는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그녀 스스로 자신을 ‘레볼트’로 인식하며, ‘레볼트’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형태가 어떻든 그녀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 말에 생긋 웃은 후,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근데 여긴 왜 왔어요? 수장님 만나러 왔나요?”
“수장님……? 어어, 아니요, 저는 마일린을 만나러……”
“수장님 맞네요, 뭐. 그분은 여기 안에 계세요. 보내드릴게요.”
“앗. 아니요, 제가 올라가겠,”
……그러나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였고, 나는 눈 깜짝할 새에 의자에 앉아 있는 마일린 앞에 섰다.
“……”
“……”
어색해!
뜬금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어색하잖아!
어쩔 거야, 이거!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보던 마일린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레볼트죠? 그 애도 참……. 어쨌든, 잘 오셨어요. 저나 당신이나 어떻게 살아남았네요.”
역시 가공할 만큼의 연륜을 가진 사람답게, 이번에도 마일린이 먼저 매끄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그, 꽤 크게 다치셨던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말을 하는 중에 절로 그녀의 복부에 시선이 갔다.
옷에 덮여서 보이지 않지만, 그때 분명히 푸욱, 하고 손이 뚫고 나왔었지.
마일린은 내 질문에 얼굴을 조금 붉혔다.
“아, 보셨어요? 이런, 부끄러워라. ……네. 괜찮아요. 그때 사제님이 바로 치료해주셨거든요.”
까마귀 악마를 떨어뜨린 후, 로나는 곧바로 떨어지는 마일린을 받아서 치유 기도를 올린 모양이다.
그 일격을 날리고도 아직 기운이 남았다니, 괜히‘특별사제’가 아닌 듯하다.
“……근데 다른 마녀들은 다 어딨어요? 여기 오는 중에도 하나도 못 봤는데.”
“그럴 거에요. 한두 명 빼고 다 잠들어 있거든요.”
엥? 이 시간까지?
어, 설마.
“……다 죽였어……?!”
“그럴 리가 없잖아요?! ……흠흠, 그 애들이 치렀던 ‘영혼의 그릇을 강화시키는 의식’에 악마의 힘이 섞여 있었나봐요. 나베리우스가 나타났을 때 하나같이 의식이 지배되려고 하더군요.”
그러고보니 그 놈, 까마귀랑 마녀를 부르려고 했었지.
아무도 안 왔지만.
놈은 우리에게 책임을 물었지만, 사실 마일린이 죄다 재워버려서 아무도 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럼, 당신에게 모였던 마녀들만 살아남은 건가요?”
“아니요.침입자일부는 죽었고, 일부는 도망쳤고, 나머지는 제 딸들과 같이 잠들어 있어요. 뭐, 그 마녀들도 제 딸을 자칭하고 있으니, 나중에 딸로 맞이해야죠.”
“나중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들을 다시 되돌릴 방법을 찾은 다음, 깨울 거에요.”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게 만들 거에요. 후후, 마법에 불가능이란 없답니다! 솔직히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요. 하지만, 뭐, 남아도는 게 시간인걸요. 저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하긴, 이미 영혼을 한 방향으로 만지작거릴 수 있으니 그 반대도 가능할 것이다. 언젠가.
마일린은 계속 말을 이었다.
“레볼트의 성질이 ‘반항’이라 그런지, 그 애는 제 성질대로 움직이는데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더군요. 그 애의 힘을 빌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렇게 살린 겁니까?”
“저는 그저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아이를 받아주었을 뿐이에요. 저 모습은, 그 아이가 스스로 원한 거죠.”
베르메가 만든 모든 것에 반항하고 반역하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레볼트는 스스로의 존재를 바꾸었다.
머리뼈 속의 ‘뇌’라는 것만 살린 채, 마력을 흡수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실체를 가진 영혼이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영혼이니까, 다른 영혼에도 영향을 줄 수 있죠.”
“그렇군요.”
사실 잘 모르겠지만,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나에게 마법의 재능이 없긴 없나보다.
“그러고보니 카엘 씨, 위슨이 당신을 따라가겠다고 하던데, 알고 계세요?”
“……네. 안 그래도 오늘 만나보려고요.”
“같이 가실 건가요?”
“그걸 정하려고 만나러 가는 겁니다.”
위슨이 일행에 들어오는 것엔 정말로 아무 이의 없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냉큼 수락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악마가 죽기 전에 내뱉은 말을 기억하고 있다.
놈이 정말로 나와 메린의 얼굴을 제 동포들에게 제대로 알렸다면……
……진짜 악마와 매일같이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 우리와 함께 할 때의 위험성을 알려주고, 다시 생각할 기회를 줄 의무가 있다.
