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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60화 (160/475)

〈 160화 〉 156화 : 그저 철저히 준비하고 싶었을 뿐 (1)

* * *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짙어 어둑어둑한 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바위궁전’의 기상예측기는 비가 오지 않을 거라던데, 여기는 엄밀히 따지면 산 아래이니 좀 다른가?

“햐아~ 그래도 좋긴 하다~”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음음, 날씨는 좋지 않지만 정말 상쾌하다.

역시 높은 곳이 공기가 더 맑은가봐!

아까부터 미소가 떠나지를 않고 있다.

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는 아래 저편을 향해 외쳤다.

“야, 이 녀석들아~! 그래 가지고 오늘 안에 끝나겠냐~!! 빨리빨리 좀 움직여라~!”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저 자식, 아주 신이 났구만? 야~! 먼저 가니까 그렇게 좋냐, 미친놈아~!”

어.

존나 좋아.

“역시 카엘 님! 힘만 없을 뿐이지 여러모로 재주가 출중하시다니까요! 이제 체력만 기르시면 되겠어요!”

로나 쟤는 이제 진심으로 감탄하면서 맥이고 있네.

그래, 저게 낫지.

이전의 그, 순수하게 눈을 반짝이면서 왜곡이 잔뜩 들어간 찬사보다 훨씬 듣기가 좋다.

“으음…… 이거 은근히 어렵네. 그냥 뛰어오르는 게 더 편하겠는걸.”

그리고 메린은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녀석에겐 도구가 아니라 봉인구인 모양이다.

돌겠네, 진짜.

아무튼 이렇게 혼자 위에 올라와 있으니 정말 상쾌하군.

뭣보다도 위슨은 물론이고, 저 무시무시한 두 아가씨까지 제쳤다는 게 너무 좋다!

진짜 기분 째진다아아!!

내가 지금 이렇게 높은 데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있는 건, 드워프들이 빌려주기로 한 ‘손목 갈고리’ 덕분이다.

이것은 키가 작은 드워프들이 나무나 벽을 빠르게 오르려고 만든 도구로, 이름 그대로 손목에 갈고리를 차는 거다.

겉보기엔 손등까지 오는 상자를 달고 다니는 거지만.

사용법은 이렇다.

부들부들한 가죽을 씌운 상자를 손목과 그 부근에 벨트로 묶은 후, 손바닥을 가로지르며 끈을 두른다.

이 끈은 상자에 연결되어 있는데, 끈을 잡듯이 주먹을 쥐면서 손목을 아래로 꺾으면,손등에 찬 상자에서 짐승 발톱처럼 세발 갈고리가 튀어나온다.

물론 이 상태에서 벽을 찍고 올라가거나 어디 매달릴 수 있긴 한데,이 도구의 진가는 따로 있다.

바로 이 갈고리를 쏠 수 있다는 것이다!

세발 갈고리가 나온 상태에서 한 번 더 손목을 꺾으면, 갈고리가 밧줄이 달린 상태로 화살처럼 슉 날아간다.

그렇게 날아간 갈고리는 손바닥을 펴서 다시 당겨올 수 있다.

만약 갈고리가 벽이나 어디 나무에 단단히 박혔다면?

당연히 그게 퐁 빠지지 않으니, 갈고리 대신 내 몸이 휙 딸려가게 된다.

즉, 갈고리만 박힌다면 아무리 높은 곳이더라도 손쉽게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양손에 하나씩 달아서 쓰는 게 기본 용법이니,익숙해지면 그야말로 숲이나 도시에서 날아다닐 수 있겠지.

­­굉장히 튼튼해서 비상용 무기로도 쓸 수 있죠!

훈련교관은 그렇게 말하며 무척이나 의기양양해했다.

아무튼 그는 우리 네 사람에게 이 갈고리 사용법을 가르쳤고, 바위기둥들 앞에서 우리에게 세 가지 단계를 통과하도록 일렀다.

첫 단계는 그냥 갈고리를 꺼내서 기어 올라가기.

두 번째는 갈고리를 발사해서 올라가기.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바로, 바위기둥들을 타면서 가장 높은 기둥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

솔리도가 가장 엄격한 훈련교관에게 부탁했다더니, 진짜로 빡센 과제를 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신기하긴 해.

