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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44화 (244/475)

〈 244화 〉 외전 4) 지독한 인연 (Side : Bluebell) (2)

* * *

다음날 아침 일찍, 블루벨은 묘지를 찾았다.

전날 밤의 일 때문에 마구 쑤셔오는 허리를 짚은 채 한숨을 쉬며, 그녀는 묘지기의 집이 달려 있는 나무를 지나쳐 공터로 향했다.

‘으으, 감안하겠다고 했으면서 너무해…….’

눈을 가리고 한 번, 거기에 양 손목을 묶은 채로 또 한 번, 안대를 벗기고 손목을 풀더니 스스로 졸라보라고 요구한 뒤에 또 한 번…….

강도만 약해졌을 뿐, 횟수 자체는 어제보다 더 많은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달거리가 끝나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십중팔구 아이가 들어섰겠지.

그런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으으으, 근데 내가 진짜 그런 거에서 느낄 줄이야……!’

그녀 스스로 그에게 조른 순간,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지며 머릿속이 완전히 흐릿해져 버렸다.

그 이후에도 이것저것 말을 한 기억은 있으나, 머리가 맑은 지금, 정말로 자신이 그런 말들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있었다.

‘분위기야, 분위기. 분위기 때문에 그랬던 거야!’

그렇게 그녀가 스스로의 행동을 부정하며 공터에 들어서자마자,

“아침 댓바람부터 술 먹었어? 뭘 혼자 그렇게 고개를 흔들면서 오는 거야?”

밭을 들여다보던 골든로드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묘지에 오고 있는 것을 한참 전부터 알아차린 듯했다.

블루벨은 왠지 쑥스러운 마음에, 헛기침을 하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음, 안녕하세요, 골든 아저씨. 그냥 생각 좀 하느라요. 별 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생각? 아…… 결박당한 채로 목을 깨물리는 게 너무 좋았던 거구나. 하긴, 부정하고 싶을 만해…….”

“조, 조조, 좋긴 누가 좋았다고 그래요?! 애초에 목이 아니라 어깨이고, 그냥 손목만 묶였…… 꺄아아악, 무슨 말을 하게 만드는 거에요!!”

“아니, 너 혼자 자폭한 거잖아.”

폭발하는 수치심과 함께, 블루벨은 골든로드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어대었다.

그런데도 그는 어지러움 따위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이, 극도로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나 참, 별 거 아닌 유도심문에 그대로 넘어가다니, 진짜 허술하다니까. 이런 애를 용사 죽이라고 보내다니, 그 왕은 진짜 등신 머저리였어.”

“아으으으아아아!!”

“근데 왜 이리 일찍 왔어? 아직 두 시간이나 더 남았는데. 설마 시간도 잘못 본 거야? 응? 진짜 그런 거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마구마구 흔들던 그의 어깨를 홱 놓아버린 후, 그녀는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을 살짝 돌리며 대답했다.

“생각해보니까, 아저씨한테 제대로 작별 인사를 못한 것 같아서요. 특별히 인사해주러 온 거라고요.”

“엥? 나한테 할 시간에 블루스타한테나 실컷 하지, 왜?”

“그 사람에겐 어제 신나게 했거든요. 그리고…… 음, 아저씨한테도, 여러모로 신세를 졌으니까요.”

블루스타를 피하고 다니던 그 이십 년간, 그녀는 묘지기인 골든로드의 집에서 지냈다.

그녀의 정신이 아직 한참 어린아이였을 때에 이따금 하루이틀씩 지냈던 터라, 옛날부터 그녀의 방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만약 이 집에 남은 방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그를 찾아왔을 것이다.

이 숲에서 그녀가 블루스타 이외에 믿고 있는 사람은, 골든로드, 그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그래~ 네가 신세를 지긴 참 많이 졌지~ 가출한 거 거둬준 데다, 밑바닥이었던 전투술도 끌어올려줬으니 말야. 네가 고마운 걸 알긴 아는구나. 이야, 이거 대견한걸?”

“기왕 대견해하시는 김에, 제가 직접 차리는 아침이라도 드시죠?”

그렇게 제안하자, 골든로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사이에 신세는 무슨 신세를 졌다고 그러니? 그런 섭섭한 말하지 말고 얼른 너네 집으로 꺼지렴. 그리고 두 시간 뒤에 네 보호자랑 같이 다시 오려므나.”

“……”

반쯤 예상했던 반응이라 해도, 실제로 겪게 되니 역시 부아가 살짝 올라왔다.

그가 수락했다면, 정말로 정성껏 아침을 차려주려 했던 것이다.

샐쭉해진 그녀를 내버려두고, 밭에 듬성듬성 나 있는 잡초를 뽑으면서 골든로드가 물었다.

