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76화 : 자유도시 말리스에 어서오세요! (1)
* * *
그 후, 이틀 동안은 별 특이한 일 없이 평범하게 흘러갔다.
몬스터를 잡은 도적들에게서 피해보상금을 얻거나,
또는 도적들을 잡은 몬스터를 베어버리거나,
아니면 그냥 지나가던 몬스터를 만나서 죽인다.
그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여관에 묵고, 소문을 듣는다.
그리고 저녁을 먹은 후 메린에게 쳐맞, 아니, 녀석과 대련을 하고 뻗은 후,
또 새벽에 가볍게 쳐맞고, 아니, 대련을 한 후 다시 길을 떠난다.
파랑새의 그 재수없는 예언도 빗나가 귀쟁, 아니, 웃긴 엘프인 블루벨도 튀어나오지 않는, 정말정말 평범하고 처량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 처량한 하루를 마무리하러 여관에 온 참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미 날이 완전히 저물어서 대련은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흑흑, 오늘은 편히 잘 수 있겠어.
“……그건 그렇고, 진짜 상인밖에 없네.”
말리스에 가까워질수록 들르는 마을마다 행상인, 상단 등, 거북이처럼 봇짐을 가득 진 상인들이 점점 더 많이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상인들이 많이 오가는 도시라곤 해도 너무 많은 거 아닌가?
“그야 손님, 말리스는 장사치들의 수도이니까요. 그래도 우리 가게는 안쪽에 있어서 좀 적은 편이에요. 마을 들어오시면서 못 보셨어요?”
“아니, 보긴 했죠…… 근데 귀한 분들도 많이 가나 봐요?”
“그야 손님, 말리스니까요! 온갖 보물과 재물이 모여드는 곳 아닙니까!뭐든 살 수 있고 뭐든 팔 수 있는 곳이라잖아요.”
뭐든……
아마 그 ‘뭐든’에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겠지.
바로 이 여관 앞에도, 허름한 차림의 남녀들이 짐마차에 타고 있으니까.
어둡게 그늘진 얼굴들.
원망도 한탄도 없는, 그냥 체념한 얼굴들.
……우리 마을에서도 몇 번, 그런 얼굴로 마차를 타고 가는 걸 본 적이 있다.
볼 때마다 안타깝긴 하지만, 그냥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
적당히 나이 먹은 사람들이 팔려가는 건, 대부분‘제대로 된 거래’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와봤자 내가 다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이 왕국은 인신매매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니 저들은 엄밀히 따지면 팔려가는 게 아니다.
어디 고용되어 가는 거지.
“……”
그 밀수꾼들의 아지트에 있던 애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겁에 잔뜩 질린 채로 울던 얼굴들.
젤리 앞에서 활짝 펴졌던 얼굴들.
숲에서 다시 그 아지트로 돌아가는 동안,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푹 빠졌던 그 똘망똘망한 얼굴들.
그 애들은 저들과는 다르다.
스스로의 불행을 받아들이고 체념한 채 집을 떠난 게 아니니까.
밀수꾼들에게 살해당한 그‘윈플’ 마을의 마지막 생존자처럼, 그 애들을 간절히 찾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러니 반드시 찾아야 한다.
아니면, 꼬박꼬박 애들을 사간 새끼들을 찾아내어 정보를 짜내야 한다.
떠나가는 짐마차를 바라보며 굳게 다짐하는 내 귀에, 여관 주인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음, 1인실은 이제 없네요. 4인실은 있는데 그걸로 하실래요?”
“어우, 당연하죠!”
“허허, 그럼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혹시 준비가 되어 있는지 보고 오죠.”
주인장이 잰걸음으로 여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휴. 다행이다.
하마터면 노숙할 뻔했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는데, 바깥에서 밤을 보내는 건 좀 많이 위험하지.
특히 돈주머니가.
주인장이 돌아오길 기다리는데, 내 뒤에서 줄 서고 있는 다른 나그네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들었어요? 금발머리의 용사님이 요 앞을 지나갔었대요!”
“엥? 갈색머리 남자 아니었어? 수도에서 봤을 땐 갈색머리였던 거 같은데?”
