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 209화 : 아무튼 휴가입니다 (2)
* * *
나는 칼싸움이 싫다.
아니, 싸움 자체가 싫다.
누군가가 고통에 신음하며 눈물 짓는 모습을 보는 게 싫어서……
……라는 건절대 아니고.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다치거나 죽는다는 그 긴박한 상황이 싫다.
삐걱거려서 잘 움직이지 않는 몸.
조금만 움직여도 가빠오는 숨.
입 밖으로 튀어나가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뛰는 심장.
어떤 빨간 사제님은 그 긴장감이 좋다고 하는데, 난 죽어도 그거 이해 못할 거 같아.
……그리고 지금, 나는 숙소 지하의 훈련장에서 그 죽을 맛을 또 체험하고 있었다.
“윽……!”
챙!
허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칼날을 쳐낸다.
튕겨나간 칼날은 곧바로 방향을 바꾸어서 어깨를 찍으러 온다.
몸을 옆으로 틀어 피하며 물러나려 하자, 대거가 곧바로 방향을 틀어 가슴을 노린다.
챙!
아래에서 위로 검을 휘둘러 칼날을 쳐내자마자, 왼손이 뻗어와 내 멱살을 잡으려 든다.
폼멜로 치려 하니 곧바로 손이 물러난다.
그 틈을 타,
저 멀리 뒤로 물러났다.
‘아니, 거기서 후퇴를……?’
……마음속에서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알아.
거기선 허리를 베든 다리를 베든, 아니면 배를 찌르려 들든 해야 됐다는 거.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무서운걸!
“하……”
그런 나를 향해, 메린은 손에 쥔 대거를 장난감 다루듯이 놀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야, 왜 아까부터 방어만 하냐? 공격을 해, 공격을! 아니 나보다 날도 더 긴 놈이 왜 자꾸 튀어?”
“네 눈이 무서워서 그런다, 임마아아!!”
울분을 담아 한껏 소리치자, 메린이 건조한 눈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쪼다 새끼, 진짜 겁은 더럽게 많아가지고.”
“아니 진짜로 무섭다고! 저기 구경하는 블루벨도 살짝 얼어 있잖아! 야, 이 매정한 새끼야, 꼭 그렇게 살기까지 내뿜어야겠냐?!”
“등신아, 그래야 훈련이 될 거 아냐! 적이 칼 휘두르면서 네 목숨 걱정해주겠냐?! 뒤지길 바라지!”
“그럼 좀 덜 내든가!”
“이게 줄인 거다, 쫄보 새꺄!”
……오, 주여.
온 몸의 털이 곤두서고, 뒤통수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저리며, 놀란 토끼마냥 얼어붙게 만드는 그 살기가 조정한 거라니.
본심을 다 낸 게 아니었다니……!
아, 역시 안 되겠다.
딴 놈들이 뿜는 적의나 살의도 맨날 심장 죄이는 느낌인데, 메린 녀석 건 진짜 도저히 못 버티겠어.
눈이 주홍색이라 그런지 압박감이 훨씬 더 심하다고!
이전까지의 대련은 길이가 긴 목검이나 장검이었으니까, 대치하더라도 거리가 좀 벌어서 있어서 그래도 괜찮았는데.
근데 망할, 지금 메린이 들고 있는 건 대거이다.
이따~금 바짝 붙는 검과 달리, 시종일관 찰싹 붙어서 공격하는 칼인 것이다!
“메린……, 그냥 목검으로 하면 안 되냐? 농담 아니고, 진짜 힘든데.”
“야, 목검 대련은 움직임이 서툰 놈이랑이나 하는 거야. 넌 다 끝났잖아. 지금 너는 실전 훈련할 단계라고.”
“그럼 적어도 검 빌려오든가…….”
“얌마, 적이 뭐 검만 쓰냐? 단검, 아밍 소드, 클레이모어, 곤봉…… 오크나 고블린은 창도 쓰잖아. 가능한 여러 무기를 상대해봐야지.
내가 창은 잘 못 다루니까 그건 어려워도 단검은 해줄 수 있다고.”
