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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42화 (242/475)

〈 242화 〉 235화 : “근데 뭐가 달라진 거야?” (2)

* * *

고난의 아침식사 후, 나는 마티나에게 키리오스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다른 사용인들이 테이블을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그녀는, 고개만 살짝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바로 떠나시려는 겁니까?”

“네. 다들 식사 전에 이미 채비를 마쳤더군요.”

어지간히 여길 떠나고 싶었나봐.

물약을 끓이느라 재료들을 늘어놓았을 위슨까지도, 당장 배낭 메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내 말에, 마티나는 말없이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위로 쳐들었다.

그대로 잠시 서 있다가, 이내 눈을 번쩍 뜨고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로드께서 응하셨습니다. 허나, 알현이 허락된 것은 용사님뿐입니다. 검과 짐을 동료분께 맡기십시오.”

“……맨몸으로 만나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장소는 어디인데요?”

“전당 안의 홀입니다.”

전당 안의 홀이면……

그 드래곤들 쫙 모여 있던 곳?

하하, 하하하……

“이 미친 빨간 도마뱀 대가리 드래곤 새끼 키리오스 님이 왜 심술을 부리시고 지랄이시래요?”

“로드께선 미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반신을 데려가겠다는 그 말, 어디 내 앞에서 맨몸뚱이로 할 수 있나 보자, 발칙한 잡놈인 용사여.’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

아니, 명색이 드래곤의 왕이면서 말야.

우리 다섯 명 전부 불러서, ‘결정을 듣겠다, 용사’ 식으로 위엄 있게 시작해야 할 거 아냐.

근데 난 검 한 자루도 못 차게 하면서, 자신만 부하들 쫙 깔겠다고?

이 새끼, 분명 저번처럼 본체로 앉아 있을 거야, 분명해!

이런 졸렬한 새끼!

“그래, 좋아, 씨발, 덤벼! 내가 못할 줄 알아?! 아주 그냥 피를 토하도록 만들어줄……. 응?”

키리오스의 노골적인 도발에 빡쳐서 도전을 수락하려는 순간, 갑자기 손 하나가 부드럽게 감싸였다.

손등에서 익숙한 온기가 전해지자, 머리 끝까지 치솟았던 분노가 곧바로 누그러졌다.

그 온기의 주인은 내 손을 잡은 채, 마티나를 보며 말했다.

“나도 같이 만날래요.”

“어…… 메린? 아냐, 나 혼자 가도 돼.”

“죽는 순간까지 함께 있어 달라며. 볼일 볼 때 빼고는 같이 있어줄게.”

“………”

반대쪽 손으로 두 눈을 덮었다.

아으, 내가 진짜 뭔 정신으로 저런 말을 한 거지?

물론 진심이긴 한데……!

아아, 분위기란 정말 무섭다!

그리고 저쪽에서 꺄아꺄아 소리지르는 사제님은 좀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다.

“로드께서는 용사님 한 명만 알현을 허락하셨습니다만.”

사실상의 거절이나 다름없는 마티나의 말.

그러나 메린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그 로드의 반신이라면서요? 절반은 그 로드나 다름없는 거니, 나도 이 녀석의 알현을 받는 거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알현은 어디까지나 드래곤 로드에 대한 것입니다. 설사 당신이 로드와 동일한 정수를 품고 있다 하여도, 결국 당신은 인간일 뿐. 감히 드래곤과 동등히 서려 하지 마십시오.”

표정은 무뚝뚝한 그대로이지만, 마티나의 목소리엔 무척이나 싸늘한 한기가 감돌고 있다.

다른 사용인들도 그 냉기를 알아차렸는지, 다들 빈 식기들을 손에 들고 후다닥 방을 나가버렸다.

……그러고보니 저 사용인들은 인간이라고 했던가?

나 참,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이구만.

한숨을 쉬며 메린의 손을 놓으려는 순간,

“동등? 푸흡, 푸하하핫!”