앞의 두 단계에서 제일 뒤쳐졌던 내가, 마지막 단계에서 딴 녀석들을 제치다니 말야.

첫 번째는 순수 힘이 필요했고, 두 번째는 ‘갈고리가 날아가는 거리’와 ‘갈고리 쪽으로 날아갈 때의 속도’가 감이 잘 안 잡혀서 애를 먹었다.

속도 적응이 안 되어서, 날아가는 도중에 몇 번이나 갈고리를 뺐었지…….

그래서 마지막 단계가 그리 어렵지 않았던 건지도 몰라.

기둥 사이를 타려면 갈고기를 꼈다 뺐다 해야 되니까.

“용사님~! 그만 내려오시죠~!”

교관이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양손의 갈고기를 써서 밧줄을 타듯이 기둥에서 주륵 내려왔다.

박수치기 직전처럼 위를 향해 두 손을 펼치자, 갈고리가 상자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진짜 신기하다니까.

이런 걸 어떻게 만든 거지?

상자를 이리저리 살피며 교관에게 다가가자,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솔직히 이렇게 빨리 익히실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용사라 되실 만한 분이군요!”

“아니요, 교관님이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죠.”

“하핫! 괜한 말씀을 하시네요. 주의사항 하나만 일러드리겠습니다.

숲은 나무가 빽빽한 법이니, 자칫 잘못하면 가지에 얽히거나 날아가다가 부딪히실 수 있어요. 그러니 먼 거리를 한꺼번에 이동하진 마십시오.”

“아, 그래서 기둥들 사이를 타라고 하신 건가요?”

그렇게 묻자, 교관이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가 얼마나 울창하건 아래쪽은 밋밋하니까요. 이걸 잘 활용하시면, 숲에서 귀쟁이 놈들에 뒤지지 않고 다니실 수 있을 겁니다.”

엘프들은 굴곡에 상관없이, 물리적인 자연물 위를 날듯이 다닐 수 있다.

때문에 평지에서 그들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숲은 다르다.

맨몸이라면나무들이 장애물이 될 뿐이지만, 만약 적절한 도구가 있다면?

그 순간, 나무는 장애물이 아닌 추진체가 된다.

숲에 사는 엘프가, 숲이 아닌 평지에서 더 우위를 가진다니, 거참 모순적이로군.

교관은 기둥들에 붙어서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는 세 녀석을 보며 말했다.

“나 참, 원래는 산꼭대기 올라가려고 만든 건데 말이죠. 설마 숲에서 쓰게 될 줄이야……. 도구는 정말 쓰기 나름인 것 같아요.”

“넓적한 돌을 절임통 위에 두면 누름돌이 되고, 침상에 두고 베고 자면 베개가 되죠. 뭐, 다 그런 게 아닐까요?”

“하핫! 예, 용사님 말씀대로입니다. ……흠, 저 세 분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군요. 용사님께선 잠시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쉬다뇨?”

내가 반문하자, 교관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말 그대로 쉬는 거죠. ‘바위궁전’ 시장을 둘러보시거나, 아니면 병사들과 대련이라도 하시거나…….”

“아, 시장 좋죠! 그러고보니 아직 안 가봤네요! 아하하!”

아니 쉬는 얘기에서 대련이 왜 나와?

하, 진짜 전사들은 이해가 안 돼.

잽싸게 손목 갈고리들을 풀어서 교관에게 내밀자, 그는 나를 보며 눈을 끔벅이더니, 곧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것들을 받았다.

음, 역시 말은 하고 가야겠지?

나는 아직도 기둥들 사이에서 끙끙대고 있는 세 녀석을 향해 외쳤다.

“나 안에 좀 갔다오려는데~ 너네 언제 끝날 거 같냐~!”

“어, 그래요?! 어어, 음, 두 시간 뒤에 다시 뵐게요!”

……두 시간?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

셋 다 절반도 안 남았는데?

“왜 두 시간이야? 한 시간도 안,”

“위슨도 두 시간은 있어야 될 거 같아! 야, 카엘! 기왕 가는 김에 우리 점심까지 사 와라!”

