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186화 (186/475)

〈 186화 〉 182화 : 목도하고, 인지하라

* *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 속, 나는 바닥에 무릎을 댄 채로 축 늘어져 있다.

텅 빈 머릿속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온 몸의 내용물을 탈탈 비워버린 탓인지, 너무나도 추워서 곧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다.

그 첫 걸음으로, 손은 이미 완전히 얼어버렸다.

허공에 들려 있는 건 알지만, 무언가 잡고 있는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주먹을 쥐고 있는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손뿐 아니라, 무릎 아래도 못 쓰게 되어버린 것 같다.

아직 몸통과 머리가 얼지 않고 있는 건, 아마 따스한 기운에 푹 감싸여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덕분에, 이 깜깜한 공간에서 울리는 소리를 멀쩡히 주워듣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들리는 건,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두근거림.

그리고 머리 아래에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이따금 숨이 넘어갈 듯한 가느다란 흐느낌이 들리고 있다.

그 소리들을 모두 덮듯이, 머리 위에서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메마른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애 셋이 박혀 있더라. 핏기 싹 빠져서. 그런데도 아무런 냄새가…… 아니지, 가까이 가니까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났어. 타임이랑…… 뭔지 모르겠는데, 왠지 살짝 머리가 멍해지더라고.”

“그럼 그걸 보시고……?”

“아니? 토한 다음에 미친듯이 주변을 돌아다녔어. 그러다 창고 같은 걸 찾았는데,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어. 그 아래엔 온통 나무통밖에 없었고. 나무통엔…… 응?”

‘나무통’이란 말이 울리자, 돌연 머리 아래에서 울리던 흐느낌이 커졌다.

그러자 말을 자아내던 메마른 목소리가 끊기더니,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잠시 후, 흐느낌이 아주 약간 잦아들었고, 그 목소리가 다시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뭐였더라? 아, 그래. 나무통엔 날짜랑…… 무슨 글자가 적혀 있었어. a, u, n, r, e, m…… 이라 써 있던데, 뭔 뜻이냐?”

“…………비료.”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갈라질 대로 갈라진 굵직한 목소리가 짤막하게 울렸다.

어딘지 괴로워하는 듯한 울림에 답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평탄하고 황량했다.

“예상은 했는데 역시 그랬구만. 응? 추운가? 갑자기 떠네.”

“추운 거 아닐걸. 아무튼, 그거 열어봤냐?”

아주아주 살짝 낮은, 그러나 여전히 가느다란 목소리가 짧게 물었다.

“당연하지.”

“뭐가 있었는데?”

“썩은 냄새가 나는 흙.”

꺽꺽대는 듯한 괴상한 신음이 귓가에 울린다.

여전히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려서, 주인이 누군지 추측할 수 없는 탓이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이어, 이번엔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머리 위에 울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다가와, 진정하라며 속삭였다.

미약한 걱정이 묻어 있는 목소리가 텅 빈 머릿속에 울려퍼지며, 그 잔향에 응답하듯이 생각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떠오른 건, 머리 밑에 울리던 흐느낌과 괴성의 주인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

그 다음이 내가 지금 내 삶의 유일한 버팀목에 매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이, 그런 나를 그녀가 가슴에 품은 채 다독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엉? 그럼 얜 뭘 보고 이렇게 된 거냐?”

“날짜가 제일 빠른 거 까봤지. 덜 썩은 시체가 들어 있더라.”

“저런.”

덜 썩은 시체.

다시 생각을 짜내기 시작한 머릿속에 그 말이 들어오자, 하나하나, 깊숙이 묻었던 기억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나무에서, 지하창고에서,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들이……!

‘떠올리지 마. 못 버텨.’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속삭임과 함께, 떠올랐던 기억들이 조각조각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감정들은 어떻게 할 수 없었나보다.

울컥 솟아오른 여러 감정들이, 그대로 눈 밖으로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메…리……우읏……메리…인……!”

“어.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울지 마. 좀 진정해.”

