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 198화 : 새싹은 무엇을 품고 움트나? (1)
* * *
블루벨을 여행동료로 삼아달라.
그 말을 귀가 받아서 머릿속에 전달하자, 머리가 목과 혀에 자신의 뜻대로 말을 자아낼 것을 명했다.
“독을 먹인 죄로 추방하기로 했군요.”
참고로 이 공정은 눈 한 번 깜빡하는 동안에 끝났다.
스스로 몰랐을 뿐, 나 자신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블루벨이 만든 게 진짜 독이라는 것을!
“………아니다.”
미간을 살짝 좁힌 블루스타.
그리고 약간의 틈이 있는 그의 대답.
굉장히 신경 쓰이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독살한 죄?”
“그것도 아니야. 애초에 누구도 죽지 않았다.
……카엘, 블루벨이 먹인 건 독이 아니라 수프야. 그저 조금…… 탈이 날 뿐이지.”
먹으면 탈이 나는 것.
세간에선 그걸 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조금’은 개뿔, 완전 죽기 직전까지 가더만!
무려 초월적인 힘을 다 가진 엘프도 탈진하게 만들었잖아.
내가 먹으면 그대로 골로 가는 거 아냐?!
그리고 내가 독 어쩌고 하니 바로 블루벨의 수프를 언급한 시점에서, 저 양반도 내심 나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추방하기로 한 게 아니라면, 블루스타는 진심으로 블루벨을 여행시키려 한다는 소리가 된다.
나로선 그쪽이 더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럼 왜요?”
“……여긴 이 아이에게 족쇄이기 때문이다.”
“……!”
블루벨이 충격에 빠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 역시, 그를 향해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족쇄.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다.
블루벨은 엘프들 사이에서 지대한 관심을 받는 존재이다.
‘어머니 나무의 마지막 꽃’이라는 입장 때문이건, 도저히 납득은 안 되지만 그녀의 외모 때문이건, 어쨌든 이 마을에서 계속 주목받아온 것이다.
경외와 애정, 경의, 호기심 등의 시선이라면 부담스러울 뿐, 생활에 지장이 있진 않았겠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를 포함한 이 사람들은 전부 엘프였다.
……음욕이란 걸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생명체.
그것을 제어해야 한다는 개념이 아직 제대로 박히지 않은, 사회성이 덜 된 종족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그 시커먼 욕구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고, 자연히 그녀의 삶이 옥죄이게 되었다.
“친분을 쌓은 사람과 같이 술 한 잔은커녕 식사도 같이 하지 못한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하기 때문이지.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항상 누군가가 지켜보고, 그에 대해 저들끼리 떠들어대고.
심지어 집 안에 있을지라도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아니 왜 그리 질척대는 거야?
아무리 변태들이라지만 너무 심하잖아!
블루벨표 독 수프를 먹으면 정신을 차리려나?
고개를 젓는 나에게, 블루스타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부탁이다, 카엘. 이 아이를 바깥으로 데려가다오.”
“자, 잠깐, 잠깐만요! 왜 멋대로……!”
“블루벨,”
곧바로 반발하는 블루벨의 말을 자르며, 블루스타가 말을 꺼냈다.
“네가 그간 괴로워하던 걸 볼 때마다 생각했다. 너를 여기서 내보내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너에게 용사를 암살하는 임무를 내리려던 폐하를 막지 못했지.”
“그, 그래도……!”
그녀도 내심 갈팡질팡하고 있는 모양이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하듯이, 블루스타는 빙긋 웃으며 계속 말했다.
“네가 술을 좋아한다는 걸 카엘이 알더구나.”
“으……!”
블루벨이 움찔하며 얼굴이 빨개졌다.
……응?
어째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그만큼 네가 편히 여긴다는 것일 터. 그라면 나 역시 안심하고 널 맡길 수 있다.”
“아니 이 양반이 지금 뭔 소리야?! 안 맡아요! 누구 맘대로 맡긴다는 거야?!”
전심을 다해 소리쳤다.
