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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06화 (106/475)

〈 106화 〉 104화 : 탑 위의 파란나비 (3)

* * *

예상을 넘어도 한참 넘어선 대답이었다.

차라리 ‘안내책자에 초상화 올리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거다.

굉장히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그런데, 엘프와 담판을 지어달라?

방금 전에 ‘왕국이 처리할 일’이라며 했던 그 입으로??

진짜 예측을 할 수가 없네.

대체 무슨 속셈이지?

나비공작은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리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거래는 ‘찾는 자’와 ‘주는 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볼케 백작을 두드리고 그 뒤에 서 있는 자를 찾아낸다 한들, 엘프가 계속 아이들을 원하는 한, 이러한 일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겁니다. 단지 장소만 바뀌겠지요.

그리고 어차피 서쪽 산맥으로 가시지 않습니까? 산맥 너머에는 엘프의 숲이 있다 들었습니다. 기왕에 가시는 거 들르시지요.”

서쪽 산맥으로 간다는 건 알고 있지만, 무엇 때문에 가는지는 모르는 건가?

그렇다는 건, 수도의 지하 신전에는 첩자가 없다는 뜻이다.

맹약을 나눈 다섯 종족 중, 인간을 뺀 나머지 네 종족에게 협력을 구해야 한다는 건 지하 신전에 들어간 다음에 들은 이야기이니까.

하아……

진짜 앞으로는 어디서든 말조심해야겠구만.

그나저나모든 거래는 ‘찾는 자’와 ‘주는 자’가 있으니까 이루어진다…….

맞는 말이긴 하네.

……근데 그‘찾는 놈’에게 아무도 주지 않아도 해결되는 거 아냐.

“댁들이 안 팔면 되는 거 아닌가요?”

“허허, 그건 안 될 말씀! 우리는 상인입니다.손님이 원하시는 것을 제공해드리는 게 삶의 기쁨인 종족이죠!그러니 그런 잔인한 말씀은 하지 마세요.”

“금고 채우는 기쁨이 아니고요?”

“모르시는 말씀. 금고를 채우는 것 또한 손님을 위한 것이랍니다. 손님이 찾으시는 걸 구하려면 돈이 드니까요.

그리고 그 쌓인 돈 또한 누군가에게는 좋은 상품이 되죠. 소문에는 어떤 상회에서 이미 부업으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쳐서 돌려받는 일을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우와.”

그거 그냥 이웃끼리 하는 거 아니었나?

굳이 왜 상회에서……?

나 참, 나중엔 물건 없이 돈으로만 장사하는 사람도 나오겠구만.

아무튼 뭐, 어차피 엘프에게 갈 거고, 이 돈귀신 할배의 부탁이 아니어도 이 이상의 거래는 막을 생각이었으니 상관없지.

내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나비공작은 만족스러운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약이 성립되었군요. 특별전시실로 가시면, 제가 준비한 전문가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를 잘 이용하십시오.”

“네? 어…… 그냥 이렇게 끝인가요?”

뭔가 종이에 쓰거나 증거를 남길 줄 알았는데.

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예. 쓰실 거는 동료분의 조제법 외엔 없습니다. 뭐, 원하신다면야 계약서를 준비하겠지만…… 굳이 종이와 잉크 낭비할 필요 있나요?”

“허…… 의외인데요. 사람을 잘 믿을 분인 것 같진 않은데.”

아니면 그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알아서 잘해’?

여러 곳에 첩자를 심어 놓았으니 하려면 못할 건 없겠지.

“물론이죠. 상인이 조건 없이 믿을 수 있는 건 그 자신과 돈뿐입니다. 다른 사람을 믿어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요.”

“그런 분이 왜……?”

“허허, 당신이 계약을 따르지 않는다고 제가 무슨 손해를 입는 건 아니니까요. 무엇보다도,”

깍지를 낀 채,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나비공작은 말을 이었다.

“제가 볼 때, 당신은 계약이 없어도 엘프를 찾아갈 사람입니다. 그러니 말만으로 충분해요.”

음…… 칭찬인 걸까?

덮어놓고 믿어준다는 건데, 돈귀신에게 들으니까 왠지 미심쩍다.

무언가 뒷말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아.

예를 들면……

“호구 같이 생겼다는 거군.”

“아잇.”

이 자식이 그걸 굳이 또 말로 꺼내네.

젠장,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반박도 못하겠다.

하아……

근데 진짜 나 만만하게 생겼나……?

메린 녀석도 그런 소리 했었고…….

그새 누가 가져다주었는지, 종이에 글씨를 적고 있던 위슨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그래 보이긴 해.”

