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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61화 (161/475)

〈 161화 〉 157화 : 그저 철저히 준비하고 싶었을 뿐 (2)

* * *

오 분 전의 내가 원망스럽다.

내일 아침에 줬으면 로나에게라도 넘길 수 있었을 거 아냐.

왜 굳이 이 밤중에 주려고 결심을 하냐고, 미친놈아.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나는 메린에게 붙잡혀서 방 안으로 납치 및 감금되고 말았다.

물론 문은 잠겨 있지 않으니 튀려면 튈 수 있긴 한데…….

“아직도 생각 중이냐? 대충하라니까.”

“……”

이미 그녀가 나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데 어떻게 튀어?!

망할, 여기서 튀었다가는 다른 두 녀석에게 등신 취급받는 건 물론이고, 돌아가신 엄마도 꿈에 나타나서 내 등짝을 날리실 거야!

두 애늙은이에겐 말 안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내가 안 하면 뭐해, 얘가 떠들 텐데!

하아…… 근데 진짜 어떡하지?

여동생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머리를 해줘?

이거 괜히 엉키기만 하는 거 아냐?

……그래, 역시 내가 하지 말고, 내일 아침에 로나에게 맡기자.

걔도 머리 길던데, 말끔하게 베일 안에 다 넣고 있으니 뭔가 방법이 있겠지.

“메린, 그냥 내일 로나한테 부탁해라. 나보다는 같은 여자애가 더 낫잖아.”

“로나? 걔는 더 안 될걸? 내 머리 보고 신기해하던데. 어떻게 했냐고.”

“……뭐? 아니, 머리도 긴 애가……. 그럼 베일은 어떻게 쓰고 있대?!”

“그냥 쑤셔 넣는다던데.”

“……”

그럴 거면 머리 짧게 쳐라.

하, 젠장, 그럼 진짜 내가 하는 수밖에 없잖아.

안 그러면 이 녀석은 평소처럼 하고 나가야 한다.

그러다 진짜 머리채 잡히기라도 하면…….

“……”

아주 잠깐,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그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쪽팔려 하거나 당황해할 때가 아니야.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야 되잖아.

머리 모양이 괴상해지면 어때?

잠깐만 그러고 있을 건데!

그녀의 머리카락 한 줌을 살며시 잡고, 스윽 쓸어내렸다.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카락이 손아귀를 부드럽게 빠져나가며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

나도 모르게, 손에 쥔 머리카락을 입가로 가져갔다.

물씬 풍기는 라벤더 향을 한껏 들이마시며, 슬슬 갈증을 느끼기 시작한 입술을 그 촉촉함으로 달래었다.

……놈들이 잡아채게 둘 순 없어.

놈들에게 모욕을 당하게 할 순 없어.

그런 꼴이 일어나게 둘 순 없다.

다른 놈이 이 머리카락에 손대는 꼴은 볼 수 없다.

절대로.

“……머리 엉켜도 모른다.”

뭐, 모슬린처럼 부드러우니 웬만해선 엉키지 않겠지.

하지만 혹시 모르니 일단 경고해두었다.

그러자 풉, 하고 작게 웃는 소리에 이어, 그녀의 태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으니까 얼른 하기나 해.”

“……빗 줘.”

건네받은 빗으로 살살 그녀의 머리를 빗기 시작하자, 그녀가 키득 웃음을 터뜨리며 꼼지락거렸다.

“히힛, 간지러워.”

“가만 있어.”

“후히힛.”

스윽, 슥.

이따금 터지는 그녀의 작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머리를 빗어갔다.

빗질이 덜 된 부분이 있어 가끔 막히긴 해도, 답이 없을 만큼 얽힌 부분은 없었다.

……그나저나, 이거 생각보다 편안한데?

물론 그녀의 머리를 손수 빗기고 있다며 심장이 신나게 두근거리고 있지만, 살짝 따뜻해졌을 뿐이다.

어제처럼 화르륵 타 죽을 것 같지도 않고, 숨도 잘 쉬어진다.

하긴, 지금 머리카락밖에 안 보이잖아.

딱히 자극받을 것도 없지.내가 뭐 그런 쪽 성향인 것도 아니고.

음, 괜히 호들갑 떨었나?

……그건 그렇고, 머리 진짜 부드럽네. 윤기도 좋고.

은근히 열심히 관리하고 있나?

