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100화 : 천칭은 어디로 기우는가? (2)
* * *
왕가의 보검이 가진 가치.
보검 그 자체와 왕가의 명예와 품위, 그 모든 것을 따져서 매겨진 값이……뭐?
여자의 순결?!
세상에, 뭐 이런 개소리가 다 있어?
아니 씨발, 결혼 선물도 아니고, 뭐?
하룻밤 보내주는 대가라고?!
머리가 핑 도는 듯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걸 마른 세수로 겨우 버텼지만, 너무나도 큰 충격에 머리가 마비된 탓에, 나는 딱 한 마디만 꺼낼 수 있었다.
“당신 미쳤어요?!”
“어머, 숙녀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런 험한 소리를 하시다니, 과자 압수에요!”
“네, 이 우유도 미리 반납하죠! 그딴 거래를 받아들이다니 당신 제정신이에요?! 아무리 왕자님을 위해서라 해도 그렇지……!”
후후후, 옐리카의 웃음소리가 밀폐된 방 안에 울려퍼졌다.
눈을 감고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는 어딘지 유쾌해 보이면서도……
허탈한 기색이 감돌고 있는 듯했다.
“오라버니를 위해? 정말로 그리 생각하세요?”
“……”
“카엘 씨, 잊으셨는지 몰라도 저 역시 상인이랍니다. 말씀드렸죠? 이 도시의 상인들은 돈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고. 저도 제 이익을 따졌을 뿐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한 몸 바치는 비련의 소녀~ 이런 걸 기대하셨다면,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하네요.”
밝은 목소리,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듯한 말투, 과장된 면모 하나 없는 자연스러운 몸짓.
얼핏 보기엔 정말로, 옐리카는 아무 감정없이, 손익만을 따져서 그런 결론을 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리가 있나.
마음 하나 담기지 않은 차가운 결정이었다면, 로나의 표정이 이 정도로 어두울 리가 없지.
이젠 거의 심연으로 잠기고 있잖아.
나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이익이요? 단골 손님과의 더 끈끈한 인연? 화제의 인물이 되는 영예? 그런 게 어떻게 이득이 되는 거죠?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물품을 선보일 뿐, 직접 파는 건 아니라면서요.”
그녀가 이 도시에서 하는 사업은 경매라고 했다.
어떤 귀한 물건을 팔고자 하는 사람의 의뢰를 받아, 그 물건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팔아주는 대신, 수익의 일부를 조금 받는 일이라고.
그러니 그녀의 손님들은 옐리카 바실리예프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인맥들을 더 신경 쓸 터.
그러나 옐리카는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어머, 모르시는 말씀. 장사가 잘 되려면 무언가 입소문 탈 게 있어야 한답니다. 상품이든 상점 주인이든,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게 기본이라고요. 그러니 제 일도, 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좋답니다.
게다가 이번 거래로 잃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요.”
“잃는 게 없다니……!”
즉각 반박하려는 내 말을 날려버리는 듯이, 옐리카는 허공에 손을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없죠. 돈을 잃는 것도, 제 사업권을 잃는 것도 아니고. 제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후후, 떨어지긴커녕 오히려 올라갈걸요?”
“대체 그게 무슨……!”
그녀는 빙긋 미소 지었다.
“귀족 사회에서는 오랜 역사를 지닌 가문일수록 더 많은 경의를 받아요. 볼케 가문은 그런 명문가 중 하나랍니다. 다들 그들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연줄을 만들려고 애를 쓰죠. 볼케 백작…… 랜돌프 볼케 백작님은 가문의 정식 후계자이시고요.후후, 그런 분이 스스로 저에게 구애하신 거에요. 그것도 왕가의 보검을 걸고!
뭐, 잘 되어봤자 정부(??)나 되겠지만, 아무튼 굉장히 떠들썩하고 뜨거운 소문이 퍼지겠죠? 그럼 다른 귀족분들이 ‘얼마나 예쁘길래?’ 라며 연락해오지 않겠어요?
후후, 사업이 마구마구 커질 기회인 거에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옐리카는 차를 홀짝였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이때까지 아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 카엘 씨가 잔소리할 거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우리의 결혼은 당신들과는 달라요. 귀족에게 결혼은 가문을 키우기 위한 사업수단 중 하나일 뿐, 거기에 감정은 담기지 않아요.
뭐, 순결이 없으면 좀 깎이긴 하겠지만, 이번 거래로 저는 더 큰 걸 얻을 테니 그 손해도 메꾸고 남죠.”
“……”
“왜냐하면 왕가에 빚을 지우게 되니까! 후후, 어떤 보상을 제시해올지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아, 그래, 오라버니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할까~? 우후후후~!”
하…… 돌겠네.
이 아가씨가 진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핑계 치는 건 뭐라 안 하겠는데,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우리 사제님 그만 괴롭히시라고요.”
“……네? 거짓말이라뇨?”
그녀의 얼굴엔 웃음꽃이 한가득 피어 있다.
따끈한 김이 피고 있는 찻잔을 든 손에는, 미세한 떨림조차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 역시 평소처럼 발랄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어떤가?
저렇게 길게 쭉 이야기하면서도, 고집스럽게 테이블만 보고 있는 저 갈색 눈동자는?
미세하게 붉은 끼가 남아 있는 눈가는?
