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168화 : 아무튼 협력하자구 (2)
* * *
언제부터였을까?
밝고 환한 웃음을 볼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기 시작한 건.
그 미소를 따라 입꼬리가 올라가긴커녕 눈썹이 찡그려진 건.
여기까지 온 길이 그만큼 험난했던 걸까?
사람 표정 하나도 믿지 못할 만큼, 음모와 계략으로 가득 찼던 걸까?
“……”
“응? 왜요, 카엘 님?”
생긋 웃으며 로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여행길 문제가 아닌 거 같아.
저 사제님도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부터 날 골탕 먹이실 때마다 환히 웃으셨잖아?
그래, 이건 그런 작은 경험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감인 것이다.
농부가 하늘의 구름을 보고 해가 계속 쨍쨍할지 비가 내릴지 알아맞히는 것 같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직감.
그러니 알 수 있다.
지금 저 엘프가 띄우고 있는 밝은 미소의 뒤에는, 야광석등의 빛조차 삼켜버릴 어둠이 꿈틀대고 있다!
“……뭐야, 뭔 꿍꿍이야? 뭘 꾸미는 거냐, 이 사악한 엘프야!”
동굴 입구 쪽으로 몇 발짝 물러나면서 외쳤다.
그런 나를 보는 메린의 눈이 굉장히 건조해졌지만 알 게 뭐야, 지금 내가 엿을 먹을 직전인데!
블루벨은 딱 봐도 수상쩍은 티가 팍팍 나는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먼저 협력하자고 한 건 너잖아. 그래서 네가 저 여자에게 달달 볶이는 동안 생각해봤지.”
“뭘.”
“네가 그랬지? 탈탈 털어야 서로에게 미련이 없다고.”
그녀는 입에는 여전히 그 불길한 미소를, 두 진한 녹색 눈동자에는 진중한 빛을 품고서 말을 이었다.
“널 보면 화가 끓지만 널 죽이고 싶지 않아. 그리고 너희 힘을 빌려서 내 의문을 풀고 싶어. 이게 내 진심이야.”
“……”
“하지만 널 보면 여전히 화가 나니까, 네가 아무리 날 믿어준다고 해도 제대로 협력하기 어려울 거야. 그러니 먼저 내가 화를 푸는 거에 협력해. 그럼 나도 흔쾌히 협력해줄게.”
그렇게 나오신다?
후후, 이거 굉장히 좋지 않은 전개인걸?
정말정말 좋지 않은 느낌이 등골을 스멀스멀, 끈적하게 타고 올라오고 있어!
……하지만 블루벨의 조력 없이는 내 목적을 이룰 수 없다.애들을 찾을 수 없다.
그 예감 역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고 있었다.
후…… 그래, 눈 딱 감고 해주자.
죽이기 싫다고 했으니 죽이진 않을 거고, 협력해야 하니 팔다리를 날리거나 손가락을 자르지도 않을 거야.
그래, 제일 심한 거라고 해봤자 귀 하나 자르는 거겠지.
그걸 메린이 가만히 보고 있을 것인가는 별개 문제이지만, 뭐, 설득하면 될 거다.
“……좋아. 뭐 해줘야 돼?”
내가 대답하는 걸 들은 메린이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손을 가만히 꼭 잡아주며, 나는 블루벨의 입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굉장히 간단한 부탁이야.”
그녀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널 한 대만 때리게 해줘.”
“……”
지금 내 표정은 메린과 로나와 비슷할 것 같다.
둘 다 멍한 얼굴로 블루벨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다야?”
내가 묻자, 블루벨은 환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너 때문에 쌓인 분노와 짜증을 모두 담아서, 딱 한 대만 때릴게. 그거면 돼.”
“어…… 어디를?”
“배. 죽으면 안 되니까.”
“……”
배를 때린다는 거군. 근데 잠깐, 죽으면 안 되니까 배를 때린다고?
그거 얼굴을 때리면 십중팔구 머리가 깨지거나 목이 돌아가버릴 정도로 세게 때린다는 소리 아냐?
그만큼 센 주먹으로 배를 때리면 뱃속이 죄다 터질 거 같은데?
헉, 설마 이 귀쟁이 자식……!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죽었다.
……이거 노리는 거 아냐?!
갑자기 머릿속이 맑게 개이며 차가워지는 듯했다.
나는 팔짱을 끼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보는 사악한 엘프에게 말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애초에 댁이 날 죽이려 한 시점에서 내가 뭘 하든 정당방위 아냐? 근데 내가 왜 댁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지?”
