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106화 : 그것은 꽃봉오리인가? 아니면…… (1)
* * *
의상실.
이름만 처음 들었을 때는, 말 그대로 옷한테 방을 줬다는 것에 엄청나게 큰 충격을 받았다.
역시 귀족과 부자는 상식 저 너머에 있구나,
혹시 옷을 침대에 재우기도 하는 걸까, 했지.
하지만 실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확연히 달랐다.
옷을 재우는 곳이 아니라, 그날그날 상황에 맞는 옷을 준비하여 입고, 화장이나 장신구를 다는 등,
한 마디로 몸치장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굳이 그걸 방을 따로 둬서, 그것도 전문가까지 별도로 고용해서 해야 하나 싶긴 한데……, 집주인인 옐리카에겐 굉장히 중요한 일인 거겠지.
뭐, 여자이니까 몸치장에 신경을 많이 쓰는 건 이해 못할 건 아니다.
“호호호호! 좋아요, 좋아! 아~주 훌륭해요!!”
“……”
아직 의상실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의상 전문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으으, 아까도 우리 각각의 몸 치수를 재면서 엄청 호들갑을 떨던데, 그 소리를 또 들어야 하는구나!
……근데 뭐가 훌륭하다는 거지?
메린?
녀석이 로나한테 끌려간 지 서너 시간은 됐을 테니, 슬슬 준비가 다 끝났을 거 같긴 한데.
“오~ 다 됐나보네요! 카엘 님, 빨리요, 빨리!”
로나가 나를 막 끌고 가기 시작한 걸 보면, 메린 녀석의 준비가 다 끝난 게 맞는 듯하다.
로나는 힘차게 의상실의 문을 열며 외쳤다.
“마릴리에 부인! 카엘 님을 모셔왔어요!
꺄아아아아!!”
문이 벌컥 열리며 드러난 그 광경에, 로나는 눈밭에 내놓은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며 마구 환호성을 질러댔다.
반면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 눈이 보고 있는 저 모습이 제발 환각이길 기도하고 기도하며, 나는 굳어버린 머리를 억지로 돌려 말을 쥐어짜냈다.
“……너…….”
“……”
“……그런 취향……이었냐……?”
앗.
엎어졌다.
위슨이.
……그렇다, 문이 열리며 나타난 것은 메린의 드레스 차림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의상 전문가, 마릴리에 부인이 최고조로 흥분한 목소리로 극찬하며, 로나가 근처 꽃병이라도 깨뜨릴 듯이 환희의 비명을 지르는 그 모습은,
위슨의 프릴 드레스 차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짙은 쪽빛의 고급 옷감에, 목둘레, 소매, 허리, 그리고 치마자락에까지 온통 프릴이 치렁치렁 달려 있다.
세상에, 장갑에 모자에 구두까지……
아주 그냥 완벽하게 다 맞췄네.
머리는 아직 약간 부스스한 걸 보면, 일단 옷 먼저 맞춘 듯했다.
“우와, 우와아아! 위슨 씨, 너무 잘 어울려요!! 역시 마릴리에 부인! 안목이 탁월하시네요!!”
“호호호! 당연한 말씀! 제가 괜히 옐리카 아가씨와 오래 일한 게 아니랍니다~!”
“……오, 주여…….”
대체 이게 무슨 끔찍한 참상이란 말입니까?
어쩌다 붙잡혀서 저 꼴이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위슨의 반응을 보니 억지로 입힌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아, 그래서 살려달라고 했던 건가?
그래서 그 거북이가 뭔 일인지 말은 안 해주고 허허 웃기만 했던 건가!
“……”
하인들의 부축을 받고 의자에 앉혀진 위슨의 눈은, 완전히 죽어 있었다.
아아, 가엾어라.
그러니까 내가 진작에 머리 자르라고 했던 건데…….
근데 이렇게 보니까 머리가 짧았으면 드레스 입히고 가발 씌웠을 거 같아.
왜냐?
사실 이 점이 이 녀석에게 있어 가장 큰 불행이기도 한데, 바로엄청 그럴싸하다는 것이다!
머리가 부스스해서 그렇지, 지금 녀석은 누가 봐도 여자였다.
“……잘 어울리긴 하다……. 예쁘네…….”
“……”
앗.
고개가 꺾였다.
불쌍한 녀석.
