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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92화 (92/475)

〈 92화 〉 90화 : 실타래를 뭉친 건 누구? (4)

* * *

방 구석에 있던 의자를 하나 당겨와, 표정이 굳어 있는 여왕장미의 앞에 앉았다.

“댁의 그 ‘토끼풀 저택’. 완전히 활활 타버렸다고.”

“말도 안 돼. 거짓말이야!!”

“못 믿겠지? 근데 진짜인 걸 어째?”

……라고 해도, 말만으로는 못 믿겠지.

이 여자 입장에서 옐리카는 적이니까,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거야.

나라면 그럴 거다.

“음…… 증거가 될 만한 거 없을까요?”

옆에 선 집사에게 물은 건데, 뚱한 얼굴로 가만히 있던 옐리카가 무어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읍! 읍으읍읍읍!”

“……저기, 옐리카 님. 뭐라고 하시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흠흠!! ……실례합니다. 증거라면 하나 있습니다. 지금 가져오도록 하죠.”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리며 집사와 다른 하인 하나가 무언가를 낑낑대며 들고 왔다.

장정 두 사람이 붙어서 옮겨야 하는 그것은,

“엥? 간판?!”

‘저택’앞에 있던 간판이었다!

곳곳이 검게 그을려 있고, 커다란 토끼풀을 안고 있는 여자의 그림이 절반 없어져 있는데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왜 이런 걸 주워 온 거에요?”

“아가씨께 보고 드리기 위해 챙겼습니다.”

……하긴 간판만큼 그 ‘저택’을 상징하는 건 없긴 해.

백 번 이해되기는 한데, 나 참, 진짜 대단하네.

아무튼 이거라면 증거로는 확실하겠지.

나는 집사에게 여왕장미의 눈을 가린 천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

……음?

집사는 표정을 찡그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아니라 옐리카 님이 말씀하셔야 되는군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주인을 잠시 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눈이 없습니다.”

“예?”

눈이 없다니? 눈을 가리고 있으니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비유인가?

그러니 저 천 풀어 달라고……

……잠깐, 눈 가림 천……?

으엑, 설마!

“뽑았어요?!”

“……예.”

“아잇!”

내가 하려고 했는데!!

아, 이게 아니지.

나 참, 눈이 없으면 증거이고 뭐고 전혀 소용없잖아.

하아아…….

그냥 약 먹일까?

“……이 냄새…… 설마 정말로……?!”

어라? 여왕장미가 코를 벌름거리며 넋이 나간 듯이 중얼거렸다.

흠, 내 코에는 그을린 냄새밖에 안 나는데.

아는 사람만 맡을 수 있는 특별한 향취가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걸로 집이 없어졌다는 건 알았겠지.

여왕장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이제 알겠지? 충심 지켜봤자 아~무 소용없어요! 다 말해주면 우리가 대신 그 놈들 조져줄 테니까,”

“그 년……! 지저분하고 그 천박한 년이 감히! 사람 노릇하게 만들어준 은혜도 모르고!”

“저기요, 혼자 떠들지 마시고. 누가 애들을 사가는 건지 알려달라니까?”

“그래, 분명 그 년일 거야, 그 망할 년!계속 방해하고 싶어하더니 기회를 잡은 거라고!”

아잇, 진짜.

갑자기 혼자서만 줄창 떠들고 있네.

여전히 아가씨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메린이 돌연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야, 그냥 약 먹여라. 이 아가씨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입만 아프게 뭐 하러 그러냐?”

“얘야, 일에는 다 순서라는 게 있단다. 다짜고짜 최종수단 쓰는 건 좋지 않다고.”

“웃기네, 결국 약 먹일 거면서.”

“당연하지.”

만든 사람 성의가 있는데.

기왕 만들었는데 안 써주면 위슨이 섭섭해할 거다.

“이 목소리……!”

갑자기 홀로 중얼중얼거리던 여왕장미의 말이 뚝 끊기더니, 입을 앙다문 채부들부들 떨었다.

“살아 있었어?! 말도 안 돼, 우리 애들이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리가……!”