“이제 와서 따지는 거야?”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는 블루벨에게, 나는 재차 입을 열어 말했다.
“따질 건 따져야지. 생각해 봐, 댁은 나한테 화를 낼 자격이 애초부터 없어. 잘못을 참회하면서 감내해야지, 뭐? 화를 풀겠다고? 누가 누구한테 화를 풀겠다는 거야?!”
“내 부탁 들어준다며.”
“들어주려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거 같아!”
특히 물리적인 힘으로 화를 풀겠다는 부분이 가장 말이 안 된다.
아니 왜 하필 때리는 거야?
왜 백 년을 훨씬 넘게 사는 종족의 사고방식이, 백 년 살까 말까 한 인간이랑 비슷한 거야?
왜? 대체 왜?!
블루벨은 뚱한 눈으로 말없이 나를 쳐다보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맞기 싫어서 이러는 거지?”
“당연하지.”
난 맞는 걸 좋아하는 변태가 아니다.
“……야, 넌 내 어깨 칼로 쑤시고 비틀고 하지 않았냐? 옷도 벗기고. 그거에 비하면 배때지 한 방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니?”
기가 막히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말하는 블루벨에게, 나 역시 콧방귀를 뀌면서 대꾸해주었다.
“그 한 방에 얼마나 큰 힘이 실려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 내가 본 적이 있어서 아는데, 엄청나게 강한 힘으로 내지른 주먹은 멧돼지 뱃가죽도 뚫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세상에 그런 게 되는 사람이 어딨어?”
“내 앞에.”
메린을 가리키자, 블루벨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음, 효과 좋은걸?
직접 검을 맞댄 적이 있어서 그런지 바로 믿는군.
참고로 메린이 멧돼지를 주먹으로 잡은 건 진짜다.
어릴 적, 내가 아직 그녀와 말을 트지 않은 때에 있었던 일인데, 한 번은 마을에 거대 멧돼지와 그 무리들이 쳐들어온 적이 있다.
그 거대 멧돼지를 지나가던 메린이 홀로, 그것도 맨손으로 잡아버린 것이다.
나도 그때 멀리서 봤었는데……
음, 그다지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콸콸 쏟아지는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지,
그 수원지인 멧돼지의 배에선 내장이 주르륵 다 흘러나오고 있지,
그 앞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개진 아이가 하나 서 있지…….
괜히 마을 사람들이 그때 이후로 메린을 슬금슬금 피했던 게 아니다.
나도 나중에 본인에게서, 그때 그 아이가 자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쫄아서 얼어버렸다니까?
아무튼, 엄연히 사례가 있는 거다.
인간 뱃가죽이 아무리 단단해봤자 멧돼지보단 연할 거 아냐.
게다가 같은 인간도 아니고 엘프잖아. 메린과 비슷한 급으로 칼싸움하던 사람!
블루벨의 주먹이 내 배를 못 뚫는다는 보장이 어딨어?!
“그럼 협력 못하는데?”
“그럼 어쩔 수 없지! 댁을 내세워서 블루스타를 잡을 수밖에!”
“너희가? 흐음…… 힘들걸?”
힘들어도 할 수밖에 없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메린도 블루벨과 협력하는 걸 마뜩잖아 했잖아.
좀 많이 어려워지겠지만, 그래도 이 방법으로 가면 적어도 마음은 편하겠지.
……근데 왜 메린이 날 뒤에서 붙잡는 걸까?
왜 내 양쪽 겨드랑이에 각각 팔 하나씩 끼우고, 그대로 나를 일으키는 걸까?
“……너 뭐하냐?”
“생각해봤는데,”
내 뒤에 선 채, 그녀는 한 팔로 내 목을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내 두 손을 뒤쪽으로 돌려 꽉 잡았다.
완전히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협력은 꼭 해야 할 거 같아.”
그렇게 중얼거리며, 메린은 팔과 손에 힘을 팍 주었다.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내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이, 이 자식 설마?!
온 몸에 한기가 돌았다.
바짝 오른 긴장에 몸이 굳어갔다.
그런 내 맞은편에서, 후후후, 하는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
블루벨이, 바닥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꽁꽁 묶고 있던 밧줄은 힘없이 풀린 채 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그 뒤에는,
“걱정 마세요, 카엘 님! 곧바로 치유해드릴 테니 괜찮아요! 배는 터져도 바로 안 죽거든요!”
방긋 웃는 얼굴로 사제님이 엄지를 척 올리고 있었다!