나는 한숨을 쉰 후, 넋이 나간 위슨을 이리저리 보면서 감탄하고 있는 마릴리에 부인을 불렀다.
“저기요, 왜 애를 이 지경을 만들고 그러세요? 엄청 싫어하는 거 같은데.”
“호호, 그게 아주 작~은 문제가 있었지 뭐에요? 위슨 님의 체형이 너무너무 가느다란 나머지, 여기 하인들 중에 맞는 옷이 없는 거 있죠~! 키에 맞추면 너무 펑퍼짐하고, 몸에 맞추면 소매가 너무 짧아지고!”
“아니, 원래 안 맞는 걸 좀 고치기로 한 거잖아요.”
딱 맞는 옷이 있을 리가 없지.
사람 몸이 무슨 주형으로 찍어서 만드는 것도 아닌데.
혹시 그냥 입혀 보고 싶어서 핑계 치는 거 아냐?!
부인은 들고 있는 작은 쥘부채를 흔들며, 고개도 같이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 고치는 정도로는 안 돼요. 아예 새로 만드는 거나 다름없겠더군요. 그래서 혹시 싶어 옛날에 아가씨가 입었던 옷 중에서 찾아봤더니, 마침 딱 맞는 게 있지 뭐에요~!”
“……”
보통 맞는 옷이 없으면 포기하지 않나?
어떻게 거기서 여자 옷을 입힌다는 발상이 나오는 거야?
의상 전문가는 다들 이래?
“호호호호, 아무튼 그렇게 된 거니, 포기하고 얌전히 입어주세요. 봐요, 옷도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데요~! 이제 이것에 맞춰서 머리와 얼굴을 꾸미면 되겠네요!”
“……”
옷은 기뻐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옷을 걸치고 있는 장본인은 반 송장이 되어 있다.
……역시 말려야겠어.
이대로 두면, 녀석의 무언가 중요한 게 망가질지도 몰라.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부인,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닙니다. 솔직히 굉장히 어울리긴 하지만,”
……기침이라도 했는지 위슨의 몸이 한 번 크게 들썩였지만, 애써 못 본 척했다.
“저대로 파티장에 가면 경기 일으킬 거 같거든요? 그…… 쟤가 좀 그런 거에 민감하니까, 치수 안 맞더라도 그냥 남자 옷 주세요.”
여태까지 쭉 속은 채로 여자 옷을 입고, 여자로서 살아온 녀석이다.
이제 제 성별대로 살기 시작한 지 겨우 두 주밖에 안 됐는데 섣불리 건들면 안 된다고.
본인이 원해서 입는 거면 또 몰라, 억지로 입히면 안 되지.
“으으~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할 수 없네요……. 그럼 최대한 조정해보도록 할게요.”
마릴리에 부인은 시무룩한 얼굴로 하인들을 향해 손짓하고서 의상실 안쪽으로 사라졌다.
완전히 넋이 나간 위슨이 하인들의 손에 이끌려 그 뒤를 따르는 걸 본 후, 나는 바로 로나를 노려보았다.
“윽.”
눈을 피하는 걸 보면 잘못한 걸 알긴 아는 모양이지?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었다.
“너 임마, 네가 제일 나빠, 이 자식아. 저 부인은 어쨌든 넌 말렸어야 할 거 아냐. 근데 그걸 냅두고, 옆에서 좋다고 떠들고 있어? 너도 쟤 사정 뻔히 알면서!”
“으…… 그게, 마릴리에 부인이 그 드레스를 위슨 씨에게 대충 대시는 걸 보고…… 갑자기 무언가 눈앞이 확 트이는 듯한 감각과 함께 기분이 고양돼서 저도 모르게……. 죄송해요…….”
이상한 취미에 맛들리기 직전이었던 건가!
완전히 각성하기 전에 싹을 잘라버려서 다행이다.
“하…… 이따 위슨이 멀쩡해지면 사과해.”
“네…….”
“근데 메린은 어딨어?”
너무나도 충격적인 광경에 주의를 빼앗겨 몰랐는데, 이제 보니 의상실 안에는 메린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기 방에 갔나?
주눅이 들었던 로나의 얼굴에 다시 방글방글 웃음이 돌아왔다.
어려서 그런지 회복이 참 빠른 거 같다.
여러모로.
