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119화 : 자유도시 말리스에 또 오시길!
* * *
바쁘시니 됐다고 여러 번 사양해도, 옐리카는 직접 집 앞까지 배웅하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집주인이 손님을 배웅하는 건 의무에요! 얘기 끝!”
“……”
물론 그 말이 맞긴 한데……
대저택의 주인이 바깥에 나오면, 다른 사용인들까지 우글우글 따라 나오는 법이란 말이지?
지난번에 내가 분명히 ‘주목받는 거 싫어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말야?!
그리고 내 예상은 훌륭히 들어맞았다.
저택 바깥, 현관 앞에 모든 사용인이 일제히 모여 서고, 그 앞에 옐리카와 피터 왕자가 나란히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자연히 내 얼굴은 구겨졌다.
“후후, 떠나시는 게 그리 아쉬우신가요?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계시네~”
“아잇, 진짜! 당신 역시 일부러 이러는 거죠?!”
“어머, 저는 그저 집주인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용사님이 가시는 건데, 마땅히 온 식구가 나와 작별 인사를 올려야죠!”
“하아………….”
상인에 귀족 아니랄까봐, 말은 진짜 잘해요.
아침부터 깊은 한숨을 쉬는 나를 향해, 피터 왕자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저도 말리려 했는데…… 아무래도 단단히 심통이 났더군요.”
“아니 어이가 없네, 내가 뭘 어쨌다고요?”
귀족의 주특기, 생트집 잡기를 시전할 생각이로구나!
오냐, 덤벼라!
내 절대로 순순히 물러나진 않을 테다!
그러나 내 굳은 결의는, 옐리카가 방긋 웃는 얼굴로 딱 한 마디 던지면서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복수초, 창고.”
“……”
곧바로 뇌리에 지난 일의 장면이 슈슉,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메린이 문을 거세게 걷어차 날려버리는 모습.
문이 직선으로 날아가면서, 그 경로에 있던 선반들을 무너뜨리는 모습.
선반에 올려져 있던 나무상자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선반에 깔리는 등 아수라장이 돼버린 모습.
아아……
그때 울렸던 소리까지 훌륭하게 다시 떠오른다.
마치 부연설명을 하는 것처럼, 옐리카의 목소리가 그 위에 덧씌워졌다.
“거기 귀~한 도자기 그릇들도 있었지 뭐에요? 식량 창고랑 금고는 불가항력으로 제외했는데도 엄~청 값이 빠져버렸어요! 덕분에 여왕장미 값으로 받으려던 거, 반의 반도 못 받았답니다!! 후후후후훗!!”
……생트집이 아니라완벽한 업보였다.
근데 내가 한 거 아닌데.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억울해!!
“생각 같아서는 무보수로 보검 찾아오라고 싶지만, 사명이 있으시니 그건 참기로 했어요. 후우, 제 너그럽고 관대한 성정에 감사하세요.”
“……”
어디가 너그럽고 관대하다는 거지?
내가 모르는 새에 단어 뜻이 바뀌었나?
애당초 그 여왕장미 잡아온 건 우리잖아.
나 참, 별 괴상한 생색을 다 내네.
후우……
그간 밥이 맛있었으니 넘어가준다.
난 관대하니까.
“보검 하니 생각나는데, 카엘 씨, 정말 아무것도 모르세요?”
“아니, 왕자님까지……. 하,왜 다들 저한테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네요.”
“하하, 왠지 카엘 씨라면 무언가 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오라버니 말이 맞아요! 카엘 씨는 제 거래 이야기를 듣고 노발대발하기도 했잖아요? 저도 막 촉이 온다고요. 찌리릿, 하고.”
그거 그냥 번개를 맞은 게 아닐까?
아니면 정전기가 오른 거겠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저기, 그 이야기 듣고 화 안 낼 사람은 없거든요? 그리고 그거 망치려면 보검 훔치는 것밖에 없을 텐데, 제가 그걸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 골치가 아프다니까요! 정말 어디로 사라진 건지 짐작도 못하겠어요.”
“……”
이건 좋은 뜻이다.
옐리카는 내가 도둑질 같은 건 절대 못하고, 좋지 않은 사람들과 엮일 생각도 안 하는 선량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거다.
……근데 왜 내 귀에는 계략 하나 못 꾸미는 순딩이라고 하는 것 같지?
또 내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속삭이는 걸까?
“뭐, 걱정 마세요. 보검은 금방 찾으실 수 있겠죠.”
