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89화 : 실타래를 뭉친 건 누구? (3)
* * *
저택의 문 앞, 우리는 위병소로 향하는 피트를 배웅했다.
“여기, 위임서에요…….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가셔요…….”
“……아, 예.”
“그리고 이거…… 과자랑 사과파이에요…… 가서 드셔요…….”
“……고, 고마워요.”
장면 자체는 굉장히 훈훈하다.
일하러 나가는 남편을 살뜰히 챙기는 아내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닌가.
그러나 그 모습을 차마 흐뭇하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위풍당당하고 여유 넘치던 그 옐리카 아가씨가, 지금은 완전 병든 닭처럼 초췌한 몰골로 골골대고 있지 않은가!
……뭐, 그럴 만하지.
사모하는 낭군님 앞에서 광대버섯 추출약을 마시는 취미가 있다는 게 까발려졌는데 오죽하겠어?
본인은 한사코 아니라며 부정하지만, 부끄러운 취미를 가진 사람은 다들 그렇게 말하는 법.
아아, 애통한지고…….
“……그럼, 조심히……”
“저, 저기, 옐리카.”
좀비처럼 물러나려는 그녀를 피트가 불러세웠다.
아, 설마 내가 했던 것처럼 옐리카를 위하는 듯한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우와, 그럼 저 귀족 아가씨, 그대로 혀 깨물고 죽을 거 같은데!
잠시 시선을 떨군 채 가만히 서 있던 피트의 입이 천천히 열리는 게 보였다.
과연……!
“그……”
어째 내가 더 긴장이 되는데?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기운 내세요. 일단 다녀와서, 제가 카엘 씨의 오해를 풀어드릴 테니까…….”
“네……? 그럼 오라버니는 제 말을 믿으시는 건가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옐리카를 향해, 피트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생쑥을 씹은 게 아닐까 싶은 씁쓸함이 잔뜩 배겨 있긴 하지만, 아무튼 미소는 미소였다.
“물론이죠.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거면 몰라도, 당신 자신은 그런 걸 즐길 사람이 아니잖아요? 제가 잘 알고 말고요. 그러니,”
“아, 아아……! 저 너무 기뻐요! 정말 고마워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역시 최고에요!!”
옐리카는 말허리를 자르며, 그의 품에 뛰어들어 꽉 껴안았다.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억지로 떼어내려 하지 않는 걸 보면, 그 역시 그녀가 마냥 거북한 건 아닌 모양이다.
……그보다 저 아가씨, ‘다른 사람에게 약 먹이는 여자’로 보이고 있는 건 괜찮은 건가?
혹시 뒷부분은 못 들었나?
“빨리 소녀와 결혼해주세요, 서방님!”
“크흐흐흠!! ……옐리카, 그런 농담은 그만하시라니까요!”
“농담 아닌데요!!”
우와,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가는 듯한 저 대담함!
이젠 민망함을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피트가 자신을 믿어주는 게 어지간히 기쁜지, 옐리카는 그를 꽉 껴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얼굴을 부비적대고 있었다.
“이야~ 저 두 사람, 정말 보기 좋네요~ 그렇지 않나요, 카엘 님?”
“훈훈하긴 한데…… 한쪽이 애매하지 않냐?”
“그렇긴 하지만, 피트 님도 싫어하시는 것 같진 않은걸요?
……어라?카엘 님도 그런 게 보이세요?”
로나는 굉장히 의외라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 녀석, 날 뭘로 보고 있는 거야?
“눈앞에서 대놓고 티 내고 있잖아. 저걸 보고도 별 생각 안 드는 건 메린 녀석밖에 없을걸.”
실제로 우리 중에 저 아가씨의 애교를 보면서 표정에 아무 변화가 없는 건 메린밖에 없다.
지금도 지루한 듯이 하품하고 있고.
“……모르는 것도 아닌데 그럼 대체 왜…… 자각 문제인가요……하아아…….”
