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 210화 : 아무튼 휴가입니다 (3)
* * *
그리고 눈을 뜨니 오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정확히 오후 세 시.
그렇게 내 오전과 점심은 허무하게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대체 얼마나 뻗어 있었던 건지, 원…….
“하아…….”
속을 비우듯이 긴 숨을 내뱉으며 욕조에 거의 눕다시피 했다.
목까지 물 속에 잠겨서 그런지, 물 위에 띄운 박하와 캐모마일, 라벤더가 뒤섞인 향이 물씬 풍겨온다.
……메린 녀석, 뭐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통증 가라앉히는 허브들 두고가면 다야?
이불 털듯이 신나게 두들겨 패고 말야.
덕분에 온 몸이 쑤시고 욱신거리고 멍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멍이야 로나에게 기도받으면 낫겠지만, 쑤시는 건 알아서 가라앉혀야 한단 말이지…….
……응?
그럼 내일 대련 안 하겠네? 아싸!
“……”
……안 하긴 개뿔.
‘적이 네 사정 봐주냐’면서 하겠지.
인정머리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흑.
그나저나 메린 녀석, 안 그럴 거 같았는데 은근히 질투 심하네.
그냥 평범하게 대화할 때는 가만히 있더니, 블루벨이 나에게 귓속말을 하자마자 나를 조지고 말야.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해줬는데도 아직 불안한가?
……근데 생각해보니 웃기네. 왜 날 조지는 거야?
아니 내가 귓속말했냐고. 난 억지로 당한 건데! 억울해!
“하…………”
뭐……, 녀석 나름대로 나한테 불만 표시하는 거겠지.
그리고 나한테 푸는 게 낫긴 해.
블루벨에게 시비 걸면 괜히 일이 커질지도 모르잖아.
……근데 슬슬 진심으로 걱정되는데.
나 진짜 이 여행 버틸 수 있을까?
위장병으로 쓰러지거나 대머리가 되거나, 아니면 메린에게 맞아 죽는 것.
이 셋 중에 한 꼴을 당할 거 같아……!
안 돼.
차라리 위장병으로 쓰러지는 게 낫지, 대머리는 절대 안 돼……!
머리카락은 한 번 죽으면 되살릴 수 없다고……!
“……”
……잡생각이 신나게 드는 걸 보니, 허브 덕분에 좀 나아진 모양이다.
진짜 병 주고 약 주고, 딱 그 말대로이네.
피식 웃으며 욕조에서 나와, 욕실을 나온 순간,
방 문이 끼익 열리며 메린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
그 충격적인 상황에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그 탓에 욕실로 도망갈 때를 놓치고 말았고, 결국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마주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 일어났냐? 잘됐네. 야, 금방 다시 올 테니까 방에 있어라.”
퉁.
도로 문이 닫히며, 무거운 고요가 찾아왔다.
“……”
그대로 옷장을 열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신발까지 꼼꼼하게 신었다.
그 다음, 침대에 걸터앉고서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흑…….”
보여버렸어…….
공식적으로 보여버렸다고!
아앗……이제 장가 못 가…….
‘원래 못 가면서 핑계는.’
닥쳐!
마음속 나 자신에게 일갈하자마자, 방 문이 다시 열리며 메린이 들어왔다.
손에는 빗과 대거, 그리고 하얀 천 한 자락이 들려 있다.
……뭘 하려는 속셈이야? 전혀 짐작도 안 가는데.
아니, 평소라면 무슨 속셈인지 바로 알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지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조금 전의 그 대대적인 사건으로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으니까.
나는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얼굴을 다시 돌리고 손으로 덮었다.
“엥? 너 우냐? 왜?”
“수치스러워서…….”
“뭐가?”
“너…… 너 조금 전에……!! 으흐흑……!”
“내가 뭐. ………아, 아까 그거? 난 또 뭐라고……. 야, 지랄 그만 떨고 여기 앉기나 해.”
“……”
그리고 내 흐느끼는 모습엔 아랑곳하지도 않고, 책상 앞의 의자를 끌고 와 두드리는 메린이었다.
