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99화 : 천칭은 어디로 기우는가? (1)
* * *
아침 일과를 마친 후의 식사는, 메마른 황무지에 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뭔 소리냐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소리다!
황무지에 물 좀 떨어뜨린다고 풀이 안 나는 것처럼, 기력이 쫙 빠진 몸에 빵 쪼가리와 수프를 부어봤자 회복되진 않는다는 거다.
누구야, 땀 흘린 후의 밥이 맛있고 기운이 펄펄 솟는다고 한 놈?
날 속였어!
그래도 아침부터 약 먹기는 싫어서, 회의실에 들어간 나는 차 대신 꿀을 넣은 우유를 요청했다.
피로 회복에는 역시 꿀처럼 단 게 최고이니까.
따끈하게 데워진 우유를 멍하니 홀짝이는 나를 향해, 피터 왕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항상 그렇게 격하게 훈련하십니까?”
“……아뇨. 그랬으면 전 이미 죽었겠죠.”
아니, 어쩌면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바닥에 뻗었다 다시 일어날 때마다 수명이 일 년씩 깎여나가고 있는 건지도 몰라.
하하, 하하하…….
헛웃음을 흘리는 나를 향해, 메린이 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난 분명히 말했다. 넌 아직 안 된다고.”
“누가 뭐랬냐.”
“근데도 네가 ‘열 네 살 수준 말고, 일반 자경단원 수준으로 해달라’고 땡깡부렸어. 내 탓 아니다.”
“누가 뭐랬냐고, 임마……. 크흡…….”
이 자식, 내가 지한테 뭐라고 할 거 같나, 왜 혼자서 다 읊고 있대?
그 덕에 내 검술이 열 네 살보다도 못하다는 게 다 까발려졌잖아!흑흑.
제길, 한 시간 전의 내가 원망스럽다……!
지금으로부터 약 두 시간 전, 훈련장에서 메린과의 대련 뒤, 잠깐 쉬면서 숨을 돌리던 때였다.
말없이 쉬기만 하는 것도 심심하니, 별 생각없이 질문 하나를 던졌던 것이다.
야, 너 지금 나 몇 살 수준으로 상대하는 거냐?
엉? 열 네 살.
……?!
……그걸 듣고 그만 속에서 열불이 나는 바람에……!
그 다음은 메린 녀석의 말대로 내가 객기를 부렸고, 그 결과, 이렇게 내 넋이 3/4 정도 나가버렸다.
그치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걸!
메린 녀석과의 대련은 맨날 내가 두들겨 처맞는 걸로 끝나는걸!
게다가 좀 익숙해졌다 싶으면, 바로 방식을 바꿔버리고!!
그럼 또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얻어터지고!!!
근데 그게 열 여덟도 아니고 열 네 살!
고향에서 5~6년 검술 배운 꼬맹이 애들보다도 못한 수준이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 참냐고!
하아……
그래도 이제 그럭저럭 한 사람 몫은 하는 줄 알았는데, 역시 아직 한참 멀었나…….
“흠흠, 자, 여러분, 이제 슬슬 시작하도록 하죠.”
옐리카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래서 카엘 씨, 잉그리트와 이야기는 잘 하셨나요?”
“아, 예. 생각보다 굉장히 잘 됐습니다.”
나는 잉그리트에게 들었던 이야기……
그녀가 ‘토끼풀 저택’의 뒤를 캐며 알아낸 세 가지 정보를 전해주었다.
“……!”
그러는 와중, 두 아가씨의 눈빛이 순차적으로 날카로워지는 게 보였다.
꼭 순서를 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장 먼저 눈빛이 달라졌던 옐리카가 입을 떼었다.
“……보석이라고 하셨나요?”
“예. 클라우드는 그 엘프에게, 대가로 굉장히 귀해 보이는 보석을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 클라우드는 거래 자리에 직접 나온 적은 없다.
그러나 잉그리트의 부하가 보석을 받은 놈을 미행했더니, 그 귀족의 별장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고 한다.
그 다음, 그 별장에서 일하는 하녀를 꼬셔서 이것저것 들었다나 뭐라나.
……폭력조직이라고 꼭 주먹만 쓰는 건 아니구나 하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렇군요.”
옐리카는 무언가 짐작가는 것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반면 로나는,
“엘프가……? 대체 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로나, 율리아 님에게 여쭤볼 순 없어? 느낌이 안 좋아.”
“……할 수 있긴 한데요. 이 도시엔 신전이 없어요. 옆 마을에서 연락한다고 해도, 언제 올지 모를 답신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요.”