“???”
갑자기 한숨을 쉬네.
진짜 늦은 사춘기가 왔나?
피트가 출발한 건 그로부터 십 분이나 지난 뒤였다.
그가 탄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지켜본 후, 옐리카는 통통 튀는 듯한 발걸음으로 돌아섰다.
“후후~ 우후후후~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예. 좋은 날이네요.”
“그렇죠, 그렇죠?! 후후훗~ 위슨 씨는 얼마나 걸리실까 모르겠네요~ 구경 갈까~?”
왈츠를 추듯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그녀에게, 집사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위슨 님께선 한 시간 정도 걸리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가씨, 처리하실 일이……”
“그래, 그래~ 일해야지, 일! 후후후~ 그럼 이따 봬요, 여러분! 아, 필요하신 게 있으면 저택 사용인 누구에게든 말씀하시면 되니까 사양 마시고요!”
병든 닭이었던 아가씨는 고삐 풀린 망아지로 완전히 부활해선, 우후후 웃으며 계단을 폴짝폴짝 뛰어올라갔다.
그 모습을 넋이 나간 얼굴로 지켜보던 집사는, 이내 우리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 예…… 고, 고생하십시오.”
그의 얼굴에 배긴 초연함에, 나도 모르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위층에서 메아리치던 웃음소리도 잠잠해지니, 로비는 완전히 조용해졌다.
그 고요함이 어색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다.
“시간이 남았군. 뭐하지?”
“뭐하긴? 대련해야지.”
“네?”
으악.
메린 녀석이 내 말을 곧바로 받아버렸다!
“아니, 남의 집에서 뭔 대련,”
“호위병 있으니까 훈련장 있겠지. 아, 그래, 잘됐네. 너 이것저것 배울 수 있겠다.”
호위병에 훈련장?!
안 돼, 죽을 거야!
달아날 새도 없이, 녀석에게 팔을 붙잡혀서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을 빡 주며 버티려 했지만당연히아무 소용없었다.
하지만 난 끝까지 저항할 거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어!
녀석이 아무 장애없이 척척 걸어가고 있는 게 엄청나게 절망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난 포기 안 해!
“놔놔놔놔, 이거 놔, 임마! 아니, 한 시간 밖에 없는데 배우긴 뭘 배우,”
“걱정 마, 일단 배운 다음엔 내가 다져줄게.”
“웃기시네, 날 다지다 못해 조져버리겠지! 로나, 살려줘! 이 녀석이 날 죽이려고 해!!”
말은 꺼냈지만 사실 저쪽도 만만찮게 시커먼 절망뿐이다.
그래도 실낱 같은 희망이,
“여기 훈련장 어디에요~?”
“안내해드릴게요~”
없었습니다.
되게 밝은 얼굴로 하녀를 따라가고 있었거든요.
역시 혈기 넘치는 전투사제.
어줍잖은 자비 따위는 베풀지 않는다는 건가.
그보다 쉬라고, 이것들아!
“쉬러 가는 거잖아.”
“그럼요, 그럼요! 가벼운 운동만큼 좋은 기분전환은 없죠!”
“돌겠네, 진짜!!”
……끝장이구나.
다리가 꺾이며 무릎이 바닥에 닿았지만, 녀석이 내 팔을 잡고 끌고가는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좀 눈치껏 줄여주면 덧나나?
그대로 정문 위쪽에 난 창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날씨는 끝내주게 화창하다.
백색구름 거니는 창천에 창명한 햇살이 내리쬐니, 어스름을 품은 이슬이 사그라지누나…….
“……훗, 정말 지랄 맞은 인생이었어…….”
“지랄하고 있네, 진짜.”
꿋꿋하게 감상에 젖었다.
훈련장으로 우리를 데리러 온 하녀를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
마침 위슨이 물약이 든 병을 살살 흔들고 있는데, 병 속에 무언가 침전물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딱 봐도먹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완성됐으니까 이제 먹이면 되는데………그새 누구 쳐들어왔냐?”