마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는 아마 자기 집에 있을 거에요. 혼자 할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마일린은 뒤돌아서 방을 나가려는 나를 불러세우더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훗후, 특별히 제가 바로 보내드리죠!”
“앗. 그럼 적어도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이번에도 나는 말을 끝내지 못했고,
순식간에 무언가 챙기고 있는 위슨과 마주하게 되었다.
“……”
“……”
현자는 개뿔.
그냥 마녀라니까.
이번에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깬 건, 연륜도 품위도 없는 짐승이었다.
“깜짝 놀랐네! 야, 이 미친놈아, 왜 갑자기 튀어나오고 지랄이야?!”
“내 탓 아니야!!”
억울한 마음을 담아 힘껏 외쳤다.
위슨은 책 여러 권을 품에 안은 채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의 주위에는 커다란 가죽 배낭 하나, 커다란 나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의도는 몰라도 한창 분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 음, 안녕. 아직 여기 정리하는 거야?”
끄덕.
책 위에 있던 파랑새가 파다닥 날아와 내 머리를 콕콕 쪼더니, 다시 위슨의 어깨에 앉았다.
이 자식, 괜히 시비 거네.
“짐 좀 챙기고 있지. 넌 뭐 하러 왔냐?”
“……크흡…….”
새삼스레 다시 눈물이 북받쳐 올라왔다.
진짜 이 파멸의 파랑새랑 아직도 같이 다녀야 하다니……
위슨 너무 불쌍해!
……라고 생각하자마자 파랑새가 내 이마에 부리를 세운 채 돌진했다.
소리의 정령은 진짜 마음을 읽는 건가……!
나는 이마를 문지르며 위슨에게 말했다.
“너 보러 왔어. 얘기나 할까 해서. ……근데 지금 바빠 보이네.”
“아니, 거의 끝났어. ……야, 등신아, 위슨이 같이 하자는데.”
“뭘?”
위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미친 마녀를 묻는 장례식.”
“……”
그 숙연한 분위기에 눌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굉장히 소박한 장례식이 열렸다.
사제의 추도 기도도, 가족이나 지인의 추도사도 없다.
그냥 고인의 물건을 나무상자에 죄다 넣고 불태울 뿐이다.
위슨은 불꽃을 낸 스라소니, 플레마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다시 유리병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나무상자를 바라보며, 머리 위에 조용히 글자를 띄웠다.
[아시다시피 시신이 없거든요. 그 대신이에요.]
“……”
마녀의 몸은 성검에 의해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타버렸다.
이렇게 굳이 장례식이라는 구실로 남은 흔적까지 싹 다 없애는 건, 위슨 나름대로 마음을 정리하려는 걸까?
정령이 피운 불꽃은 특수한지, 제법 꽉꽉 차 있던 나무상자가 금방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우리는 그 재를 모아, 늑대가 미리 파 놓았다는 구덩이에 붓고 흙으로 덮었다.
“……”
위슨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흙더미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 분위기에서 말을 꺼내는 건가…….
역시, 내가 먼저 해야 되겠지……?
괜히 헛기침을 한 후, 가까스로 말을 짜냈다.
“들었어. 우리랑 같이 가겠다면서?”
“……”
그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못 들은 척한다기보단, 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이유를 듣고 싶어서 왔어.”
잠시 후, 위슨이 글자를 띄웠다.
[말 못하니까 못 미더워서 그러세요?]
“아니.”
[그럼 너무 어려서요?]
“너보다 로나가 더 어려.”
[그럼 왜 물으세요?]
그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유를 듣고 싶다니까? 이제 안전해진 곳을 떠나, 스스로 위험이 들끊는 데로 뛰어들고 싶어하는 이유를.”
……설마 위험을 즐기는 변태였던 건 아니겠지?
뒷골이 서늘해진 채,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러 이유가 있어요. 일단 저는 여기 살던 마녀를 죽였으니까, 떠나야 해요.]
“무슨 소리야? 내가 죽였잖아.”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인 건 저에요. 카엘 씨는 그냥 마지막 처리만 했을 뿐이고.]
“위슨.”
그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양보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쓸데없이 성실하긴.
[그리고…… 섬에선 목을 고칠 수 없어요.]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아니, 전설의 대현자도 있고, 온갖 기묘한 생물은 다 살고 있는 이 섬에서 못 고치면 어디서 고칠 수 있다고?
마법에 불가능은 없다며?!
위슨은 고개만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훤히 드러난 입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이거, 상처가 너무 오래 되어서 약으로는 못 고친대요. 신의 자비를 받는 게 더 빠를 거래요.]