“하아…… 그랬으면 좋겠는데요.”
“하하, 믿으셔야죠. 믿으며 두드리는 자가 열매를 얻으리라, 그런 말씀이 있잖아요? 그치, 로나?”
내가 던진 말에, 로나는 헤실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모습에 옐리카는 씁쓸히 웃은 후,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저 옐리카 볼포브나 바실리예프, 짧은 시간이나마 용사님을 모실 수 있었음을 큰 영광으로 여기나이다. 창조주께서 그대의 발걸음을 보살피시기를.”
우아하게 인사한 후, 옐리카는 생긋 웃으며 왕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예상 못했다는 듯이 흠칫 놀랐지만, 이내 헛기침을 한 후 말을 꺼냈다.
“디왈리의 피를 이은 자로서, 이 왕국과 대륙의 명운을 진 용사를 손수 떠나보낼 수 있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부디 창조주께서 그대의 여정을 굽어살피시기를.
……하하, 꼭 다시 봬요, 카엘 씨. 그때는 반드시, 제가 입은 은혜를 다 갚겠습니다.”
대답 대신 쓴웃음만 지어주며 말에 올라탔다.
다른 녀석들이 각자 인사를 건네며 준비되기를 기다린 후,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며 외쳤다.
“여러모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미리 인사드리는 건데, 결혼 축하드려요! 두 분 행복하십시오!”
“?!?!”
별 피해도 없을 폭탄을 던져버린 다음, 잽싸게 말을 출발시켰다.
등 뒤에서 비명 소리가 나는 걸 듣고 있자니, 굉장히 유쾌해졌다.
결혼 축복만으로도 저렇게 좋아하는데, 결혼선물을 보면 어떻게 될까?
잠시 후, 아가씨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고민하며 집무실에 들어설 것이다.
책상 앞에 앉자마자, 곧바로 집사에게서 선물을 전달받게 되겠지.
이라는 쪽지가 붙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검을.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거기 창문 죄다 깨져버리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잠시 그려본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부디 꽃길만이 펼쳐지기를.
진심으로 축복하며 길을 달렸다.
도시의 큰길로 들어선 후, 처음에 들어왔던 남쪽 성문으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처음에도 이렇게 마차용 포장길로 갔으면, 인파에 휩쓸리는 일 없이 편하게 갔겠네.
이런 걸 미리 안내해줘야지, 나 참,진짜 웃긴 도시야.
짐마차들 사이에 껴서 천천히 길을 가며 도시의 경관을 둘러보았다.
늦은 밤까지 북적이는 이 도시도, 아침에는 무척 한산하다.
부지런한 상점 주인들이 문 앞을 비질하는 것 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덕분에 평소보다도 더 먼 곳까지 여유롭게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느긋~하게 위병소 앞을 지나치는데, 누군가가 마침 문을 열고 나오더니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한데 누구지?
기억을 열심히 뒤져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고, 결국 그 여자애가 길에 뛰어들 기세로 달려오는 바람에 잠시 비켜서야 했다.
말에서 내리는 나를 향해, 소녀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사람이 친절하게 인사해주는데 왜 대꾸를 안 해!”
“……기억이 안 나서.”
“뭐? 나한테 그런몹쓸 짓을 해놓고 기억을 못한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너무해!”
“야, 그딴 소리하지 마!! 오해하잖아!!”
아앗, 왠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이 차가운 것 같아.
덧붙여 내 뒤의 녀석들도 눈이 썩은 것 같은데, 이 자식들이 지금 장난하나?!
“너네 계속 나랑 같이 있었잖아! 왜 그딴 눈으로 봐?!”
“……”
“말 좀 해!!”
이 녀석들이 진짜 날 뭘로 보고……!
나는 이 사단을 일으킨 원흉을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너 진짜 나 아는 거 맞아?!”
“그럼 내가 거짓말한다는 거야?형씨가 그때 영감한테 나 넘겼잖아!”
“……형씨?”
날 형씨라고 부르는 여자애를, 내가 영감한테 넘겼다?
……아, 설마?
“……클레어?”
“그래!”
소녀가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 걔가 얘라고?
양갈래로 땋아내린 머리, 소박하지만 깔끔한 옷에 앞치마를 입은 이 소녀에게선 거적때기 뒤집어쓴 모습이 전혀 연상이 되지 않는다.
아니, 옷 하나 갈아입었다고 이렇게 사람이 변할 수가 있나?