둑이 터진 것처럼, 두 눈에서 뜨거운 물이 마구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아까 다 흘려버린 줄 알았는데, 몸 속의 피를 물로 바꾸어서 내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아……아아아……!”

화가 나고, 슬프고, 안타깝고, 후회스럽고, 분하고, 참담한 기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그런 걸 고안해냈다는 것에 대한 공포…….

그 모든 감정들을 아우르는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울음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명확히 떠올릴 수 없다.

머릿속이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멍텅해진 탓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그저 가슴이 찢기는 것처럼 너무나도 아파서, 울고 또 울었다.

“으음…… 말한 게 들려서 그런가? 왠지 더 심해졌네…….”

“그야 말을 들으면 다시 기억이 떠오르니까요. 카엘 님, 괜찮으실까요?”

“하루 지나면 좀 낫겠지. 위슨, 약 있냐?”

“수면물약? 있을걸? 없으면 만들지, 뭐. 별 어렵지도 않은데.”

나와 함께 그것들을 직접 봤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그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도 별 동요 없는 두 소년소녀.

……무섭다.

이미 볼 대로 보고, 알 대로 안 이들의 모습이 새삼 무섭다.

그러면서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나를 토닥이는 그녀의 손길이 무섭고 무서워서,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가고 싶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건, 그녀가 나를 안고 있어서가 아니다.

내 손이 그녀에게 매달리듯이, 그녀의 등을 꽉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이 그녀의 온기에 감싸이길 바라는 탓이다.

그런 나 자신이, 가장 무서웠다.

“메…린…….”

“응?”

“너……너…는, 크흑……!”

……너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거니?

채 맺어지지 못한 말은 오열이 되고, 고통에 젖은 헐떡임이 되어 땅으로 가라앉았다.

“……너희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리고 마치 그 말을 이어받듯이, 블루벨의 목소리가 허망하게 울려퍼졌다.

세 사람이 그에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모른다.

내 귀가 그 말을 주워듣기 전에, 몸에 남아있던 기운들이 일순간 말라버린 탓이다.

아득히 먼 곳에서, 당황해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그 소리들에 답할 기운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의식이 끊어지는 그 순간 느낀 건, 오직 단 하나.

구하지 못했다.

……그 회한뿐이었다.

서서히 떠오른 의식이 제일 먼저 감지한 건, 적당히 푹신한 물체가 머리 뒤를 받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누가 내 가슴을 토닥이면서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는 것이었다.

살짝 간질거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 바람에 의식이 도로 가라앉으려는 걸,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끌어올렸다.

초점이 맞춰진 시야로, 눈에 익은 가죽조끼와 셔츠가 보인다.

봉긋 부풀어 있는 두 둔덕은, 내 기억보다 훨씬 작으면서도 엇비슷한 느낌이다.

살짝 옆으로 꺾여 있던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자, 곧 위쪽에 있던 주홍빛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깼냐?”

“……메린.”

메린은 잠시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

“뭔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냐?”

“대충…….”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와 그 주변에 있던 걸 본 후, 나는 메린과 함께 동굴로 향했다.

아니, 메린이 나를 동굴로 데려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

나는 그저 눈만 뜨고 있을 뿐,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으니까.

그렇게 동굴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온 다음, 나는 그 자리에 무너졌다.

메린이 붙잡아서 바닥에 눕지만 않았지, 거의 쓰러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이러고 있네…….”

“중간이 많이 잘렸는데? 너 울다가 꺽꺽대고는 도로 울었어. 그리고 기절했고.”

“넌 너무 요약한 거 아니냐……?”

잘 기억 안 나지만.

그러고보니 그 나무 주변에서 봤던 것들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을 봤는지’는 알지만, ‘무슨 모습이었는지’가 떠오르지 않고 있다.

“궁금해? 읊어줘?”

“됐어…….”

떠올리면 또 정신이 나갈 게 뻔한데 그걸 왜 들어?

앞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잘지도 모르는데.

나는 살짝 눈을 감고,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근데 내가 왜 네 다리 베고 있는 거냐……?”

