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 199화 : 새싹은 무엇을 품고 움트나? (2)
* * *
얼마나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저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길다랗게 풀어헤친 갈색머리, 서너 개쯤 단추가 풀어져 있는 셔츠, 그 탓에 살짝 엿보이는 둥그런 두 살덩어리, 그리고 침대 위에 뻗어 있는 두 늘씬한 다리.
아래속옷……브리프는 셔츠 자락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에 진정되긴커녕, 오히려 더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아아,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
머리 끝까지 단번에 끓어오른 열 때문에 현기증이 인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천천히 바닥에 엎드리고 있었다.
……아니, 솔직해지자.
눈은 어째 평소보다도 더 잘 보인다.다리도 풀리지 않았고.
그저 그 언저리에 다른 무게가 실렸을 뿐.
아무튼 엎드려야 했다.
안 그러면 머리나 심장, 아니면 몸 어느 부분이 터져버릴 테니까.
그대로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너…… 왜 그러고 있냐……?”
“……내가 뭐.”
“왜…… 하아…… 바지는 왜 벗고 있는 거야……?”
아잇, 제기랄.
바지 얘기하니까 방금 전에 본 메린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어.
……근데 왠지 자세가 달라진 것 같은데!
으아악, 아니야!
메린은 그냥 살짝 옆으로 몸을 틀어서 축 늘어져 있었어!
가슴을 덮은 옷깃을 들추거나 하지 않았어!
날 보면서 웃지도 않았고!
저리 떠나가라, 사악한 음란마귀야!
“됐다, 대답하지 마라……. 빨리 바지 입기나 해…….”
……아, 울고 싶다.
“굳이 왜?”
“……뭐?”
왜냐니……
여기서 ‘왜’가 왜 나와……?
무심코 뒤를 돌아보려다 황급히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린 후, 나는 고개를 흔들며 쏘아붙였다.
“너 몰라서 묻냐? 아무리 내가 편해도, 임마, 지킬 건 지켜야지! 다 큰 아가씨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싫어.”
“뭐?”
“다시 입는 것도 귀찮고, 너 가면 도로 벗을 거 생각하면 더 귀찮아. 싫어.”
참 너답다, 응?
늘 있는 일이지만, 이 녀석은 항상 내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대답을 내놓는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머리 끝까지 올라온 열기가 단숨에 어깨까지 싹 내려가버렸다.
“………그래도 입어. 남자 앞에서 함부로 그러는 거 아니야.”
여전히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일부러 힘주어서 말했다.
하, 오늘 무슨 불길한 별이라도 떴나?
어떻게 하루가, 아침부터 밤까지 쭉 충격과 경악으로 점철이 되어 있냐?
더 미치겠는 건,
“왜?”
……이 녀석이 이상하게 뻗댄다는 것이다!
아니 알 거 다 아는 애가 오늘따라 왜 이래?
블루벨이 영입될지도 모른다는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왜긴 왜야, 임마, 일 날지도 모르니까 그렇지! 너 이번엔 진짜 내 인내력 시험하고 싶어졌냐? 빨리 바지 안 입어?!”
“인내력……. 참고 있냐?”
“당연하지!”
“그럼 끝까지 참아. 그게 네 특기잖아. 굳이 내가 뭐 해야 되냐?”
“………”
코웃음 섞인 목소리. 노골적인 조롱.
아마 그녀의 얼굴에도 그에 걸맞은 표정이 떠올라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는 게 내 특기……?
아, 뭐 그렇긴 하지?
근데 저 자식 말투 때문인지 뭔가 좀 열받네?
조용히 일어나 뒤로 돌아섰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처럼, 몸을 살짝 옆으로 틀고 누워있다.
여전히 셔츠의 단추는 풀어져 있고, 여전히 그 틈으로 뽀얀 앙가슴이 엿보인다.
잘못하면 완전히 보일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그걸 내버려두고 있다.
“……”
반쯤 가늘게 뜬 채, 멀거니 저 앞을 보던 주홍빛 눈동자가 움직였다.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노려보는 내 시선을 받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보이고 있을 텐데.
그런 그녀를 마주하며 입을 열자,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딱딱한 목소리가 나왔다.
“……옷, 똑바로 입어.”
“싫어.”
“나 너랑 얘기하러 온 거다. 화내기 싫어. 그러니 고집 그만 부리고 들어줘.”
“싫다고 했어.”
“너 진짜……! ……사람 돌게 만들래?”
이 집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야.
가까스로 그 사실을 떠올려, 터져나오려던 고함을 도로 꾹꾹 밀어넣었다.
게다가 그냥 사람도 아니고, 귀가 엄청나게 밝은 엘프잖아.
……근데 그 아저씨, 왠지 처음부터 귀 기울이며 듣고 있을 거 겉아.
하아아…….