너구나! 네가 풀어줬구나, 로나 이 자식!!
그보다 배가 터지면 당연히 죽지, 뭔 소리야!!
더 기가 막힌 건, 그새 내 발치에 있던 늑대가 총총걸음으로 저만치 위슨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것이다.
늑대, 너마저!!
“후후후…… 네 동료들은 동의한 모양이구나.”
정말 기쁘다는 듯이 웃으며, 블루벨은 두 손을 풀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득.
내 뱃속 너머, 등뼈까지도 이 모양으로 만들겠다는 듯한 불길한 소리가 동굴 속에 울려퍼졌다.
원한에 불타는 사악한 엘프가 한 걸음 내딛자, 내 몸은 알아서 발버둥치며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메린메린, 메린! 임마, 놔! 놔줘! 이거 놓으라고!! 싫어! 이렇게 죽는 건 싫어어어!!”
“너 안 죽일 거라며.”
“아냐, 죽일 거야! 결과적으론 날 죽이는 게 될 거야!! 그러니까 놔아아!!”
힘껏 몸부림을 쳐도 소용없었다.
그러나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죽기 싫은걸! 아니, 맞기 싫은걸!!
“자, 간다아~”
“오지마오지마,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내게 다가오지 말란 말이다아아!!”
온 힘을 다해 외치는 순간, 그대로 의식이 뚝 끊어졌다.
……머리 위에서 깔깔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나를 내려다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 입에 담고 있다.
약골 주제에 잘난 척하냐, 어딜 대드냐……
대충 그런 말들이 귀로 들어오려다가, 도로 흘러내려가버린다.
나를 두들겨대는 발과 주먹에서 머리랑 배를 지키느라 귀담아들을 여유가 없기도 하고, 나 자신도 놈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느라 안 들리는 것도 있다.
그러다 나에게 발길질하던 놈이 저만치 뒤로 날아가버린다.
불쑥 나타난 메린이 놈의 위에 올라타서, 그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분노의 함성이 비명이 되고, 놈의 주변에 피가 튀기면서 공포가 퍼지기 시작한다.
그만그만그만! 그만해! 그만!!
필사적으로 녀석을 당겨, 놈에게서 떼어놓는다.
남아 있던 기운이 몽땅 빠져버려 바닥에 드러눕는다.
놈들은 그 틈을 타, 곤죽이 된 제 대장을 데리고 도망친다.
눈에 익숙한 광경, 몇 번이고 겪어본 적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날, 나는 모처럼 산 사탕을 놈들에게 빼앗긴 탓에 크게 좌절했다.
나를 등에 업고 가는 그녀에게, 불쑥 중얼거릴 만큼.
……넌 좋겠다. 강해서.
내가 강한 게 아니라, 다들 약한 거 아냐? 그 중에서 네가 제일 약하고. 어떻게 맨날 얻어터지고 사냐?
……
반박할 수 없는 말에 가만히 입 다물고 있자, 그녀가 별안간 킥킥 웃으며 재차 말을 꺼냈다.
야, 나 좋은 생각 떠올랐어. 아침부터 쭉 나랑 노는 거야!
내가 왜?
넌 엄청나게 약하고, 나는 다들 무섭다고 피하잖아. 그러니 나랑 같이 있으면 맞을 일이 없겠지! 넌 안 맞고, 나는 너랑 놀고. 응응, 엄청나게 좋은 생각이야!
메린은 진심으로 그걸 좋은 생각이라 믿는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평소라면 웃기지 말라고 내질렀겠지만, 나는 사탕을 빼앗긴 탓에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따질 기운도 없겠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냥 웃어버렸다.
……너랑 있으면 안전하다는 거냐?
안전? 그게 뭐야?
……내가 맞을 일이 없다는 거야.
그래, 그래. 나랑 있으면 안전해. 그러니까 앞으로 아침부터 나랑 놀자. 매일매일!
킥킥 웃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그 말을 곱씹었다.
어차피 이 녀석에게 시달리나 딴 놈들에게 쳐맞나, 그리 다르진 않지?
아니, 적어도 얘는 나에게서 뭘 빼앗지는 않는다.
지난번에 실수로 다리 부러뜨린 뒤에는 나름대로 좀 살살 대해주는 거 같고.
또 몬스터이든 다른 썩을 놈들이든, 이 녀석은 못 당하잖아?
좋네.
응, 아주 좋아.
……그래, 그러자…….
너 대답했다? 그럼 내일부터 바로 노는 거다?