무어라 하려던 메린의 말을 가로채며 위슨이 소리쳤다.

으음……, 뭘까?

저 애늙은이 둘이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뭐, 여기서 뭘 꾸며봤자지.

나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혼자 ‘바위궁전’으로 돌아갔다.

승강기 앞의 그림으로 안 건데, 여기 ‘바위궁전’은 총 네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사당과 상점들, 그리고 지상으로 통하는 승강기가 있는 ‘입구 층’,

여러 농장과 목장들이 있는‘농장 층’,

집들이 늘어서 있는‘주택 층’,

그리고 제일 아래층이, 바로 개발연구소를 포함한 작업공장들이 모여 있는‘생산 층’이었다.

‘생산 층’은 유독 저 아래 깊은 곳에 떨어져 있어서 승강기를 아예 따로 두고 있다.

마그마를 동력으로 써야 해서 그렇다는데, 마그마가 뭔지도 모르는 내가 자세히 들어봤자지.

그래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버렸다.

“……”

승강기에서 내린 후, 상점들이 몰려 있는 거리로 향했다.

아직 오전인데, 거리를 돌아다니는 드워프들이 제법 많다.

다들 나를 보며 흠칫 놀라다가도, 곧 신경을 끄고 다시 제 할 일에만 집중하는 게 특이했다.

솔리도도 그랬지만, 드워프들은 다 무던한 성격인가 봐.

아니, 무심한 건가?

상점 주인들 중에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나야 그 덕에 되게 편하게 돌아다니고 있긴 한데, 이래 가지고 장사가 되나?

크로케라는 튀김을 몇 개 사며 주인에게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하러 그래요? 팔릴 만한 건 알아서 팔릴 텐데.”

“……그렇긴 하네요.”

가게 주인이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참 특이한 종족이야.

그건 그렇고, 시장 생긴 건 다 똑같구만.

가게 주인이 드워프이고, 파는 물건이 약간 희한할 뿐이었다.

왕국의 돈을 그대로 쓸 수 있어서 그런가?

이종족의 상점가인데도 무척 낯익은 느낌이다.

……매번 돈이 맞게 환산된 건지 계산해야 했지만.

그리고 세 번째 상점에서 물건값을 치를 때, 나는 앞의 두 가게가 돈을 더 떼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둘 중엔 크로케 가게가 제일 바가지를 씌웠다는 것도!

크로케 가게는 액수도 적고 맛있었으니까 봐줬지만, 다른 가게는 곧바로 영수증 들고 쳐들어가서 다시 정산했다.

잉크와 펜을 정가의 두 배나 준 거였다니 절대 못 넘어가지!!

무사히 승리하고 가게를 나오며,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나 참, 종족 불문하고 상인 놈들은 다 똑같구만.

이 정도면 상인도 마법사처럼 따로 종족으로 분류해야 되는 거 아냐?

“……”

시계를 보니 아직 약간 시간이 남아 있다.

구경은 대강 다 했고, 대충 점심 때울 것도 샀으니 설렁설렁 돌아가면 될 거 같은데…….

“……응?”

그 순간, 무언가 눈길을 끄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니 여러 장신구들을 파는 가게였다.

어디 보자…….

목걸이, 반지, 팔찌, 귀걸이, 코걸이, 치아용, 눈썹용……

엥? 치아에 눈썹?!

그런 데에 보석을 박는다고?!

정신이 약간 아득해질 정도로 충격적인 문화였다.

그냥 넘어가, 넘어가!

다른 물건들을 살펴보는데, 이번엔 정말로 순수하게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보였다.

“……이거 얼마에요?”

시선이 박히며 곧바로 말이 튀어나오고, 그대로 값을 치러버렸다.

“……음…….”

산 건 좋은데……

이걸 뭐라고 하면서 줘야 되나……?

다시 진영으로 돌아가면서 고민에 휩싸였다.

‘손목 갈고리’의 훈련을 마친 후, 우리는 지원받기로 한 물품들,

즉 드워프의 문양이빠져 있는짙은 풀빛의 망토, 끈끈이 공, 그리고‘손목 갈고리’한 쌍을 각각 챙겼다.

