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 211화 : “당신들은 자유에요!” (1)
* * *
북쪽의 대재앙, 드래곤 아트라토스를 물리쳐라.
그렇지 않으면 일 년 뒤에 세계가 멸망할 것이다.
서서히, 조금씩.
하지만 이 두 달간, 내가 길에서 들은 ‘그럴 듯한 재앙’은 하나밖에 없다.
이미 식은 지 오래 되었던 ‘불구덩이’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
이거 딱 하나뿐인 것이다.
몬스터가 더 강해지고 많아졌다는 이야기도 듣긴 했지만……, 우리 동네에 비하면 그렇게 심하진 않단 말이지?
그래서 그건 별로 와 닿지 않는다.
뭐, 도시 근처에서 흡혈거미가 튀어나왔을 때는 놀랐지만.
그러나‘불구덩이’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말로 세계가 멸망하는구나 싶었다.
다들 ‘불구덩이’가 깨어났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그 안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불의 호수’가 다시 깨어난 것이다.
‘불의 호수’는 드래곤이 대륙의 남쪽을 태우려고 뿜은 불 그 자체다.
그게 남쪽으로 흐르면서 지나는 길목에 있는 모든 생명을 깡그리 태워서 불모지로 만들었었고, 이후에 전설의 정원사가 땅을 되살렸다고 한다.
이 무시무시한 호수 아닌 호수는, 내가 용사가 된 그 즈음에 다시 살아났다고 들었다.
그래서 ‘세계가 멸망하기까지 서서히 문제가 생긴다’, 즉 세계 멸망의 징조라는 게 전부 어떤 환경적인 종류일 줄 알았는데.
천사에게 들은 마지막 징조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다’는 거였기도 하고 말야.
하지만 아니었다.
멸망의 징조는 우리 자신에게도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새끼를 낳지 못한다고? 안 생긴다고?”
“네. 발정기는 오는데, 안 생긴대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 하지만 심각성 역시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로나.
“그럼 개도 고양이도 닭도……”
“개, 고양이, 닭, 말, 소, 양, 산양, 토끼, 파리, 모기, 벌, 개미, 매미, 귀뚜라미, 바퀴벌레…… 아무튼 염소 빼고 전부 포함이야. 물론 드워프도 들어가고.”
충격으로 멍해진 나를 향해, 느긋한 말투로 쐐기를 박는 위슨.
“벌레는 어떻게 안 거야?”
“연구소에서 기르더라. 실험용이래.”
아무래도 좋은 걸 묻는 메린.
“……세상에…….”
그리고 나처럼 경악에 찬 얼굴로, 술병째로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블루벨.
참고로 어제 그녀가 절반 먹고 남긴 증류주를 마저 비우고 있다.
……분위기가 심각해지기엔 사람 수가 두 명, 아니 두 명 반 정도 부족하다.
아니, 애초에 자리부터 글러먹었다.
저녁식사 차려진 테이블 앞에서 하는 시점에서, 심각한 분위기 따위 만들어질 리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와 블루벨……
아니, 나만 한 술도 못 뜨는 상태로 계속 앉아 있다.
블루벨? 술로 배 채우고 있으니 빼야지.
여러 의미를 담아 한숨을 푹 쉰 후, 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연구소에서 볼 거 다 본 다음에 ‘농장 층’을 쭉 둘러봤다. 근데 거기서 위슨, 네가 뭔가 이상한 걸 찾았다. 그리고 그게……”
“닭 농장에 노란 병아리새끼가 하나도 없었어.”
“그래서 거기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대충 열흘 전에 부화했어야 했던 알들이 하나도 안 됐다’고 했다고?”
위슨은 고개를 끄덕이고, 태평하게 음식을 우물거렸다.
어차피 말은 어깨 위의 파랑새가 하니까 자신은 먹을 거 먹겠다는 거겠지.
파랑새는 그 작은 부리를 열어, 위슨의 말을 대신 전했다.
“모조리 부화가 안 되다니 말이 안 되잖냐? 그래서 다음주 부화할 예정이라 되어 있는 것 중에 다섯 개를 까봤어.”
“아, 돈은 냈어요.”
보충하듯 덧붙이는 로나의 말을 이어 받으며, 위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맞춰볼래? 뭐가 나왔을 거 같냐?”
“되다 만 병아리.”
곧장 대답이 튀어나왔다.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부화될 거라 기대된 달걀이었으니, 아마 알 속에서 죽었겠지.