이 자식, 또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네.
맞받아칠 수가 없잖아.
참고로 저 녀석이‘창은 잘 못 다룬다’고 하는 건, 말 그대로 창술이 서툴다는 거지 창 들면 약해진다는 게 아니다.
아무튼,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숙여버렸다.
……다리가 풀려서 더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야, 카엘. 넌 있잖아, 긴장을 너무 심하게 해. 그러니 쓸데없이 힘을 더 쓰고, 더 빨리 지치지. 알고는 있냐?”
“알아…….”
“내가 보기엔 말야. 네가 싸우기도 전에 질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 같거든?하여간 생각이 글러먹었어.
얌마, 질 게 뻔해도 ‘이길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아야 할 거 아냐! 시작하기도 전에 기세가 꺾이면 어쩌냐!”
“……”
고개를 숙인 내 머리 위로 스승…이 아니라 메린의 질타가 쏟아진다.
흑, 그게 되면 이 고생 안 하지……!
그보다 그게 돼?
어디를 어떻게 봐도 처참하게 질 거라는 것만 보이는데, 거기서 ‘이길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진짜 나와?
전사들은 그게 되는 거야?
아니면 나처럼 원체 사고방식이 부정적인 사람은 전사가 못 되고 다 뒤져서, 그런 긍정적인 생각이 되는 사람만 남아있나?
“하…… 카엘, 너 대충 두 달 전에, 나한테 처음 훈련받을 때에 비하면 거의 딴 사람 수준이야. 며칠 안 잡았는데도 감각 별로 안 떨어졌고. 기세만 안 꺾이면 괜찮은 수준이란 말야.
넌 지금 몸보다도 대가리가 문제야, 대가리! 긴장 좀 줄여!”
“괜찮긴 개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리자, 저쪽에서 그녀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켜는 게 들렸다.
“내 말 못 믿겠다? 그래, 좋아. 이런 건 역시 직접 겪어야지, 안 그러냐?”
……직접 겪는다니, 뭘 할 생각이지?
고개를 들고 물어보려는 순간,
“……!!”
살기.
당장에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며 온 몸이 아우성쳤다.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을 옆으로 굴린다.
그 후, 몸을 낮춘 그대로 횡베기를 시도한다.
쇠가 부딪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아마 뒤로 물러났겠지.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며 녀석의 배를 노리고 횡베기.
내려치는 건 단검에 막힐 게 뻔하고, 무엇보다도 틈을 허용할 테니까.
녀석이 검날을 피해 뒤로 살짝 물러난다.
그리고 곧바로 내 품을 파고들며 가슴을 베려 든다.
그 손목을 붙잡고 꺾자, 녀석의 오른손에서 대거가 떨어진다.
허공에 떨어지던 대거는 그대로 녀석의 왼손으로 옮겨가, 곧바로 목을 향해 뻗어왔다.
녀석의 오른손을 붙잡은 채, 왼쪽으로 몸을 틀며 녀석의 목을 폼멜로 치려 했다.
퉁!
“큭……!”
그러자 녀석이 순식간에 몸을 낮추고서 제 몸을 부딪쳐왔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뒤로 밀리며, 녀석의 오른손을 놓쳐버렸다.
“……!”
아예 낙법으로 한 바퀴 구른 다음, 일어나자마자 양손으로 자루를 쥐어 가로로 벤다.
어디까지나 거리를 벌리기 위한 위협용이다. 그런 다음, 뒤로 더 물러났다.
그렇게 거리를 벌린 다음,
“야, 이 미친년아, 진짜 나 뒤지는 꼴 보고 싶냐! 사람 간 떨어지게 뭐하는 짓이야?!”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간만에 내 입에서 튀어나온 욕을 듣고도, 메린은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어쩐지 만족스러워하는 게 더럽게 열받아!
“봐, 생각없이 하니까 제대로 하잖아! 야, 너 대가리 그거, 잠깐 어디 털어놓을 수 없냐?”
“몰라, 이 나쁜 새끼야!! 하, 씨발, 진짜………!”
아, 몰라, 죽이려면 죽여.