응…….
이 녀석과 아침부터 쭉 같이 있는다…….
와아, 앞으로 어디서 뭘 하든 안전하겠네.
이 녀석이 나한테 질리기 전까진 말야.
안전하다. 아무 위험도 없다.
……그 생각에 안심이 된 건지, 긴장이 확 풀리면서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녀가 혼자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뜨자, 눈앞에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방금 전에 본 것보다도 훨씬 성숙한, 역시나 질리도록 본 얼굴이다.
꿈에서 또 다른 꿈으로 이어지는 일이 가끔 있긴 한데, 이것도 그건가?
그래, 꿈이야.
그렇구나.
하긴, 얘 뒤에 보이는 벽이 엄청 이상하게 생기긴 했어.
게다가 얘가 나랑 한 이불 속에 같이 누워 있다니…….
꿈 맞네.
이번엔 이러저러한 일이 다 끝난 뒤인가보군.
상황 설정이 쓸데없이 세부적인데?
아쉬우니까, 한 번 더…….
……는 무슨.
자는 사람을 덮치면 안 되는 법이다.
꿈인데 뭐 어때? 그럼 키스라도……!
꿈이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리고 키스하는 것도 결국 덮치는 거잖아.
……하지만 모처럼 그녀와 함께 있는 꿈, 그것도 내가 꿈인 걸 알아차린 꿈인데그냥 있긴 아쉽긴 해.
그러니 껴안자.
이미 같은 이불 속에 있으니까 이건 괜찮겠지.
지금 장난하냐고 속에서 외치는 목소리를 무시하면서, 나는 고이 잠든 그녀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포근한 이불에 더해,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한껏 전해져 온다.
그녀의 머리에서 풍기는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몸을 한층 더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아, 꿈이라고 해도 좋다.
아니, 꿈이어서 좋다.
꿈이니까 이렇게 거리낌없이 맘껏 껴안을 수 있는 거잖아.
곧 물거품처럼 흩어질 허망한 순간인데도, 나는 벅차올라오는 행복감을 만끽하며, 웃음이 절로 나오는 걸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근데 역시 꿈은 꿈이구나.
이렇게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고 있는데, 그 부드러움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데 달아오르긴커녕 편안하다.
바로 전에 본 꿈 때문인가?
그대로 나는 다시 눈을 감았고,
“꺄아아아아악!!”
그 다음날 아침, 힘찬 비명을 질렀다.
왜냐? 꿈이 아니었으니까!!
얘 또 왜 나랑 같이 자고 있는 거야?!
베개 하나를 꼭 껴안은 채로 황급히 방 구석으로 도망쳤다.
“……!”
근데 여기 어디야?
분명히 동굴 속에 있었던 거 같은데, 웬 나무벽?
웬 침대에 옷장? 누구 집인가? 여기가 침실인가?
그보다 메린 쟨 내가 그 큰 비명을 질렀는데도 꿈쩍도 안 하네, 혹시 죽은 거 아냐?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볼을 콕콕 찔러보았다.
“우으응…….”
얼굴을 찡그리며 뒤척인다.
귀여워.
……아니 이게 아니지!
“허…….”
그럼 뭐야, 아까 그건 꿈이 아니라 살짝 깼던 거였잖아.
그럼 만약 그 속삭임대로 꿈이니까 뭐 어떠냐 하고 덮쳤다면……,
“히이익…….”
하마터면 자고 있는 여자를 덮친 파렴치한이 될 뻔했다!
와, 진짜 위험했어.
내 지극히 상식적인 성품이 날 살렸구나!
역시 사람은 평소부터 건실하게 살아야 돼!
“오, 일어났네. 안녕?”
능청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갑자기 창문으로 불쑥 얼굴이 튀어나왔다!
“꺄악!”
“억.”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베개를 던져버렸다.
살짝 딱딱한 기미가 있는 베개가 그 얼굴을 정통으로 때리며 방바닥에 떨어졌다.
“하이고, 아파라……. 듣던 대로 성깔 있구나.”
한손으로 얼굴을 문대며, 그 누군가는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연한 노란빛 머리카락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부산스럽게 흔들렸다.
아마 집주인이겠지.
정중히 인사를 해야 마땅할 텐데,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바닥에 서서, 나를 향해 빙긋 웃으며 손을 내민 그 사람은,
“안녕, 용사님? 블루벨에게 얘기 들었어. 만나서 반가워!”
……두 귀가, 하늘을 향해 뾰족이 솟아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