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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22화 (122/475)

〈 122화 〉 120화 : 해바라기의 토로 (1)

* * *

성문을 나와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중간에 만난 오솔길로 들어가 서쪽으로 향했다.

이 길이 맞는지는, 내 앞쪽에서 엘크를 타고 가는 저 위슨만 알겠지.

내가 ‘춤추는 해바라기’라는 여관으로 가야 한다고 말을 꺼내자마자, 어째서인지 위슨이 안내역을 자처했다.

그 여관이 말리스의 남서쪽에 있다는 정보 자체는 그도 들었겠지만……

어째 꼭 세부적인 위치까지 다 알고 있는 눈치란 말야?

엘크나 늑대에게 미리 알아보라고 시켰나?

“아니, 딴 놈한테 시켰어.”

“딴 놈? 누구?”

“있어. 자유자재로 싸돌아다닐 수 있으면서 글도 읽을 수 있는 놈.”

음, 모르겠다.

애초에 이 녀석이 일 시켜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놀랍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다 왔네. 직접 봐봐.”

정말로, 위슨이 고갯짓으로 가리킨 방향에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리스에 비하면 한참 작지만, 일개 마을 치고는 그럭저럭 규모가 있어 보였다.

아마 그 돈독 오른 도시에 묵을 수 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있던 거겠지.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까.

……맞다, 그럼 저기엔 신전도 있겠구나.

오오, 드디어 축복 기도를 받을 수 있겠어!

이제 불운은 안녕이다!

기쁜 마음으로 입구 앞에 다다른 나는,

“되게 늦네. 좀 빨리빨리 와!”

모자를 깊이 눌러쓴 엘프를 보며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

천천히 위슨을 돌아보자, 그는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먼저 출발시켰다더니 이런 거였냐?”

“편하잖아. 기왕 같이 가게 된 거 팍팍 써먹어야지.”

“하아…….”

한숨을 쉬며 말에서 내린 후, 기분이 영 좋지 않아 보이는 엘프, 블루벨에게 다가갔다.

옐리카의 감옥에 있어야할 그녀가 여기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그녀를 데리고 엘프에게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블루벨을 보내 용사를 죽이려 한 걸 보면, 엘프들이 용사에게 적대적인 건 자명하다.

그러니 내가 만약 맹약서를 들이밀며 공식적으로 면회를 요청하면, 분명 그 자리에서 바로 벌집을 만들려 하겠지.

그러니 우리는 암살미수로 체포된 이 엘프를 데리고 가서,‘인간 왕국의 왕자를 죽이려 한 것’에 항의를 할 작정이다.

이걸 왕국 측에서 정식으로 진행하게 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우리가 대신 그 일을 맡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그거 아니어도 엘프를 찾아가야 하니까.

즉, 블루벨은 우리의 포로였다.

“……흥.”

나와 눈이 마주치자, 블루벨은 바로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재차 한숨을 쉰 후, 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블루벨. 미리 말하는 건데, 내가 시킨 거 아니니까 나한테 지랄하지 마.”

“알아. 저 마녀가 단독으로 지시한 거잖아. 흥! 사악한 마녀가 할 법한 짓이지.”

“……”

일단 위슨과는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군.

블루벨이 아직도 목과 양 손목에 두르고 있는 저 끈……

혹시 억지로 달았던 걸까?

“아니, 합의하에 단 건데.”

“그런 거 치고는 너 죽이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인데.”

만약 엘프가 눈으로 화살을 쏠 수 있었다면, 위슨의 이마에 구멍이 벌써 한 다섯 개는 나 있을 거다.

뒤에 선 메린과 로나가 각각 무기 손잡이를 쥘 정도로, 블루벨은 굉장히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개미 더듬이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위슨은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저거 끼고 있으면 위슨 말을 들을 수밖에 없거든.”

“……엉?”

“볼래?Ordonner, 블루벨, 제자리에서 재주넘기 한 바퀴 실시.”

“큭!”

위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블루벨이 짧은 신음을 흘린 후,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공중에서 한 바퀴 돌고 착지한 다음, 그녀의 눈에선 한층 더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봤지?”

“마법이야? 너 말을 써서 하는 건 못한다며.”

“못해. 이건 주문이 아니라, 도구를 작동시킨 거야. 귀쟁이가 하고 있는 끈 보이지? 위슨의 사념을 불어넣어 만든 부적 같은 건데, 명령을 들을 때까지 살을 지지는 고통을 주지. 아, 걱정 마. 엘프의 살은 불에 지져지지 않으니까 자국 안 나.

주문을 외울 수 있다면 직접 머릿속에 명령하거나, 정신을 쏙 빼놓을 수도 있는데. 그건 안 되니까 아쉬워.

