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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73화 (173/475)

〈 173화 〉 169화 : 아무튼 협력하자구 (3)

* * *

마침 방 구석에 서 있겠다, 나는 방긋방긋 웃고 있는 엘프와 그 주변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일단 연노랑색 머리를 한데 모아 뒤로 질끈 묶은 이 엘프는, 그 블루스타 친위대장처럼 얼굴선이 굵직굵직한 게 남자가 분명하다.

……사람을 처음 만날 때마다 성별부터 확인하고 있네.

그런 괴상한 습관이 들어버린 거에 자괴감을 느끼며, 나는 이 수상쩍은 엘프의 차림새를 살폈다.

블루벨처럼 단추 대신 끈으로 옷섶이 매여 있는 녹색 셔츠에, 짙은 회색 바지만 입고 있을 뿐, 무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어.

격투술을 쓸지도 모르니까.

다음은 탈출 경로.

여긴…… 침대와 옷장, 장식장, 작은 책장이 전부인 작은 침실이군.

문이 있긴 한데, 창문에 서 있는 엘프 앞을 지나쳐야 하니 있으나 마나다.

결국 창문밖에 없는데, 이 방엔 방금 엘프가 타고 들어온 창 딱 하나밖에 없다.

하핫, 망했는데?

메린도 퍼질러 자고 있으니 진짜 완전히 망했……

……응? 얘가 아직도 자고 있다고?

위협 요소가 있으면 바로 잠이 깨는 애가?

“……”

어……

적이 아닌가?

엘프를 빤히 쳐다보자, 그는 난처한 듯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윽고, 그는 쭈뼛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내 말 알아듣지? 간만에 쓰는 거긴 한데, 그래도 잘못된 건 없을 텐데.”

살짝 당황한 듯한 그의 갈색 눈에서는 적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이 엘프, 방금 블루벨이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사형수 신세인 그녀가 제 발로 찾고, 내 이야기까지 전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인가보군.

나나 메린을 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메린이 저렇게 퍼질러 쳐자고 있는 걸 보면 확실해.

이 엘프는 적이 아니다.

……그럼 곧 싸울 듯이 경계할 필요는 없지.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서 인사했다.

“……네, 잘 말씀하고 계십니다. 답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좀 놀라서…….”

“오, 역시! 이야~ 내가 학교 다닐 때도 말야, 딴 건 몰라도 언어 쪽은 항상 만점 수석이었거든!

난 골든로드. 다시 한번, 만나서 반가워!”

다시 싱글벙글 웃으며, 엘프는 나에게 다가와 재차 손을 내밀었다.

내가 약간 주춤거리면서 그 손을 잡자, 골든로드라 소개한 엘프는 내 손을 힘차게 잡고서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어어, 그, 저는……”

“알아알아, 카엘이지? 블루벨에게 들었어. 아, 그래, 자네도 수배 중이니까 그냥 이름 부르는 게 낫겠군. 잘 부탁해, 카엘!”

내 어깨를 두드리기까지 하면서 혼자 주절주절대는 이 모습……!

오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거리감 따위 신경 안 쓰고 팍팍 접근하는 성격인가!

나 같은 사람에겐 굉장히 부담스러운 유형이다!

“배고프지 않아? 거기 아가씨도 깨워서 같이 밥이나 먹자구!”

“어…… 아, 예……. 저기,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대답 대신 눈썹을 살짝 올리는 골든로드에게, 나는 메린을 가리키며 물었다.

“쟤 누가 던져 넣은 겁니까?”

“저 아가씨? 제 발로 들어갔는데? 이야~ 인간들은 대담하구나. 남의 눈 신경 안 쓰고 당당하게 동침하다니! 그러면서 다른 사람 잠 안 깨도록 배려도 해주고 말야!

어제는 깜빡하고 귀마개 안 꼈는데도 되게 조용하더라고. 오늘부턴 제대로 끼고 잘 테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즐겨!”

“…………”

뭐부터 해야 할까?

저 쿨쿨 자고 있는 녀석을 침대에서 떨어뜨리는 거?

아니면 이 엘프의 머릿속을 뜯어고치는 거?

아아, 그래, 이거부터 하자.

시간 순서도 그렇고, 지금 상황에선 이걸 제일 먼저 해야지.

“하으으…….”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세상에, 초면인 사람 앞에서 뭔 꼴을 보인 거야?

왜 아무도 이 자식을 안 말린 거야?

근데 생각해보니 우리 일행 중엔 말릴 놈이 하나도 없구나, 제기랄!

머리 위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겠지.

그런 내 등을 두드리면서, 골든로드는 뭘 부끄러워하냐며 하하 웃었다.

“인간 기준으로도 둘이 젊지? 젊은 남녀는 신나게 서로 부비적대야 하는 거야. 그게 당연한 거라구! 특히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런 사이 아닌데요…….”