뜬금없이 블루벨이 웃음을 터뜨렸다!

굉장히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그녀는 배를 붙잡고 허리를 굽히기까지 하고 있었다.

거참 희한하네.

아침식사 테이블에 술병은 없었던 거 같은데.

눈빛이 살아있는 걸 보면 그새 한잔 마신 것 같지도 않다.

그렇게 또렷한 정신으로 미친 사람처럼 한참을 웃은 후, 블루벨은 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그런 소리를 하다니! 푸흐흣, 그 로드도 그렇고, 현실도피가 너무 심한 거 아냐?”

“그저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드래곤은 이 대륙의 정점. 본디 인간은 물론이고, 당신과 같은 숲의 잡초가 감히 우러러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설령 용사와 그의 동료라 할지라도 결국은 하등한 미물이니, 살고 싶으시다면 몸을 낮추도록 하십시오.”

마티나의 표정엔 아무 변화도 없으나, 그 목소리엔 살짝 노여움이 서려 있었다.

그 얼굴을 향해 씨익 웃으며, 블루벨은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열등종 주제에 잘난 척하지 말지?”

“……!”

두 눈을 부릅뜬 드래곤을 향해, 엘프는 입술을 비죽이며 말을 이었다.

“너희가 왜 여기 있는데? 너희 왕이, 지상에 남은 드래곤을 왜 여기로 다 불러모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갓 자란 잡초 주제에, 감히 로드의 뜻을 헤아리는 겁니까?”

“헤아릴 게 뭐가 있다고.”

키득키득 웃으며 고개를 저은 후, 블루벨은 마티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이 고개를 내밀고,

“안 그래? 패배자들아. 너희들은 그냥 여기 도망친 거잖아.”

눈을 부릅뜨면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패배자. 그냥 여기 도망친 것.

……그 말소리가 조용히 방 안에 흩어진 순간,

“으앗?!”

메린에게 붙잡혀 있던 손이 뒤로 홱 당겨졌고,

채애앵!

소름이 바짝 돋는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겼다!

“……?!”

벙벙해진 내 눈에, 두 여자가 바짝 붙어있는 게 보였다.

커다란 도마뱀과 같은 손으로 블루벨에게 손톱을 들이밀고 있는 마티나.

그리고 단검 두 자루를 교차하여 그 손톱을 막고 있는 블루벨.

둘 다 살기등등한 기세로, 반드시 상대의 목을 따버리겠다며 눈으로 선포하고 있었다.

“이슬보다도 헛되던 놈들이 완전히 기고만장해져 있구나……! 네놈들을 멸종시키지 못하고 여기에 온 것이 한이로다……!”

“아하하!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시네! 그간 나한테 꼬박꼬박 존댓말 하느라 얼마나 힘드셨어? 응? 나도 네년한테 접대받는 동안 신경 거슬려서 죽는 줄 알았는데 말야!!

일족의 숙적에게 접대받다니, 아저씨가 들으면 아주 폭소를 하시겠어……!”

엘프의 숙적……?

드래곤이……?

……아, 맞아. 그 임시 왕이 그랬었지?

옛날에 이 대륙 곳곳에 퍼져 있던 생명수……

엘프를 낳는 그 어머니 나무들 중 일부를 드래곤이 불태웠다고.

마티나가 그 범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고, 애초에 블루벨은 그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엘프인 만큼, 드래곤에게 그리 좋은 감정은 없는 것이리라.

그래, 이해할 수 있어.

개인이 아닌 단체에게 반감을 갖는 건 흔한 일이지.

그렇다고 여기서 이러면 되나?!

나는 불꽃을 마구 튀기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두 사람 다 미쳤어?! 실내에서 뭐하는 짓이야, 집 다 부수고 싶어?! 하려면 밖에서 하든가!”

“야, 보통은 싸우지 말라고 하지 않냐?”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메린이 딴죽을 걸자,

­­­­그러게 말이다.