“아니요?”
“근데 쟤는 또 왜 뒤져가?”
저 녀석이 말하는 ‘쟤’는 당연히 나다.
근데 허 참, 부축 좀 받고 있다고 죽어가고 있다니.
과장이 너무 심하네!
“뒤지긴, 허어, 누가, 헉…… 허억…… 뒤져, 헉, 간다고……!”
“……숨 끊기기 직전이구만.”
큭, 젠장.
이게 다 메린 녀석 때문이다!
대련으로 끝냈으면 이렇게 안 뻗었을 텐데, 괜히 검술 동작 배워야 한다면서 호위대장에게 부탁을 해버려서 그만……!
“난 분명히 적당히 하랬다. 지가 죽자사자 덤벼 놓고…….”
“그럼 거기서 꼴사납게 그냥 물러가냐?! 콜록콜록!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럴 순 없어!”
“훈련에 목숨 걸지 마, 등신아!”
그래도 위슨이 주변을 정리하는 중에 호흡이 안정되면서, 내 두 다리로 다시 설 수 있었다.
전엔 거의 하루종일 뻗었었는데, 진짜 장족의 발전 아니냐.
나도 좀 성장한 걸까?
기지개를 켜며 한숨을 쉬는 나를 보며, 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달 만에 이 정도라……. 진작에 이렇게 굴렸어야 되나?”
“……”
일순, 여기까지 오면서 겪었던 일들이 착착착, 정지된 그림이 되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 굴렀지. 진짜 더럽게 많이 굴렀어.
오크에 고블린에 늑대에 거대 구렁이에 골렘에 마녀에 헬하운드에 까마귀 악마에 오우거에 바르그에……
이 도시 들어오기 직전엔 뭐였지? 흡혈거미?
아니 왜 도시 근처에서 그딴 게 튀어나와, 미쳤나?!
이러니 도적 뒤에 ‘따위’가 붙는 거지, 망할!
게다가 그 뿐인가?
야영이 아닌 이상 매일 아침마다, 요즘은 한 세트 더 늘어서 매일 아침저녁마다 더럽게 무서운 검사님과 목검을 맞대고 얻어터지고 있다.
수상한 물약을 들이마신다든가, 몬스터 고기로 만든 요리만 주구장창 먹는 건 덤이고.
조만간 분명 독 오를 거야.
하, 진짜…….
새삼 돌아보니 되게 살 떨리는 여행이잖아, 이거…….
근데 더 무서운 건,이게 지금 여정의 반도 안 됐다는 거다!
살려줘, 씨발, 근데 나 아니면 못하는 여행이잖아, 빌어처먹을!!
“크흑…….”
“엥? 울 정도로 감격스럽냐? 어어, 뭐, 네가 전엔 늙고 병든 닭이나 다름없긴 했지?”
“그딴 거 아니거든……?”
하…… 이제 와서 한탄한들 무엇할꼬.
이게 내 팔자인 것을.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검사님이 있으니 죽진 않겠지.
터덜터덜, 위슨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연락을 받고 온 옐리카가 계단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을 보고 오니 하늘을 뚫을 것 같던 기분도 좀 가라앉았는지, 옐리카는 평소와 같이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자아, 갈까요?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화 시간이네요!”
지하로 갈 줄 알았는데, 그녀는 오히려 계단을 올라갔다.
감옥은 너무 음침하고 위험하니 방에 옮겼다면서, 그녀는 3층의 어느 방 문을 시원하게 열어젖혔다.
손을 뻗어 대신 문을 열려던 집사가 작게 한숨을 쉬며 그녀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이어서 들어간 방 안은 무척 경악스러웠다.
“짜잔~ 반나절 동안 지하에서 숙성된 ‘여왕장미’님이시랍니다!”
“……!”
두 손은 의자 팔걸이에, 두 발은 의자 다리에 꽁꽁 묶여 있고, 눈과 입조차도 천으로 봉인되어 있다.