“엉? 애들? 아, 그 남자들? 별 볼일 없더만.”

네 기준에서 말이지.

열 몇 명의 건장한 남자들을 혼자서, 그것도 사지 멀쩡한 채로 죄다 해치울 수 있는 건 메린 녀석밖에 없을 거다.

여왕장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다시 소리쳤다.

“개소리 마! 어떻게 구한 애들인데! 이 미친년, 내 애들을 어쨌어?! 어떻게 한 거냐고!!”

“글쎄? 네가 먹인 독 때문에 정신이 없었거든. 일단 닥치고 벴으니까 몇 명은 죽었겠지.”

몇 명은 개뿔.

덤빈 놈은 다 죽었다, 새꺄.

속으로 쏘아붙여주었다.

독 때문에 손대중을 못한 건지, 아니면 로나 말처럼 몸이 근질거려서 마구마구 힘을 쓰고 싶었던 건지…….

아무튼 그날, 메린 녀석에게 베인 놈들은 죄다 즉사나 과다출혈로 죽었다.

“미, 미친년……! 미친 새끼에 미친년, 아주 끼리끼리 잘 다니는구나!”

“뭐야, 역시 날 기억하고 있었네.”

돌멩이 어쩌고 한 건 그냥 도발이었던 모양이다.

“아니지, 아니야! 덥썩 내 손목을 자르고 그 애들을 혼자서 해치웠는데 그냥 미친년일까! 이 괴무,”

우당탕타다다다앙!

또 다시 의자가 굴렀다.

왜냐? 또 내가 발로 찼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앉아 있던 의자도 쳐들었다.

함부로 입 놀리면 무슨 꼴을 당하는지, 그새 노망나서 잊은 모양이다.

아주 그냥 뼈에 새겨주마!

의자를 내려치려는 순간, 누군가의 팔이 내 어깨를 감싸며 붙드는 바람에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 틈에 손에 든 의자를 빼앗겨버리고, 이윽고 어깨를 붙들려버렸다.

“놔!! 이거 놓으라고!! 저 썩을 년이 지금!!”

“어이고, 저 미친놈, 잘 간다 싶더니 결국 터졌네! 사제님, 집사 혼자서는 힘들 테니 거들어줘.”

“다 끝나고 보자, 거지 같은 년아!! 개소리하면 어떻게 되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마!!”

“아하하, 메린 님이 모욕당하는 건 진짜 못 참으신다니까~ 근데 왜 자각을 못할까요~ 자자자, 카엘 님, 물러나시죠~”

……결국 나도 맨 뒤로 끌려갔다.

옐리카에 이어 나까지 붙잡힌 탓에, 여왕장미에게 자백제를 먹이는 건 위슨의 일이 되었다.

병의 1/3 정도를 입에 흘려 넣었을까?

의자째로 바닥을 구르며 신음하던 그녀가 갑자기 마구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치더니, 축 늘어지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근데 그 신음이……

“하으으…… 하아, 아흐윽……”

“……”

아니, 소리가 왜 저래?!

왠지 얼굴도 빨개진 것 같고!

집사를 시켜 입의 붕대를 풀게 한 옐리카마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위, 위슨 씨? 자백제라고 하지 않았어요?”

“맞는데요.”

“근데 왜 저래요?! 꼭 미약 먹은 거 같잖아요!”

미약이라는 거 처음 들어보지만 뭔지 알겠다!

근데 이 아가씨, 그건 또 어떻게 아는 건데?!

세상에, 여기 피트가 없어서 천만다행이지!

위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환각 일으키는 버섯이 들어갔으니까, 사람에 따라서는 발저………흥분하기도 해요. 으음, 역시 일반인이라 그런가? 효과가좀세네.”

“좀?! 저게 좀 센 거라고?!”

그럼 엄청나게 세면 어떻게 되는 거야?!

위슨은 충격과 경악에 빠진 우리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이 녀석 혼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야,뭔가 무서워!

“아무튼 정상이니까 이제 물어볼 거 물어보세요.”