“아, 그 꽃장식한 검을 가진 사람? 그래, 갈색머리야, 갈색머리. 어제 바로 지나갔다고 하던데?”
“갈색이 아니라 검정색이유. 내가 어제 봤슈. 흑발 긴 머리를 쫙~ 늘어뜨린 빵빵~한 누님이었다니께!”
“뭐여? 그럼 용사가 여자여?! 참 희한허네, 이틀 전에는 금발머리 머시마라 혔는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어제까지만 해도 금발에 엄청나게 잘생긴 남자라고 들었는데 말이죠.
애초에 용사는 저이고요.
근데 갑자기 갈색머리가 되고 또 검은 머리가 되더니, 이젠 아예 성별이 바뀌어선 몸매 좋은 누님이 되었다.
마티아스가 검집 말고 딴 건 신경 쓰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성별까지 휙휙 바뀌는 건 아니지 않아?
제길, 그 사람 성별이라도 물어볼걸.
그래도 말리스에 들어갔다고 했으니, 어쩌면 그 안에서 만날지도 모르겠네.
“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방 준비는 다 되어 있으니 지금이라도 들어가셔도 돼요. 여기, 열쇠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좀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던 다른 녀석들을 불러, 배정받은 방으로 향했다.
말만 4인실이지, 2층 침대 두 개만으로 꽉 찰 정도로 작은 방이었다.
그러나 로나는 실망하긴커녕, 오히려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와, 신전에 있었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래? 단체 숙식이었어?”
“네. 수도사들은 한 방에 여덟 명씩, 정식 사제들은 한 방에 두 명이나 네 명씩 들어가거든요. 정말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혼자 쿡쿡 웃는 걸 보니, 그때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진짜 사람 많네요. 말리스? 거기는 여기보다 더 하겠죠?”
“아마 그렇겠지? 하……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주머니도 조심해야 되고.”
로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허공에서 무언가 낚아채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소매치기. 사람이 빽빽~하게 모여드는 곳엔, 손버릇 나쁜 사람도 꼭 끼거든.”
인구가 적은 우리 마을에서도 매주 예배 때마다 주머니가 털리는 사람이 가끔 나올 정도이다.
분명 말리스 같은 대도시에선 더 심하겠지.
톡톡, 위슨이 내 팔을 두드렸다.
[이거 써보실래요?]
오, 간만에 보는 위슨의 글자마법이다.
그러고보니 목소리 조정해야 한다면서 어제부터 파랑새가 안 나왔었지?
어쩐지 평화롭더라.
위슨이 준 건, 검정 잉크로 무슨 문양이 그려져 있는 린넨 천 조각이었다.
“이게 뭐야?”
[도난 방지 부적이요. 거기 가운데에 형 이름 쓰고, 돈주머니에 넣으시면 돼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
지난주까지는 ‘카엘 씨’라고 하던 그가, 어느새 나를 형이라 부르고 있었다.
별 상관없으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형 말고 그 돈주머니에 손대는 놈에게 저주 내릴 수 있어요.]
“저주? 뭔 저주? 얼마나 심각한 저주?”
[그건 형이 얼마나 센 원한을 가지냐에 따라 다를걸요. 작게는 새똥을 맞거나…… 아, 엄청 원한이 깊으면 그 자리에서 피 토하고 죽을지도 모르겠네요.]
헉. 장난 아니잖아!
물론 남의 돈주머니에 손을 대는 놈은 죽어도 마땅하……진 않지. 음.
……근데 그 상황이 되면 뒤져버리라고 욕할 것 같다.
내 돈주머니엔 우리 일행 여비가 다 들어있으니까.
그래도 저주 내리는 건 좀…….
“으음~ 이거 마녀의 마법이지? 아무리 돈이 귀하다 해도 악마의 힘을 빌리고 싶진 않은데…….”
[걱정 마세요. 그거 수장님이 준 책에 있던 거거든요.]
“……”
대현자님도 소매치기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뭐, 그냥 ‘부적’이니까 진짜로 막 사람이 죽고 그러진 않겠지.