손도 떨리고 다리도 떨려서 어차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겠네.
그 자리에 드러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아아…… 숨소리가 너무 시끄럽다.
몸은 또 왜 이리 떨리는 거야, 빌어먹을.
그때, 멀리 있던 웃음소리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내 내 머리 바로 위에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리며, 무언가가 어깨를 쿡쿡 찔렀다.
살짝 눈을 뜨자, 그녀가 내 얼굴 앞에 쪼그려 앉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야, 일어나. 뒹굴려면 저기 가서 뒹굴어. 밟힌다.”
“………”
“응……?우와, 너진짜 쫄았구나. 알았어, 짜샤. 이제 다신 기습 안 할게.
뭐, 이 정도 반사신경이면 더 안 해도 되긴 하겠다. 영차.”
옮긴다는 말도 안 하고, 메린은 바닥에 드러누운 나를 구역표시선 바깥까지 질질 끌고 갔다.
그런 뒤, 그녀는 나를 일으켜 앉히고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이제더 위협받을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며, 몸을 잠식했던 공포가 차츰차츰 가라앉아간다.
아니 무슨 애도 아니고, 머리 쓰다듬는 걸로 안심하고 있네.
뭔가 기분이 묘하다.
“야, 괜찮냐? 차 갖다 줘?”
“……됐어.”
“진짜로? 그럼 여기서 쉬면서 나랑 쟤 하는 거나 봐. 아, 검 빌린다.”
“……”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내 손에서 검을 가져가면서 머리를 툭툭 두드리고 가버렸다.
……진짜 묘한 기분이야.
“후우…….”
길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자, 메린과 블루벨이 대치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나랑 붙겠다는 블루벨을 메린이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막았었지?
내가 다칠 수도 있다면서.
……순전히 그 이유 때문에 막았던 걸까?
상대가 블루벨이라 그런지, 왠지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검과 쌍단검의 대결이다.
다른 사람이 싸우는 걸 보는 것도 공부가 된다고 하던데……
저 둘의 움직임이 나한테 보일까 몰라?
챙! 탁. 채앵!
“……”
역시 안 보이잖아!
블루벨이 단검을 교차해서 메린의 검을 막고 힘겨루기를 할 때 외엔, 그냥 서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팔을 휘두르는 걸로만 보인다.
이따금 주먹이나 발이 오가는 것 같긴 한데…….
나 참, 뭐가 보여야 참고를 하든가 하지.
나랑은 진짜 격차가 어마어마하구만.
“하으와아아아……….”
잠시 후, 블루벨은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내 옆에 드러누웠다.
완전히 기진맥진한 듯했다.
“헤엑, 헥…… 아니 쟤는…… 히익, 어떻게 지치, 히이, 지치지를 않아?!”
“……”
이렇게 두 명의 진을 완전히 빼놓은 장본인께서는, 아직도 힘이 남는지 혼자서 검술 동작들을 연이어 수행하시는 중이다.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그 움직임은, 왠지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어느 마을에선, 검을 들고 춤을 추기도 한다던가…….
“휴우…….”
금세 호흡을 정돈했는지, 블루벨이 부스스 일어나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던가 말던가, 나는 계속 메린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찌르며 스텝을 밟는 일련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드레스를 입지도, 화장을 하지도 않았는데.
“대단하다.”
블루벨이 멍하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메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대단하지. 메린은 정말 대단해. 진짜, 세상에 쟤 같은 사람은 또 없을 거야.”
“인간도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지 몰랐어. 혹시 너희 고향엔 쟤 같은 인간이 수두룩하니?”
“아니.메린밖에 없어. ………정말로.”
그녀를 이루는 모든 것이 유일무이하다.
세상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유일하다지만, 그녀는 멀리서 보아도 정말로 특별한 존재이다.
“근데 내가 보기엔 너도 대단해.”
“엥?”
뜬금없이 뭔 소리래?
어처구니가 없어서 블루벨을 돌아보자, 이 웃긴 엘프는 의외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서 헛소리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는 대신, 차분하게 물었다.
“그새 또 마셨어? 댁은 술 좀 줄여야겠다.”