“그러고보니 카엘, 어제 자네가 물어본 그 인간 아이들 말인데,”

‘바위궁전’에서 엘프의 숲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 후, 솔리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 말처럼 산을 통과한 건 분명한데, 길이 전혀 없네. 정확하게는 시작점과 끝점밖에 없어.”

“중간이 없다는 말씀이세요? 뭐 뚫고 가기라도 했대요?”

“맞아, 뚫고 갔어.”

“……”

농담이었는데.

혹시 이 양반도 농담하는 건가 싶었으나, 솔리도의 표정은 무척 심각했다.

“광부들 말로는, 지하 중간중간에 지반이 물러진 곳이 있다더군.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놈들은 산을 뚫고 다녔어.확실해.”

“아니 그게 말이 돼요?!”

“돼.”

내 경악에 답한 건 위슨이었다.

그러나 정작 고개를 돌려보니, 그 역시 놀란 눈으로 자신의 어깨 위를 보고 있었다.

……위슨이 아니라 파랑새가 대답한 거였구나.

녀석은 주위의 시선이 모인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 째짹거린 후, 나를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냐? 귀쟁이 놈들이 뭘 할 수 있는지.”

“어…… 자연물을 맘대로 다룰 수 있다고 했었지? 그게 관련이 있냐?”

“있지. 말 그대로 맘대로 할 수 있으니까. 산이라봤자 돌이랑 흙이지.치우면 길이 되고, 덮으면 도로 막히지 않겠냐?”

“……!”

온 몸에 한기가 돌며 오싹해졌다.

아무리 형체 있는 순수 자연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해도 그렇지, 진짜 그 정도라고……?

돌과 흙을 움직여서 길을 만들고, 그걸 다시 덮을 수 있다는 거야……?

그 자리 그대로?!

“쯧. 너무 많은 권능이 주어졌구먼. 그러니 그 모양이지.”

그저 툴툴대는 솔리도와 달리, 나는 떡 벌어진 턱을 도무지 다물 수가 없었다.

……엘프들을 알면 알수록 이해할 수가 없어.

아니, 그런 능력들을 가졌으면서 대체 왜……?

“왜 그간 숲에 틀어박혀 있던 거지?”

대륙을 지배하지도, 인간을 비롯한 다른 종족들과 교류하지도 않은 채, 천 년이 훨씬 넘는 세월동안 왜 그저 틀어박혀 있었던 것인가?

그러다 갑자기 아트라토스 토벌에는 왜 끼어들었는가?

왜 이제 와서 대륙을 지배하겠다고 나서는 건지,

왜 인간 애들을 데려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왜 굳이 용사를 죽이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진짜 뭐하는 놈들이야?

“가면 알 거다.”

“……넌 다 알고 있구나.”

“정령이니까. 하지만 말 못해. 용사에게는 더더욱.”

그리고 용사와 얽혔기 때문에, 계약자인 위슨에게도 알려줄 수 없다.

파랑새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 위로 날아 앉아선 정수리를 콕콕 쪼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낮은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직접 울려왔다.

“허나 조언은 가능하지. 숲 앞에서, 그대가 붙잡은 그 엘프를 내세우거라. 그 뒤는 그대의 몫일지니.”

……이거 파랑새의 목소리겠지?

주변 분위기를 보니, 나에게만 들리는 듯했다.

파랑새는 재차 내 머리를 쪼면서,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았냐고, 새꺄.”

“……어. 알았어. 고마워, 에코.”

“하! 인사는 참 잘해요.”

톡 쏘아붙인 후, 파랑새는 다시 위슨의 어깨로 돌아갔다.

그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나와 파랑새에 머물렀지만, 곧 무언가를 들었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흠, 보아하니 무언가 계획이 있나보군?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되기를 빌겠네.”

솔리도는 격려하듯이 내 팔을 툭툭 두드리며 씨익 웃었다.

“자네가 친히 선포한 것처럼, 귀쟁이 놈들을 확실하게 불태우라고!”

“그런 소리 안 했는데요.”

질색하는 내 목소리에 섞여, 드워프 장군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바위궁전’으로 다시 돌아온 다음, 위슨은 마법 관련으로 여러 볼일이 있다며 따로 떨어졌다.