아무튼 방금처럼 특정 말에 반응하여 명령을 내리는 거라서, 위슨 목소리가 아니어도 할 수 있어.”

……자국이 안 남는 게 문제가 아닌데?

어쨌든 살을 지진다는 거 아냐.

돌겠네. 노예 데리고 있는 걸 보고 자라서 그런가, 이런 거에 아무 거리낌이 없어.

하…… 그렇다고 이걸 풀으라고 할 수도 없고.

포로가 도망 못 치도록 묶는 건 당연한 거니까.

결국 한숨을 쉬며, 단단히 일러둘 수밖에 없었다.

“……너 막 이상한 명령하고 그러지 마라. 내가 쟤한테 물어볼 거야.”

“안 해. 위슨은 그런 취미 없어. 몇 개 필수적인 명령밖에 안 걸어놨으니까 안심하셔.”

“……”

지난번에 위슨이 자백제를 놓은 베아트리스를 대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취미가 아닌데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건가.

취미였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순간 떠오른 무시무시한 상상을 재빨리 치워버리고, 나는 여전히 살기를 내뿜고 있는 블루벨을 보았다.

왠지 몬스터와 싸우는 중에, 실수인 척하고 뒤통수에 화살 꽂을 거 같아.

“……위슨아, 그래서 뭔 명령을 걸어놨냐.”

“위슨을 공격하거나 죽이려 하지 말 것.”

“……”

무척이나 합리적인 명령이었다.

그보다 이 녀석, 블루벨이 본인을 협박하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인질 잡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건가?

즉, 나도 그 대상에 끼워줘야 될 거 아냐, 이 치사한 자식!

게다가 이 엘프는 용사를 죽이라고 파견된 놈인데!

“명령줄을 끊으려 하지 말 것. 그리고용사를 죽이려 하지 말 것.봐, 문제없지?”

“……”

내 이름을 대지 않고 굳이 ‘용사’라 지칭한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블루벨이 시선만으로 화살을 쏴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현 시점에선 위슨 하나밖에 없다.

즉, 나에게는 살기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왜냐? 내가 용사인 걸 모르니까!

당연히 나는 내 입으로 밝힐 생각은 먼지만큼도 없는데, 위슨도 그녀와 거래할 때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적의가 가득한 얼굴로 툴툴대며, 블루벨은 공연히 땅바닥의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하, 마녀 아니랄까봐 쓸데없는 명령을 걸어서 날 괴롭히고 있어. ……쳇.”

“너 스스로 혀 차면서 답했다, 귀쟁아. 꿈도 꾸지 마. 그리고 마녀가 아니라 마법사야!”

“명칭 바꾸면 뭐 달라져? 네 년들이 납치한 우리 일족이 몇 명인데! 진짜 내 손으로 네 년을 끝장내지 못하는 게 한, 꺄아아악?!”

살기등등하게 말을 쏘아내던 블루벨이, 갑자기 양 귀를 부여잡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음, 저 꼴을 보니 파랑새가 또 한 방 쐈군.

역시나, 위슨은 고통에 신음하는 블루벨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위슨은 남자라고 했잖아, 씨발년아. 귀 뜯어버린다.”

“……”

아, 왠지 벌써 머리가 아파오는 거 같아…….

조만간 내 위장이 뚫려버리는 거 아닐까?

“걱정 마세요, 카엘 님! 사람 위장은 그렇게 쉽게 뚫리지 않아요! 진짜 탈이 나면 위슨 씨가 물약 주실 거니까 아무 문제없어요!”

“하아………….”

넉살 좋은 사제님의 격려를 들으며, 나는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쉬었다.

‘춤추는 해바라기’란 이름답게, 여관에는 덩실거리는 해바라기가 그려진 간판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 문 안쪽은 춤을 추기는커녕 숙연하게 기도를 올려야 되는 거 아닐까 싶을 만큼 조용했다.

여관이니까 아침이라서 조용한 것일리는 없고, 이 가게만의 독특한 분위기인 거겠지.

실제로 손님 몇 명이 테이블과 카운터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어떤 테이블에는 세 명이 모여 앉아 있는데, 희한하게도 말소리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얼마나 작게 이야기하는 건지, 원.

“……”

홀 안에 깔린 묵직한 침묵을 헤치며, 카운터를 닦고 있는 여관 주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없이 하던 일만 계속했다.

어지간히 과묵한 사람인 건지, 내가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내밀었는데도 그는 눈썹만 꿈틀할 뿐이었다.

“편지 좀 맡기고 싶습니다. 아, 맥주 한 잔 주시고요.”

“……이름.”