“……너 머리 관리하냐? 머릿결 되게 좋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비누로 감고 라벤더 오일 바르고 끝인데.”

“하는 거 없군.”

촌장님 댁 셋째 딸인 율스 누나가, 툭하면 나 일할 때 쳐들어와서 떠들던 말에 의하면, 여자들의 머리 관리법 중에 라벤더 오일을 바르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어떤 사람은 머리에 윤기나라고 돼지 기름에 허브를 섞어서 바르거나, 양젖에 각종 허브를 넣고 끓여서 거기다 머리를 감는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자신의 동생, 즉 다섯째 딸인 슐 누나는 말린 장미가루를 꿀에 섞어서 머리에 바를 뿐 아니라, 매번 로즈마리 물로 감아서 머릿결이 끝내주는 거라고 덧붙이곤 했다.

‘그런 애를 아직도 안 데려가다니 사내 새끼들 눈 삔 거 아니냐’면서.

그때마다 ‘나보고 어쩌라고, 이 아줌마야’라고 속으로 투덜댔었다.

입 밖으로 내면 쳐맞으니까.

음, 아무튼 메린의 머릿결은 타고난 거였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거겠지?

딸은 보통 어머니를 닮는다니까.

“으음…….”

다 빗었으니 이제 땋아야 되는데……

밧줄 꼬듯이 하면 되나?

촘촘하게 했다가 꼬이면 굉장히 난감하니, 세 갈래로 나눈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땋기…… 아니, 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방금 전에 ‘자극받을 게 없다’며 너스레를 떤 나 자신에게 속으로 욕을 날려주었다.

자극이 없긴 개뿔.

“……”

부드러운 감촉이 내 손 전체를 쓰다듬으며, 손가락 사이와 손바닥, 손등을 간지럽힌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물결칠 때마다, 머금고 있던 향내가 마구 코끝을 찌른다.

그것만으로도 열이 오르려 하는데,

머리카락을 모으면서, 쭉 감춰져 있던 목덜미가 드러났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가느다란 곡선에 손이 우뚝 멈춰버렸다.

가슴이 시끄럽게 요동치면서, 입 안이 바싹 말라왔다.

그냥 목인데. 그런데 왜 눈을 못 떼는 거지?

살짝 드러난 귀에, 절반쯤 노출된 어깨로 이어지는 목선에, 왜 이렇게 두근거리는 걸까?

“하…….”

터져나오려는 숨을, 그녀가 듣지 못하도록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내쉬었다.

열을 주체 못해 파르르 떨리는 숨소리가 내 귀를 때려, 그 민망함에 몸이 한층 더 뜨거워진다.

충동이, 급물살처럼 밀려들어온다.

그녀의 귀를 살짝 깨물고 싶다.

그녀의 머리에 코를 파묻고, 향취를 한껏 들이마시고 싶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 반쯤 드러난 어깨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깊이 입맞추고 싶다.

그리고, 그대로……!

해버려.

“……윽.”

꺼져, 음란마귀 새끼야!

이를 악물고 고개를 세차게 털어버렸다.

“카엘?”

손이 멈춰서 그런지, 그녀가 의아해하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뭐하냐?”

“어, 그, 생각 좀 하느라. 신경 쓰지 마.”

……끼어들지 마.

속으로 중얼거리며 재차 손을 움직였다.

이거 되게 진지하게 하는 거야.

같잖은 감정은 접어두자고.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온 힘을 다해, 조금씩 엮이고 있는 그녀의 머리에만 온 시선을 집중했다.

불현듯, 그녀가 웃음기를 머금은 말투로 말을 걸었다.

“너 뭐 밧줄 꼬냐?”

“아,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는데 어쩌라고.”

퉁명스럽게 핀잔을 주니, 그녀가 별안간 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기냐?”

“어. 너 아까부터, 어렸을 때랑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말하는 거 아냐?”

“……어렸을 때?”

그러고보니 메린이 아까, 내가 어렸을 때 지 머리를 해줬다고 했었지.

으음…… 왠지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그때, 산발머리를 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아.”

빗질 따위 태어나서 한 번도 안 한 듯한, 머리 대신 덤불을 이고 다니는 듯한 모습.

그 상태로 무릎에 닿도록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던, 야생 짐승 같던 모습.

……그런그녀가 처음 사람 손을 받았던 때의 기억이,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맞아. 그때 메린은 꼴이 말이 아니었어.