드워프의 여러 기술들이 마법과 연계되어 있어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그에게 유용할 법한 연구들이 많다는 듯했다.

애석하게도 ‘마그마주 과음으로 목이 타버린 드워프용 의료장치’는, 그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했다.

로나의 치유 기도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목은 이미 상처가 아닌 흉터가 돼버린 탓이었다.

그래도 성과는 있다며, 위슨은 실망한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힌트는 얻었어. 역시 기도가 답이야.”

“기도? 신전 말하는 거야?”

“비슷해. 아무튼 저녁에 숙소에서 보자고. 아, 위슨 밥도 해 놔라!”

“……”

파랑새가 저 따위로 전하는 거야.위슨이 그런 게 아니라고.

그렇게 되뇌이며 울컥 올라오는 속을 달랬다.

후……아직도 가끔 울컥한단 말이지.

참 대단한 축생이야.

위슨과 헤어진 후, 우리 셋은 시장을 돌면서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기도 하고, 거리공연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별일 없이 밤을 맞이했다.

떠날 채비를 다 마친 후, 나는 몇 바퀴나 방을 빙빙 돌며 고심한 끝에, 방을 나섰다.

머뭇거리는 발걸음을 움직여 다다른 곳은, 메린의 방 앞.

“……”

으, 역시 그만둘까?괜한 참견 아냐?

아니, 그래도 일단 물어는 봐야지.

필요 없다고 하면, 그때 버리거나 딴 사람 주면 되잖아.

……그래, 물어나 보자.

문을 두드린 다음,응답이 없는 문 너머를 향해 홀로 대답했다.

“……나야.”

곧 문이 열리며, 메린이 문틈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얇은 실내복 차림에, 긴 머리카락을 앞쪽으로 늘어뜨리고 있다.

머리를 빗고 있던 건지 손에 빗을 들고 있었다.

“웬일이냐?”

“그…… 이거, 필요할까 해서.”

얼굴을 마주하며 건넬 용기는 없어, 나는 시선을 돌린 채 손 안에 든 것을 내밀었다.

아까 낮에 충동적으로 사버린 그것은,

“머리핀? 이걸 왜?”

특별히 장식이 달려 있지 않은 호박빛 머리핀이었다.

“……너 머리 길잖아. 여태까지 만난 적들은 너보다 빠르지 않았지만, 그, 엘프들은 다르잖아?

그러니 이걸로, 그, 머리 바짝 올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메린은 평소에,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내리고 다닌다.

여태껏 만난 적들은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으니, 머리채를 잡힐 걱정이 없었지만…….

엘프들은 그녀와 비슷한 급으로 빠르니까, 여럿이서 덤빈다면 반드시 긴 머리가 약점이 되겠지.

머리 자르는 건 죽어도 싫어하니, 그 대신 틀어 올렸으면 하는 것이다.

……단지 그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메린은 내 손에서 머리핀을 받아 이리저리 보더니, 또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올려?”

“어? 뭐, 땋거나 묶은 머리를 빙빙 돌린 다음, 핀으로 꽂으면 되지 않겠냐?”

“음…….”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곧 표정을 찡그린 후, 나에게 다시 머리핀을 돌려주었다.

……역시 쓸데없는 오지랖,

“네가 한번 해줘.”

“……예?”

……보다 더한 게 날아왔다!

뜻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나를 향해, 그녀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네가 한번 해보라고. 머릿속에 잘 안 그려진단 말야.”

“아, 아니, 야, 내가 여자 머리를 어떻게……!”

“너 손재주 좋잖아. 대충이라도 좋으니까 해봐. 옛날에도 그랬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그녀는 다짜고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납치범이다아아!

살려주세요!!

“예, 옛날이라니 내가 언제?!”

“어렸을 때. 기억 안 나냐?”

“안 나!!”

“시끄럽고 얼른 해줘봐.”

그녀의 힘 앞에 내 저항은 무색했고, 나는 엉거주춤 그녀의 방으로 끌려 들어오고 말았다.

……등 뒤에서 작게 쾅 소리가 울리며 내게사형선고를 내렸다.

문이, 닫혀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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