허공에 목소리가 울리며, 눈앞의 공간이 일순 일렁거렸다.

그리고 눈을 깜빡인 순간, 주위의 풍경이 단숨에 바뀌어버렸다.

“용사라는 놈이 이리 비뚤어져 있어서야…….”

높디 높은 천장 아래에 모여 있는 드래곤들.

맨 안쪽 거대한 의자에 자리하고 있는 붉은 드래곤.

이틀 전에 나 홀로 불려왔던, 그 거대한 홀이다.

또 다시, 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이다.

또 다시,

시선들이 쏟아지고 있다.

“하…… 윽……!”

머리 위에서, 또 다시 경멸 어린 시선들이 강렬하게 느껴지고 있다.

또 다시 심장이 꽈악 짓눌리는 듯한 느낌에 숨이 막혀 오기 시작한다.

망할……, 아까 빡쳤을 때 왔으면 괜찮았을 텐데!

“개…새끼가 진짜……!”

빌어먹을 빨간 도마뱀 새끼, 예고도 없이 불러오고 지랄이야!

제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좀 달라고!

“카엘.”

“큭……!”

……잡혀 있던 손이 꽉 죄여왔다.

조금만 더 세게 잡으면, 가루가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억센 힘이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메린은 내 턱을 잡더니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나 봐.”

“하아, 하……!”

“내 눈을 봐.”

눈…….

눈을, 봐야 돼.

자꾸만 흔들리는 초점을 한곳에 고정하려 애썼다.

나를 향해 단호한 빛을 내고 있는 눈동자.

볼품없는 내 모습을 피하지 않고 비추고 있는,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메…린……, 윽…… 하아……!”

“어. 나야. 내가 여기 있어.”

그러니까 안심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을 보며,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괜찮아.

검도 차고 있고, 무엇보다 메린이 같이 있잖아.

드래곤이 얼마나 덤비든 문제없어.

몇 번이고 그 말들을 속으로 되뇌면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후우…… 하……”

마침내 호흡이 안정된 나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은 후, 그녀는 내 손을 놓더니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어째서인지 턱은 놓아주지 않았다.

“메린……? 어…… 나 이제 괜찮아졌는데 왜……?”

의아해하며 묻는 순간,

“캬아아아아아!!”

“?!”

갑자기 귀를 찢을 듯한 괴성이 울렸다!

아니, 비명이야. 등줄기가 바짝 설 만큼 소름끼치는 비명이다!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거 같긴 한데……!

그 소리는 메린의 뒤쪽에서 나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은데, 메린이 내 턱을 계속 붙잡고 있는 통에 그럴 수가 없었다.

“무, 뭐야?! 메린, 손 놔줘. 뒤에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 같은데?!”

“별 거 아냐.”

“소리는 전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뭔가 푹 하기도 하고, 찌익 하기도 하고, 자글자글 구워지는 소리까지 들리는데 별 게 아니라고?!

“로, 로드…… 저는 그저……!”

“그래, 드래곤으로서 품위를 지키려 했을 뿐이지. 내가 그걸 모를 듯하여 나를 가르치려는 것이냐?”

“아, 아니, 아닙니,”

콰직!

무언가 부숴지는 소리와 함께, 또 다시 새된 비명이 홀을 왕왕 울렸다.

저 목소리, 마티나랑 키리오스 같은데……!

“메, 메린……!”

“쉿. 가만히 있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대며 그녀가 속삭였다.

키리오스가 마티나에게 뭔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내가 보지 않도록 하려는 것 같다.

근데 소리는 계속 들리잖아!

상상이 막 가고 있다고!

“그래, 엘프 따위 잡초에 불과하다. 인간은 땅을 기는 버러지이고. 그렇다면, 그러한 놈들의 빈정거림을 참지 못한 네년은 무엇일까?”

“캬아아아아아!”

“그래, 나의 반신은 드래곤이 아닌 인간이다. 인간이 드래곤과 동등하게 서려 하다니 가당치 않은 일이지. 맞아.