……그래, 뭐, 내 병간호하다가 이런저런 별꼴은 다 봤겠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덤덤한 거 아냐?
어째 민망해하는 내가 이상한 거 같잖아?!
“뭐해? 앉으라니까.”
“하…… 뭐할 건데.”
……더 따져서 뭐하랴? 내 입만 아프지.
나는 체념하고 터덜터덜 의자에 가서 앉았다.
음, 앞에 아무것도 없이 의자에 덜렁 앉아 있으니까 기분이 좀 묘하네.
슥, 스윽.
……갑자기 그녀가 내 머리를 빗으로 빗기 시작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해!
“아니 뭘 하려는 거냐니까?”
“어제 머리채 잡았을 때 보니까 많이 자랐더라. 그래서 잘라주려고.”
“……으, 됐어. 내가 하면 돼.”
맹세코, 메린이 대거로 내 머리가죽을 벗기거나, 풀 벤 뒤의 벌판 꼴로 만들어버릴 거 같아서 거절하는 게 아니다.
지 머리 관리도 안 하는 애가 남의 머리를 자르려는 게 어이가 없어서 그런 것……은 좀 있군.
아무튼, 그녀가 내 머리를 작살낼까 걱정하지는 않는다.
예전에도 이따금 메린이 손질해주고 그랬는데, 뭐.
그때마다……
그녀가 내 머리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어서 조금 꺼려질 뿐이다.
그래서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일어나려 했는데, 엉덩이를 떼자마자 어깨가 팍 눌리면서 도로 앉혀졌다.
“웃기시네. 네가 네 머리를 어떻게 다 다듬냐? 보나마나 뒷머리는 대충 손으로 모아 잡고 댕겅 잘라서 쥐 파먹은 꼴이 되겠지. 아니, 어떻게 그러고 다닐 생각을 하냐?”
“땅바닥에 질질 끌리고도 넘칠 때까지 머리 기르고 다닌 놈이 할 소리는 아닌데.”
“난 땋으려고 일부러 안 자른 거고, 등신아. 아무튼 좋은 말할 때 그냥 얌전히 있어라. 저번에 네가 내 머리 잘랐으니까 이번엔 내가 해줄게.”
저번에 네가 내 머리 잘랐으니까 해준다.
……나 참, 그 소리를 하면 더 거절할 수가 없잖아.
이 이상 뻗대면, 녀석이 진짜로 내 머리카락을 풀처럼 반듯하게 베어버릴 것 같기도 하고.
할 수 없지.
기분이 묘해도 좀 참는 수밖에.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킥킥 웃는 소리와 함께 흰 천이 목에 둘러졌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
“재밌는 건 아니고…… 글쎄, 왠지 웃음이 나와.”
빗으로 내 머리를 슥슥 빗어내리면서, 그녀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아까 허브 두러 갔을 때도 그렇고. 예전엔 별 느낌 없었는데, 희한해.”
빗이 떠나가고, 그녀의 손가락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손가락이 두피를 쓸면서 머리카락을 모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린다.
칼날 특유의 서늘함도 느끼지 못할 만큼 오묘한 느낌이다.
……왠지 가만히 있을 수 없어,나는 그 간지러움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재차 입을 열었다.
“나 챙기는 게 그렇게 좋냐?”
“그런가? 뭐, 웃음이 나오니까 좋은 거겠지?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점수 딸 기회라서 그런 거 아니냐?”
내뱉자마자 아차 싶었다!
카엘, 이 등신아, 아무리 대가리가 안 돌아가도 그렇지, 뜬금없이 뭔 개소리야?!
“점수 따다니?”
그녀가 여전히 손을 놀리면서 묻는 말에, 나는 눈을 멀뚱히 깜빡였다.
이걸 몰라?
별별 얘기를 다 듣고 다니길래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네가 딴 사람에게 뭔가 해서, 그 사람이 널 좋게 보는 걸 ‘점수 딴다’고 해.
그러니까…… 음, 너,나한테, 예쁨받을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좋아한 거 아니냐고…….”
……어째서인지 얼굴이 점점 더워졌다!
으으, 내 입으로 이런 말하니까 진짜 쪽팔리네!