“……하아…….”
영혼이 감정을 담는 그릇이라면, 눈은 그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눈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 눈 속에 담긴 감정마저 거짓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당장 극단에 가서 배우가 되어야 한다.
분명 대륙의 전설이 될 거야.
배우의 소질은 옐리카 볼포브나 바실리예프에게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전설적인 재능은 아니야.
그녀는 스스로를 속이지 못하고 있으니까.
로나처럼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신왕자님과 결혼할 생각없잖아요.”
“……네? 나 참, 제가 없긴 왜 없어요? 오히려 이런 기회만 오길…….”
“아니요. 당신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요. 오히려연을 끊을 생각이겠죠.
아까부터 왕자님 쪽을 보고 있지도 않고, 눈길도 주지 않고 있잖아요. 고개나 눈이 그쪽으로 가려고 할 때마다 억지로 다시 돌리는 걸 몇 번이나 봤다고요.
‘이런 얘기를 하는 나는, 차마 왕자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이런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내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잘못 생각해도 한참을 잘못한 거다.
사랑하는 고향 마을 덕분에, 내가 사람 표정을 좀 읽을 수 있거든.
그런 능력 아닌 능력을 얻은 과정은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그 덕분에 내 옆에 있는 녀석이나 저렇게 거짓말하는 사람의 심정을 엿볼 수 있으니, 이거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사실은 당신 스스로도 원하지 않잖아요. 그러니 이렇게 핑계를 쭉쭉 늘어놓고 있는 거죠. 제 말이 틀려요?”
“……글쎄요.”
옐리카는 여전히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그러나 나는 보고 말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 그 짧은 순간………울음을 참는 듯한 얼굴을, 내 눈은 놓치지 않았다.
“설령 카엘 씨 말씀이 맞더라도, 이게 저에게 이익이라는 건 부정하실 수 없잖아요?”
“……못하긴 왜 못해요? 아무 이익도 없는 일인데.”
이 아가씨의 목소리가 너무 밝은 탓일까, 그녀를 상대하는 내 목소리는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 자신이 죽어버리는데. 스스로에게 항상 당당하던 옐리카 볼포브나 바실리예프가 부숴져 없어져버리는데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요……!”
왕자를 연모하는 마음, 그게 옐리카 바실리예프라는 여자에게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오늘밤 그녀의 그 ‘거래’가 성사된다면……
……그녀는 왕자를 배신한 자신을 용서하지 않겠지.
아마 그게 유일한 버팀목이었을 테니까.
“……카엘 씨도 참, 호들갑이 너무 심하시네요. 저를 너무 감성적인 사람으로 보고 계신 거 아니에요? 나 참, 애초에 지금 여러분을 돕는 것도 제 이득을 위한 거였는데.”
“……”
“뒷골목을 청소하는 걸로 제 공적도 쌓을 겸, 이번 일에 연루된 사람을 찾아서 약점을 잡을 생각이었거든요? 복수초에게 여왕장미를 넘기는 대신, 엄청난 대가를 요구할 생각이기도 하고요. 저를 너무 얕보지 마세요!”
……여기까지인가?
역시 나로는, 무슨 말을 해도 그녀의 뜻을 꺾을 수 없는 모양이다.
옐리카는 찻잔을 기울인 후,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단 한 사람, 왕자를 제외하고.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제가 백작님에게 슬쩍 더 캐물어볼게요. 어차피 별 가치도 없는 순결이었는데, 그 값이 보검인데다 중요한 정보까지 얻는다면 엄청 수지맞는,”
“그렇지 않아요.”
허탈하게 허공에 흩어지는 말들을 자르며, 마침내 왕자의 입이 열렸다.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던 그의 노란 눈동자는, 어느새 옐리카에게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옐리카, 당신은 보검 따위보다 훨씬 귀한 사람이에요.”
“……”
옐리카의 시선이 천천히, 테이블에서 떨어지며 피터 왕자를 향했다.
그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녀의 짙은 갈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집안도, 핏줄도, 그 어떤 것도 당신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못해요. 그러니 그렇게 스스로를 낮추지 말아요. 스스로를 상처입히지도 말고요. 당신은 천박하지도, 비열하지도 않으니까.
그 누구보다도 깨끗하고 고결한 나의 아름다운 아가씨이죠.”
“오…라버니……?”
그의 손이 천천히 옐리카를 향해 다가갔다.
“미안해요. 내 어리석음 탓에 당신을 이렇게나 힘들게 해서. 그동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커다란 손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살포시 감싸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은 손이 완전히 덮이는 동안, 노란 눈동자는 그녀를 향한 채 떠나지 않았다.
커다랗게 뜬 두 눈을, 그 속에서 떨리기 시작한 눈동자를,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사랑합니다, 옐리카.”
그녀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놀라움으로 가득한 두 눈에 눈물이 어른거리며, 그녀의 뺨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진심, 이세요?”
“예.”
“……행여나, 저를 불쌍히 여기시는 거라면,”
“절대 그렇지 않아요.”
손을 붙잡힌 채, 그녀는 얼마간 조용히 그와 눈을 마주했다.
“아아……. 그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이윽고 정말로 기쁜 듯이 미소 지으며,
“……오늘도 정말, 좋은 하루가 될 것 같네요…….”
살며시 눈을 감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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