그러나 나의 반신이다. 인간이기 전에 나의 반신이란 말이다!

감히 네년 따위가 나의 일에 끼어드느냐?! 감히 멋대로 ‘나’의 말을 일축하느냐?! 네년이 나의 총애를 믿고 멋대로 날뛰는구나! 기고만장한 건 바로 네년이다!!”

키리오스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리자마자, 바로 이어서 머리가 뒤흔들리는 듯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젠장, 더 못 듣겠어……!

손으로 양쪽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온 힘을 다해 귀를 막는데도, 노성과 비명소리, 무언가 짓눌리고 터지는 소리는 계속 뚫고 들어왔다.

이를 악물고 그걸 흘려버리려 애쓰고 있는데, 갑자기 이마에 무언가 닿으면서, 내 손을 포개는 온기가 느껴졌다.

손…….

그녀의 손이 내 손등을 덮으면서, 힘있게 누르고 있는 게 느껴진다.

살짝 눈을 뜨자, 메린이 나에게 이마를 맞댄 채 눈을 감고 있는 게 보였다.

“……”

아아…… 들리지 않는다.

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째진 비명도, 분노에 타오르는 듯한 고함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고 있다.

다시 눈을 감아 캄캄해진 시야.

그 공간 속에 존재하는 건, 오로지 그녀의 따스한 온기뿐이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그녀가 내 귀에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서는 게 느껴졌다.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드니, 거대한 붉은 드래곤의 뒤에 길다란 머리가 쓰러져 있는 게 보인다.

저게 마티나의 본래 모습인가……?

머리가 두 개나 달린 것 같은데?

……근데 그 중 하나는 입에 피거품을 물고 있다!

“마티나?! 우와, 죽인 거에요?!”

“저치도 드래곤이니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아마 좋은 교훈이 됐을 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콧방귀를 뀐 후, 키리오스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놈, 나의 반신을 데려가겠다?”

“……네.”

위압감이 잔뜩 느껴지는 그 눈을 마주하며, 나는 최대한 단호하게 대답했다.

“메린을 데리고 갈 겁니다. 당신의 본신 앞까지, 같이 갈 거에요.”

“허, 아트라토스의 그릇인 줄 알면서 그의 앞에 데려가겠다? 네놈, 혹여 그에게 아부라도 할 셈이냐?”

“아니요. 아트라토스가 이 녀석에게 깃드는 순간, 제가 죽일 겁니다.”

“……”

키리오스의 눈이 일순 움찔하는 게 보였다.

아트라토스에게서 독립한 존재라 해도, 여전히 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가당치 않다고 비웃거나, 이곳을 나가는 순간 도로 빼앗겠다고 위협할 줄 알았는데.

“그런가? 그게 네놈의 결정이라면, 좋다. 그러도록 해라.”

붉은 드래곤은 의외로 흔쾌히 수락했다.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깔끔하게 포기한 것이다!

“엥? 진짜 그래도 돼요?”

“지금 내 허락을 구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안 된다고 하고 싶은데.”

“어, 아뇨. 그게 아니라………”

“뭘 기대한 것이냐? 회유? 위협? 어차피 안 통할 게 뻔한데 뭐하러? 하, 나는 그런 헛수고에 공을 들일 만큼 어리석지 않다, 용사.”

키리오스는 투덜거리듯이 말한 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군. 귀히 여기는 자의 목숨을, 귀히 여긴다는 이유로 손수 빼앗으려 하다니.”

“……”

“그 파멸적인 정신에 경의를 표하마. 그런 의미에서, 내 하나 알려주지.”

무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키리오스는 입을 열었다.

“그릇을 빼앗기기 싫다면 안을 채워라.주도권을 지키는 방법은 오직 그뿐이다.”

“……채우라고……?”

옆에 서 있는 메린을 흘긋 보았다.