딴 사람은 이런 거 어떻게 멀쩡하게 말하는 거야?
“네 맘에 들 수 있어서 좋아한 거라고? 아닌 거 같은데.”
“아, 그래.”
그녀가 단칼에 잘라 준 덕분에, 얼굴에 쏠리던 열이 싹 사라졌다.
블루벨에게 관심이 쏠려서 자신을 잊을 거라고 시무룩하기도 했으니 그런 줄 알았는데.
“음, 그럼 내가 뻗어 있어서 좋아한 거 아니냐?”
“아닌데.”
“진짜로? 꼴 좋다, 뭐 이런 생각 안 했어?”
“내가 왜?”
“그…… 읏.”
으, 어째 저릿한 느낌이 점점 더 세지는 거 같다.
희한하네…….
저번에 그녀가 손댔을 땐 이렇게까지 느낌이 오진 않았던 거 같은데.
“후…… 크흠, 그, 내가 네 심기를 거슬렀잖아. 그래서 쌤통이라고 생각한 거 아냐?”
“아닐걸? 허브 들고 네 방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는 웃음이 나왔는데, 너 보니까 속이 바로 무거워졌어.”
“어……”
“혹시 나도 모르게 힘이 더 들어갔던 건가, 그새 열이 나서 몸이 안 좋아져 있던 건 아닌가…… 음, 그런 생각밖에 안 했는데?”
“………아, 그래.”
그 말을 듣는 사람 속도 모르고, 그녀는 덤덤한 목소리로,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아까 보니까 멍이 많던데. 아프냐?”
“어. 존나 아파.”
더할나위 없이 진지하고 힘있게 대답해주었다.
이 녀석 앞에서 이런 걸로 허세 부리다간 수명이 줄어든다.
아니 진짜로.
“멍이야 로나에게 기도받으면 되고, 몸이 쑤시는 건…… 아, 내가 안마해줄까?”
“………뭐?”
오오, 위험했다.
하마터면 무심코 뒤돌아볼 뻔했어!
지금 내 머리 바로 가까이에 대거가 슥슥 움직이고 있을 텐데!
세상에, 이 자식이 진짜 날 죽일 셈인가?
안마라니, 그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어깨랑 팔이랑 다리랑 뻐근할 때, 살살 주무르거나 움푹 들어가는 부분 누르면 풀린다던데.”
“……누가 그러디?”
“전대 검술 사범님. 그래서 살아있을, 아니 살아계실 때, 내가 가끔 안마했……아니, 안마해드렸어.”
“야, 그 분은 할아버지잖아. 할아버지 몸이 뻐근한 거랑 나랑 같냐?”
그 할아버지는 세월의 풍파를 맞아서 몸이 삐그덕거리는 거지만, 나는 그냥 목검으로 쳐맞아서 아픈 거다.
근본적인 원인이 다르잖아.근데 효과가 같겠어?
“됐어, 난 그냥 쉬면 되겠지. 맨날 그랬잖아.”
“그래? 나 전대 사범님한테 꽤 잘한다고 칭찬받았었는데.”
“………됐어.”
후, 위험했다.
사실 어깨가 좀 결리는 게 있어서 귀가 좀 솔깃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 되지.
딴 사람도 아니고 메린이잖아.
그녀가 내 어깨를 만지작거리는 걸, 내가 맨 정신으로 끝까지 버틸 수 있겠어?
지금도 그녀의 손가락이 두피를 쓸어갈 때마다, 살짝살짝 저리는 느낌 때문에 자꾸 움찔거려서 당황스러운데.
저번에도 그녀가 팔 만지작거릴 때 간지러웠고.
근데 안마라고?어깨랑 팔다리를 주무른다고?
후후후후, 절대 못 버텨.
암, 그렇고 말고.
사람은 자신의 분수를 잘 알아야 하는 법이다.
“됐다. 뒷머리 끝.”
“……휴.”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는데, 왠지 모를 아쉬움도 살짝 느껴진다.
……아쉽긴 개뿔! 카엘, 이 자식,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그 사이에 그녀가 내 앞에 서서 살짝 몸을 굽혔다.