……염소 빼고 전부 다 해당된다고 했었나?
정말로 그 달걀에서 나온 게 되다 만 병아리라면, 오늘 꿈자리가 조금 사나울 것 같다.
위슨은 웃음기 하나 없는 덤덤한 얼굴로, 수프가 든 솥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두웅, 하는 약간 무거운 울림이 퍼지는 가운데,
“때앵~”
“……”
녀석이 한없이 느긋한 목소리로 내 대답이 틀렸음을 알렸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헷갈리니까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흰자랑 노른자였어. 썩은내가 풀풀 나는.”
“………뭐?”
흰자랑 노른자……?
뭐야, 그럼 아예 병아리가 되지 않았다는 거야?
혹시 처음부터,
“부화가 안 되는 알이 아니었을지 의심하는 카엘아, 애석하게도 아니란다. 위슨이 본 노른자들은 다 제대로 씨를 품고 있었어. 전부 병아리가 됐어야 했다고.”
설령 껍데기를 깨고 나오지 못한다 해도, 일단은 자라야 했다.
흰자와 노른자가 아닌, 다른 형태로 바뀌어 있었어야 한다.
“다른 데도 가본 거야? ……그리고 내가 그 생각할지 어떻게 알았냐?”
“당연히 딴 데도 가봤지. 그리고 너 원래 의심 많잖아. 그런 생각할 게 뻔하지.”
위슨은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어. 그럼 뭔가 낌새가 이상하잖냐? 그래서 거기 있는 가축농장들 다 돌아봤어.”
“소, 양, 산양, 염소, 그리고 또 뭐였죠? 아, 멧돼지! 근데 눈이 없는 멧돼지였어요. 신기하죠?”
“사제님, 그거 땅굴돼지였어. 몬스터야, 몬스터. 멧돼지 아니야. 아무튼 다 돌아본 결과를 정리하면 이래.”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시하면서, 그는 자신이 정리한 결과를 알려주었다.
하나, 7월 1일을 시작으로 새로 태어난 놈은 하나도 없고, 사산한 놈도 전혀 없다.
둘, 지금 만삭인 놈은 하나도 없다.
셋, 몬스터도 예외는 아니다.
넷, 염소는 아무 변화도 없다.
몬스터도 똑같다는 건, 드워프들이 그 땅굴돼지라는 놈을 포함해, 식용으로 쓸 수 있는 몬스터를 기르고 있는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위슨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까닥거렸고, 나는그런 그를 마주보며 미간을 좁혔다.
“야, 염소는 왜 멀쩡한 거야?”
“몰라. 사제님은 염소가 반항마의 상징이라 그런 거 같다던데.”
“염소 자체엔 죄가 없지만, 악마의 상징이니까요!”
로나의 해맑은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 담겨 있다.
그렇게 따지면 몬스터들은 뭐냐고 묻고 싶지만, 어차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벌레랑 드워프도 해당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다시 연구소에 간 거야?”
끄덕끄덕.
하긴, 이 ‘바위궁전’에서 이상현상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 곳은 개발연구소밖에 없지.
정말로 이게 세계 멸망의 징조라면, 드워프에겐 미리 알려졌을지도 모른다.
맹약을 잊지 않은 명예로운 종족이라는 평가까지 받았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들은 위슨이 전한 말을 듣고서, 충격 때문에 얼굴이 완전히 새하얘졌다.
미리 알고 있던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오늘이 12일이니, 이게 이상현상이란 걸 못 알아채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 게다가 드워프는 남의 일에 별 관심을 안 가지는 성미인 거 같더라고. 그러니 더더욱 모르지.
아무튼 그들이 ‘농장 층’ 전체를 황급히 확인하는 동안, 위슨이랑 사제님은 의사당에 갔어.”
짐승과 몬스터, 비슷하면서도 성질이 다른 두 생명체 집단에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 분명 사람도 다르지 않으리라.
그 생각에 그는 의사당으로 향했고, 접수원을 보자마자 물었다.
출생신고를 어디서 하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접수원이 알려준 데로 가서 자료 봤구나.”
“바보냐? 위슨이 그걸 왜 봐? 거기 직원한테 이번 달에 출생신고 된 게 있냐고 물어보면 되는 걸.”
“……”
……그렇겠군. 제길.
생각해보니 위슨에게 보여줄 리가 없잖아?
아무리 이 녀석이 용사의 동료라 해도, 출생신고 등등은 용사와 하등 관계없는 내부 정보이니까.