고맙게 받아서 내 이름을 쓰고, 돈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다른 분들은요? 더 있긴 한데.]
“난 됐어. 귀중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푼돈밖에 없으니까.”
“저도 괜찮아요! 돈 되는 물건은 아예 없으니까요. 그리고 사제의 물건을 훔치진 않을 테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부적을 다시 품속에 넣었다.
“그나저나 이제 위슨 씨도 부적 만들 수 있나 보네요! 다른 것도 있어요?”
[응. 볼래?]
“오, 진짜요?! 와~”
……그러고보니 저 둘, 참 잘 노네.
섬에서부터 곧잘 어울리긴 했지만, 지금은 아예 거의 단짝이나 다름없다.
위슨 녀석도 은근히 거리두는 성격인 것 같은데 말야.
뭐든지 잘 부수는 전투사제님은, 사람의 마음의 방벽도 잘 부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뜨려야 하는 게 조금 미안했다.
“이따가 해, 이따가. 저녁부터 먹고.”
“아, 네~ 가요, 위슨 씨!”
두 소년소녀가 쪼르르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동생들이 있으면 이렇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 진짜 내 동생이었다면 철퇴부터 압수했을 테지만.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나고 점심 즈음 되어, 드디어 목표로 했던 말리스에 도착했는데……
“예에~ 네 분 합쳐서 금화 여덟 닢 되겠습니다~”
“아니, 돈 받아요?!”
“그럼요~”
창구에 앉은 아가씨가 방실 웃는 얼굴로, 무척 당연한 듯이 말했다.
내가 열을 내건, 어처구니없어 하건, 전~혀 무너지지 않는 무적의 미소이다.
현재 상황은 이렇다.
도시 성문에 가까이 갔더니, 위병들이 ‘입장권’이라는 게 필요하다며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래서 성문 가까이에 ‘입장권 발급소’가 있길래 가보니,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또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의 시간이 지나 겨우 우리 차례가 됐더니, 이번에는 이렇게 돈을 요구해 온 것이다!
그것도 한 명당 금화 두 닢씩이나!
‘입장권’이라는 게 무슨 ‘출입 허가증’ 같은 건 줄 알았는데 돈 받고 파는 거였다니, 세상에.
“돈 돼?”
“될걸.”
저 값을 낼 수 있는 건 확실하다.
근데 들어가면 끝인 것도 아니잖아.
조사를 해야 되니까 며칠 묵어야 되는데…….
젠장, 죄다 은화랑 동화인데 이걸 언제 다 세?!
내가 돈주머니를 들여다보며 인상을 쓰고 있자, 발급소 직원이 생긋생긋 웃으며 말했다.
“손님~ 동전 수량 확인하시려면 이걸 쓰세요~”
직원이 가리킨 건 작은 금고처럼 생긴 상자였다.
‘동전 계량기’라는 글자 밑에 숫자 0 이 세 개나 표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깔때기처럼 생긴 게 붙어 있었는데, 깔때기 밑에는 작은 쟁반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동전 계량기?”
처음 보는 건데.
이것도 기계인가?
“네~ 동전 개수를 세어주는 기계에요~ 금화, 은화, 동화 무엇이든한 종류만깔때기에 넣으시면 숫자를 세어준답니다. 요즈음 가게 주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물건이에요~”
“오? 어디 보자…….”
시험삼아 주머니에서 동화 하나를 꺼내어 깔때기에 넣었다.
짤랑, 하는 소리와 함께 동전이 깔때기 밑의 쟁반으로 떨어지면서 숫자가 0에서 1로 움직였다.
“우와.”
“한꺼번에 너무 많이 넣으시면 계수가 안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아, 네.”
옆으로 한 걸음 움직여 뒷사람에게 차례를 양보한 후, 동전 계량기를 써서 동전을 세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온 결과는……
“금화 10개, 은화 567개에 동화 8개? 뭔 은화가 그렇게 많냐? 그보다 안 무겁냐?”
“방금 전에 도적이랑 상인 만났잖아. 으, 어쩐지 무겁다 했어.”
말리스 코앞이라 그런지 도적 무리도 많았고, 그에 시달리는 상인들도 같이 만났다.
