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87화 (187/475)

〈 187화 〉 183화 : 경청하고, 곱씹어라 (1)

* * *

톡톡, 뺨을 두드리는 느낌에 눈을 뜨자, 그녀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저녁 다 됐다는데, 잘 거지?”

“아니…… 일어날래…….”

“엉? 배고프냐?”

고개를 저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숨 넘어갈 듯이 울었던 탓에 눈은 뻑뻑하고, 머리는 지끈거린다.

뱃속은 텅 비었을 게 분명한데도, 입맛이 있긴커녕 아예 배가 고프지도 않다.

“그럼 그냥 잠이나 자지?”

“아냐…… 먹을래…….”

속이 비었으면 도로 채워야 한다.

몇 시간 전에 내 입으로 어떤 엘프 아저씨에게 직접 했던 말이다.

남에게 그런 말을 했으면, 나 자신도 지켜야 하는 법.

게다가 지금은 여유롭게 늘어져 있을 때도 아니다.

세상 끔찍한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해서, 온종일 드러누워 끙끙 앓아도 되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나는 그 참상을 만든 개새끼들을 전부 갈아버릴 생각이다.

그러려면 강제로라도 배를 채우고, 약을 먹어서라도 쉬어야 한다.

그러니 스튜 한 그릇이라도 억지로 우겨넣을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

왜 이렇게 잘 들어가지?!

스튜 한 그릇만 먹을 생각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두 그릇째 가득 담고 있었다!

스튜에 곁들어진 꼬치고기구이도 벌써 두 개나 먹었고!

“의외로 잘 처먹네.”

“……그러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는 위슨의 시선을 피하며, 나는 또 다른 꼬치를 집어 고기를 우물거렸다.

좀 질기긴 해도, 소스 없이 간만 맞춘 것 치고는 맛있는 편이었다.

“우와, 카엘 님이 무슨 고기인지 묻지도 않고 드시는 거 처음 봤어요! 그거 지난번에 잡은 다이어울프 고기인데, 괜찮으세요?”

“응……, 맛있네…….”

내 솔직한 감상을 들은 로나의 눈이 더 커지는 게 얼핏 보였다.

……아무리 재료가 괴상해도 맛있는 건 맛있다고 했었는데 뭐 저리 놀란대?

게다가 다이어울프면 그냥 늑대나 마찬가지잖아.

늑대고기는 이미 여러 번 먹었는데 뭐…….

그렇게 한 번 체하는 일 없이 조용조용 음식을 먹었다.

이윽고 내가 그릇을 비우고 긴 숨을 내쉬자, 아까부터 나를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빤히 보고 있던 메린이 툭 던졌다.

“너 입맛 없다며?”

“……없었어! 진짜 없었다고!!”

첫 술을 뜨기 전까지, 아니 그 스푼을 입에 넣기 전까지, 아니아니 지금도 식욕은 전혀 없다.

그냥 입에 넣고 삼켰는데, 전혀 걸리지 않고 술술 넘어갔을 뿐이야!

그래서 또 별 생각없이 한 스푼 더 뜨게 된 거고!

뭘 먹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전혀 못 먹겠다는 것도 아닌, 그런 괴상한 상태인 것이다!

어째서인지 좌절한 나를 향해, 로나가 까르르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오오,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는데도 다시 꿋꿋하게 일어나시는 그 불굴의 정신……! 그 뒤에 바로 식사까지 하시는 근성……!

그럼요! 아무리 내가 상심에 빠져 있더라도 적들은 봐주지 않는걸요! 역시 카엘 님, 전장에서의 마음가짐을 제대로 갖추고 계시네요!”

“그런 거 아니야…….”

제길, 그냥 먹어야 할 거 먹었을 뿐인데,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엎드리고 싶다.

하늘을 향해 소리 높여 외치고 싶다!

난 진짜 식욕 없어! 억울해!!

“밥 잘 처먹는 거 보니, 거기서 본 거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겠네.”

“……”

고기를 문 채로 굳어버렸다.

거기서 본 것…….

……순식간에 마음이 도로 가라앉았지만, 내 입은 멀쩡하게 고기를 뜯고 씹었다.

이게 바로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라는 것인가!

“메린이… 음,대충 말하지 않았냐?”

“어. 진짜 대충. 그래서 네가 왜 정신 털렸는지는 알았는데, 놈들이 정확히 무엇을, 왜 했는지는 몰라.”