고개를 숙이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목은 의자 등받이에 고정되어 있다.
헝클어진 머리에 지저분하게 헤진 드레스.
잿더미 속을 헤엄치기라도 한 것처럼 먼지에 뒤덮인 온 몸.
누가 그녀를 알아볼 수 있으랴?
“어때요? 약, 굉장히 잘 받겠죠? 후후후후!!”
“……”
……이 늙고 추레한 여자가, ‘토끼풀 저택’의 안주인이었던‘여왕장미’ 베아트리스라는 것을.
여왕장미는 시체처럼 미동도 없었다.
아니, 움직이고 싶어도 못 움직이는 건가?
집사가 얼굴 앞에 대고 손가락을 퉁기자, 몸이 움찔거리며 놀라는 게 보였다.
일단은 살아 있군.
위슨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정신이 약할수록 약이 잘 드니까, 적게 먹이고 싶으면 막 몰아붙여.”
“흠.”
일반인에게 쓴 적이 없는 약이니, 가급적 적은 양만 쓰는 게 좋겠지.
아예 안 쓰는 게 제일 좋고.
“……근데 왜 나한테 말하냐?”
“네가 심문할 거 아니야?”
“아니, 저 아가씨가 하겠지.”
지금도 기대 만방한 얼굴로 여왕장미가 앉은 의자 주변을 빙빙 돌고 있으니까.
둘이 원수지간이었나?
“그래? 네가 하는 게 더 나을 텐데.”
위슨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오, 이 녀석, 날 믿는 건가? 근데 뭔 근거로……?
“미친놈이니까.”
“……”
이딴 믿음 필요 없어!
그리고 마침내 관람을 마친 옐리카가, 집사에게 고갯짓했다.
“입 풀어줘.”
집사가 입을 봉한 천을 풀자, 여왕장미가 무언가를 한가득 토해냈다.
……천 뭉텅이?
세상에, 아예 입 안까지 다 틀어막고 있던 거야?!
“우와…….”
어쩐지 신음소리도 못 낸다 했어!
오, 주여, 여기 당신의 종보다 훨씬 무서운 짓을 하는 자가 있습니다!
살려주세요!
“지하에서 편히 쉬셨나요, 여왕장미님? 질문에 답할 준비되셨죠?”
퉷.
침조차 죄다 말라붙었는지, 옐리카의 얼굴에는 물방울 하나 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확실히 침을 맞았다.
비죽이던 옐리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은 게 그 증거다.
“아직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모르나 봐? 아, 돈이 있어야 되나? 동전 몇 푼에 다리 벌리는 게 네 년 일이니까.그 입이 다리만큼 헐거워지려면 얼마 줘야 돼?”
“……젖도 못 뗀 년이 옹알이는 잘하네. 애비한테 아양 떨어서 받은 용돈으로 장사하는 년이, 뭐 잘났다고 내려다보시나 몰라? 아가씨?”
“어머나, 용돈이라니. 남자 등골 빨아먹고 산 티를 내네. 여왕님, 그건 용돈이 아니라 내 몫의 유산을 미리 받은 거랍니다. 잘 모르시나봐요?”
무서워……!
쌍욕 하나 없는데 뭔가 무서워!
이 대화, 꼭 듣고 있어야 되나?!
두 여자가 나누는 무시무시한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유산~? 몸값이겠지! 사내한테 팔려갈 때 지불하는 몸값! 후후후, 너나 나나 별반 다를 거 없어~ 그런 주제에 맨날 내려다보고 말야. 정말 맘에 안 들어!”
“어머, 기분 나빴어요? 미안해요. 근데 난 그냥 마주보고 싶은데, 그쪽이 길바닥을 구르고 있는 걸 어쩌겠어요?”
앗.