덕분에 이쪽으로 오면서 점점 치솟아 오르는 숙박비와 식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돈이 넉넉한 것이었다!
……근데 엄연히 정당한 피해보상금을 받은 건데, 왠지 돈을 번 것 같아서 좀 그렇네.
그래도 계속 받을 거지만.
“감사합니다~”
직원은 은화 500닢과 금화 세 닢을 가져간 후, 나무메달 네 개를 건넸다.
“이 메달을 가지고 계신 한, 언제든 자유롭게 오가실 수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오?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다든가 그런 건 아닌가보네요.”
“네~ 아무 제한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음, 다른 마을은 돈 안 내도 아무 제한없이 오갈 수 있는데 말이지…….
한 번만 돈을 뜯는 건 최소한의 양심인가?
아무튼 입장권도 손에 넣었으니,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군.
하아……
제발 큰 돈 들인 보람이 있어야 되는데…….
“도둑이 저 안에 들어갔다니까요! 제발 들여보내주세요!”
“아, 글쎄, 그건 그쪽 사정이고. 우린 입장권 없는 사람 못 들인다니까 그러네!”
발급소를 나오자마자 소란스러운 분위기와 맞닥뜨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도시 입구에서 위병이 어떤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후드를 쓰고 있어서 잘 안 보이는데, 위병만큼 키가 큰 사람이다.
나보다도 클 거 같은데?
“아, 그러지 말고 그냥 저기 발급소에서 사서 오셔! 그럼 싫어도 들여보내줄 테니까!”
“그 도둑이 몽땅 털어가서 돈이 없어요! 제발 협조 좀 해주세요! 보상은 나중에 꼭 섭섭하지 않게 해드릴게요!”
들리는 말만 들어보면, 이 사람의 물건을 훔친 도둑이 저 안에 들어간 모양이다.
가엾기도 하지.
“큭…… 그렇다면 어쩔 수 없나……!”
앗. 키 큰 남자가 품 속에 손을 넣었다!
설마 여기서 난동을 피울 셈인가?!
위병들의 인상이 험악해지며 창을 꽉 쥐는 게 보였다.
안 돼!
“아~ 아아아! 잠깐잠깐잠깐,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죠! 실례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올게요!”
“으악?! 당신 누구에요?!”
재빨리 그 남자의 팔을 붙잡고 쭈우우욱 뒤로 끌며 한산한 데까지 뛰어갔다.
남자는 허를 찔려서 그런지 키 큰 값도 제대로 못하고 허둥대며 끌려왔다.
주변에 보는 눈이 없는 걸 확인한 후, 나는 남자의 팔을 놓았다.
“아니, 갑자기 뭡니까! 저 아세요?!”
“당신 미쳤어요?! 뭔 사정인지 몰라도 위병 앞에서 그딴 짓을 하다니 죽고 싶어요?!”
“죽다니……? ……당신, 설마…….”
아니, 뭘 그렇게 놀라면서 경계를 한대?
엄청 대놓고 칼이나 연막주머니 같은 거 꺼내려 했으면서.
나는 한숨을 쉬며, 돈주머니에서 금화 두 닢을 꺼냈다.
그리고 그 즉시 메린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지더니, 금화를 건네려던 내 손을 부서져라 꽉 쥐었다.
“야, 모르는 놈한테 뭔 금화 두 닢씩이나 줘?! 네가 뭐 기부천사냐?!”
“야야야야, 아파아파파파파! 부서져! 진짜 부서진다고오오!!”
내 비명에 메린이 손을 놓았다.
으깨지기 직전까지 몰린 손이 파들파들 떨며 욱신거렸다.
존나 아파…… 흑…….
그러면서도 꿋꿋이 남자에게 금화를 건넸다.
내가 이제 와서 폭력에 굴할 것 같냐!
험악한 눈길이 관자놀이를 마구 찔러댔지만 무시해주었다.
“그걸로 입장권 사서 들어가쇼…….”
“예?! 어, 나 누구인지 모르시잖아요? 그런데 왜…….”