“저요? 아니면 받을 사람?”

“……둘 다.”

“저는 카엘. 편지 받을 사람은 마티아스 토레스햄.”

그러자 여관 주인은 몸을 뒤로 빼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라? 거절당했어?

혹시 그 친구, 여기서 진상 부려서 차단목록에 올라와 있는 건가!

“직접 전해.”

“우와, 그 아저씨 얼마나 진상을 부렸길래…….”

대체 여기서 뭔 짓을 했길래 이름을 대자마자 거절을 당하는 거야?

이야,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역시 사람은 겉으로 보면 안 된다니까.

“헛소리하는 건 여전하구나. 그리고 누가 아저씨야, 임마!”

“……?”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볶은 콩 한 알이 날아와 내 이마를 톡 때리고 떨어졌다.

그걸 무의식적으로 받아 입에 넣으며, 이런 시시한 시비를 걸어온 무례한 손님을 쳐다보았다.

“모가지 잘 붙어 있구나. 잘 있었냐?”

“아.”

카운터에 앉아 이쪽을 보며 손을 까닥이는 그 남자는,

어느 위엄 있는 기사님의 종자이자, 내 편지를 받기로 한 사람인 마티아스 본인이었다!

여관 주인은 단순히 편지를 받을 사람이 여기 있어서 거절한 거였다.

얼굴이랑 이름 외울 정도로 오래 알고 지낸 모양이다.

아무튼 본인이 튀어나올 줄은 진짜 몰랐기 때문에,나는 놀랍고 반가운 마음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누구시더, 아야, 아파, 그 콩 딱딱해서 진짜 아프다고!

……크흠, 결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도련님. 그냥 작은 장난이었, 우와,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술잔 내려놔!”

“미친놈이 진짜 꼭 까부네.”

그치만 놀리는 게 재밌는걸!

물론 이 말을 하면 그가 깨작이고 있는 콩을 내 머리 위로 쏟아버릴 게 뻔하니, 나는 얌전히 옆자리에 앉아 다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마티아스. 멀쩡해보이네.”

“오냐. 너도 명줄 붙어있어서 다행이다, 카엘.”

그는 싱긋 웃으며 내 쪽으로 콩 그릇을 슥 밀었다.

그릇에서 콩 몇 개를 주워 먹으며, 나는 그에게 편지를 건넸다.

“이야, 진짜 했구나. ……근데 뭐 이리 두꺼워? 몇 장이야?”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 네 개를 펴자, 마티아스의 표정이 좀더 구겨졌다.

“……밑조사 한다며? 뭐 지도라도 다 그려 넣었어? 대체 뭘 한 거야?”

“미리 말해주면 재미없으니 그냥 읽어봐. 별 거 안 했어.”

그냥 저 도시의 뒷세계 거물 셋 중 하나를 조져버렸을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둘도 만나서 두런두런 이야기만 나눴고.

“별 거 안 했다……. 어제 저녁에 말리스에서 웬 짐승들이 골목을 뛰어다녔다더라. 막 연기가 되면서 사라지질 않나, 큰 고양이 같은 놈은 불을 뿜질 않나……. 별별 괴상한 꼴은 다 일어났다더라. 뭐 아는 거 없냐.”

“없어.”

“……”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대답하자, 마티아스는 가볍게 한숨만 쉰 다음, 내 주변을 슬쩍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로나…사제님은 다른 애랑 신전으로 갔고, 메린은 시장.”

참고로 포로인 블루벨은 메린이 데리고 있다.

그 엘프가 필요하다는 건 어지간하면 들어주라고 말은 해뒀지만…… 괜찮을까 모르겠네.

“그러는 당신은? 백……대장님은 어쩌고 혼자 왔대?”

“클라크 경과는 따로 움직이는 중이야. 경은 모이트로 가시고, 나는 애들을 데리고 성으로 돌아갔지. 처리할 거 처리하고 여기로 온 거야. 별일 없으면 사흘 뒤에 여기서 경과 합류하겠지.”

“……”

아니, 일부러 신경 써서 대장이라고 해줬더니 본인이 이름을 까발려버리네.

누가 엿들을 수도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나 참, 어이가 없네.

그는 내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여긴 괜찮아, 임마. 이 양반이랑은 오래 알고 지냈거든. 내 주변에 누구 딴 놈은 얼씬도 못하게 막아준다고.”

게다가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웬만큼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이상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다며 그는 웃었다.

쿵.

별안간 여관 주인이 내 앞에 맥주 한 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의아한 얼굴로 술잔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자, 그는 무뚝뚝한 말투로 딱 한 마디 꺼냈다.

“시켰잖소.”