아마 앞머리를 손보려는 거겠지.
앞머리야 잠깐 눈을 감고 있으면 되니 뭐…….
“엥? 얼굴 빨갛네. 열 나냐?”
“………신경 꺼.”
“아, 딴 열이냐? 내가 뭘 했다고?”
……아무것도 안 했지. 넌 그냥 내 머리 다듬었을 뿐이야.
내가 널 너무 좋아해서, 이젠 네가 건들기만 해도 달아오르나봐.
아니면 뭐가 많이 쌓인 걸까?
덤으로 네가 날 걱정했다는 말을 길게 풀어놓아서 민망한 것도 있고.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 민망해서, 나는 그냥 눈을 꽉 감아버렸다.
“……됐으니까 얼른 할 거나 해, 임마!”
“왜 갑자기 화내냐?”
“화내는 거 아냐, 짜샤!”
“맞구만.”
“아니라고!”
그러자 그녀가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쪽팔린 걸 감추려고 소리친다는 걸 알아차렸겠지.
하지만 역시 그녀에겐 조금 어려운 모양이다.
솔직하게 ‘네가 머리 만져서 느낀 게 쪽팔리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게 슬프다.
이건 괜히 메린에게 화풀이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하……그러면 안 되는 건데.
“……됐다. 끝.”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 머리를 손으로 훅훅 털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에 올려진 거울을 보니, 고향을 떠나기 전의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보다 눈 밑이 살짝 검고, 얼굴에 왠지 그늘이 낀 거 같긴 하지만……
음, 아무튼 예전에 실컷 보던 내 얼굴 그대로였다.
“용케 똑같이 다듬었네.”
“맨날 봤는데 당연한 거 아니냐?”
나에게 둘렀던 천으로 대거를 슥슥 닦으며,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하고 있다.
……맨날 봤으니까 기억하는 게 당연하다니.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 덤덤하게 할 수 있는 거지?
“아무튼 고마워.”
“받은 걸 돌려준 건데, 뭘. 오히려………응, 왠지 내가 고마운 거 같아.”
“뭐? 왜?”
메린이 고마워할 게 어디에 있다고?
멀뚱히 그녀를 보며 묻자, 그녀는 오히려 나를 마주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글쎄……… 음…… 내가 너한테 아직 쓸모가 있다는 걸 알게 해줘서……인가? 잘 모르겠어.”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직 쓸모가 있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난 이제 너 없으면 안 되는데.
“아직은 무슨. 앞으로도 쭉 네가 필요하구만.”
여행이 끝난 뒤에도 내가 계속 살아가려면, 네가 내 눈이 닿는 곳에 있어줘야 하는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단언하자, 그녀가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그렇…지……? 응…… 네 괴상한 성질머리도 그렇고…… 호구 짓하는 거 말리는 것도 그렇고…….”
“……”
“너 달래는 것도 그렇고…… 밥도 그렇고…… 특히 블루벨은 밥을 못하니까…….
………어라, 결국 밥밖에 없네.”
“얌마, 결론이 왜 그래?”
낮게 중얼거리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역시 아직 불안하구나.
“……아니, 생각해보니까 다른 애들도 너 달래거나 말릴 수 있잖아. 아, 잠깐, 밥도 정 뭐하면 네가 해먹으면 되는구나.”
“메린.”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다들 한두 가지씩 자신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 로나는 기도를 하고, 위슨은 정령이랑 물약이 있고, 블루벨은……
가슴 작고 활 잘 쏘고 나무나 바위도 어려움없이 넘어다니고 나보다 눈이랑 귀도 좋고 성격도 좋고 말씨도 곱고.”
“야, 어째 블루벨만 길지 않냐?”
그리고 ‘각자만 할 수 있는 능력’을 꼽는데 가슴 작은 거랑 성격이랑 말씨가 왜 나와?
특히 가슴 작은 건 진짜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
메린 이 녀석, 진짜 블루벨의 그 빈약함을 부러워하는 건가?
왜……?대체 왜……?
“아무튼…… 나만 뭐가 없어. 그냥 힘세고 잘 싸운다는 거밖에 없어. 하지만 잘 싸우는 건 다들 똑같잖아.”