“너 기절했었다니까?”

“아니…… 왜 굳이 다리를 내줬냐고……. 그냥 바닥에 눕히지…….”

지금 나는 그녀의 두 허벅지를 벤 채, 걸치고 있던 망토를 담요 삼아 덮고 있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한 시간은 훨씬 넘었을 게 분명하다.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무릎베개 받고 싶다고. 무릎 안 꿇고 있는데 괜찮지?”

“하, 진짜…… 그거 농담이었다니까…….”

“그런 거 치곤 되게 잘 자던데?”

그야 편안하니까.

덕분에 그 끔찍한 걸 본 직후였음에도 악몽 하나 꾸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일어나야지.

지금 몇 시인지는 몰라도, 이 이상 시간을 더 허투루 흘려버릴 순 없다.

“다리… 아프지……? 일어날게…….”

“안 아프니까 그냥 있어. 한숨 더 자도 되고.”

“아냐……. 일어나야지…….”

“좋은 말할 때 그냥 누워 있어라. 너 완전히 기운 빠졌잖아.”

말 안 들으면 뽑아버리겠다는 듯이, 그녀가 내 머리채를 가볍게 잡았다.

대머리가 되기 싫었으므로, 나는 얌전히 그녀의 말을 듣기로 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몸의 긴장을 푼 내가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그녀는 한층 더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무리하면 안 되잖아. 어차피 이미 해 다 졌으니 그냥 쉬어. 그러다 또 열병 도진다.”

“무리해서 열 날 거면 진작에 뻗었어……. 그리고 요샌 열 안 나잖아…….”

“안 나긴, 자주 미열 있잖아. 그러다 저번처럼 되면 어떡해? 지난 겨울 때처럼,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넘기고, 머리를 아예 눈에 파묻어도 금방 녹아버릴 정도로 열이 펄펄 끓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올해 초에 있던 일을 말하는 듯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표정을 잔뜩 구긴 채,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짜내듯이 말을 이었다.

“또…… 또 그래 봐……! 이번엔,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메린…….”

“죽여버릴 거라고…….”

가만히 손을 뻗어, 무언가를 꾹 눌러 참느라 떨리고 있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내 손을 감싸쥐며, 속삭이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무리하지 마.”

“선처할게…….”

“진짜 뒤진다. 무조건 하지 마, 염병할 새꺄.”

“하하…… 알았어, 가능한 안 할게…….”

그렇게 대답하자,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음, 하지만 난 이게 내 최선인걸.

무리해야 하는 때가 반드시 있을 텐데, 그걸 알면서 ‘무리 안 한다’고 하는 건 그냥 거짓말하는 거잖아.

그럴 순 없지.

“……”

다시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그녀가 제 뺨을 감싸고 있던 내 손을, 내 가슴 쪽에 내려놓는 게 느껴졌다.

그 손은 여전히 꼭 잡은 채, 그녀는 다른 손으로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따뜻하고, 편안하다.

너덜너덜해졌던 마음이 조금씩 기워지는 것 같다.

기왕 쉬기로 한 거 이대로 그냥 자버릴까 하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뭐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멀리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말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다들 어디 갔나?

살짝 눈을 뜨고, 그녀에게 물었다.

“다들 어디 있어……?”

“빨리도 물어본다. 앞쪽에 있어. 위슨이랑 그 친위대장이 저녁 준비하고 있고, 로나는 그 엘프랑 이야기 중이야.”

“그래…….”

아무래도 나와 메린이 있는 곳은 동굴의 맨 안쪽인 듯했다.

……그러고보니 내가 정신 놓은 거 다들 봤겠군.

조금 기운이 돌아와서 그런지, 갑자기 자괴감이 마구 솟구쳐왔다.

물론 누구라도 그걸 봤으면 나처럼 충격 먹을 거야.

그럼, 물론이지.

……그렇다고 남들 다 보는 앞에서 펑펑 울다가 기절한 게 쪽팔리지 않은 건 아니다.