“……”

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 그걸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내가 본 것을, 그걸 보고 생각한 것을 말하긴 해야 하는데…….

“후우……”

아주 살짝,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 꼭 해야 돼? 오늘은 그냥 쉬고 내일 해도 되는 거 아냐.”

나와 달리 ‘입맛이 없다’는 걸 온 몸으로 보이고 있던 블루벨이 낮게 중얼거리자,위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곧바로 대꾸했다.

“지금 해야지, 멍청아. 내일도 이렇게 여유부릴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있냐? 그리고 밤은 이제 막 시작이야. 시간 많아.”

“……얘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네가 그 소리하자마자 얼굴이 파래졌잖아. 근데 그런 애한테 얘기를 시키고 싶어?”

“해야 되니까 그러는 거 아냐.……근데 웃기네, 왜 네가 지랄이냐? 위슨이 너한테 물었어? 상황 파악 못하는 애새끼는 빠지시지?”

“너……!”

“아, 시끄러, 이 자식들아!”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분위기에 빽 소리지르자, 두 녀석이 곧바로 조용해졌다.

블루벨은 잔뜩 인상을 쓴 채로 고개를 홱 돌렸고, 위슨은 오히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못하냐?”

“……”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묻는 위슨을 향해, 블루벨이 또 다시 눈을 치켜뜨는 게 얼핏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곁눈질조차 하지 않고 철저히 그녀를 무시한 채, 나만 주시하고 있었다.

저렇게 남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하는 건 그렇다 치고……

‘해야 되니까 그런다’고?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 들어야 하니까 묻는 거라고?

한 명 빼고는 내 눈치 보느라 말 꺼내길 주저하고 있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니까 스스로욕받이 역할을 자처하는 거야?

……나 참, 어이가 없네.

쟤 진짜 열 다섯 살 맞아?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할 거야. 해야지.”

“지금 바로 할 수 있냐?”

“할 수는, 있는데……”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잠시 눌렀다.

그 상태로 심호흡을 한 후,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슬쩍 살폈다.

은근히 내 말을 기대하는 눈치인 로나, 무던한 위슨, 무관심한 메린, 뾰로통한 블루벨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블루스타.

각기 다른 표정을 지은 채, 나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아니, 한 명은 진짜 관심 없는 거 같지만.

“……그러려면 차가 좀 많이 필요할 거 같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중간중간에 차를 홀짝이면서, 나는 그 어머니 나무에서 봤던 것을 쭉 이야기했다.

나무에 맺혀 있는 파란 과실들, 나무줄기에 박혀 있던 세 구의 시신, 그리고 창고 지하의 나무통…….

순식간에 비어 버린 물잔을 다시 채우며, 나는 중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불태우고 싶었는데 부싯돌로는 안 될 거 같더라. 기름도 없고. 그래서 그냥 나왔어.”

“지하니까 더 힘들겠지. 다음에 위슨한테 알려줘.”

대강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물잔을 기울였다.

따끈한 기운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자꾸만 뒤집어 엎어지려는 속을 가라앉혀주었다.

“후…… 어쨌든 피를 전부 뺀 다음, 몸은 썩혀서 비료로 주고 있는 거 같아. 근처 어디에 애들을 숨기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 찾을 정신이 없었거든.”

솔직히 거기서 어떻게 동굴로 왔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뭔가 휘두른 거 같기도 하고, 붙잡혔던 거 같기도 하고…….

“아, 그때? 너 계단 올라와서 왕궁으로 돌격하려고 하길래 내가 패대기쳤지.”

“그렇구나. 어쩐지 등이 아프더라. 젠장할.”

제대로 못 걸었던 이유가 그거였나?

충격을 너무 크게 받아서 휘청거리는 줄 알았는데!

그러고보니 팔도 좀 당기는 거 같은데, 혹시 얘한테 꺾였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공연히 어깨를 빙빙 돌리며, 나는 아직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블루스타를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의 수양딸인 블루벨과 달리,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먹을 거 다 먹고 침착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차를 홀짝이며, 그에게 물었다.

“당신, 알고 있었어요?”

“……계획은 알고 있었다. 세부사항은 몰랐고.”

“계획이 뭔데요?”

“돌에렛을 되살리는 것.”

되살린다고? 아직 안 죽은 것 같던데…….

블루스타는 내 시선을 무심히 마주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돌에렛은 확실하게 죽어가고 있다. 삼백 년 전, 나를 낳은 그 순간부터.”