“아아, 하아아아……! 뜨거어, 몸이 뜨거어어……!”

“……”

돌겠네, 진짜.

저딴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뭘 어떻게 물어보라는 거야?!

민망해서 제대로 보고 있지도 못하겠구만!

메린까지도 질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채 귀를 틀어막고 있으니 말 다했지.

“뭐야, 아가씨는 그렇다 치고, 너도 못하겠냐? 어휴…… 할 수 없네. 애들을 거래하는 놈들이 누군지 물어보면 되지?”

“어? 어어, 그렇긴 한데…… 네가 하려고?!”

“달리 있냐? 뭐, 섬에서 몇 번 했으니 괜찮아. 마침 손발 꽁꽁 묶여 있고.”

그러더니 민망한 소음을 마구 내뿜고 있는 여왕장미에게 척척 다가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이, 이름은?”

“흐으, 후으으으……”

찰싹.

“이름.”

“애, 애니이…… 애니에요……”

“베아트리스잖아. 거짓말하냐?”

“아흐윽! 아, 안대애……! 아니에요…… 그건 예명……! 베아트리스는 예명……!”

위험해.

이건 위험하다고!

의자와 위슨의 등에 가려서 전~혀 안 보이지만, 소리만 들어도 알겠어!

무언가 엄청나게 위험해!

어째 위슨 저 녀석, 아니 파랑새도 목소리 낮게 쫙 깔고!

아, 참고로 위슨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방 뒤쪽에 모두 모여 있다.

물론 나 포함해서.

……다들 저 여자가 지금 뭔 꼴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으으, 귀 막고 있을까?

근데 귀 막았다가 중요한 이야기를 놓칠 수도 있잖아!

“어휴…… 댁들 그냥 옆방 가 계세요, 응? 간간이 위슨이 가서 뭔 얘기를 들었는지 알려줄게. 나 참, 그게 훨씬 편하겠네.”

“옙! 수고하십시오!!”

누구보다 빠르게 방을 뛰쳐나갔다.

……위슨은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동안, 우리가 피난 온 방에 두세 번 정도 오가며 여왕장미를 심문했다.

이따금 방의 벽을 뚫고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분명 착각이겠지.

사람 입에서 그런 소리가 어떻게 나오겠어?

“어때? 다 된 거 같아?”

“흠…….”

“부족하면 내일 또 하고.”

“아니, 그건 좀…….”

그딴 걸 또 보긴 싫어!

뭘 했는지는 몰라도, 여왕장미가 완전히 뻗어서 기절했기 때문에 오늘은 더 못 물어본다고 한다.

덤으로 여왕장미가 쓰러져 있던 자리 언저리가 푹 젖었다는데, 뭐, 몸이 뜨겁니 뭐니 했었으니까 땀이겠지. 음음.

달리 뭐가 있겠어?

아무튼 심문도 끝났으니, 여왕장미에게서 얻은 정보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토끼풀 저택’의 원래 손님이었던 클라우드라는 귀족이, 친한 친구와의 비밀거래 장소로 창관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친한 친구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맨날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도 못 봤다…….”

그리고 창관을 쓰는 겸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달마다 클라우드에게 상당한 금화를 받았다…….

허황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럼 굳이 저택을 태울 필요는 없었던 거 아니야?

옐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장부 때문일 거에요. 어디 숨겼을지 모르니까, 협박도 할 겸 그냥 태워버린 거겠죠.”

“장부? 굳이 그런 것도 적어놔요?”

“어머, 당연하죠! 나중을 대비한 귀중한 상품인걸요? 그 귀족에게 더 큰 신세를 지고 싶거나, 아니면 반대로 완전히 벗어나고 싶을 때 쓸 수 있답니다.”

“아~ 그럼 협박이란 건 그 여왕장미…… 아니, 그 저택에 있던 종업원들 전부에게 압박을 준 거겠군요.”

무엇을 봤든 안 봤든, 무언가 알든 모르든,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마라.

안 그러면 이 꼴로 만들어버리겠다.

……아마 그런 뜻이겠지.