“댁이 입구에서 깽판치면 우리까지 들어가기 힘들어지니까……. 위병들한테 괜히 깝치지 마요…….”
어차피 돈은 넉넉하다.
뭣하면 말리스의 신전에 들러서 지원금을 좀 꺼내면 되고.
근데……근데 이걸 좀 나눴다고 이런 처우를 받네……
흑…… 내 손…….
“뭐, 임마. 누가 호구 짓하래?”
“이게 왜 호구 짓이야, 방금 말했잖아! 이 아저씨가 저 앞에서 깽판치면 쓸데없이 고생할 수도 있다니까! 이건 엄연한 위험예방책이라고!”
아버지가 그랬었다.
한 번은 수도의 성문 앞에서, 어떤 마을 대표가 자신의 동행자들도 신분보증 혜택을 적용해달라고 억지를 부려서 소란이 났었다.
물론 그 대표는 위병소로 끌려갔지만, 그 사람에게 시달린 위병들의 기분이 엄청나게 나빠지고 말았다.
그 탓에 아버지도 괜히 시비를 걸리고, 안 해도 되는 소지품 검사를 하는 등 굉장히 귀찮았다고 한다.
그렇다.
귀족이 아닌 이상, 성문에서는 위병들이 갑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 남자 때문에 우리까지 괜히 시비가 걸려서 귀찮아질 바에야 그냥 금화 두 닢 더 내고 말지!
어차피 돈도 많은데!
“아, 그래? 난 또, 네가 저 남자가 불쌍해서 적선하는 줄 알았지.”
“얌마, 아무리 내가 착해도 금화를 주진 않는다고.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알아서 들어가세요. 우린 가볼 테니까.”
파르르 떨리는 손을 앞으로 내민 채,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저, 잠시만요!”
“……?”
“나중에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은혜?
은혜라…….
“됐어요. 은혜는 무슨…….”
“아니, 그래도 저 때문에 손도 망가지셨는데……!”
“안 망가졌거든요?! 불길한 소리하지 마세요!
……진짜 됐어요. 그냥 길 가다 돈 주웠다고 생각하고 갈길 가세요.”
어차피 더 만날 일도 없을 텐데 은혜 갚기는 무슨.
고작 그런 거 때문에 함부로 이름을 알려줄 순 없지.
또 무슨 소리가 나오기 전에,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버렸다.
입구에 선 위병에게 나무메달 네 개를 보여주었다.
“음, 확인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메달을 확인한 위병이 문 바로 근처에 서 있는 위병에게 손짓하자, 그가 우리를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
캄캄한 성문을 지나, 밝은 곳으로 나오자마자……
“우와!”
로나가 크게 탄성을 질렀다.
나 역시 저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건물들인데,모든 건물이 정갈하게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지붕도 붉은 벽돌기와로 되어 있고!
수도도 벽돌집은 거의 볼까 말까 한 정도였건만……!
게다가 길은 또 어떤가.
입구 문 앞부터 시작해서 저 멀리 보이는 골목길까지, 모든 길이 돌을 반듯하게 깎아서 촘촘히 박아 놓은 포장길이다.
수도에선 마차가 다니는 큰 길만 돌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그리고 저 멀리, 아마 이 도시에 중앙일 듯한 곳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시계탑이 있었다.
마침 정각이 되었는지, 대앵, 대앵, 하는 묵직한 종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그야말로 ‘도시’라는 단어가 바로 연상되는 광경이다.
……이걸 감탄하지 않고 어떻게 배겨?
“우와아, 굉장하네요!”
“어. 진짜 도시다, 도시.”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메린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녀석은 주변 경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여기 서 있을 거냐? 놀러 온 것도 아닌데.”
“아, 그렇지.”
경관이 너무 굉장해서 깜빡했다.
이곳으로 끌려온 애들을 찾아야 되잖아.
그렇다면 역시, 정보를 모으는 게 우선이지!
“일단은 여관을 찾아볼까? 여기서 사람 가장 많은 곳으로.”
세 사람이 나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각또각 경쾌하게 울리는 돌포장길을 걸으며, 우리는 상인들의 수도, 말리스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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