비어 있는 그릇…… 영혼을 채우면, 아트라토스가 몸을 빼앗으려 해도 주도권을 지킬 수 있다는 건가?

그걸…… 아트라토스의 앞에 가기 전에 해내야 한다고?

짧으면 두세 달밖에 안 되는 시간 안에, 내가 그걸 해낼 수 있을까?

“……”

………아니, 그건 별로 상관없구나.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어차피 나는 너와 함께 끝까지 갈 거니까.

그러니 전혀 상관없지. 안 그래, 메린?

멀거니 서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의아한 듯이 나를 보는 그녀에게 빙긋 웃어주었다.

“……하, 실로 이해가 안 되는 놈이로군. 그런 네놈의 결말을 기대하도록 하겠다, 용사.”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또 다시 공간이 일렁이면서 풍경이 확 달라졌다.

탁 트인 시야에 높고 높은 하늘.

그리고 저 앞에는 거대한 붉은 바위산이 보이고 있다.

무심결에 아래를 내려다보자, 내가 지금 경계선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발만 더 내딛으면, 키리오스의 권역인 붉은 지역에 들어서는 지점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메린이 서 있었다.

그녀는 붉은 바위산을 바라보며,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이야, 바로 내려왔네. 걸어 내려오면 되게 귀찮을 거 같았는데 잘됐다, 그치?”

“……응. 그러게.”

딱히 걸어 내려와도 상관없었는데, 이런 친절을 베풀어주시다니.

드래곤의 왕께선 인간이 저 산을 멀쩡히 걸어 내려가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그 신비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이겠지, 뭐.

나는 홀로 어깨를 으쓱였다.

“카엘 님~! 메린 님~! 여기에요~!”

뒤쪽에서 들린 밝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 두 소년소녀와 엘프 하나, 그리고 말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나와 메린이 전당 안에 있는 동안, 나머지 사람과 축생들을 먼저 산 아래로 내보낸 듯했다.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손을 흔들고 있는 로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가자, 메린.”

“응.”

그녀와 한 손을 맞잡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일행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야, 카엘.”

“응?”

“우리 이제 뭐냐?”

“엉? 뭐가?”

“우리 어제 잤잖아. 그럼 뭐야? 이제 사귀는 건가?”

“그……렇지?”

순서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같이 밤을 보냈으니…….

세간에서 말하는 연인……이 된 거겠지.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재차 물었다.

“애인? 연인? 뭐 그런 거지? 음, 그럼 보통 뭐하는데?”

“어…… 뭐…… 같이 놀러다니거나 데이트하고…… 키스나 뭐 그런 애정행각도 하고…….”

“애정행각?”

“왜, 그, 음, 뭐 먹을 때 서로 먹여준다거나…… 서로 끌어안는다든가……. 그, 관계 말고도 그냥 같이 자거나…….”

“흠……”

메린은 시선을 돌리며 턱을 문지르더니,

“그거 이미 다 하고 있었는데?”

“………”

그러네.

젠장할.

“그럼 뭐야? 너랑 나, 그 전부터 사귀고 있던 게 되냐?”

“…………몰라, 임마, 묻지 마.”

“같이 자는 거만 추가된 거 같은데, 맞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는 그녀의 표정은 평소대로 무덤덤하다.

……그러나 나 역시 평소처럼 민망함을 감추며 얼버무리기엔, 그녀의 눈이 사뭇 진지해보였다.

솔직하게 대답해.

쪽팔리고 민망하고 어색해도 솔직하게……!!

“………아, 응. 그럴 거야…….”

……엄청나게 마음을 다잡았는데도, 차마 그녀를 보면서 대답할 순 없었다.

흑, 나 너무 한심해.

“그렇구나. 그럼 그냥 평소대로 하면 되는 거네.”

“응…….”

밀려오는 자괴감에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가면서, 나는그녀와 맞잡고 있는 손, 그 가느다란 손가락들에 깍지를 끼었다.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는, 그 마음을 한껏 담아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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