속으로 한숨을 푹 쉬는 나를 향해, 메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네가 참으면 되잖아. 지금도 잘 참네. 계속 그렇게 참아.”
“못 참을 거 같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그럼 못 참은 네 잘못이지. 왜 나한테 괜히 잔소리냐?”
이 자식 진짜 일부러 이러는 건가?
난 이미 한계인데,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데, 왜 자꾸 건드리는 거야?
……지금 도발하는 건가?
네까짓 게 못 참으면 어쩔 거냐, 뭐 그런 건가?
그래, 뭐, 메린은 누가 덮치더라도 얼마든지 조져버릴 수 있을 만큼 강하니까 말야.
나 따위는 아무 위협도 안 되겠지.
……아니면 평소에도 날 쫄보라고 대놓고 까는 것처럼,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를 배짱도 없는 놈으로 보이는 건가?
그래서 비웃은 거야?
그 생각이 들자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가, 멀거니 누워 있는 그녀를 똑바로 눕히고, 그녀의 양 손목을 각각 잡으며 그 위에 엎드렸다.
뭐하는 거냐고 벙벙히 묻는 듯한 목소리와, 환호성 섞인 응원소리가 들린 것 같다.
그러나 화가 잔뜩 오른 내 머리는 그 목소리들을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뭐하냐?”
덤덤히 묻는 그녀의 말에 속이 한층 더 뜨거워졌다.
애정이나 단순한 성욕이 아닌, 분노로.
“너 내가 우스워? 네가 이렇게 대놓고 유혹하고 있어도 아무 짓도 못하는 등신 쫄보로 보이냐고.”
“유혹? 누가? 내가?”
덤덤하게 시치미를 떼는 모습에 부아가 돋았다.
무정히 나를 비추는 주홍빛 눈동자에 대고, 낮게 화를 퍼부었다.
“그럼 아니야? 이런 꼴로 있으면서 날 방에 들였잖아. 내가 널 좋아하는 것도, 내가 너에게 욕정을 느낀다는 것도 다 알면서……!”
“……”
“내 잘못? 그래, 씨발, 내 잘못이다. 그럼 너는 깨끗한 줄 알아? 먼저 유혹한 주제에 뭘 혼자 결백한 척하고 있어……!”
“지랄하, 으읍……!”
끝까지 시치미를 떼려는 괘씸한 입을 틀어막았다.
그저 소리를 막기 위한 입맞춤.
신음 같은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와, 내 입 안에서 울린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은 소리조차 듣기 싫어, 그녀의 혀를 내 것으로 감싸며 눌러버렸다.
그녀의 몸이 움찔거리는 걸, 아예 몸을 포개듯이 짓눌러버렸다.
그러다 숨이 차서 입술을 떼었다.
타액이 실처럼 늘어지며 그녀의 입가에 떨어졌다.
화가 치밀어 올라있는 탓에, 그걸 닦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어차피 손이 부족해서 못 닦지만.
숨을 가쁘게 쉬며, 나와 마찬가지로 모자랐던 숨을 한꺼번에 쉬느라 호흡이 거칠어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봐. 가만히 있잖아. 싫으면 얼마든지 내칠 수 있으면서……! 이게 유혹하는 게 아니면 뭔데?
나랑 자고 싶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며? 그거 다 거짓말이었냐? 사실 덮쳐줬으면 했던 거냐고!”
“……몰라.”
이 자식이 끝까지……!
“시치미 떼지 마, 네가 한 거잖아! 너 스스로 이 꼬라지로 나를 방에 들이고, 살결 보이고, 내가 덮치고 있는데도 발버둥 하나 안 치고 있잖아!
그러면서 모른다고? 지랄하네, 한두 번이 아니구만! 내가 계속 속아 넘어갈 줄 알았냐?! 씨발, 날 얼마나 등신으로 봤으면……!”
“몰라. 난 몰라. 모른다고!”
격한 외침이 들리자마자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어졌다.
등과 뒤통수에 부드러운 충격이 느껴지며, 그늘진 주홍빛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그제야 그녀가 날 넘어뜨리고 위에 올라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봐.
얼마든지 내칠 수 있다니까.
속으로 허탈해하는 나에게,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말을 쏟아내었다.
“네가 말하는 거 하나도 몰라! 욕정을 느끼는 게 어떤 건지! 유혹당한다는 게 어떤 건지!
좋아한다는 게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건지!”
“……”
“너랑 키스해도 아무 느낌 없어. 하기 싫다는 생각도, 더 하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어!
다른 놈들이 나에게 손대는 건 싫은데……! 너한텐, 아예 아무 느낌도 없다고……!”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토해낸 후,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처량해보였다.
“……나는 몰라.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몰라.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메린,”
“그러니까 나 대신에 그 엘프를 들이려는 거겠지. 그 엘프가 나보다 훨씬 나으니까.”