그러나 푸른머리 엘프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블루벨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 나는……!”
“……내 말하지 않았느냐? 네 마음은 이미 알고 있다고.”
울먹이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그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나 역시 내 말 좀 들으라고 계속 외쳤다.
빌어먹을, 둘 다 귀가 먹었나, 쳐다보지도 않네!
“네가 진정 나를 생각한다면…… 부디 행복을 찾아가거라. 밖으로 가서 네 마음껏, 너 자신으로 살아가렴. 그가 널 잘 보살펴주리라 믿는다.”
“흑…… 블루스타아……!”
그에게 안기며 흐느끼기 시작하는 블루벨.
그런 그녀를 깊이 껴안는 블루스타.
그리고 그런 둘을 지켜보는 나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돌겠네, 진짜!
누구 맘대로 얘기 진행시키는 거야?!
“안 맡아, 이 사람들아! 보살피지도 않을 거야! 숲 밖에 나갈 거면 혼자 알아서 나가!!”
“카엘, 그대가 비록 블루벨에게 몹쓸 짓을 하긴 했으나,”
“안 했어!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하지 마세요, 내가 하긴 뭘 했다고?!”
“너 기억 안 나? 그렇게 날 마구…… 마구 찔렀으면서……! 그만하라고 사정해도 들어주지도 않고……! 으흑……!”
“칼!! 칼 빼먹지 마, 이 할망구야! 의미가 이상해지잖아!!”
그리고 그땐 입 틀어막아서 뭔 소리하는지도 몰랐구만!
아, 목 아파.
엎드려 기침하자, 그런 내 등을 메린이 가만히 두드려주었다.
……순간 이 녀석이 내 등을 부수거나 뒷목을 잡아버릴까 쫄았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테이블에 편안히 앉아서 보고 있던 임시 왕, 골든로드가 마침내 입을 열고 끼어들었다.
“이야~ 이걸 보고 ‘양손에 꽃’이라고 하는 거지? 축하해, 카엘!”
“으아악, 아니야!! 그런 거 절대 아니야!!
큰일날 소리하지 마세요, 하늘이 무너진다고요!!”
하늘, 아니 더 나아가 이 세상이 무너질 거다!
내년이 되기 전에 세상이 멸망한다고!
“응? 하늘이 무너진다니? 아, 인간들은 일부일처제야? 근데 인간 중에도 아내 있으면서 애인 여럿 두는 사람 있다고 들었는데.”
“꺄아아악!! 아냐아냐아냐, 전 아니에요, 그런 사람 아니라고요!!”
맹세코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건 메린 한 사람뿐이란 말야!
물론 메린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기 전엔 다른 여자로 상상하거나 한 적은 있지만, 그래도 좋아하진 않았어! 진짜라고!
진짜 아니야아아아!!
바닥에 엎드려 절규하는 내 머리 위로, 로나가 한숨을 푹 쉬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골든 씨, 카엘 님을 놀리는 건 그쯤하세요. 정신 나가시겠어요.”
“하하하! 젊은이를 골리는 건 아저씨의 특권이라구. 음……, 근데 생각보다 반응이 크긴 했어?
카엘, 카엘~? 농담이야, 농담! 저 둘도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거 아니야.”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을 거는 아저씨를 향해 고개를 들자, 그가 흠칫 놀라며 몸을 주춤거렸다.
“어우, 놀래라. 표정 풀어! 미안해, 자네가 이렇게 신경 쓸 줄은 몰랐어.”
“……하…….”
진짜 한 대라도 좋으니까 딱밤 놓고 싶다.
제길, 느릅나무 보내는 조건으로 책 쓰는 거 말고 딱밤을 걸었어야 했어……!
“……그럼 그냥 여행동료로 받아달라는 거죠?”
“그것 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나? 블루벨의 마음속엔 이미 내가 있는데.”
블루벨을 꽉 안으며 당당히 말하는 블루스타.
그의 팔 안엔, 블루벨이 완전히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근데 언제 저렇게 가까워졌대?
그 짝사랑남 A랑 결투할 때 뭔 일이 있었나?