그래서…… 내가 참다 못해 뭐라고 했던 거 같은데.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자르든가 묶으라고 했던 것 같다.

­­묶어? 어떻게?

­­끈으로 묶으면 되겠지.

­­몰라. 해줘.

……그래, 그때도 이 녀석은 나에게 해달라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냐면서 난리를 피워도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기게 졸라댔었지.

그리고 결국 그녀의 고집에 꺾여버렸지.

항상 그랬듯이.

­­……머리 엉켜도 모른다.

볼멘소리로 투덜대면서.

……그래. 그랬었어.

내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살포시 엮어갈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해진다.

그녀의 머리를 땋는 게 아닌, 풀어져 있던 나 자신의 기억을 다시 엮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손의 움직임을 따라, 단단하게 되새겨져 갔다.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낫지. 그땐 결국 엄마가 다시 땋았으니까.”

“이제 기억나냐?”

“어.”

근데 이 녀석은 머릿속이 대체 어떻게 되어 있길래 그런 잡다한 것까지 다 기억하는 거야?

머리 안 아프나?

……나와 있었던 일 전부,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는 거냐고.

아, 진짜 미치겠다.

그 사실이 너무 기뻐서,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미칠 거 같아.

주의를 돌려야 돼.

손에 집중하자.

머리에 집중하자고!

이거 잘못하면 꼬이니까!

“……”

그러고보니, 메린이 머리를 땋고 다니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인가?

계절이 몇 번이 바뀌건 머리가 얼마나 자라건, 쭉 그 머리 모양만 하고 있다.

그렇게 맘에 들었나? 어울리긴 한데.

“메린,”

끝까지 땋아 내린 머리를 리본으로 묶으면서,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왜 맨날 이 머리만 하냐?”

“엉? 아, 그거?”

메린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잘 어울린다고 해서.”

“………어? 내가?”

내가 그랬다고?

평소에 어렴풋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을 텐데?!

깜짝 놀란 탓에 손이 멈추자,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좌우로 까닥였다.

“아주머니가 다시 땋아준 다음에 네가 그랬어. 잘 어울린다고.”

“………”

……내가 그때 잘 어울린다고 해서, 지금까지 쭉 그러고 다닌 거라고?

그럼 설마, 지난번에 내가 머리 잘라버리려 했을 때 ‘못 땋는다’며 지랄발광을 했던 것도…….

“……으.”

……진짜 돌겠네.

메린 이 자식, 어떻게 그런 짓을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거지?

어떻게 그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거야?

혹시 날 죽이고 싶은 건가?

그런 거라면 곧 성공할 거다.

심장 터져서 곧 죽을 거 같으니까.

와, 손도 떨려오네.

“음…… 이젠 아니냐?”

게다가 살짝 눈썹을 내리면서 우물거리기까지 하고!

아, 망했어. 표정 되게 한심하게 풀어져 있을 거야.

이거 봐, 메린 녀석의 표정이 뾰로통해졌잖아.

돌겠네. 저 얼굴도 귀여워.

아, 신이시여. 제발 살려주세요……!

“왜 웃어? 그렇게 안 어울렸냐? 진작에 말을 하든가.”

아니 내 의사에 맡기는 거냐고.

그만해……, 이러다 나 죽어……!

“아냐, 아냐아냐. 잘 어울려. 진짜로. ……하, 귀여운 짓 그만하고 빨리 앞이나 봐.”

“……내가 뭐 어쨌다고?”

“아, 됐으니까 앞이나 보라고.”

……내가 진짜로 미쳐버리기 전에.

너한테 달려들어서 마구 입맞추기 전에.

내게 쌓인 열기를 너에게 죄다 쏟아내버리기 전에.

이제 그만 조용히 있어줘.

나 좀 봐줘.

……제발,나를봐줘.

메린.

“……”

눈을 질끈 감아, 끓어올라오는 정념을 다시 가라앉혔다.

오늘은 아냐. 오늘은 그런 감정에 들끓을 때가 아니야.

그럼 언제……? 언제까지 참고 있어야 돼?

언제까지 너만?

이미, 결정한 거야.

평생이 되더라도, 끝까지 고상하게 있기로 결심했다고!

……참는 건, 내 얼마 없는 특기이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돼.

머리 다 땋았으니까, 올려서 묶기만 하면 된다.

‘힘내라.’

얼마 안 남았어.

주먹을 한 번 꽉 쥐고 다시 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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