“안 마셨어! 내가 뭐 틈만 나면 마시는 줄 알아?!”
“그럼 뭐야, 제정신으로 한 소리야?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오, 주여…….”
“아니 칭찬하는 건데 왜 충격받는 거야? 너 진짜 자기애가 없구나.
아무튼, 전사도 아니면서 계속 여행 다니고 있으니 대단해. 안 싸우는 날이 없었을 텐데.”
뭐야, 그냥 사회적인 인사였구나.
아, 놀래라. 난 또 진짜 이 엘프가 정신이 이상해진 줄 알았네.
“누구든 내 입장 되면 똑같을걸. 대단하고 할 것도 없어.”
“아냐, 대단해. 난 네가 원래 전사인 줄 알았거든. 싸움을 업으로 삼는 사람.
……카엘, 내가 전에 했던 얘기 기억해? 넌 다른 인간이랑 다르다고 했던 거.”
그 진지한 얼굴을 향해 눈만 멀뚱히 깜빡이고 있자, 블루벨이 건조한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내가 전에 그랬잖아. 감정적이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폭력적인 게 인간인데, 넌 전혀 다르다고. 기억 안 나?”
“안 나. 내가 인상깊은 상황을 보고 듣는 게 한둘이 아닌데,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그랬다가는 머리 터져버릴 거다.
뭐, 아예 기억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저 밑으로 파묻힌 거니,블루벨이 이것저것 힌트를 던져준다면 다시 낚아올릴 수 있겠지.
하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은 없는 듯, 그냥 한숨만 쉬고 말았다.
“아무튼, 살아있는 생명은 피와 폭력에 닿으면 닿을수록 물들어. 그건 너도 알 거야.
나는 원래 전투원이 되고 싶었거든? 그리고 이렇게 됐으니, 피를 흘리는 건 내 일이야. 즉, 일을 위해서만 해를 입히는 거지.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제어하고 있어.그리고 너도 그런 줄 알았지.”
음, 비슷한 거 같은데.
나는‘살려면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싸우고 있으니까.
“난 있지, 네가 전사이면서 유독 순한 성향인 줄 알았어.”
내 대답을 바란 건 아닌지, 그녀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칼을 휘두르는 의미를 받아들이고, 시체를 쌓을 거란 걸 각오하고서도 여전히 순한 면모가 남아있을 만큼 순둥이인 줄 알았다고.”
하지만 아니야.
그렇게 운을 떼는 그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오늘 네가 쟤랑 대련하는 거 보고 알았어. 넌 애초에 검을 잡으면 안 되는 사람이야.”
“……뭐?”
“넌 재능이 있어. 하지만 기질 자체가 이 길에 맞지 않아. 마음이 돌처럼 굳었으면 몰라, 그것도 아니고.
너 아까 쟤랑 대련할 때 어땠는 줄 알아? 겁을 집어먹을 대로 집어먹은 상태였어. 그러면서 억지로 검을 들고 있었지.
쟤를 상대할 때만이 아니야. 그 도시 근처에서 도둑들이랑 싸울 때나, 산 위에서 다이어울프랑 싸울 때도 얼굴빛이 그리 좋지 않았어.”
“그야…… 익숙하지 않으니까……”
어물어물 대꾸했지만,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 이전의 문제야.너, 싸워서 이겨도 승리감 안 느끼지?‘내가 이겼다, 어떠냐, 짜식들아!’ 같은 생각한 적 있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전투를 마칠 때마다 느끼는 건, 대개 전투가 끝났다는 안도감이니까.
어쩐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은 기분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아마 그걸 내 대답으로 받아들인 것이리라.
그녀는 한숨을 쉬고 재차 말을 꺼냈다.
“그런 ‘보상’도 없이 계속 싸우고 있으니 미친놈이지. 진심으로 싫다고 생각하면서, 억지로 하고 있잖아.
……나 고문했을 때처럼.”
“고문은 어쨌든, 싸우는 건 싫어도 계속해야 되잖아. 그래서 그러고 있는 건데, 그게 뭐.”