“시끄러, 임마. 그거 쓰기나 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녀석에게 생긴 거 가지고 왈가왈부당하고 싶진 않다.

성별 헷갈리게 생긴 녀석이 누구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허허, 절대 그런 이유가 아니니 오해마십시오. 제가 당신을 믿는 건, 당신이 용사이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게 이유가 되나요?”

“그럼요.그만한 성품이 되지 않는 사람이 용사가 될 리가 없으니까요. 허허, 창조주께서 보증하신 사람을, 제가 어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펜허스트 백작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가.

­­인간된 자가 어찌 용사를 믿지 않을 수 있겠소?

……너무 무거운 거 아니냐?

정작 나 자신은 대체 무엇 때문에 용사로 선택된 건지 짐작도 안 가는데.

드래곤을 물리쳐야 한다는 거나, 내년까지 못하면 세계멸망이라는 거나, 멸망의 징조가 서서히 나타난다는 거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불안해지기만 하는데.

영웅도 아닌 내가,‘용사’라는 것만으로도 이런 신뢰를 받아도 되는 건가?

“……”

……다행이다.

알아보는 사람이 적어서 진짜 다행이야.

어디를 가든 이런 묵직한 신뢰를 받는다면, 부담돼서 밥도 제대로 못 먹을 테니까.

어쩐지 시선을 마주하기 불편해져서 괜히 위슨이 쓰는 종이를 쳐다보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또 한 번 웃음소리가 들렸다.

“특이하신 분이군요. 오히려 표정이 더 어두워지다니.”

“……”

“허허, 특이한 걸 보여주신 답례로 제가 한 가지 더 말씀드리죠.

이번 일에 중요한 건 보검을 훔쳐내는 게 아닙니다.훔친 보검을 끝까지 지키는 게 중요하죠.”

……이건 또 뭔 소리야?

“끝까지 지키다니요?”

“볼케 백작이 왕가의 보검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그가 바실리예프 양에게 거래를 제안한 것…… 이건 저만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온 도시가 다 알고 있을걸요?”

등줄기에 싸한 기운이 올라오며 머릿속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하얗게 굳어버린 머리를 대신해, 입술이 알아서 달싹이며 말을 만들어냈다.

“그 말은 즉…… 설마…….”

“그렇습니다.오늘밤, 온 도시가 그 보검을 노릴 겁니다!”

개회 선포를 하는 것처럼, 나비공작은 두 팔을 벌리며 외쳤다.

오늘밤, 온 도시가 왕가의 보검을 노린다고?

왜…… 아니, 어떻게 그 백작이 보검을 가지고 옐리카에게 거래를 건 걸 온 도시가 다 아는 건데?

그 얘기는 옐리카의 저택에서 했다고 들었는데?!

아, 설마.

“당신이 소문냈어요?!”

“어이쿠, 무슨 말씀을. 제가 왜 그러겠습니까? 아무 이득도 없는데요. 이건 백작 스스로가 퍼뜨린 겁니다.”

“엥? 그 백작이요?”

뭐지?

술김에 막 나불나불댔나?

“저녁 정찬 때 술에 취해서는 떠들었다고 하더군요. ‘그 도도한 여자가 어떤 소리로 울지 벌써부터 기대된다’면서.”

“아니, 이게 진짜였네.”

등신이잖아…….

그냥 보검 얘기만 해도 소문거리가 될 건데, 그딴 거래를 했다는 얘기를 하면 당연히 온 도시에 소문이 다 나지!

아니, 그보다 진짜 저 따위로 말했다고?

미친 새끼 아니야?!

“물론 지금쯤, 어젯밤 일을 무척 후회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보검을 이중삼중으로 지키겠지만 별 소용없겠죠. 누군가는 반드시 훔칠 겁니다.

허허, 이 도시에 내로라 하는 도둑들이 전부 한데 모이겠군요. 이거 볼만하겠는데요.”

“아니 아무리 보검이라도 그렇지……. 그게 그 정도로 값어치가 커요?!”

“크죠.”

단 한 줌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긍정했다.

도대체 그 보검의 무엇을 보고 그러는 거지?

물론 보검이라니까 화려하긴 엄청 화려하겠지.

아마 검 자체에도 무언가 장식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래선 그냥 비싼 검이잖아.

도시가 전부 들고 일어나기엔 그걸론 부족해.

무언가 더 큰 가치가 있다는 건 분명한데…….

옐리카가 핑계로 댔던 것 중 하나는 왕가에 빚을 지울 수 있다는 거였는데,그게 그렇게나 큰 이득인가?