“메린 님은 아직 준비 중이세요.”
“아직도?!”
“이제 겨우 드레스를 고른 데다가, 메린 님, 머리도 엄청 길잖아요. 시간이 좀 걸린대요. 저~기 안쪽에서 옐리카 님이 같이 봐주시고 계세요.”
그녀는 위슨이 사라진 곳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준비실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니, 여기 옐리카 혼자 쓰는 게 아닌가보네.
그보다 옐리카까지 붙어서 메린을 꾸미고 있는 거야?세상에…….
그 녀석, 갑자기 성질부리면서 뛰쳐나오는 건 아니겠지?
좀 걱정되는데…….
이거 내가 가볼 수도 없고.
“에스트렐 님~! 이쪽으로 오시죠~!”
마릴리에 부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로나가 내 등을 툭툭 밀면서 재차 입을 열었다.
“카엘 님은 저쪽으로 가보세요! 저도 메린 님한테 가볼 테니까요!”
“어, 응. 그래.”
나 참, 이게 무슨 난리인지…….
한숨을 쉬며, 나는 위슨이 끌려들어간 준비실로 향했다.
준비실 안에는, 위슨이 따끈한 차를 마시면서 거울을 마주한 채 앉아 있었다.
본래 입고 다니던 옷을 걸치고 있어서 그런지, 녀석의 눈빛은 다시 살아나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검은 머리카락을 마릴리에 부인이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매만지고 있었다.
“자르려고요?”
“으음~ 그걸 지금 고민하고 있거든요~ 그냥 다듬기만 하고 길게 묶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다듬기만 해요, 다듬기만. 저희가 예복 입는 건 오늘밖에 없을 텐데, 너무 옷에 맞추면 안 되잖아요.”
부인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인 후, 가위를 든 하인에게 지시를 내린 다음, 나를 향해 몸을 휙 돌렸다.
윽, 이번엔 나인가?!
나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렸다.
“에스트렐 님은…… 다듬기만 하면 되겠네요.”
“……”
뭐지?
이것저것 끈질기게 요구하는 걸 물리치지 않아도 되니 굉장히 다행스러운 일일 텐데.
뭘까, 이……무언가 허한 기분은.
왠지 ‘네 얼굴엔 뭘해도……
……아니, 생각하지 말자.
알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을 품고, 부인이 권하는 대로 위슨의 옆 자리에 앉았다.
“여기 여러 명이 쓰나 봐요?”
“그럼요. 아가씨 이외에도, 저택에 무언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용인들도 이곳에서 치장을 한답니다. 그 사람들도 저택의 얼굴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하긴, 저택 주인은 말끔한데 그 아래에 있는 하인들과 하녀들은 부스스하면 그림이 좀 좋진 않지.
그래도 사용인들에게도 이 공간을 쓰도록 허락하다니, 옐리카가 통이 크긴 크구나.
내 뒤에 선 하인이 마릴리에 부인의 지시대로 가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흠…… 제대로 이발 받는 건 처음인가?
그동안은 그냥 대충 칼로 잘랐는데, 이렇게 누가 머리 건드리는 걸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네.
“그런데 소더 님과는 무슨 사이이시죠?”
“……”
나도 모르게 기겁하며 벌떡 일어날 뻔했다.
아니 뜬금없이 그런 건 왜 묻는대?!
“……고향, 친구인데요.”
“흐음, 그래요?”
“……그런데요. 왜요?”
왠지 목이 메여왔지만, 어떻게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 나와 메린은 고향 친구이다.
일단은.
……응? 일단은?
일단이라니, 뭐야, 그게?
꼭 뭔가 더 있는 거 같잖아.
뭐가 더……
있나……?
생각에 잠겨가는 내 귀에, 마릴리에 부인의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은방울꽃 펜던트, 당신이 선물하신 거라면서요?”
“……가, 감사의 표시로 준 거지, 별 다른 뜻은 없는데요.”
“그래요? 그런 것 같진 않던데. 아니면 그 아가씨 혼자 다른 뜻을 품고 있나?”
아잇, 진짜.
그 녀석이 다른 뜻을 뭘 품을 게 있다고.
그거야말로 진짜 말도 안 되는 망상이지!
그러나 부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을 이었다.