빠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를 갈던 여왕장미는 이내, 별안간 빙긋 웃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고보니 우리집에 왔던 금발 사내, 아가씨 애인이지? 지난번에 아가씨가 아주 그냥 꼬리를 치던데.”
“……!”
아, 피트 이야기인가?
“후후, 푹 빠진 것 같던데, 뭘 받았어? 이 저택? 아니면 그 사내의 안주인 자리를 받기로 했나? 처녀를 팔아서 말야!”
“그 더러운 입으로 감히……!!”
옐리카는 곧바로 눈을 뒤집히며 손을 쳐들었다.
그 손바닥이 베아트리스의 얼굴에 닿기 전에, 가까스로 붙잡을 수 있었다.
“이거 놓으세요!! 이 늙은 창녀 년이 오라버니를 모욕했다고요!!”
“때린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요! 자자자, 일단 진정하시고…….”
“절대 못 참아!! 저 년의 혓바닥을 뽑아버리겠어!!”
집사와 함께 옐리카의 팔 하나씩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물러나면서도 발차기를 날리는 건, 그녀답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말싸움은 아가씨의 패배로 끝났다.
“각오해, 빌어먹을 년아!! 이 일이 끝나자마자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게 만들어주겠어!!”
“아, 좀 진정하시라니까요! 메린, 교대해줘, 교대!”
“오냐.”
메린이 붙잡은 뒤에야 옐리카는 겨우 얌전히 있을 수 있었다.
……계속 발버둥치긴 했지만.
그래도 계속 욕을 퍼붓는 입까지 막진 못했는데,
갑자기 집사가 품속에서 붕대를 꺼내어 제 주인의 입을 돌돌 말아버렸다!
“……저기, 괜찮은 거에요?”
“괜찮습니다. 냉정을 잃거든 이리 하라고 아가씨께서 미리 명하셨습니다.”
“아, 예…….”
정말 대단한 주종이었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나는 고개를 저으며,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여왕장미에게 말을 걸었다.
“내 목소리도 기억해요?”
“넌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일일이 기억하니?”
아, 그러셔.
“그나저나 지하에 반나절이나 절여져 있던 것 치고는 팔팔하시네. 익숙한 곳이었어요?”
“이번엔 네가 덤비려고? 아~아, 젖비린내 나서 죽겠네, 정말!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 아윽?!”
여왕장미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의자째로 넘어져버렸다.
왜냐? 내가 발로 찼으니까.
“어이쿠.”
집사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으켜준 후, 내가 걷어찬 부분을 툭툭 털어주었다.
내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며 덜덜 떠는 게 조금 안쓰러웠다.
이런. 어지간히 놀랐나 봐.
나도 참, 갑자기 욱해가지고……
그러게 이 여자는 괜히 왜 엄마 얘길 꺼내서……!
“미안. 엄마 돌아가신 지 아직 두 해밖에 안 됐거든. 그러니 부탁인데, 그딴 식으로 엄마를 입에 올리지 마, 응? 다음은 목을 밟을지도 모르니까.”
“미, 미친 새끼……!!”
“하하, 그 소리 자주 들어. 왜일까?”
……솔직히 정말 모르겠단 말이지.
내가 어딜 봐서 미쳤다는 거야?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하며 일반적이잖아.
“아무튼, 애들 거래하는 거에 대해 물어볼 게 있는데.”
“꺼져, 미친 새끼야!!”
“버텨봤자 어차피 죽을 거, 그냥 시원하게 부시지 그래? 새벽에 여기 손님이 왔었던 거 알아? 그 손님이 잽싸게 돌아가버리긴 했는데, 댁 잡으러 온 거 아닐까?”
여왕장미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입술을 비틀었다.
“하, 반대이겠지. 날 죽일리가 없어.”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댁 집도 홀라당 다 타서 잿더미가 됐다던데?”
“……뭐라고?”
이번엔 좀더 오랫동안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그건 예상밖의 일이었나보군.
옅은 충격에 빠진 그녀를 보며, 나는 싱긋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