“응? 아까 슬쩍 봤을 때, 둘이 꼭 껴안고 있던데?”

크아아악! 그 음란마귀만 아니었어도……!

그보다 이 아저씨는 왜 또 방을 슬쩍 들여다봐?!

속으로 땅바닥을 두드리면서 마구 절규하며, 나는 그 엘프를 향해 똑바로 말했다.

“아니에요.”

“그래? 흠흠, 그럼 짝사랑인가?”

“……”

“앗하하, 미안미안, 내가 혼자 살다보니 혼잣말이 좀 커!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지 마.”

빤히 쳐다봤더니 손을 휘휘 저으면서 너스레를 떤다.

아, 진짜 부담스럽다…….

내가 한숨을 쉬자, 골든로드는 헛기침을 하더니 처음에 봤던 것처럼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묻고 싶은 게 많을 거 같은데, 밥이라도 먹으면서 하자구. 세숫물은 거기 있으니까 준비되면 부엌으로 와. 아가씨도 깨우고!”

“네……. 그럴게요.”

내 대답에 그는 만족스러운 듯이 웃은 후, 다시 창문을 넘어서 나갔다.

……방에 문 있는데.

거참 희한한 사람이군.

아무튼 동굴에서 그 지랄을 떤 뒤로 꼬박 하루가 지나버렸으니, 여러모로 들을 이야기는 많을 것 같다.

얼굴을 씻어 잠의 흔적을 모조리 없애버린 다음, 나는 메린을 깨우기로 했다.

이 녀석과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좀더 다정하게 깨워주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린 그저 친구 사이일 뿐.

그러니 그 관계에 걸맞은 방법을 써야지.

나는 아까 계획했던 일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일어나라, 임마~”

느긋하게 말을 걸며 메린을 이불째 굴려버렸다.

그녀가 이불에 돌돌 말리면서 침대 바깥으로 쿵 떨어졌다.

잠시 후, 메린이 졸린 눈을 비비며 바닥에서 비실비실 일어섰다.

“안녕, 잘 잤어?”

“좋은 아침…….”

태연하게 건넨 인사에 거의 감긴 눈으로 중얼거린 후, 그녀는 하품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그 다음,

“새끼가 뒤질라고.”

녀석이 곧바로 베개를 던졌고,

“헛.”

나는 그걸 반사적으로 받았다!

오, 좀 아프긴 해도 역시 잠이 덜 깨서 그렇게 세게 던지진 못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든 순간,

“우악?!”

머리 위를 무언가 덮으며 시야가 가려졌다!

이 폭신한 느낌, 이불인가!

그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불이 날아왔다는 건, 설마 베개는 그저 내 주의를 흐트러뜨리기 위한 미끼……!

“……!”

아냐, 아직이야!

이럴까봐 일부러 녀석을 침대 건너편으로 굴린 거잖아!

지금이라도 이불을 걷어버리고 대피를……

“크헉.”

……하기엔 이미 늦은 듯했다.

복부에서 묵직한 통증이 울려오면서, 무릎이 절로 푹 꺾였다.

얼굴부터 바닥에 쓰러졌지만 이불 덕분에 꿍, 하는 진동만 느껴질 뿐, 이마가 얼얼하진 않았다.

“깨워준 건데…… 너무해…… 흑…….”

“그냥 흔들거나 불러서 깨운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냐?”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묻는 그녀에게, 나를 고개를 쳐들면서 단호히 대답했다.

“그냥 깨우면 재미없잖아. 누구나 그 상황에선 굴려서 떨어뜨리고 싶을걸?”

“에라, 미친놈아.”

툭 내뱉으면서, 메린이 주변에 떨어져 있던 베개로 내 머리를 갈겨버렸다.

그대로 이불에 다시 고개를 처박으며,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도 못 이기네…….

이번엔 좀 자신 있었는데.

저 녀석에게 이길 수 있는 건 진짜 가위바위보 밖에 없는 건가…….

속으로 꿍얼대며 고개를 들었다.

“……”

곧바로 다시 내렸다.

“……너 뭐하냐?”

“엉? 가슴속옷 입는데?”

아니 그걸 누가 모르냐고.

어깨에 끈 걸고, 가슴에 한창 천을 둘둘 말고 있는 걸 봤는데!

“왜…… 왜 내가 있는 데서 그러는 건데……? 왜 나보고 나가라고 안 했어……?”

“약속했잖아.”

“뭘?!”

부스럭부스럭, 천이 스치는 소리 속에서 메린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엘프랑 협력하면, 이후로 계속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기로.”

“내가 언제 약속했냐? 그냥 너 혼자서 조건 건 거잖아.하…… 됐다.

……그래서 내 옆에서 잔 거야?”

고개를 힐끔 들자, 그녀는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 조끼를 입고 있었다.