“결과는 아까 농장 봤을 때랑 같아. 하나도 없어.”
그걸로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녀석은 빵을 잘게 뜯어서 파랑새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
……눈을 감고,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두드리며 다시 정리해보았다.
나무나 풀꽃은 모르겠지만, 일단 짐승과 사람은 7월 1일을 기점으로 자손을 낳지 못한다.
모든 종족에게 적용된 이 재앙은, 세계 멸망의 징조라 해도 아무 손색이 없겠지.
문제는 그 방식이다.
위슨은 말했다.
씨를 품은 달걀이 병아리가 되지 못한 채 썩어버렸다고.
속에서 죽은 것이 아닌, 애초에 자라지도 않았다고.
그 일자를 기점으로 죽은 새끼를 낳은 짐승은 물론이고, 만삭인 놈조차 하나도 없다고.
그렇다는 건……
“……아예…… 새끼를 배지 않는다……? 7월 1일부터 그 이후 날짜에 태어나는 일이 없도록……?”
병아리가 되고 있던 게 도로 흰자와 노른자로 돌아갔다는 기적 아닌 기적이 일어난 게 아닌이상,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이것 하나밖에 없다.
달걀이 부화하는 데엔 보통 3주가 걸리니까, 암탉이 그 달걀을 낳은 건 6월이겠지.
어미 닭은 그 달걀을 열심히 품었지만, 애석하게도 그 달걀 속의 흰자와 노른자는 병아리가 되는 과정을 아예 밟지 않은 것이다.
7월 1일 이후에 태어나지 않도록, 초월적인 힘이 개입한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생각에, 눈이 번쩍 뜨였다.
손끝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7월 1일 이후에 새 생명이 태어나지 않도록, 날짜를 맞추어서 잉태가 막혔다는 것.
그것은 달리 말하면, 이 재앙은……
10개월 전부터 이미 시작됐다는 소리가 된다.
사람의 임신 기간이 대충 10개월이니까.
즉, 드래곤은 이미 훨씬 전에 깨어나 있었던 것이다.
용사에 대한 예언이 내린 시점이 아니라……!
“그럼 일 년이라는 시간제한도 그때부터 시작된 거 아냐? 앞으로 채 두 달도 안 남은 거 아니냐고……!”
“아~ 그건 아니에요, 카엘 님.”
수프가 담긴 스푼을 후후 불던 로나가 고개를 저었다.
“시간제한은 용사가 나타난 순간부터 시작된 거에요. 아, 물론 출산의 단절이 이쯤 시작될 거라고 미리 예정되어 있었겠죠.
아트라토스 재앙이 터지는 것 자체는 이미 확정된 사실이었으니까요.”
확정된 사실……?
멀뚱히 그녀를 쳐다보자, 로나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기억 안 나세요? 율리아 님이 직접 말씀하셨었는데요. 그 분이 저를 미리 준비시켰다고요.”
그 말에, 어슴푸레한 지하 공간에서 있었던 일들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로나를 소개시켜주면서 공주가 했던 말이 슬며시 머릿속에 다시 되새겨지는 듯했다.
제 삶이 끝나기 전에 봉인이 풀릴 거라는 계시가 있었어요.
……하지만 공주도 그 정확한 날짜는 알지 못했다.
창조주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대언자조차, 용사에 대한 예언과 계시를 듣기 전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을 로나가 알던 건, ‘세계에 여러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뿐.
‘불구덩이’가 되살아나거나, 지금처럼 새 생명이 태어나지 않게 될 거라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성실하게 맹약을 지키고 있던 드워프조차, 이 사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것인가?
그 대답은 하나다.
‘그것은……?’
……무언가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 같다.
분노, 혼란스러움, 당황함, 슬픔, 안타까움……
그 어떤 것도 아닌 감정.
뱃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이 느낌은, 틀림없는 공포였다.
‘그 대답이 뭐지?’
말할 수 있겠어?
차분하게 묻는 속삭임과 비웃음 섞인 속삭임.
둘 다 내 목소리인 탓에, 진짜로 천사와 악마가 옆에서 속삭이는 느낌이다.
진짜 천사와 악마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내가 찾은 대답은 이렇다.
……전부 물밑작업이 되어 있었다는 것.
“……전부 다 예정되어 있던 거야. 그렇지?”
율리아 공주에게 계시를 내릴 수 있는 존재,
악마의 능력을 봉할 수 있는 존재,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자리한 존재의 의지에 따라.
“당연하죠.”