“그래, 그러니까 대단하다고.”
조롱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억지로 싸우는 건데, 넌 또 약하기까지 하잖아. 그런데도 남에게 연민을 느끼고, 손을 뻗을 생각을 하는 게 대단해.”
“……”
이럴 때는 뭐라고 대꾸해야 되는 걸까?
‘별말을 다한다’? 아니면 ‘고맙다’?
……전혀 와닿지 않는 칭찬을 하는 사람에겐, 대체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잘 떠오르지 않아,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대답하기로 했다.
“댁이 인간을 몇 안 봐서 그런 거야. 나만 그런 거 아니라고. 게다가 나는 손익 따져서 하는 거야. 다 이득이 있어서 한 거지.
난 댁이 생각하는 것만큼 선한 사람이 아니야.”
“아, 그러셔? 그럼 애들은 왜 구했어?”
“………애들 신경 쓰는 건 사람이면 다 하는 거야! 어차피 엘프들이 뭔 일을 꾸미는 건지 알아보러도 가야 했고! 별 거 아냐!”
“아, 그래?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을 한 거다?”
“그래! 사람이면 응당 그래야 되니까 했을 뿐이야! 나는……”
왠지 모르게 나온 한숨을 쉰 후, 나는 발끝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냥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싶은 것뿐이야. 댁이 생각하는, 그런 선한 사람이 아니라고.”
선한 사람은 고문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지도, 죽이지도 않는다.
어떤 이유이든 악행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정말로 선한 사람이었다면, 그 도시로 가다가 보았던 수레……
여러 사람이 실려가던 그 수레를 그냥 부숴버렸겠지.
곤경에 처했던 피터 왕자나 도둑 할아버지도 보자마자 구했을 거고, 아무리 옐리카 아가씨를 위해서라지만 보검을 훔치려 들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필요한 일’이라는 이유로 악행을 저지르고, 어쩔 수 없다고 못 본 척 눈 감고 있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싸우고, 필요하면 고문하고 죽이고, 훔치고 빼앗기도 하겠지.
이런 내 어디가 선하다는 거야?
그냥 사람이지.
“그 사람의 도리라는 거, 전부 좋은 일이잖아. 결국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하는 거 아냐. 즉,”
“아니라니까. 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하는 거야. 목적이 있어서 하는 거라고. 그런 거 없이 그냥 천성적으로 해야 진짜 선한 사람이지. 난 아니야.”
“……아, 그래? 그럼 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건데?”
톡 쏘듯이 묻는 블루벨은, 어째서인지 건조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것 같은데, 음, 실망한 건가?
그건 미안하긴 하지만, 나는 내 입으로 착한 사람이라 한 적 없다.
이 엘프가 혼자 착각한 거지. 난 잘못 없다고.
그나저나, 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냐…….
내가 그런 사람이 되면 엄마가 자랑스러워할 거라 하셔서 목표로 삼은 게 시작이었지.
지금은 엄마 상관없이, 나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 이유는……
“글쎄……, 그래야 떳떳해서 그런 거 아냐?”
“내가 물어봤잖아. 왜 나한테 물어?”
“아니, 나도 확실하진 않아서……. 근데 생각해보면 그런 거 같아. 내가 딱히 내세울 게 없거든.
그러니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라도 되어야 좀 떳떳하게 다닐 수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힘이 센 것도 아니고, 머리가 엄청나게 좋은 것도 아니고, 배짱이 두둑한 것도 아니다.
엄청나게 잘생기지도 않았고.
글을 읽고 쓰는 거야 배우면 다 하는 거니 자랑거리는 안 되지.
그런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최소한의 도리……
최소한의 도덕을 지키는 것뿐.
엄마가 말씀하셨던 것처럼,‘착한 사람’이 아닌‘좋은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그거라도 해야 떳떳하게 얼굴 들고 다닐 수 있다.
……메린 앞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다.
그게 내 유일한 우위이니까.
손익을 따져서 손을 내밀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도리를 따르려는 사람.
그게 나란 놈이다.