“……”
……있구나. 바로 어제 경험했잖아.
경우에 따라선 엄청난 파괴력을 지닐 정도로 사람이 변하는 걸.
붉은 드레스, 춤, 달빛…….
……으악, 안 돼.
여기서 갑자기 이러면……!
“엉? 형씨, 갑자기 왜 얼굴 빨개졌어? 어디 아파?”
“빠, 빨개지긴 누가! 햇빛 받아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아으, 이 꼬맹이 때문에 괜히 더 화끈거리는 거 같아!
……설마 본 건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메린에게 눈이 갔다.
그녀는 내가 이 꼬맹이와 이야기 나누는 거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후……다행이다.
이 얘기 들었으면, 분명 그녀는 또 열 나는 거 아니냐며 이마 짚으려고 들었겠지.
아침부터 굳을 뻔했어.
나는 서둘러 헛기침을 한 후, 클레어에게 말을 건넸다.
“……근데 왜 여기 있어? 아, 알겠다. 드디어 위병에게 잡혀서 개과천선했구나! 옷 입은 걸 보니 집에도 들어갔고!그래그래, 잘했어.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다.
너네 할아버지 진짜 되게 무서운 분이니, 앞으로 말씀 잘 듣고 착하게 지내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심으로 말해주었다.
이 소녀의 할아버지, 앨런이 보통 노인네인가?
수틀리면 바로 머리통 갈기고, 창문으로 던진다고 협박하는 성질 더러운 영감탱이 아닌가!
몸을 잘 사려서 곱게 큰 다음, 좋은 신랑감 잡아서 탈출하는 게 이 소녀의 유일한 살 길일 것이다.
그 노인네가 전설적인 도둑이라는 거?
그게 얘랑 뭔 상관이야.
……잠깐. 이 녀석이 집에 들어간 거, 혹시 그때 따귀 맞은 공포 때문인 건가?
“혼자 뭔 소리하는 거야. 뭐어, 집에 들어간 건 맞지만.”
“그래…… 그 싸대기가 좀 아파 보이긴 했어……. 부디 무사히 잘 자라렴…….”
“뭔 소리야, 형씨, 아침부터 술 마셨어? 길거리에 있을 필요가 없어서 들어간 거야.”
음, 따귀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구나.
하긴, 한두 대 맞는 것 정도로 쫄면 좀도둑질도 못하지.
“그리고 저기선 언니 기다리고 있던 거고.”
“언니?”
“어. 언니랑 같이 언니 만나러 가기로 했거든! 후히, 캐롤라인 언니를 다시 만나다니!”
어어…… 그러니까 위병소 앞에서 언니를 만나서, 그 캐롤라인이란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소리이겠지?
즉, 얘는 언니가 둘인 것이다.
클레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 헤어진 뒤로 못 만났거든. 요전에야 겨우 언니가 있는 곳을 알았는데, 할아버지가 절대 안 데려가준다고 하니까 집을 나온 거야.”
혹시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하여 거리의 좀도둑이 되고, 매일 밤마다 언니가 있다는 곳을 찾아 살피었건만, 불행히도 그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언니가 있다는 곳이, 하룻밤 새에 홀라당 불에 타 잿더미가 된 것이다.
“허, 꼭 ‘토끼풀 저택’ 같네.”
“어? 맞아. 거기야.”
“어, 그래? 아, 그래서 네가 거기 위치를 알고 있었구나.”
중간에 할아버지가 끼어든 탓에 이야기가 살짝 꼬였었지만, 처음엔 이 애에게 그 창관의 위치를 들으려 했었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그 창관에 가려 했던 것도, 클레어가 거기에 애들을 실은 마차가 있는 걸 봤기 때문이었지.
그날 광장에서 얘를 만나지 못했다면, 우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난 언니가 안 죽었을 줄 알았어! 할아버지는 죽었을 거라고 하는데, 후힛, 어제 편지가 왔다! 캐롤라인 언니는 애초에 딴 데 있었대. 그래서 오늘 만나기로 했어. 후히힛, 너무 기대 돼!”
“그래그래, 잘 됐네.”
“이거 봐, 언니가 편지랑 같이 보내준 거야!”
소녀가 까르르 웃으며 내민 것은, 딱 봐도 고급 천으로 만든 손수건이었다.
꽃잎이 풍성하게 달린 노란 꽃과 함께, 클레어의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예쁘지? 언니가 이거 가지고 있으면, 어디를 가든 안전할 거래.”