“으……”
로나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빙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사명이 틀어질 만한 일이 생긴다면 율리아 님께서 어떻게든 먼저 연락을 주실 거에요. 그러니 카엘 님은 갈 길만 생각하세요!”
“하아…… 그래, 알았어…….”
그냥 평소처럼 내 쓸데없이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한 기우였으면 좋겠는데.
이상하게 이런 불길한 예감은 되게 잘 맞는단 말야…….
……어쨌든 이 불길함을 떨치는 건 불가능할 듯싶다.
할 수 없지.
“……볼케 백작님이 말이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옐리카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 분이 항상 저에게 보석 경매를 의뢰했어요. 보석감정사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는 고품질들뿐이었죠. 게다가 보검까지 가지고 있고…….”
“그럼 설마, 그 사람이……?!”
“연관은 있겠지만, 주범은 아닐 거에요. 지금 우리는 오라버니가 찾은 검문 기록들이 전부 아이들일 거라 가정하고 있잖아요?수가 부족해요.”
뭐가 부족하다는 거지?
고개를 갸웃하는 나를 대신해, 피터 왕자가 입을 열었다.
“경매를 의뢰한 보석의 수가 부족하다는 건가요?”
“네. 훨씬 적어요. 그 분은 한 번의 경매에 보석 하나만 의뢰했거든요.”
지난주만 해도 세 건의 ‘비료’ 출입기록이 있는데, 옐리카는 그 귀족이 단 한 건의 경매 의뢰만 했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는 건, 나머지 보석은 다른 누군가에게 바쳤다는 말이 된다.
그 ‘누군가’가 필시 이 일의 주범일 터.
어쨌든 그 볼케 백작이라는 사람을 조사해서……
“……응?”
잠깐, 뭔가 안 맞는 거 같은데?
옐리카는 볼케 백작이 자신의 단골이라 했다.
그녀가 언제부터 이 도시에서 살았는지는 몰라도, ‘단골’이라 부르려면 거진 한 달 이상은 거래가 있어야 할 터.
그런데 분명, 애들을 납치한 사건은……
어디 보자, 마티아스를 만났을 때 ‘2주 전’이라 했으니까……
우와, 오늘부터 세면 거진 한 달 전이네?
벌써 그렇게 됐나?
아무튼 한 달 전부터 발생한 사건인 거다.
“옐리카 님, 볼케 백작님과 거래를 한지 얼마나 됐죠?”
“제가 이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손님이 돼주셨으니, 일 년이네요.”
“일 년…….”
으음…… 역시 볼케 백작을 의심하기엔 시간이 맞지 않아.
하지만 그냥 무시하기엔 정황이 너무 잘 맞아떨어지고…….
“야, 한 달 전이 아니잖아.”
메린이 과자를 우물거리며 톡 쏘아붙였다.
“뭔 소리야, 한 달 맞구만.”
“너 까먹었냐?그 창관, 매달 돈 받았다고 했잖아. 그럼 한 달 훨씬 전부터 계속 거래했다는 소리 아냐.”
“……아.”
이 녀석, 기억력 진짜 좋네.
그보다 관심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의외로 다 듣고 있었구나.
……어, 혹시 이 녀석, 그동안 못 들은 척했을 뿐이지, 사실 다 듣고 다 기억하고 있는 거 아냐?
예를 들면……
……어제 저녁 정찬 때 했던 이야기라든가?!
“엉? 얼굴 빨개졌네. 야, 그거 까먹은 거 들켰다고 뭘 그렇게 창피해하냐? 내가 뭐라고 한 게 아니잖아.”
“그거 때문에 그런 거 아니거든! ……너 어제 저녁식사 때 얘기 들었어?”
지금 그딴 걸 물어볼 때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메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얘기?”
“……펜던트가 어쩌고 한 거.”
“엉? 그런 얘기했었어? 전혀 기억 안 나는데.”
그녀는 기억을 더듬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음……진짜 모르는 거 같은데.
선택적으로 듣고 기억하는 건가?
그건 그거대로 대단한데?
아무튼 못 들어서 다행이다.
“으으음……전혀 모르겠어. 중요한 얘기였냐?”
“아니. 전혀.”
바로 대답해주었다.
어쨌든 메린의 말대로라면 훨씬 질이 나쁜 얘기가 되는데.
엘프들이 훨씬 전부터 인간 어린애들을 사갔다는 소리가 되잖아.
대체 왜?
“흠, 어쨌든 볼케 백작님이 수상한 거죠? 그럼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좋은 생각이요?”
되묻는 나를 향해 옐리카는 환히 웃으며,
“오늘밤 다같이, 파티에 가요!”