휴, 끝났군. 나도 슬슬 채비해야지.

안도하며 몸을 일으키는 내 귀에, 그녀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너 진짜로 용변 볼 때도 따라오려는 건 아니지?”

“상황 봐서.”

“보긴 뭘 봐, 따라오지 마, 임마.”

머리를 묶기 시작한 그녀에게 신발을 휙 던져주며 쏘아붙였다.

나 역시 신발끈을 묶고, 장식장 위에 개켜져 있는 더블릿을 껴입기 시작했다.

“누구는 좋아서 따라가냐? 상대가 엘프이니까 그렇지.”

“블루벨은 감정 다 털었을 거 아냐. 굳이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가 있냐?”

“내 경험상, 훌훌 털어서 아무 원한 없다는 놈일수록 더 진득하게 뒤끝 부리던데.”

겉옷의 단추를 여미는 나를 향해,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쪼르르, 세숫물을 따르는 소리가 조용히 들린 후, 짧은 한숨과 함께 그녀가 재차 말을 이었다.

“너도 가끔 미치는데, 그 엘프는 뭐 다르겠냐? 게다가,”

찰박거리는 물소리 후, 그녀는 물기를 닦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 집주인도 엘프잖아.”

“흠……”

그건 그래.

이 집 주인인 골든로드가 우릴 팔아넘기지 않을 거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물론 블루벨은 이 사람이 그러지 않을 거라 믿으니까, 우리를 여기로 데려왔겠지.

하지만 사람 속은 그 파랑새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뒤로는 무슨 생각을 품고 있을지 모르는 거다.

친절하게 우리를 돌보았던 그 마녀처럼.

불쌍한 척은 다 했던 그 밀수꾼들처럼.

“……”

음, 이제까지의 여정이 인간불신을 조장하긴 했군.

세상엔 정말 지저분한 사람이 많은 것 같아.

드래곤이 없어지고, 몬스터들이 얌전해져서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좀 괜찮아질까 모르겠다.

뭐,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래도 용변 볼 땐 따라오지 마라! 절대로!”

그녀 몫의 망토를 휙 던져주며 일갈했다.

메린과 함께 부엌에 들어서자, 골든로드가 막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부엌 한편에 놓인 아담한 테이블 위에는, 굉장히 간단한 식사가 딱 세 명분 차려져 있다.

달걀프라이와 햄, 그리고 볶은 양배추가 올려져 있는 접시와, 굉장히 질어 보이는 죽이 함께 놓여 있었다.

“왔어? 자자, 앉아서 좀 들어봐.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반색하며 권하는 그의 말을 따라, 우리는 테이블에 앉았다.

……근데 사람 수가 모자라네.

절반이나 안 보이는걸?

“다른 사람들은……”

“자네 동료 둘은 밖에 탐문하러 갔어. 블루벨은 나 대신 일을 해주고 있고. 원래 내가 해야 하는데, 자네들 밥이나 챙겨주라면서 쫓아내더라.”

“아니 일이라니……”

“아, 걱정마걱정마. 우리집은 외곽에 떨어져 있거든. 내 직업상 다른 사람들이 올 일도 거의 없고.”

어서 먹으라는 듯한 손짓에, 죽 한 스푼을 떠서 입에 넣었다.

음…… 이 까끌까끌한 식감, 오트밀인가?

우유에 푹 끓인 걸로 모자라 꿀까지 넣었는지, 특유의 단 내음을 풍기며 목 너머로 넘어갔다.

“입맛에 맞나 보네. 다행이다.”

“아, 네. 맛있네요.”

내 대답에, 골든로드는 빙긋 웃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스푼을 들고 막 오트밀을 뜨며, 그는 재차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했더라? 아, 맞아. 다른 사람들이 여기 거의 안 오는 대신, 나도 거의 밖에 나갈 일이 없거든? 그래서 미안한데, 나도 너희 이야기를 같이 듣게 될 거야.”

“……”

“자리를 비켜줘봤자 귀에 다 들리는데다, 내가 집 밖을 서성거리는 걸 누가 보면 되게 수상하게 생각할걸? 그러니 양해해줘.”

엘프라서 어쩔 수 없어.

골든로드는 어딘지 자조적인 웃음을 띄우며 덧붙였다.

“직업이 뭔데요?”

심드렁하게 물으며, 메린은 달걀프라이에서 떼어낸 노른자를 오트밀 위에 올리고 톡 터뜨렸다.

……아까 그녀가 했던 말 때문일까?

어떤 암시를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묘지기.”

“묘 같은 건 안 보이던데……. 그리고 그 엘프…… 블루벨이 그러던데요.”

스푼에 묻은 노른자를 핥으며 메린이 중얼거렸다.

“엘프는 죽으면 곧바로 흙먼지가 된다고. 그런데 묘가 있어요?”