“………뭐?”
누구 대신에 누구를 들인다고?
벙벙해져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 내 귀에,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블루벨, 그 엘프를 네 호위로 두려는 거잖아. 감지능력이 뛰어나니까 호위에는 제격이지. 활도 쏘고.
또 가슴도 작으니까 나처럼 속옷으로 동여맬 필요도 없으니, 채비시간도 훨씬 짧을 거고.”
“…………”
“게다가 넌 그 엘프에게 아무 생각도 안 든다며? 그러니 네 옆에 딱 붙어서 지킬 수 있겠지. 네가 다칠 일이 전혀 없도록.
……나보다 그 엘프 옆에 있는 게 더 안전하니까, 넌 그 엘프랑 밤낮으로 계속 같이 있겠지. 그러다가 그 엘프를 좋아하게 될 거고.
그럼 난……네 안중에도 없어지겠지.”
조용히 일어나 그녀의 셔츠 단추를 채우고, 근처에 나뒹굴고 있는 이불을 끌어와 그녀의 다리를 덮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는 그녀의 두 손을 한데 모아, 양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블루벨이 샘나?”
“………그런 거 같아.”
지난번엔 멀뚱히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이번엔 명백히 질투한다는 걸 인정했다.
거참 또 쓸데없는…… 음, 아니지.
내 눈엔 개미 발톱만큼도 쓸데가 없지만, 메린에겐 굉장히 심각한 문제이다.
내 기준대로 별볼일 없다고 치부하면 안 되지.
……그러니까 웃으면 안 된다.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고.
웃지 마!
자꾸 풀어지려는 입에 단단히 힘을 주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일부러 헐벗고 있던 거야? 블루벨에겐 없는 걸 내세우고 싶어서?”
“……모르겠어.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
그냥 자포자기였나?
다음부턴 그냥 술 퍼먹고 드러누웠으면 좋겠다.
이건 너무 선정적이잖아.
“너 내가 아까 거기서 더 나갔다면 어쩔 셈이었어?”
“……그냥 뒀겠지.”
아, 예. 물론 그러시겠죠.
절로 한숨이 나왔다.
……메린이 오늘 괴상하게 뻗댔던 건 역시 블루벨 때문이었다.
즉, 그녀는 블루벨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거란 생각에 우울해졌던 것이다.
진짜 어이가 없네.
“야, 블루벨이 일행에 들어오는 게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잖아. 딴 건 잘만 얘기하면서, 왜 혼자 꽁해 있냐?”
“블루벨이 있어야 네가 더 안전하니까. 그건 엄연한 사실이잖아.”
“나 참…….”
웃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었건만, 결국 입꼬리가 풀어지고 말았다.
그치만 어쩔 수 없잖아!
얘가 그런 고민을 하고 시무룩했다는 게 너무 귀여운걸!
하, 메린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망정이지.
그녀가 내 웃는 얼굴을 보고 역정을 내지 못하도록, 그녀의 얼굴을 내 어깨에 묻어버렸다.
“야, 이 바보야, 내가 왜 블루벨을 좋아하게 되냐? 이미 네가 있는데.”
“……나랑 달리 그 엘프는 멀쩡하잖아.”
어디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물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강하니까 계속 같이 있을 거고. 네가 날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인 거 아냐?”
“그건……”
무엇 때문에 메린을 좋아하는 것인가?
또 다시 그 질문이 돌아왔다.
메린은 강하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그 힘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옆에서 지켜보고, 때로는 그 힘에 의지해왔다.
아니, 지금도 의지하고 있구나.
……정말로 그녀가 강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걸까?
거대 멧돼지를 주먹으로 해치우고, 골렘의 팔을 슬링으로 부숴버리고, 철창살을 검으로 잘라내버리는……
그 힘에 반한 걸까?
“……아니야.”
“……아니면 뭔데.”
“그냥…… 그냥 네가 좋아. 나는 이길 수 없는 적을 쓰러뜨리는 게 멋있어서 좋고, 내가 어디에 있든 찾아오는 게 신기해서 좋고, 과자 준다는 말에 눈을 반짝이는 게 귀여워서 좋아.”
마주칠 때마다 내 열을 재는 등, 네가 내 몸 상태를 자꾸 신경 쓰는 게 미안하면서도 기뻐서 좋아.
네가 단어나 상황을 이해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릴 때, 내가 널 챙길 수 있어서 좋아.
그 밖에도 여러 모습이 좋지만……
“……뭣보다도, 넌 내 온갖 추태를 봤으면서도 옆에 있어주고 있잖아. 그게 좋아.”
고맙고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좋아.
“……뭐야, 그거. 애매하잖아.”
“그러게……. 근데 진짜 그런 걸 어떡해?”
명확한 이유 따위 모른다.