“허…… 당신 삼백 살이었구나. 아, 하긴, 당신을 교육한 골든이 사백 살이었지.”

새로 태어난 엘프는, 백 살 위의 형제나 자매가 맡아서 이것저것 가르친다고 했던가?

……엉? 그럼 블루벨은 뭐지?

블루스타랑 130살이나 차이 나는데, 왜 그가 맡은 것인가?

“기념하기 위해서이지. 나와 블루벨은 산화(?花)의 시작과 끝이니까.”

삼백 년 전, 블루스타와 다른 세 엘프를 시작으로 어머니 나무는 시들어갔다.

엘프가 태어날 꽃도 새로이 맺히지 않고, 태어나는 엘프도 영 시덥잖았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70년 전에 태어난 블루벨을 마지막으로, 이제 그 나무에는 단 한 송이의 꽃도 달려있지 않다.

그래서 산화의 시작과 끝이라는 건가?

블루스타가 그 시작이었으니, 마지막 꽃인 블루벨을 그에게 맡긴다?

음…… 뭔가 좀 걸리적거리는 말이다.

꼭 그 나무가 시든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듯한 말투인데?

내 말에, 블루스타는 엷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의도가 아주 없진 않겠지. 장로들에게 나와 다른 세 엘프는, 엘프의 쇠락을 알리는 시발점이나 마찬가지이니…….

불행의 원인을 다른 누군가에게 찾고 싶어하는 건 흔한 일이지.”

“……”

“여하간 블루벨이 태어나고 일 년 뒤, 폐하는 돌에렛을 다시 되살리겠다고 천명하셨다. 구체적인 방법은 조금 전에 말했듯이 전혀 알지 못했다.”

“친위대장인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 아닌가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은 후, 조용히 대답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는 시종이지, 내가 아니야. 나는 폐하께서 왕궁 밖을 나가실 때와 침소에 드실 때만 호위할 뿐, 평소에는 대원들을 관리한다.

물론 다른 자들에 비해 여러모로 보고 듣는 것은 많으나…… 그리 큰 기대는 하지 마라.”

호로록, 물잔을 한 번 기울인 후,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협조적이시네요. 처형당할 뻔한 게 많이 원망스러웠나 봐요?”

“아니다.”

“그럼 블루벨 때문에?”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고개를 저었고, 나는 의외의 대답에 물잔을 기울이던 손을 멈추었다.

당연히, 사랑해 마지않는 블루벨이 우리와 함께 있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블루스타는 이마를 찌푸리며 말을 꺼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이라뇨?”

“어제, 그대의 검이 빛을 내뿜는 와중에 종소리가 울렸었지.”

눈을 뜨고 있기 어려울 정도로 환한 빛 속에서, 마음이 불안해지는 종소리가 댕댕 울렸었다.

근원 어쩌고, 심판의 때가 어쩌고 하는 목소리도 같이 들렸었고.

그 영문 모를 목소리 다음엔 종소리만 계속 들렸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엘프들은 또 다른 말소리를 들었던 모양이었다.

어딘지 무거운 말투로, 그는 인상을 쓴 채 말을 이었다.

“……‘너 배반자여, 형제의 피를 흘린 자여, 그 핏속에서 태어난 자여. 죄를 깨달으라, 어머니의 죽음을 참회하라, 부끄러움을 알라.’

종소리가 그치는 그 순간까지, 그 말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울렸다.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지. 우리가 정말로 죄인이라는 것을.

……스승의 말이, 그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었다는 것을.”

스승? 골든로드 말인가?

……그러고보니 그 아저씨가 그랬었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옛 이야기들을, 블루스타에게도 전해주었다고.

지금이 그 이야기들을 들을 때인지도 모른다.

“골든에게 들었어요. 지금으로부터 육백 년 전, 선대 왕을 처형했다고. 그 일련 이야기들을 당신에게 해주었다고 하던데, 기억하고 있나요?”

“대략적인 것은……. 애석하게도, 내 기억력은 스승처럼 완전하지 않다.”

“상관없으니 말씀해주세요. 어째서 선대 왕이 처형된 거죠?”

그가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는 동안, 나는 조용히 물잔을 기울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야기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어떤 아가씨가, 그릇 치운다며 덜그럭거리는 걸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마침내 그의 입이 다시 열리고, 굵직한 목소리가 말을 자아냈다.

“선대 왕을 처형한 건, 일족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함이었다.”