그 존재를 섬기는 교단의 사제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은 창조주의 뜻이잖아요?”
“……”
당연히 알고 있던 상식이, 새삼 묵직한 무게로 다가왔다.
세상만사에 우연은 없다.
모든 것은 필연으로서 이루어진다.
그 필연을 정하는 건 세상만물을 만든 창조주.
특별한 이름이 없는 전지전능의 신이다.
그것이 교단의 가르침이며, 오래된 숲의 정령조차 당연지사로 인지하는 진리이다.
……물론, 정령들은 신의 뜻이라는 소리는 안 했지만.
“다 예정됐다면…… 결말도 이미 다 정해진 거야?”
“결말? 아, 이 여정의 결말요?”
남은 수프를 떠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삼킨 후, 로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이 땅에 사는 누구도 몰라요. 율리아 님도 모르시고요. 그야말로 창조주만 알고 계신답니다.”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주의 계획인 거야? 내가 성검을 들고, 마을을 나오고……
마녀들을 상대하고 그랬던 게 전부…… 그저 계획대로 움직였을 뿐이라고……?”
로나는 고개를 좌우로 까닥이며 말했다.
“맹약을 나눈 다섯 종족을 찾아가는 게 원래 계획된 거잖아요? 그게 왜요?”
“아니, 그게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좀처럼 말로 이어지지 않는다.
목이 막히고, 목소리가 떨려서 자꾸 더듬는 나를 빤히 쳐다보던 로나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하, 카엘 님의 생각과 행동이 자신의 의도로 된 게 아니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제 말이 맞나요?”
“정말…… 그런 거야……?”
“글쎄요. 모르는데요.”
“……기도의 능력을 체현시킬 정도의 사제이면서 모르는 거야?”
“교단의 가르침이라면 알지만, 정말로 어떤 구조로 이루어지는지는 몰라요. 뭐, 여쭌다면 알려주실지도 모르죠? 근데 별로 안 궁금해서요.”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녀는 태연하게 그렇게 말했다.
“……안 궁금하다고? 전혀? 너 말고 다른 사제님들도 다 그런 거야?”
“네. 조금도 궁금하지 않아요. 다른 사제님들도 그런지는 모르겠네요. 그런 이야기를 할 일이 없거든요. 관심이 없어서.”
주저없이 대답한 후, 그녀는 나를 향해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알아서 뭐하겠어요? 애초에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인걸요. 제가 지금 수프를 먹고, 이따가 잠자리에 드는 것조차 창조주의 뜻 아래 있으며, 제가 어느 싸움터에서 죽게 될 거라는 것도 다 예정된 일이겠지요. 그래서요? 그게 뭐 어떻다는 거죠?
모든 것이 창조주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는 건 불변의 진리이잖아요? 새삼스럽게 왜 놀라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야, 그건……!”
어렴풋하게, 그냥 지식으로서 아는 것과 피부에 와 닿는 건 다르다.
모든 일은 전지전능한 신이 정한 대로 움직인다.
그 사실이 눈앞에 들이밀어졌을 때, 내가 느낀 것은 공포였다.
내가 한 생각, 내가 이때까지 한 행동들, 그 전부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거니까.
……어쩌면, 내가 메린을 좋아하는 감정조차도.
나 자신이 일개의 독립된 존재가 아닌, 인지하고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존재에 의해 움직일 뿐인 인형이라는 사실.
그게 무척이나 무서웠던 것이다.
“인형……? 아, 착각하고 계시는구나.”
“……”
“제대로 교리를 못 들으신 탓에 큰 착각을 하셨군요.좋아요, 일단은 사제이니까 강론 하나 해드리죠.”
그녀는 흠흠, 하고 과장되게 목을 가다듬고서 말을 꺼냈다.
“자, 카엘 님, 예시를 들어서 설명해드릴게요. 당신이 그 수프를 먹지 않는다면 주무시기까지도 엄청나게 배가 고프겠죠? 반대로, 수프를 먹으면 든든한 포만감에 편안~히 주무실 거고요.”
아직도 살짝 김이 남아있는 수프를 가리키며, 그녀는 생긋 웃었다.
“카엘 님이 무서워하시는 건, 이 수프를 먹거나 먹지 않겠다는 그 생각이 온전히 당신 스스로에게서 나온 게 아닌 것 같아서 그러신 거죠?”
“……어.”
“근데 카엘 님, 당신은 수프를 왜 드시나요?”
“………엉?”
뜬금없는 질문에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