……엄청 괴상한 발언을 던졌다.
아니, 이런 심각한 상황에 웬 파티?
이 아가씨가 너무 상심이 커서 그만 이성을 잃고 만 것인가?
어젯밤 저택에 남았던 로나도, 옐리카가 입은 마음의 상처를 다 치유할 순 없었던 모양이다.
하아…… 결국 저 왕자님은 내 말을 그냥 귓등으로 흘려버린 것인가?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옐리카 님, 마음에 화가 쌓인 건 알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 파티에 가는 건 좀…….”
“네? 마음에 화가 쌓이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리고 이런 상황이니까 더더욱 파티에 가야죠. 다름 아닌 볼케 백작님이 여는 파티인데.”
“네네, 그러시겠죠……. ……네? 볼케 백작님의 파티?”
눈을 깜박이며 되묻는 나를 향해, 메린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너 또 까먹었냐? 볼케 백작이라는 사람이 오늘밤에 별장에서 파티 연다고 했었잖아. 이 아가씨에게 보검 감정 부탁한다면서.”
“……”
들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옐리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메린의 기억이 또 맞은 모양이다.
윽, 괜히 왕자를 속으로 욕해버렸네.
입 밖에 안 내서 다행이야.
그렇다고 왕자의 잘못이 없어진 건 아니지만.
“네. 보검을 자랑하는 파티죠. 그러지 않아도 여러분과 같이 가려 했는데 잘됐네요. 보검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면 오라버니가 있어야 하는데, 저희끼리만 가기엔 좀 죄송했었거든요.”
“네? 아니요, 두 분만 가셔야죠. 저희는 예법 같은 거 몰라요. 괜히 갔다가 옐리카 님께 수치만 안겨드리면 안 되잖아요.”
내가 손사래를 치며 사양하자, 옐리카는 오히려 더 크게 웃었다.
“아이, 괜찮아요! 파티 예법이란 게 별도로 있는 게 아니랍니다. 벌거벗고 춤추거나, 와인을 남의 얼굴에 뿌리거나, 남의 집안이나 얼굴을 욕하지만 않으면 돼요.어차피 여러분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별로 없을걸요?
조사도 할 겸,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구경도 한다고 생각하세요!”
으…… 진짜 그 정도 예법만 지키면 되는 건가?
그보다 그런 짓을 한 사람이 있던 건가?!
아무튼 그냥 얌전히 먹기만 하는 건 메린도 할 수 있으니 괜찮겠지만…….
여전히 문제, 그것도 굉장히 크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근데 저희 옷도 없는데요.”
바로 우리에겐 예복이 없다는 것!
동네 술잔치도 아니고, 후줄근한 셔츠에 바지차림으로 갈 순 없을 거 아냐.
설령 들어간다고 해도, 다들 우릴 손님이 아니라 사용인으로 보고 일 시킬 거다.
“전 이거 입고 가면 되는데요. 헤헤.”
“아, 그래, 잘 다녀와라.”
“저만 보내시려고요?! 말도 안 돼요! 같이 가요!!”
“아니, 옷이 없다니까.”
지금 당장 옷가게로 가서 예복을 맞춘다고 해도, 오늘밤에 바로 입을 수는 없을 거다.
옷이 뭐 뚝딱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빨라야 사흘 걸리지 않을까?
“어머, 걱정 마세요. 옷은 제가 빌려드릴게요. 치수만 재시면 돼요.”
“……네? 남자 옷도 가지고 계세요?”
옐리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숙녀분이야 제 옷을 빌려드리면 되고, 신사분들은 하인들의 정복을 조금 고치면 되는 걸요. 출발하기 전까지는 충분히 준비되고도 남으니 염려 마세요.”
“아니, 그래도…….”
“아~ 집주인으로서 명령이에요! 무조건 같이 가요! 이미 초청장에 여섯 명 간다고 했으니 취소 못해요! 얘기 끝!”
“……”
권유가 아니라 통보였다.
하아……
사람 우글거리는 곳 싫은데…….
“아, 그래, 그 보검이 진품이라면 왕자님이 돌려달라고 하시면 되겠네요.”
좀 얼빠진 짓이 되겠지만, 잃어버린 시점에서 이미 등신 중의 등신이니 더 이상 지킬 체면은 없지 않을까?
아무튼 왕가의 보검이라면 왕족의 소유이니,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카엘 님…….”
조용히 나를 부르는 로나의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 피어 있던 웃음꽃 대신, 마치 비 내리기 직전과 같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얘가 이렇게까지 표정이 어두운 건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게……”
그녀는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고, 그 사이에 옐리카의 부드러운 웃음 소리가 끼어들어왔다.