“클라우드라는 놈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는 모르겠죠?”

“뭐, 창관이니까요. 사실은 귀족이 아니라 그냥 돈 많은 상인일수도 있어요. 일단 저는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으응~ 여기서 막혀버리나?”

돈 많은 상인……

흠, 상인이 심야에 저택 불태울 만한 능력이 있을까?

물론 있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론 없지?

사람을 사서 항상 데리고 다니면 몰라도.

그리고 그렇게 부하들을 졸졸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보통 귀족이다.

뭣보다도 밤에 잘 자던 걸 깨워서 일을 시킨 건데, 그걸 불평 없이 고분고분 따르게 하려면 돈 말고도 다른 게 필요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말 안 듣는 놈을 콱 없애도 죄가 안 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엔 수배령이 내려지는 특권 같은 거.

“옐리카 님, 이 도시에 당신 말고 다른 귀족이 또 거주하고 있나요?”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 도시에 온 거거든요.”

“응? 왜요?”

“여기 있으면 가끔만 모임 열면 되는데, 귀족들이 있으면 모임 열랴, 참석하랴~ 쓸데없이 바빠져서 일을 못하거든요!

별 관심도 없는 사내 새, 흠흠, 신사분들과 억지로 어울리는 것도 번거롭고요.”

“아, 예…….”

어쨌든 이 도시에 그녀 말고 다른 귀족이 살지 않는다면, 그 귀족은 필요한 때만 이 도시에 와서 머무는 손님일 거라는 이야기가 된다.

내 추측이 맞다면.

테이블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귀족이라면 여행객일 텐데…… 본인이 아니라 매번 다른 놈을 썼다고 했지?”

“어.”

거 더럽게 철저하네.

혐의 하나 묻지 않으려는 이 철저함………엄청 높은 사람인가?

“……설마 왕족?!”

“에이, 그건 절대 아니에요. 왕족분들 가난하거든요. 왕족이길 포기한 사람이면 모를까. 근데 그 시점에서 그냥 귀족일 뿐이죠.”

“……”

굉장히 슬픈 이유였다.

아무튼 진짜로 막혀버렸네.

예상외로 잉그리트와 클라우스, 그 어느 쪽도 연관 없었고…….

피트가 위병소에서 뭔가 찾아오길 기대할 수밖에 없나?

“카엘.”

별안간 메린이 불렀다.

……설마 ‘골치 아플 땐 가볍게 움직여서 기분전환을 해야 한다’는 거지 같은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일말의 불안을 안고 돌아본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니구나!

휴우, 다행이야.

“이제 생각난 건데.”

“어.”

“그 여자가 말한 ‘그 년’, 누구였을까?”

“엉? 그게 뭔 소리야?”

그런 얘기를 했었나?

중간에 본 엄청나게 충격적인 광경 때문에 기억 일부분이 휑 날아가버려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메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여자가 그랬잖아. 그 년이 저택을 불태웠을 거라고. 계속 방해하고 싶어했다고. 물어보자고 하려 했는데 까먹었네.”

“오?”

그러고보니 그런 이야기를 한 것도 같고…….

이야, 이 녀석,용케 그걸 듣고 기억하고 있네.

까먹고 못 물어본 건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떠올린 게 어디야!

“이야, 메린, 고맙다, 임마! 네 덕에 멍하니 안 있고 또 움직일 수 있겠어!”

“어어…… 그래? 잘됐, 야, 하지 마, 머리 헝클어지잖아! 하지 말라고, 새꺄!!”

너무 기쁜 나머지 메린의 머리를 마구마구 쓰다듬어버렸다.

도로 땋아야 한다고 투덜거리며 머리를 매만지는 녀석을 내버려두고, 나는 바로 전에 얻어맞은 가슴팍을 문지르면서 입을 열었다.

“옐리카 님, 위병소에 다녀오겠습니다.”

“위병소? 오라버니 도우시려고요?”

“아니요, 대장을 만나려고요. 나이비 대장……이라고 하셨었죠?”

“대장을? 왜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귀족 아가씨를 향해, 나는 미소를 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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