“으엑, 그거 편지 맡아주는 값으로 말한 건데! 저 이 다음에 바로 말 탈 거라서 술은 좀…….”

그냥 값만 주고 말려고 했는데 일이 꼬였네.

으, 이걸 안 마시고 그냥 버리긴 아깝고…….

술잔을 노려보고 있는 내 등을, 마티아스가 퍽퍽 두드렸다.

“야, 그냥 마셔. 겨우 한 잔 가지고 뭘 그러냐? 설마 한 잔으로 취하……아, 넌 취할 수도 있겠다. 비리비리할수록 술에 잘 취한다잖아.”

“……저기, 나 그 정도는 아니거든? 한 잔으론 나도 안 취해. 그냥 가다가 또 서야 되는 게 귀찮아서 그렇지.”

“그럼 먹고 속 비운 다음에 출발하면 되겠네. 어차피 너도 일행 올 때까지 기다려야 되잖아.”

“하…….”

그 말대로, 나는 다른 녀석들이 여기로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할 수 없지.

나는 포기하고 맥주잔을 입에 대었다.

“그래서 서쪽으로 간다고?”

“어……. 아, 그래, 마티아스, 산맥이 막혔다는 게 진짜야?”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쪽 동네 얘기는 들을 일이 없어서 몰라. 왜, 막혔대?”

“산신이 내려와서 막았다는데.”

“산신……? 흠…… 산에는 몬스터가 많이 사니, 그 대장 같은 놈이 생긴 거겠지. 세상에 다른 신이 어딨냐.”

창조주를 믿는 신도다운 대답이었다.

아무튼 마티아스도 무언가 알고 있는 건 없는 거 같군.

하아,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나…….

“근데 서쪽은 왜 가냐?”

“엘프 만나러. ……아, 그래, 그 애들 말인데, 엘프가 사가고 있었다더라.”

이 이야기도 편지에 써두었지만, 미리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말해주기로 했다.

역시 예상대로, 마티아스의 눈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뭐? 엘프?! 아니, 엘프가 왜…….”

“몰라. 가서 물어봐야지. 그러니 내가 구매자에게 덤비는 동안, 당신은 백작님과 같이 판매자를 조져. 그 내용도 대강 써놨어.”

“하…… 나 참, 진짜 뭐가 뭔지…….”

기가 막히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마티아스는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또 한 잔을 시켰다.

“아, 내가 따로 부탁했던 건?”

“검집 주인? 그것도 거기 써놨어. 아, 그래. 당신, 저 놈의 도시 들어가려면 입장권 사야 되는 거 알았어?”

내 질문에, 그는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지.”

“……신전이 없는 것도?”

“임마, 그건 상식이잖아.……뭐야, 너 설마 몰랐어?”

“한 번도 안 가봤는데 당연히 모르지!!”

이래서 귀족님들은 안 돼.

평민적 감수성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잖아!

세상에, 가는 길에 도적들을 만나서 다행이지.

돈이 모자랐으면 어쩔 뻔했어?

이 마을 신전에서 돈을 찾으려 해도, 신전 금고가 비어 있다면 그것도 불가능할 텐데, 하마터면 무단으로 성벽 넘어갈 뻔했잖아.

“큭큭, 그거 미안하게 됐다. 그래서 얼마나 지냈냐? ……사흘? 호오, 온종일 조사만 하진 않았을 거고, 뭐 구경했어?”

“구경…….”

하루 잡아서 실컷 구경하긴 했지.

메린이랑 박물관 빼고 바깥은 거의 다 돈 것 같다.

그리고 어젯밤도 신나게……

“……”

“……뭐야, 왜 갑자기 조용해지고 그래? 넌 조용하면 더 무섭다고.

……어랍쇼? 얼굴 빨간 거 봐라? 너 설마한 모금 마시고 취했냐?”

“어? 아, 아니, 이건 그게 아니고, 그…….”

“푸핫, 당황하는 거 보게. 뭐, 거기서 이쁜 여자한테 반하기라도 했냐?”

철푸덕.

곧바로 카운터에 엎드지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으아아아…… 역시 그런 거냐고오오……. 미치겠네, 진짜…….”

“아, 깜짝이야. 미친놈이 진짜 예측을 할 수가 없네. 뭔데 그래?”

“……”

……말해도 되나?

이 사람도 정작 따지면 알고 지낸 지 하루도 안 됐잖아.

근데 달리 말할 사람도 없고…….

“임마, 여기서 네 얘기 듣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했잖아. 말해봐. 보고서 네 장이나 써준 답례로, 이 형님이 친히 들어주마.”

“하아…… 형님은 개뿔…….”

그러나 결국, 나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죄다 불어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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