“책임?”

“일족의 사명은 ‘생명의 순환을 수호하는 것’. 선대 왕은 그 본연의 사명을 위해 수백 명의 엘프를 대동하고 아트라토스 원정에 나섰지.

그 중에 다시 이 숲으로 돌아온 자는 열 몇 명뿐이었다.”

꽃에서 태어난 엘프들이 정해진 수명 전에 목숨을 잃으면, 그 자리에서 꽃이 하나 피어난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그 꽃들을 거두어 묘지기에게 전달하며, 묘지기는 그것들을 느릅나무 근처에 심고 넋을 기린다.

그것이 본래 전통이었다고 말하며, 블루스타는 제 머리를 매만졌다.

“아직 그때 피었던 꽃이 조금 남아있을 터. 스승은 그들에게 옛 이야기를 들었지.”

“네? 꽃한테 어떻게…… 아, 거기 영혼이 있다고 그랬지.”

골든로드는 태어나면서부터 영혼을 보고,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그 또한 옛 엘프들이 다 가지는 능력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꽃에 남은 영혼들에게 그 머나먼 옛 이야기들을 전부 들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선대 왕은 드래곤을 막으러 출정했고, 소수의 생존자만 데리고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잘 이해가 안 되네.

왜 그걸 선대 왕이 책임져야 하는 거지?

엘프들은 그 전부터 그런 일들을 해왔던 거 아니었나?

블루스타는 내 의문에,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순히 싸우다 돌아온 것이라면, 그 누구도 폐하에게 동조하지 않았겠지.그러나 선대 왕은 산맥 너머의 마지막 생명수를 버렸다.”

“버리다뇨?”

“아트라토스의 불꽃이 산맥 너머의 대륙 남쪽을 전부 태웠다는 건 들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구덩이’라 불리는 그 지점을 시작으로, 드래곤이 토해낸 불꽃은 남쪽을 몽땅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골든로드는 그에 더해, ‘그때 마지막 생명수가 같이 타버렸다’고 말했었지?

본거지가 파괴되는 건 전쟁 중에 가끔 일어나는, 규모가 좀 많이 큰 재앙이다.

그런데 그게, 이 숲의 선대 왕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이라고……?

“다른 대재앙들과 달리, 아트라토스는 정면승부를 할 수 없었다. 설령 그를 물리치더라도, 대륙의 생명들이 전부 타버릴 테니까. 때문에 선대 왕은, 놈이 남쪽 숲에 온 신경을 쓰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틈에 영웅들이 놈과 함께 전이했지.”

“어디로……?”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영웅들만이 알고, 정확한 위치는 전이마법을 짠 현자와 그 장소를 제공한 자만 알고 있겠지.

스승에게 그 이야기를 한 자는, 그곳이 물 속에 있다는 것만 들었다고 했다. 그곳에선 놈의 불꽃이 약해진다고 했다더군.”

음, 진짜 물 속에 덩그러니 빠뜨린 게 아니면……

아니, 설령 물 속에 가라앉혔다고 해도, 그 드래곤이라면 물을 금방 펄펄 끓게 해서 다 말라버리게 할 거 같은데.

아무래도 내 상식을 뛰어넘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하는 곳이었나보다.

근데 물 속에 있는 장소를 제공한 거면, 결국 인어밖에 모른다는 거 아냐?

뭐, 어차피 드래곤은 북쪽 산에 봉인됐었지만.

“그래서 그 책임을 물어서 처형한 거에요?”

“폐하는 ‘엘프가 그 희생양이 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하셨다. 그리고 ‘이제 엘프는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고 천명하셨지.”

자신의 손으로 선대 왕을 처형하고 왕위에 오른 그는, 대관식 때에 단 하나의 말만 외쳤다.

“‘엘프를 다시 위대하게’. 그리 외쳤다고 하더군.”

“그래서 다들 거기 동조했고요?”

“물론 아니다. 일부는 폐하의 뜻이 잘못되었다고 외치며 들고 일어났고……

그 결과, 묘지는 공식적으로 처형장이 되었다.”

거기까지 말한 후,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잠시 침묵했다.

아무래도 또 기억을 더듬는 모양이었다.

나는 석 잔째의 차를 물잔에 채운 후, 혹시 필요할까 싶어 다른 물잔에 차를 따라 그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엘프는 변하기 시작했다.”

앞에 놓인 물잔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그는 말을 잇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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