……마치, 로나의 말을 가로막는 것처럼.
“카엘 씨는 역시 순박하시네요. 그 분이 그걸 인정할 리가 없잖아요.”
“네? 하지만 왕자님이……”
“오라버니도 그걸 공인할 수는 없어요. 그 보검은 어디까지나진품에 가까운 복제품이 될 거랍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뻔히 진품인 걸 알면서도 복제품이라 친다고? 왜??
……그보다 저 ‘순박하다’는 말, 어째 단순하다고 욕한 거 같은데 그건 내 글러먹은 사고방식 때문이겠지?
힐끗 쳐다본 피터 왕자는, 괴로운 듯이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결국, 또 다시 입을 연 건 옐리카였다.
그녀 역시 테이블 위만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이 두 사람, 오늘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거 같은데.
굳이 따지자면, 옐리카가 의도적으로 눈을 피하는 거 같다.
“말씀드린 대로 그 보검은 원래 왕가의 보물고에 있어야 하는 물건이에요. 그런 물건이 한 개인의 소유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무 연락도 없이 이 도시를 방문한 왕자가 있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그건……”
……그 사람에게 가보를 몰래 팔았다, 그렇게 생각하겠지.
나라면 그렇게 생각할 거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면,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겠죠?”
“아, 예, 그렇겠죠. ……아, 그렇구나. 소문……!”
“네. 그런 거랍니다.”
보검이 진품인 걸 공인할 수 없는 건,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왕자가 판 게 아니라 도둑 맞았던 거라 공표하더라도, 사람들은 분명 믿지 않고 ‘피터 왕자가 몰래 보검을 들고가서 팔았다더라’며 수군댈 것이다.
왜냐?
그게 더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그 소문은 피터 왕자 개인뿐 아니라, 왕가 전체에 먹칠을 하는 꼴이 될 것이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걸 제 목적에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러나 그게한없이 진품을 닮은 복제품이라면, 뒷소문은 퍼지더라도 앞에서는 작은 소란만 나고 말겠지.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이해는 했는데……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는 거 아닌가?
“그래도 어쨌든 그걸 되찾아야 되는 거잖아요.”
“맞아요. 그래서 그게 진품이라는 게 확인되면, 제가 사기로 했답니다.”
호로록, 옐리카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툭 던지며 차를 들이켰다.
그녀의 말을 들은 피터 왕자의 시선이 마침내 테이블에서 떨어졌다.
정작 옐리카는 여전히 테이블만 바라보며, 왕자의 놀란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사다니…… 얼마에……? 아니, 옐리카, 그새 협상까지 다 마친 겁니까……?”
“처음부터 저에게 팔 생각이었나봐요. 다만 협상이고 뭐고, ‘이 값이 아니면 안 된다’며 물러나지 않으시더군요.”
“그럼…….”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옐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에 초청장에 답하면서, 그 값에 사겠다고 보냈어요.”
의연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입으로만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을 뿐.
왕자는 그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는 듯이,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떨구었다.
자연히, 회의실 안에 적막이 가라앉았다.
“……”
조금 전에 우물쭈물하던 로나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찻잔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어두운 얼굴을 한 걸 본 적이 없다.
……뭔가 있어.
그것도 그냥 넘어가선 안 될 만큼 큰 일이.
로나는 어젯밤에 저택에 남았다.
옐리카에게 뭔가 들었던 게 분명해……!
“옐리카 님, 그 값이 얼마죠?”
“……”
“말씀해주세요. 얼마나, 아니,무엇을 지불하셔야 하는 거죠?”
이 대저택? 아니면 사업권?
아니면 둘 다?
나는 옐리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은 후, 나를 바라보았다.
“왜 물으시는 거죠?”
“이 분위기에서 물을 수 있는 건 저뿐이니까요.”
누구보다도 알아야 하는 사람은 죄의식에 눌려 입을 다물어버렸으니, 덜 상관있는 나라도 대신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옐리카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구나. 아무도 나서지 못할 때 나서는 것, 후후, 확실히 용사답네요.”
“옐리카 님.”
“순결이에요.”
“………………뭐요?”
지금……뭐라고……?
내가 또 잘못 들었나?
그러나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
하나같이 눈을 크게 뜨고 동작을 멈춘 사람들,
그리고 이젠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눈을 감은 로나.
……아아, 정말 애석하게도, 내 귀는 굉장히 멀쩡한 모양이다.
“제 순결이요. 하룻밤 보내주고 보검을 받기로 했어요.”
태연하게 말하며, 아가씨는 찻잔을 다시 기울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