“신……? 그럼 사제에게……?’
[네.]
그럼 로나가……
……아니, 그녀는 불가능할 거야.
전투사제에게 허락된 치유 권능은 ‘전투 중에 입는 부상’에 한한다고 그녀 자신이 말했었다.
위슨의 목은 상처를 입은 지 십 년도 넘었으니 이제 ‘흉터’나 다름없을 터.
로나에게 물어봤자, ‘치유사제가 할 수 있다’는 대답만 돌아오겠지.
[무엇보다도,]
“응?”
[……무엇보다도, 세계를 보고 싶어요.]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저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은, 그때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는 기대와 동경 말고도 약간의 두려움이 섞여 있다.
그 두려움을 설렘으로 치부하듯이,그는 소리없이 웃으며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한시도 더 못 참겠는 거 있죠.]
“……”
[죄송해요. 카엘 씨와 다른 분들은 사명 때문에 가시는 건데, 이런 시시한 이유로 따라가겠다고 해서.
그래서 사제님께는 도저히 말씀 못 드리겠더라고요. 그분, 은근히 엄격할 것 같아서…….]
아마 이게 진짜 이유겠지.
매사에 진지하고 엄중한 사람이 듣는다면, 어린애 장난인 줄 아냐며 크게 꾸중할 사사로운 이유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일행은 전부 애송이다.
철없는 소년을 막을 진지한 어른 따위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철이 덜든 애송이 어른답게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네가 우리 중에 제일 능동적이야. 우린 그냥 차출된 거나 다름없거든.”
위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요?]
“진짜야.”
메린은 나한테, 나는 율리아 공주한테 끌려왔다.
로나도 율리아 공주가 지명해서 나왔다.
우리 중에 스스로 가겠다고 나선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근데 너도 봤지? 우리는 몬스터뿐 아니라, 악마와도 싸워야 돼. 최종적으로는 드래곤과 싸워야 하고. 버틸 수 있겠어?”
[그건…….]
“세계를 보고 싶다고? 근데 꼭 우리를 따라나설 필요는 없잖아. 수도로 가서 목을 치료하고, 마법을 배운 후라도 늦지 않고.”
……그는 선택권이 있다.
나와 로나처럼 의무에 매여 있지도 않다.
메린과 달리 마을에서 사랑도 받고 있다.
몬스터가 집에 쳐들어올 걱정도 거의 없다.
동경 때문에 그 모든 걸 버리기엔, 그는 아직 어리다.
그러니 만류해야 한다.
아직 애송이여도, 나는 어른이니까.
“몇 년 기다린다고 해서 세계는 없어지지 않아.”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
완곡하게 거절당했는데도, 위슨은 화를 내거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 대신, 조용히 미소지었다.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지금처럼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열심히말린 사람은 카엘 씨뿐이에요.]
“……그러겠지.”
로나는 이미 일행으로 받아들인 거나 다름없었다.
메린은 뭐, 별 신경 안 썼겠지.
마일린은 본인 의사를 존중한다며 말리지 않았을 거다.
위슨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를 마주보고 섰다.
여전히 그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니 더 확신이 드네요. 당신과 같이 가는 게, 분명 저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 될 거에요.]
“뭐? 아니, 왜 그런 결론이 나와?!”
개고생길이라고 실컷 얘기했구만!
기가 막혀 하는 나를 향해, 위슨은 더 깊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니까요.]
“엉?”
[당신은 좋은 사람이니까, 제가 잘못된다 싶으면…… 분명그때처럼 필사적으로 막아주겠죠. 저는 당신 덕분에, 비틀리는 일 없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거에요.]
“……나보고 너까지 보라고?”
애초에 난 한 명으로도 버겁다.
소년은 킥킥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른이잖아요. 어른은 아이를 이끄는 게 일이라고요. 그리고 당신 옆에는 강력한 사제님도 계시고, 무시무시한 검사님도 계시잖아요? 이보다 더 든든하고 안전한 길동무가 어딨어요?]
“……나 참.”
반박의 여지가 전혀 없는 완벽한 논리였다.
기껏 준비한 논리가 무참히 깨져버린 이상, 나는 감성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아도 난 모른다.”
[맘에도 없는 말씀 하시긴.]
오로지 꿈을 위해 스스로 이 고생길에 오르는 어리석은 소년에게, 나는 경의의 마음을 담아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법사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용사님.]
내 손을 맞잡으며, 소년은 환히 웃었다.
그늘 하나 없이 맑게 개인 듯한, 상쾌한 웃음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