울적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나한테는 그거밖에 없는데. 몸 말고는 도움이 안 되는데.”
“아니야, 메린. 아니야……. 근데 딴 사람들이 오해할라, 몸 말고 도움 안 된다는 소리 딴 데서 하지 마라.”
“응……?”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치로군.
돌겠네, 진짜.
“……아무튼, 너만 할 수 있는 게 왜 없어? 지금도 하고 있잖아.”
“머리 다듬기?”
“아니. 나 안심시키는 거.네가 가까이에 있으면, 그 사실만으로도 든든해. 어떤 놈이 덤비든 싸울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어.”
속된 말로 ‘믿는 구석’이라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나를 지켜준 메린이 있으니까, 그녀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이미 뼛속까지 박혀 있으니까, 그녀를 믿고 내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다.
………잠깐. 왠지 나 좀 쓰레기 같은데?
이거 완전 뒷배 믿고 깝치는 조무래기 심성 아니냐?
“……아무튼 그건 너밖에 못해. 다른 셋과 같이 있어도, 너 한 사람만 옆에 있는 것처럼 안심할 순 없을 거야.
그리고 솔직히 말하는 건데, 나, 네가 있어서 울 수 있어.”
“뭔 소리야?”
“넌 내가 뭔 꼴을 보여도 안 도망가잖아. 한심하다고 까긴 하지만.
네가 받아줄 거 아니까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어. 그때…… 그 숲에서 애들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았을 때 있잖아.
네가 없었으면 그냥 속으로만 앓았을 거야.”
어쨌든 나는 일행의 리더…… 대장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되겠는가?
게다가 로나와 위슨은, 아직 성년도 안 된 아이이다.
그런 그들에게 어떻게 눈물을 보이고, 힘든 기색을 내비칠 수 있겠는가?
뭐든 털어놓을 수 있는 그녀가 있으니까, 설령 리더의 위엄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해도, 나는 아직 고향을 떠나기 전의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응? 잠깐, 왠지 점점 더 쓰레기 같은 놈이 되는 거 같은데.
방금 그거, 그녀에게 내 감정을 배설해야 되니까 필요하다는 소리 아니냐?
으아악,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모르겠어.”
그녀가 내 어깨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거 딴 사람도 다 할 수 있는 거 아냐?”
“맞아. 하지만 난 너 아니면 못해.”
“……이해가 안 돼. 반드시 내가 다 이긴다는 보장도 없는데, 내가 있는 것만으로 안심이 된다고? 위험이 없다고?
내가 없으면, 다른 사람 앞에서 울 수 없다고? 왜?”
역시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가 안타깝고, 내 진심이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슴을 저민다.
……그래도 괜찮아. 그게 너이니까.
그걸 알면서도 너를 좋아하는 거니까, 이 애달픔도 서글픔도 전부 내 책임이야.
네가 옆에 있어준다면, 나는 괜찮아.
“아무튼 난 쭉 네가 필요해. 그러니까 그런 소리하지 마. 응?”
“……알았어.”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그녀를, 나는 더 힘있게 끌어안았다.
그 후, 별일 없이 저녁을 맞이했고, 로나와 위슨이 숙소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아, 카엘 님, 여기요.”
피곤한 기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씩씩한 목소리로, 로나가 내게 꾸러미를 건넸다.
조심스럽게 풀자, 작은 소쿠리에 담긴 달걀이 모습을 드러냈다.
딱 봐도 신선한 놈들이다.
“고마워. 근데 우유는?”
“없대요. 그래서 염소젖 샀어요. 괜찮죠?”
“어. 상관없어. ………근데 염소젖이 있는데 우유가 없어? 다 팔렸대?”
아니면 여긴 젖소가 없나?
지하이긴 해도 일단은 산이니까, 소보다는 산양이나 염소가 더 잘 자랄지도 모른다.
“안 나온대.”
“……엥?”
“산양이든 양이든 젖소이든 젖이 안 나온대. 염소 빼고는 새끼가 안 태어난다더라.”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녀석은 태평한 목소리로 재앙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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