“알겠어? 난 그냥 사람이야. 쓰레기 같은 나쁜 놈은 아니라고 자신하는데, 아무튼 착한 사람은 아니라고.
그러니 대단하게 볼 거 없어. 완전히 틀린 생각이니까 후딱 버려.”
“……그래. 그렇구나. 그래서 그런 거구나.”
뭘 혼자 납득한 건지, 블루벨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일 뿐이다? 좋네, 그거. 응, 아주 좋아.”
“……놀리는 거야?”
“아니. 네가 계속 그랬으면 좋겠어. 그래야 더 맛이 가지 않을 거 아냐. 안 그래도 미친놈인데.”
“……”
놀리는 게 아니고 비꼬는 거군.
왜 다들 맨날 나보고 미쳤다는 거야?
지들이 더 돌았으면서…….
속으로 투덜대는데, 블루벨이 갑자기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뭐 하나 알려줄까, 용사님?”
“변태한테 배우고 싶은 거 없는데.”
“내가 왜 변태야, 이 미친놈아! 하…… 됐으니까 귀 좀 줘. 네가 어떤 놈인지 알게 해준 답례로, 하나 알려줄 게 있어.”
“……”
“아오, 진짜.”
“악.”
움직이지 않고 뻗댔더니 블루벨이 내 귀를 잡아당겼다!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귀를 가까이 대자, 그녀가 쿡쿡 웃더니 작게 속삭였다.
“……복수다, 미친놈아. 잘 가라.”
“………뭐? 복수? 뜬금없이 뭔,”
슈욱.
……눈앞에 은빛 섬광이 나타나며 바람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콱, 하고 오금이 저리는 소리가……!
“……”
소리가 난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대거 한 자루가 벽에 박혀 있는 게 보인다.
와아, 저 벽, 가공 하나 되어있지 않은 순수 바위인데.
“다 쉬었냐?”
“……”
아앗…… 뒤통수가 엄청나게 따가워……!
돌아보기 싫어……!!
하지만 내가 안 돌아보면, 저 녀석이 억지로 내 목을 돌려버릴 거야!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자,
“……!!!”
어느새 내 앞에 메린이 쪼그려서 앉아 있었다!!
우와, 눈 부릅뜨고 있어, 무서워!!
“덕분에 운동 잘했어, 수고해~”
그리고 메린의 뒤쪽에서, 블루벨이 손을 흔들더니 문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아아악! 저 사악한 엘프가 일 벌리고 혼자 토껴버리네?!
아, 설마 저 변태 자식, 메린이 질투할 걸 알고 일부러 귓속말을 한 거야?!
복수다, 미친놈아.
복수는 뭔……
헉, 설마 어제 억지로 치수 잰 거……?
아니 난 줄자만 댔을 뿐인데 왜 나한테……?!
“다 쉬었냐고.”
오오, 지하라서 메아리까지 울린다.
어째 지난번에 그 동굴에서 봤던 것보다 더 무서운데!
아니 그보다 귓속말도 못하는 거야?!
아무리 질투가 나도 그렇지, 그건 너무 불합리하잖아!
“아, 아니, 아, 아직 더, 덜 쉬었……”
“보니까 다 쉰 거 같던데? 그럼 한 판 더 해야지.”
메린이 나를 강제로 일으켜 세우더니 그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아, 신이시여, 살려주세요!
얘가 절 죽이려 해요!
“맞다, 아까 목검으로 하자고 했었지? 그래, 좋아. 목검으로 하자고. 그럼 너도 덜 긴장하고 맘껏 대응할 수 있으니 훨씬 낫겠지. 안 그러냐?”
“아, 아냐아냐아냐아냐, 아니에요, 안 그래요, 메린 님!! 아니라니, 우와아악!
야, 이 자식아, 솔직히 너 너무하는 거 아니냐!! 귓속말 좀 했다고 뭔……! 와아아악?!”
설령 목이 달아날지라도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그 역시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일 터.
아아……, 역시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래도 메린 녀석, 내가 다칠까봐 칼날은 안 쓰는구만.
폭풍처럼 몰아치는 목검에 두들겨 맞으면서, 그렇게 멍하니 생각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