아무튼 그런 낯간지러운 장면은 집에서나 실컷 찍었으면 좋겠는데.
남사스럽게 밖에서 뭐하는 짓이야?
“와, 남 말하시는 거 봐. 와, 엄청 뻔뻔해.”
“내가 뭐, 임마.”
공연히 비방해오는 사제님은 무시해주고, 나는차 두 모금과 비스킷 한 개로 속을 가라앉혔다.
긴 숨을 내쉬는 나를 향해, 골든로드가 재차 말을 꺼냈다.
“나도 부탁할게. 블루벨 때문이 아니라, 엘프를 위해서.”
“흠? 엘프요?”
“로나에게 들었어. 블루벨이 인간 왕자를 용사로 보고 공격했다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터 왕자가 사라진 애들을 찾을 겸, 방황도 할 겸 왕성을 뛰쳐나온 후, 그의 외모를 기반으로 용사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블루벨 역시 동네 술집에서 그 소문을 들었던 거겠지.
어쩌면 직접 마주했던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아무튼 그 상인의 자유도시 말리스에서, 블루벨은 왕자를 죽이려 했다가 우리한테 잡혔고, 나는 그걸 명분으로 삼아 엘프 왕을 만났던 것이었다.
“그리고 자네가 그랬지? 자네들이 여기 온다고 하니 드워프들이 이것저것 장비를 빌려줬다고.
그건 즉, 우리는 지금 드워프랑 껄끄러운 관계라는 뜻이지. 아니야?”
골든로드는 빈 잔에 다시 차를 따라 호로록 마신 후,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자네가 블루벨을 데리고 가서, 엘프가 그들의 적이 아니라는 걸 알려줘.”
“어…… 그러니까, 블루벨을 사절로 보내신다는 건가요?”
“맞아! 역시 잘 아는구나.”
“어…… 근데 저희, 인간 왕성으론 안 갈 건데요.”
드워프의 도시에 다시 들른 후, 인어들을 찾아가기로 되어 있다.
그 다음은 드래곤을 잡으러 북쪽 산으로 가야 하고.
이러면 사절로 가는 의미가 별로 없지 않나?
그러나 골든로드는 내 말을 듣고도 하하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편지나 이런 거 먼저 보내면 되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엘프가 용사의 적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거 아니겠어? 그걸 일단 드워프부터 시작하는 거고.”
“음…….”
나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사절은 그냥 명분일 뿐이니 신경 끄고……
블루벨을 여행동료로 데려간다면 어떨지 생각해보자.
일단 그녀는 엘프이다.
눈도 좋고 귀도 밝으니 보초를 세우기엔 안성맞춤이지.
또 활 실력도 뛰어나고, 근접 전투실력도 좋고…….
비록 모든 요리를 독으로 만드는 저주 비슷한 게 걸려 있지만, 냄비 근처에도 못 가게 막으면 괜찮을 거다.
하지만……
“……생각해볼게요.”
“흠, 그렇게 고민할 정도로 저 녀석이 맘에 안 들어?”
“그건 아니고……”
나는 블루벨을 힐끗 보았다.
블루스타의 품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눈물 때문에 살짝 충혈된 눈을 내리깐 채 코를 훌쩍이고 있다.
그러다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 놀라면서 도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뭔 어린애도 아니고…….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다른 녀석들이랑 얘기도 해봐야 되고……. 또, 블루벨도 지금 처음 들은 것 같은데요. 생각할 시간을 줘야죠.”
“뭐, 그래, 그럼. 블루스타도 그걸로 됐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블루벨의 어깨를 안는 블루스타를 보며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그날 밤, 하루의 마지막 일과인 기록을 마치고 깃펜을 내려놓았다.
손이 굳을까봐 시작한 건데, 수첩케이스가 두툼한 걸 보니 은근히 뿌듯하다.
이거 나중에 책으로 엮을까?
이 여행이 좀 특이한 게 아니니까 여행기로 꽤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 너무 특이해서 출판금지 당하려나?