“그 펜던트, 절대 안 풀겠다고 어찌나 고집을 부리시던지. 드레스에 훨씬 더 어울릴 법한 걸 보여드려도, 파티에 참석했을 때만 하시면 된다고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완강히 거절하시지 뭐에요?
정말이지, 너무너무 아쉬워요~! 최고의 아름다움을 선사해드릴 수 있었는데!”
“……”
맹세코, 난 그녀에게 ‘맨날 걸고 다니라’는 소리는 단 한 마디도 안 했다.
그러니까 이건……
그래, 그녀가 생각보다 그 펜던트가 무척 맘에 들었던 거다.
그런 단순한 이야기겠지.
……그렇구나. 맘에 들었던 거구나.
그때는 녀석이 우물쭈물거려서 내가 고를 수밖에 없었는데, 반응이 너무 멍해서 맘에 든 건지 아닌지 잘 몰랐는데.
그래도 모처럼 옐리카가 큰 맘 먹고 장신구도 빌려주기로 한 거니, 그 펜던트 잠깐 빼도 될 텐데.
훨씬 더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목걸이들이 많을 테니까.
근데 그걸 다 거부하고, 내가 준 펜던트를 고집하다니 바보구만.
정말이지……
……입가를 가리고 싶어 미치겠다.
금방이라도 풀어질 거 같아.
그보다 덥다.
아니, 뜨겁다.
주로 얼굴이.
진짜 별 일 아닐 텐데.
그녀가 고집을 부렸다는 그 사실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려 한다.
……지금 상태에서 거울을 봤다가는 바깥으로 뛰쳐나갈지도 몰라.
나는 필사적으로 아래쪽을 바라보며, 시선을 들지 않으려 애썼다.
“……호호, 귀여운 분들이네. 걱정 마세요~! 아~주 약간만 아쉬울 뿐, 이 마릴리에, 단연코 그 아가씨를 최고로 아름답게 만들어드렸고 말고요~!”
“……”
한껏 과장된 몸짓과 말투로 내 기대를 부추기고자 하는 부인에겐 미안하지만,
솔직히 상상이 안 된다.
메린이 치마를 입었던 건, 어렸을 때 그 몇 년이 전부이다.
말을 타면서부터는 쭉 바지만 입었고, 마을 축제에도 잘 참가하지 않아서 드레스를 입은 적이 없다.
아, 한 번 있구나.
마녀의 숲…… ‘부엉이탑’이 있는 그 섬에서 보라머리 마녀가 입혔었지.
그때 말했던 것처럼 예쁘긴 했다.
때와 장소가 영 안 맞는데다, 그냥 옷만 갈아입고 머리만 대강 만진 게 다라서 그렇지.
하하, 바지 입으면 어떻게 앉든 잔소리 안 들어도 되니까 좋다며 낄낄대던 녀석이 드레스라니.
그것도 파티용.
……진짜 상상이 안 돼.
“호호호~! 각오 단단히 하시는 게 좋을 거에요~!”
뭔 결투하러 나가는 것도 아닌데 각오를 해?
만면에 웃음을 띄운 채 재잘대는 그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머리를 다듬고, 준비된 예복까지 싹 갈아입은 후, 준비실 바깥에서 기다리는 상태가 되었다.
아까 위슨이 죽은 눈을 하고서 앉았던 그 의자에, 이번에는 내가 얼이 빠진 채 앉아 있는 신세가 되었다.
“……왜 기다려야 돼?”
이해가 안 돼.
어차피 있다가 볼 거잖아.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나에게, 마릴리에 부인은 ‘기다리라’는 딱 한 마디만 남기고 메린이 있다는 준비실 쪽으로 들어가버렸다.
……기묘하게 강한 압박을 두 눈에 한가득 담은 그녀의 말을, 나는 도무지 거역할 수가 없었다.
앨런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진 아직 멀었고,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긴 한데……
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슬슬 나 자신이 이 의자에 동화된 게 아닐까 싶을 즈음, 마침내 준비실의 문이 끼익 열리며 로나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히히, 다 됐어요!”
“그러냐…….”
됐으니까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로나가 한 걸음 한 걸음, 준비실 바깥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잡힌, 길다란 소매자락을 휘날리는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보였다.
마침내 문이 완전히 열리며, 붉은색과 은색의 긴 치마자락이 살며시 물결치며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이윽고……
“……”
시간이 멈추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