이런 쪽은 문외한이라서 잘 상상이 안 되네.

“나 참, 진짜 모르겠네.”

“음? 이런, 모르시겠습니까?”

“전혀요.”

고개를 젓는 나를 보며, 나비공작은 푸근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순결이 걸려 있지 않습니까?”

“네? 뭐요?”

“옐리카 볼포브나 바실리예프 양의 순결 말입니다. 물론 도둑들이야 돈을 위해 덤벼드는 거겠지만,그들을 고용하는 자들은 다들 그 아가씨의 순결을 위해 달려드는 겁니다.”

“미친 새끼들 아냐, 진짜?!”

아니, 왕가에 보답을 요구할 권리를 얻는다는 것보다 아가씨의 첫날밤을 가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거야?

돈에 미친 놈들이 모인 게 아니라, 그냥 미친놈들이 모인 곳이었어!!

“허허, 평생에 단 한 명만 얻을 수 있는데다, 그냥 평민도 아니고 귀족 아가씨 아닙니까? 진귀하다고 하면 진귀하죠.

……솔직히 저도 좀 고개를 젓고 싶은 심정이긴 한데, 대부분이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걸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일부는 다른 목적으로 보검을 노리고 있군.

다행이야. 죄다 미쳐 돌아가는 게 아니라서.

근데 ‘대부분’ 그런 의도라면, 나도 그런 놈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거 아냐.

하씨…… 갑자기 엄청나게 하기 싫어진다.

나비공작은 한숨을 쉬더니, 불현듯 내 손을 굳게 잡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부디, 에스트렐 씨께서 무사히 성공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제 명예를 위해……!”

“……도시의 명예가 아니고요?”

“말리스는 대륙의 화제가 될 테니 오히려 더 승승장구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조합장일 때 일어나야 돼요. 같이 싸잡아서 엮이기 싫다고요!”

“……”

음, 나라도 싫긴 하겠다.

사람들은 분명 조합장도 관련됐으니까 그런 거래가 이뤄진 거 아니겠냐고 수군거릴 테니까.

위슨이 깃펜을 내려놓는 걸 신호로, 나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나비공작을 향해 내밀었다.

의아한 눈으로 종이와 나를 번갈아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 이게 뭡니까?”

“손님으로서 이 도시에 대해 느낀 점을 쭉 쓴 겁니다. 조합장실에 가시면 꼭 읽어보시고, 제~발 하나만이라도 적용 좀 해주세요.”

적어도 갈림길마다 이정표 하나씩 꽂아줬으면 좋겠다.

진짜로.

“조합장이시면 상인보다는 지도자가 되셔야 하지 않겠어요? 수익 말고 다른 것도 생각해주세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위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다시 찾아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손님!”

……끝까지 상인이구만.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돌아가는 길은 환히 밝혀져 있었다.

나비공작과 대화를 나눴던 그 방처럼, 복도도 시커멓고 두툼한 커튼으로 창이란 창은 몽땅 덮었던 듯했다.

근데 진짜 그 파란나비는 뭘로 만든 걸까?

물어볼 걸 그랬나?

공연히 바라본 창 밖은 무척이나 화창했다.

“바깥에서 여기 보이려나?”

별 생각없이 중얼거린 말을 위슨이 곧바로 받았다.

“보일걸. 근데 뭘 어쩌겠냐? 여기 8층인데.”

“하긴.”

어떻게 이렇게 높게 지었나 몰라.

근데 여기 위에 몇 층은 더 쌓여 있잖아.종도 있고.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부숴질 거야.

그런 잡다한 생각을 하며 복도를 빠져나와, 다시 어두침침한 특별전시실로 돌아왔다.

돈귀신 할배가 준비했다는 전문가가 여기 있다고 했는데……

나비 빼고 죄다 까매서 내 눈엔 안 보인다.

누구 있나 불러볼까 싶은 순간, 전시실 입구에서 무언가 꿀렁이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애송이 너냐?”

……어디서 들은 목소리 같은데.

날 알아보는 걸 보면 언제 한 번 만난 사람인 건 분명하다.

“저기, 잘 안 보이니까 나가서 얘기하죠.”

“젊은 놈이 그리 눈이 어두워서 쓰나. 쯧, 탑 앞으로 나와라.”

천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는 그대로 사라졌다.

당연히 전시실 입구로 누군가 나가는 모습 따윈 보이지 않았다.

뒷문 같은 게 있나?

뭐, 뒷세계 관련된 일로 연락하는 곳이니 있을 법하긴 하지…….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위슨의 팔을 붙잡고 나비관을 나서기 시작했다.