“하하, 그럴 거야. 꽃잎 많이 달린 꽃은, 보통 오래 살길 바란다는 뜻을 가지거든. 좋겠다, 야.”
클레어는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이 웃으며, 우리를 훑어보았다.
“댁들 여기 떠나는구나? 어디로 가?”
“서쪽.”
“거기 산밖에 없는데.”
“어. 맞아. 산에 올라갈 거야.”
그러자 소녀가 놀란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형씨, 모르는구나.지금 산길 막혔어.”
“……뭐? 막혔다고?”
“어. 소문에는산신이 내려왔다고 하던데. 아무튼 못 올라가.”
산신은 또 뭐야.
가만히 로나를 돌아보자, 그녀는 묻지 말라는 듯이 어깨를 크게 으쓱였다.
……역시 모르는구나.
아무래도 직접 가서 알아봐야 할 듯했다.
“클레어!”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클레어는 또 다시 활짝 웃으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 왔다. 난 가볼게! 댁들도 잘 가!……크리스틴 언니~!”
그렇게 멋대로 가까이 왔던 것처럼, 소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뛰어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위병소 앞에 셔츠와 바지 차림을 한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남자처럼 짧게 친 머리카락이 굉장히 인상적인 사람이다.
저 차림으로 크리스틴이라니, 이름 되게 안 어울리네.
……짧게 친 머리카락의 여자?
허? 설마??
“아~ 생각났다. 복수초다, 복수초.”
갑자기 위슨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얘는 또 뭔 소리인가 싶어 쳐다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아까 그 손수건에 박혀 있던 거, 그게 복수초야. 위슨이 아는 거랑 생긴 게 달라서 헷갈렸네.”
복수초를 수놓은 손수건을 선물했다……?
그걸 가지고 있으면 안전할 거라고 했다……?
복수초, 잉그리트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 년이 우리 세 자매를 고아원에서 샀어.
언니랑 다시 만난 것도 얼마 안 됐어. 내가 알리지 말라고 했으니, 동생은 아직 내가 그 창관에 있는 줄 알걸.
……베아트리스에게 팔린 나이비와 잉그리트, 그리고 막내 여동생.
잉그리트는 언니와 동생을 그 창관에서 빼내고, 대신 그곳에 몇 년 남았다.
그리고 최근에야 언니인 나이비와 다시 연락이 닿았다.
막내 여동생에겐 여전히 비밀로 한 채.
어렸을 때 헤어진 뒤로 못 만났거든.
……클레어는 어렸을 때, 두 언니 중 하나와 헤어졌다.
최근에야 그 헤어진 언니가 ‘토끼풀 저택’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어제 그 언니가 편지와 함께, 복수초가 수놓인 손수건을 보냈다.
……내가 잉그리트에게 이야기 하나를 해주었던, 그 당일에.
그냥 우연일까?
비슷한 사정을 가진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닐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일단 이 세상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고,
지금 저 소녀와 함께 있는 사람은, 뺨에 큰 흉터를 지닌 나이비 대장이니까.
그녀가 저 소녀를 정답게 대하는 걸 보면, 둘이 자매 사이인 건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
“하…….”
……그 노인네, 그런 뜻이었구나.
추가 보수를 주겠다는 내게, 이미 보수를 받았으니 필요 없다며 했던 말.
네가 내 손녀의 목숨을 구했어. 그러니 더는 필요 없다.
앨런은 클레어의 할아버지이고, 클레어는 나이비와 자매이다.
그리고 나이비는 잉그리트와 자매이고.
즉, 내가 목숨을 구했다는 앨런의 손녀는…….
“……나 참.”
세상 좁다더니, 진짜네.
기가 막힌 가족관계에 헛웃음을 켜며, 나는 다시 말에 올라 길을 다시 가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그 여자, 동생을 만나기로 한 거구나.그게 옳지.
서로 살아 있으면서, 또 보고 싶어하면서 만나지 않는다니 말이 안 돼.
그러다 영영 기회를 놓칠 수도 있는데.
물론, 오늘의 만남이 계속 좋게 이어지리란 보장은 없다.
설령 그렇더라도, 세 자매가 다시 만나는 순간만큼은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최고로 행복한 때이겠지.
마침 오늘도 날씨가 맑다.
분명 좋은 하루가 될 거야.
왠지 모르게 그런 확신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