교단에서 금서로 지정한다든가…….
말도 안 되는 상상에 홀로 피식 웃으며, 책상에 둔 휴대용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오후 아홉 시.야영하고 있을 때였다면 슬슬 잠을 청할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은 집에서 묵는 거니 아직 깨어 있을 터.
“……”
역시 이야기를…… 해봐야겠지?
책상에 턱을 괴고 잠시 고민한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 계단을 내려갔다.
집을 올린 나무가 커서 그런지, 골든로드의 집은 침실만 셋이나 있는 3층집이다.
거실에 부엌까지 따로 있는, 한두 명만 살기엔 꽤 호화롭다고 할 수 있었다.
……뭐, 말이 3층이지, 나무 위에 있으니까 실제로는 예닐곱층 정도 되나?
아무튼 1층에는 자신의 방과 블루벨의 방을, 그리고 2층에 손님방을 하나 두고 있는데, 바로 이 손님방에 내가 머무르게 되었다.
손님 싫어하는 사람이 손님방을 두고 있다니, 참 별일이야.
참고로 그 별난 집주인은 메린에게 1층에 있는 블루벨의 방을 내주었고, 나는 지금 그 앞에 막 선 참이었다.
“……”
……밤에 그녀의 방을 찾는 건 이번이 두 번째인가?
고향에 있을 땐 그녀의 집에 잘 가지도 않았고, 가더라도 항상 낮이었으니까…….
아니 근데 왜 하필 지금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이런 망할, 괜히 긴장만 더 되고 있잖아!
아으…… 오늘은 관둘까?
어차피 이삼 일은 여기 머물러야 할 테니, 내일 다시 기회를 봐도 되지 않을까?
“하아…….”
……되긴 개뿔이 되겠냐?
카엘, 임마, 아까 봤잖아.
그 이야기가 나온 후로 메린이 어땠는지.
완전히 시무룩해선, 안 그래도 별로 말없는 애가 아예 입도 뻥끗하지도 않고 말야.
밥이야 잘만 먹었지만, 어쨌든 그녀가 침울해진 건 확실했다.
무엇 때문에? 뻔하지.
블루벨을 여행동료로 들이냐 마냐는 이야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가 그렇게 침울해진 것인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걸 들으러 여기, 메린이 묵는 방 앞에 온 것이다.
그러니 긴장할 필요도, ‘메린의 방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나는 그녀를 연모하는 남자가 아닌, 일행을 이끄는 대장으로서 여기 온 거니까.
알았냐? 알았냐고.
그러니까 좀 진정해, 심장, 이 멍청아!
……내 일갈은 당연히 전혀 먹히지 않았고, 그 탓에 나는 잠시 얼굴을 두 손으로 덮어야 했다.
하…… 좋아하는 쪽이 지는 것이라는 말이 있던가?
근데 나는 지금 혼자 벽에 머리 박고 생난리치는 거잖아.
나 참, 진짜 한심하구만…….
“……”
음, 나 자신에게 한숨을 좀 쉬었더니 진정되었다.
자괴감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는 사실에 또 다른 자괴감을 느끼며, 나는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와.”
안쪽에서 바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인지 어떻게 알고……
아, 후보가 골든로드랑 나 둘 밖에 없구나.
하지만 그 아저씨는 용건이 있다면 창문을 두드리고 말을 걸 사람이니, 결국 나밖에 없군.
그녀의 말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돌아선 나는, 그 자리에 우뚝 굳어버렸다.
“……”
메린은 굉장히 편한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망토는 벽의 옷걸이에, 신발은 침대 근처에 두고서.
실내복 같은 건 드워프의 도시에 두고 왔으니까, 그녀가 셔츠 차림으로 누워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침대맡에 가슴속옷이 있는 것도, 민망하긴 하지만 넘길 수 있어.
여긴 메린이 쓰는 방이니까.
……근데 바지는 왜 침대맡에 같이 개켜져 있는 건데?!
“……왜 왔냐?”
셔츠 한 장 꼴로 침대에 누운 채, 그녀가 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