“야야야, 굳이 그렇게 당길 거 없잖아! 근데 진짜 하나만,”

“아, 거 짜식, 진짜 끈질기네. 내 그럴 줄 알았어. 안 된다니까!”

“……”

성큼성큼 걷던 내 발이 갑자기 우뚝 멈추었다.

길이 막혀서?

아니, 위슨 녀석이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얌마, 포기해! 쓸데없이 힘 빼게 하지 말고!”

“……”

어쭈? 이 녀석, 이거 버티는 거 보게?

아니, 왜 이렇게 나비 못 잡아서 안달이야?!

녀석의 어깨에 앉아 있던 파랑새가 내 머리에 앉더니 정수리를 또 콕콕 쪼았다.

이 자식은 꼭 내 머리에 앉을 때마다 쪼더라.

“내가 말 안 했냐? 위슨은 약재료만 보면 눈이 뒤집어진다니까.”

“이건 뒤집어지는 걸 넘어서 아예 빠진 거잖아!”

“……”

녀석은 뚱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하고 있다.

억지로 당기면 조금씩 조금씩 끌리긴 한데……

이거 평범하게 힘으로 끌고 나가려고 하면 오늘 기운 다 쓸 거야.

그건 절대 안 돼!

하……

어쩔 수 없지.

위슨과 마주서서 마지막으로 물었다.

“좋은 말로 할 때 포기해.”

“……”

“안 한다고? 오냐, 잘 알았다.”

녀석의 팔을 내 쪽으로 홱 잡아당겼다.

예기치 않은 내 공격에 당황한 탓에, 녀석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녀석의 뒷발을 걸었다.

“……!”

녀석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며 몸이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쭉 걸으며, 방향을 틀고 틀어서 출구로 나가기 시작했다!

“……!”

술술 끌리는데다 내 손이랑 팔을 마구 쳐대는 걸 보니 대성공이군.

이 자식, 은근히 손이 맵네.

“나갈 때까지 절대 안 놓을 거니까 포기해라~”

이건 내 아버지가 자주 쓰던, ‘발바닥이 땅에 닿으니까 저항하는 거니, 발꿈치만 닿게 해서 질질 끌고 간다’는 사악한 기술이다.

내가 이걸 어떻게 익히고 있냐, 하도 당했더니 자연히 몸이 깨우쳤다.

하하, 무슨 경험이든 진짜 어떻게 다 써먹게 된다니까.

참고로 메린은 이 기술이 안 걸린다.

홱 당기는 것까진 되는데, 발이 안 걸리기 때문이다.

무서운 자식.

째짹, 파랑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작게 울었다.

“야, 위슨이 ‘아, 이 새끼가, 치사하게 뭐하는 거야’ 라고 하는데.”

“‘아, 형, 이건 너무 치사하잖아요’ 겠지, 이 새끼야. 똑바로 안 할래?”

“‘이 새끼가’ 빼고는 그대로 전한 거거든, 인간 새끼야.”

“덧붙이는 시점에서 글렀거든, 축생 새끼야.”

머리 위의 건방진 축생과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내 걸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고, 덕분에 무사히 나비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니, 팔이랑 손이 엄청 아프니까 무사하진 않구나.

엄청 꼬집어댔네.

멍난 거 아냐?

“하…… 넌 그래도 좀 멀쩡한 편인 줄 알았는데…….”

“‘너보단 멀쩡하거든, 미친놈아’ 라는데.”

“그거 그냥 네가 하는 소리 아니냐?”

내려갈 때만 쓰는 승강기 앞에 서서, 요청용 끈을 당겼다.

이 끈을 당기면, 승강기 안에서 도르래를 돌리는 사람에게 몇 층에서 부르는지 신호가 가는 듯했다.

승강기가 오길 기다리는데, 옆에서 엄청나게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슬쩍 돌리니, 위슨 녀석이 원한 서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저주할 거야’ 라는데.”

“……”

이건 진짜 같은데.

이 녀석, 내가 지 도둑질을 막았다고 날 저주하겠다는 거야?

돌겠네, 진짜.

돌아가는 길에 뭔가 먹여서 달래야겠구만.

절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승강기를 타고 내려와 시계탑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누군가 바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고개를 돌리니, 시커먼 색의 망토를 두르고 후드를 살짝 걸치고 있는, 얼굴에 주름밖에 없는 것 같은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이제 알아보겠냐? 애송아.”

어, 본 적 있는 사람인데.

어디서 봤더라?

“아.”

“하, 그래, 임마. 전에 네가,”

“전혀 기억 안 나는데, 어디서 봤었죠?”

“……”

주름진 눈이 굉장히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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