그냥 메린이 좋다.
다른 사람보다 영혼이 부족하다는 진단을 받은, 무심하고 무던하고 무정한 그녀가 좋다.
그런 그녀가 나를 빼앗긴다는 생각에 울적해졌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좋다.
내가 무단으로 덮치고 입술을 빼앗았는데도 내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 좋다.
……나에게 몸을 기대는 모습이, 정말 참기 어려울 정도로 사랑스럽다.
“네가 싫다면,”
감정이 벅차오른 탓인지 내 목소리는 살짝 갈라져 있었다.
가만히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꺼냈다.
“네가 싫다면, 블루벨이 일행에 들어오는 거 거절할게.”
“……내가 좋든 싫든 무슨 상관이야? 네 안전이 제일이잖아. 그리고, 드래곤도…….”
“난 네가 더 중요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단호히 말했다.
“네 마음이 편한 게 우선이야. 안 그래도 나 때문에 네가 신경 쓰는 게 많잖아. 더 부담지우기 싫어.”
“……”
“어차피 엘프에게 지원 요청하러 온 것도 아니었는데, 뭐.
그러니까 괜찮아. 솔직하게 말해줘.”
천천히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고, 그 눈을 가만히 마주하며 물었다.
“메린, 블루벨이랑 같이 다니기 싫어?”
묵묵히 시선을 내리고 생각에 잠기는 그녀.
잠시 후,
“……싫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싫지 않다고?”
“……그 엘프가 활로 지원해준다면 나나 로나도 더 편히 싸울 수 있을 거야. 네 걱정도 덜할 거고. 틈날 때 대련도 할 수 있겠지.”
의외로 블루벨과 같이 다니면 무슨 좋은 점이 있는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역시 메린이야. 참 합리적이라니까.
“근데…… 네가 블루벨과 가까이 지내는 건 싫어.”
“푸핫.”
“……왜 웃어? 내가 웃긴 소리했냐?”
“아니, 귀여워서.”
“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찌푸리는 얼굴도 귀여워, 그녀를 꽉 끌어안으면서 홀로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메린.”
“……블루벨이 끼는 걸 찬성해서?”
“아니, 나 생각해줘서.하하……
음, 알았어. 블루벨이랑 친하게 안 지낼게. 선 딱 긋고, 데면데면하게 대할게. 그러면 되지?”
어차피 블루벨과는 사무적인 관계가 될 것이었다.
내 배를 때려서 내장을 뭉갰던 사람이랑 어떻게 친하게 지내?
블루벨도, 자신의 어깨를 난도질했던 놈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메린이 원한다면, 좀더 멀찍이 선을 그어서……
“……아냐. 그냥 너 편한대로 해.”
“응?”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랐다.
“나 신경 쓰지 말고 편한대로 하라고.”
“엉? 왜? 가까이 지내는 거 싫다며.”
“……나 때문에 네가 억지로 참는 게 더 싫어.”
안 그래도 힘들잖아.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가 내 어깨에 뺨을 부볐다.
……블루벨 때문에 나와 멀어질 거 같아 싫으면서도 내 안전을 위해 꾹 참는다.
내가 블루벨과 친해지는 것보다, 내가 어떤 부담을 지는 게 더 싫다.
그녀는 이 말들을 어떤 의미로 한 걸까? 의미가 있긴 한 걸까?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처럼, 너무나도 애매모호한 감정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한 건, 그녀가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애착이 아니라.
설령 그게 내가 원하는 종류가 아닐지라도, 그녀가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그걸 알려준 게 기뻐서, 나 역시 그녀에게 품은 내 마음을 말해주고 싶어졌다.
무언가 받았다면, 나도 무언가 주어야 하는 게세상 법칙이니까.
“메린,”
“……왜.”
“좋아해.……정말 좋아해.”
속삭이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괜찮아. 네 대답 들으려고 말한 거 아냐. 그리고…… 아까는 미안.”
“아까? ……아, 덮친 거.”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별 거 아니라는 말투로 중얼거린 후,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후후후, ‘아무 느낌도 없었다’더니 정말로, 요만큼도 느낀 게 없었나보군.
왠지 조금 울적해졌다.
“신경 쓰이면 다시 하든가.”
“………네?”
“억지로 덮친 게 신경 쓰이는 거 아냐? 그럼 허락해줄 테니까 다시 해. 자.”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감았다!
아니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야?!
여기선 괜찮다든가, 아니면 화내든가 그래야 되는 거 아니냐고, 으아악!
“안 해? 하기 싫어?”
“…………역시 유혹하고 있잖아!”
“이게? 이게 뭔 유혹……”
또 다시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 나쁜 입을 틀어막았다.
이번엔 좀더 부드럽게, 좀더 깊게.
……그리고 좀더 오래, 그녀와 숨을 나누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