고개를 까닥이며, 그녀는 골든로드를 마주보았다.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날카로운 빛을 두 눈에 품은 채.

“하하, 블루벨에게 들었구나. 맞아, 우리 엘프는 죽으면 곧바로 흙이 돼. 밥 먹고나서 내 일터를 보여줄게.

그러니 아가씨, 의심을 거두시고 일단 편하게 드셔요.”

사글사글하게 웃으면서, 그는 부드럽게 손짓했다.

짧은 한숨을 쉰 후, 메린은 말없이 오트밀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살짝 씁쓸히 웃은 뒤, 골든로드도 다시 스푼을 움직였다.

그렇게 이어진 유쾌하면서도 어색한 아침식사를 마친 후, 골든로드는 자신의 일터, 즉 묘지를 보여주겠다며 우리를 바깥으로 안내했다.

이 집도 나무 위에 달려 있는 탓에, 나와 메린은 문 앞에 달린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 했다.

“사다리도 있네요? 엘프들은 이런 거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묻자, 천천~히 나무를 걸어 내려가던 골든로드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손님용이야. 옛날엔 필요 없었는데, 요즘은 필요해졌어. 아니, 자네들에겐 요즘이 아닌가? 160년 전인데, 어때?”

“엄청 옛날인데요.”

“하하, 역시 그렇구나. 아무튼 그건 손님용이야. 160년 전에 건축법이 바뀌었거든. 모든 나무집 문엔 사다리나 계단을 꼭 설치하라나? 어차피 여긴 거의 아무도 안 오는데 말야~

그래서 솔직히 걱정했는데, 사다리가 의외로 튼튼~하더라. 160년만에 밟히는 건데 안 부러지더라고.”

“……”

갑자기 발 밑이 엄청나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160년 된 사다리라니, 이런 세상에……!

자연히 내려가는 속도가 느려진 나를, 아래쪽에 있던 메린이 한숨을 쉬며 채근했다.

“야, 주접 떨지 말고 팍팍 내려와. 내가 어제 너 업은 상태로도 올라갔는데 멀쩡했다.”

“그래그래, 걱정 마. 카엘 자네가 밧줄에 꽉 묶여서 아가씨 등에 찰싹 붙어 있는 상태였는데, 사다리가 삐걱이지도 않았다구. 어젯밤의 침대처럼 굉장히 조용했다니까?”

“……”

아잇, 저 아저씨가 진짜!

하마터면 발 미끄러질 뻔했잖아!

내가 발끈한 눈으로 쳐다보자, 골든로드는 낄낄 웃으며 총총걸음으로 나무를 걸어내려갔다.

……아, 진짜 딱밤 때리고 싶다.

배신 안 하려나?

땅으로 내려온 다음, 망할 아저씨는 우리를 데리고 나무 뒤쪽으로 돌아갔다.

얼마 걷지 않아, 중앙에 앙상한 가지만 있는 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주변에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공터가 나타났다.

블루벨은 그 꽃밭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탓에, 뭘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골든로드는 팔을 쭉 뻗어 공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내 일터야.”

……묘지기라며? 꽃밭인데?

설마 또 속은 건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에게 대꾸했다.

“엘프들은 정원사를 묘지기라고 부르나요?”

“당연히 아니지. 저~기 보이는 꽃이 죄다 무덤이란다.”

“……네?”

다시 공터로 시선을 돌렸다.

완전히 죽은 듯한 시커먼 나무 주변에는, 그야말로 융단이라 해도 좋을 만큼 꽃이 피어 있다.

……저 꽃들이 죄다 무덤이라고?

멍하니 꽃밭을 바라보는 내 귀에, 약간 가라앉은 듯한 골든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프는 죽으면 흙이 되지. 그런데 수명 전에 죽은 엘프는 무언가 씨앗이라도 품고 있나봐. 얼마 안 있어서 꽃이 피더라. 그렇게 핀 게 한스러운지, 가끔 이상한 기운도 나오고.

저 나무 밑에 꽃이 피면 그걸 적당히 옮겨 심고, 가끔 흘러나오는 이상한 기운을 없애는 게 내 일이야.”

수명 전에 죽은 엘프는 꽃을 피운다.

그 꽃은 저 시커먼 나무 밑에서 피어난다.

그렇다는 건…….

“맞아.”

건조하게 웃으며, 골든로드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여긴 처형장이야.”

그의 중얼거림에 호응하듯이, 숲에서 공터로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꽃들이 흔들리며 부스스 떠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이건 꽃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야.

공터 주변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이지.

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아.

무언가 흐느끼는 듯한 소리는 더더욱……!

“……”

……몸이 순간 오싹해진 것도, 아마 바람이 차가워서 그런 걸 거다.

망토 깃을 꽉 쥐며 그렇게 되뇌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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