아니 뭔 귀족 아가씨도 아니고, 충격 때문에 울다가 기절하다니 그게 뭔 짓이야?!

하아아………….

빈 손을 들어 내 눈을 덮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메린…… 나, 많이 추했냐……?”

“뭐가?”

“울었잖아……. 그것도 아주 목놓아서…….”

“한두 번도 아닌데, 뭐.”

그렇기는 하지?

자랑은 아니지만, 그녀에겐 이보다 훨씬 더 못 볼 꼴을 많이 보였다.

그러니 토하고 우는 꼴을 보인다 한들 새삼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역시 추한 건 마찬가지이다.

메린 녀석도 ‘한두 번이 아닌데 어떠냐’고 했지, ‘추하지 않았다’고는 안 하고 있잖아!

하…… 망할…….

자괴감이 마구 넘쳐흘러서 머리를 쿡쿡 쑤시는 것 같았다.

“메린…… 네가 보기엔 나 한심하지……?”

“왜?”

“시체 봤다고 이 꼴이 됐잖아…….”

“한두 번도 아닌데, 뭐.”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뻗은 건 처음인 거 같은데?

그동안은 그냥 좀 시무룩했을 뿐이었지 않았나?

그녀는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너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태생이 쫄보인 걸 뭐 어쩌겠냐? 한심하진 않아.”

“……”

충분히 한심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괜히 나만 더 마음이 깎일 게 뻔하니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메린…… 너는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아까는 묻지 못했던 그 말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녀는 일순 눈썹을 살짝 올릴 뿐, 곧 다시 평탄한 말투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많이 봐서 그럴걸?”

“네가 언제 사람 시체를 봤다고…….”

“자경단 일 돕거나 사냥 나갈 때 가끔 봤지. 어렸을 때도 숲 돌아다니면서 자주 봤고. 몬스터나 짐승 시체도 봤고. 가끔 내가 만들기도 하고.

처음 몇 번은 신기했는데, 그 다음부턴 별 생각 안 들더라.”

신기했다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신기해……?”

“껍데기 안에 여러 덩어리들이 마구 우겨 넣어져 있잖아. 처음 보면 신기하지 않겠냐?”

하지만 생긴 게 달라도 내용물은 다 똑같으니까 금방 질렸던 걸 거야.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덧붙였다.

“그렇…구나…….”

나는 그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언젠가 로나가 나에게 했던 말, ‘메린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만약 그때 로나에게 그 말들을 듣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어떤 반응을 하고 있었을까?

처음부터 시체가 무섭기는커녕 신기했다고 말하는 메린에게, 나는 과연 뭐라고 했을까?

“메린……,”

……그랬구나. 너는 정말로 사람이 아니었어.

그 사람들의 눈엔, 너는 정말로 인간을 닮았을 뿐이었던 거야.

그래서 그들이 널 더 싫어했던 건가 봐.

그 엘프 아저씨도 그랬잖아?

겉만 닮은 생물은 끔찍할 뿐이라고.

그래도…… 그래도 나에게는 달라.

너의 그 말을 들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네가 사람으로 보여.

조금 특이한 사람.

정말로 사람이 아니라면, 네가 그 겨울날 나를 돌봤을 리가 없지.

내가 지금처럼 너를 좋아하는 일도 없을 거고.

이렇게 너와 내가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네가 사람이라는 증거일 거야.

강하고 냉정하면서, 따뜻하고 귀여운 사람.

“고마워…….”

그런 너를 좋아해. 정말, 많이 좋아해.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며, 가만히 그 손가락들을 쥐었다.

그녀는 잠깐 흠칫할 뿐, 내 손을 뿌리치지 않고 내버려둔 채, 다른 손으로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뜬금없이 뭐가 고맙다는 거냐? 무릎베개?”

“그거랑…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새삼스럽게 뭐라는 거냐? 잠 와? 그럼 한숨 더 자라.”

“계속…… 같이……”

……그런 너와 계속 같이 있고 싶어.

그 말을 채 전하기도 전에, 그만 잠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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