“근데 진짜 왜 온 거야?”

“인사하러 왔다니까요.”

“그건 이따가 해도 되잖아. 뭐, 특별히 할말이라도 있어?”

“아뇨.”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서 심드렁하게 묻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이 풍경도 기억에 담아두려고요.”

“어제 짐 챙기러 여기 왔을 거 아냐. 까먹었구나?”

“아닌데요. 짐 챙기고 이 집 한 번 쭉 돌아봤거든요?”

그녀는 어제 몸을 추스른 후, 이 집에 와서 옷가지를 비롯한 여러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갔다.

지난 이십 년간 이곳이 그녀의 집이었던 탓에, 짐이 전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난번에 한 번 짐을 챙겼었으나, 그 물건들은 도시에서 체포됐을 때 죄다 빼앗겨버렸다.

그 후 포로로서 그 도시를 나올 때 돌려받은 건 옷 두세 벌과 무기뿐.

그 외엔 붕대 하나조차도 되찾을 수 없었다.

‘아마 그것도 그 미친놈이 주장하지 않았다면 못 받았겠지.’

포로로 데려가면서 무기를 쥐어주다니, 역시 보통 정신머리가 아니었다.

아무튼, 그런 사정 때문에 이 집에서 그녀가 챙길 수 있던 건 옷가지나 손거울, 빗 등의 물품뿐.

숫돌이나 예비 활줄 등의 다른 물건들은 전부 다른 곳에서 사거나 빌려야 했으므로, 이 집에서 짐을 챙기는 시간이 무척이나 짧았던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생각보다 일찍 채비가 끝난 탓에, 그녀는 한동안 보지 못할 이 집을 기억에 담아두려고 찬찬히 돌아봤던 것이었다.

“그럼 어제 여기도 왔겠네. 두 번이나 보러 오다니, 너도 참 별나구나.”

“음, 어제는 안 왔어요. 부족한 게 있어서.”

“……?”

골든로드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면서, 무슨 뜻 모를 소리를 하느냐고 눈으로 물었다.

그 의아해하는 두 갈색 눈을 마주보며, 그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어제 아저씨 안 계셨잖아요. 아저씨가 있는 묘지를 기억하고 싶었어요. 아저씨가 없으면, 제 눈엔 그냥 꽃밭으로만 보이니까요.”

그리고 그가 여기서 밭을 돌보거나 꽃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새삼 담아두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가 기억하고 사랑하는, 이 숲의 평화로운 일상이기 때문이다.

“……진짜 별난 녀석이라니까. 여기가 뭐 그리 좋다고.”

“……”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툭 내뱉은 후, 골든로드는 다시 풀 뽑기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두 시간 뒤에는 용사 일행을 숲 바깥까지 배웅하러 나가야 하니, 그전에 해치울 수 있는 만큼 일을 해두려는 것이리라.

그런 그의 모습을, 블루벨은 곧잘 앉던 공터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멀거니 바라보았다.

……묘지기 골든로드.

마을에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사백 년 먹은 엘프.

마을에 큰 불이 나서 난리가 나건, 축제가 열려서 소란이 일어나건, 오로지 집과 묘지만 오갈 뿐인 이상한 사람.

그녀가 언젠가 딱 한 번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귀찮아.

그저 단순히 밖에 다니는 걸 싫어한다고 하기엔, 그는 묘지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뿐인가? 이따금 근처 숲을 다니며 버섯이나 새알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사람 많은 걸 싫어하는구나 하고 홀로 납득했었다.

그가 용사…… 카엘에게 자신의 속내를 밝히기 전까지.

­­뒤떨어지는 동생들은 얼마든지 아껴줄 수 있어. 하지만 겉만 닮은 생물은 끔찍할 뿐이야.

블루스타 다음으로 가까운 사이라 여긴 자신에게도 밝히지 않은 그 속내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어둡고 음울했다.

­­네가 예전에 내가 왜 항상 여기 처박혀 있는지 물었었지? 이게 바로 그 이유란다. 난 저 아래가 굉장히 끔찍해요.

그녀를 향해 웃으며 내뱉듯이 말한 그의 두 눈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너는 그렇지 않으냐고, 너에게 이런저런 지독한 소리들을 내뱉는 그 놈들이 끔찍하지 않냐고 묻고 있었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동의하지 않은 건, 그 엘프들은 끔찍하긴 해도, 어쨌든 동족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태반에서 태어났든, 자신처럼 나무에서 태어났든, 모두 같은 일족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거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이리라.

……그리고 그런 그는, 다음주엔 엘프들을 다스리는 왕이 된다.

비록 임시이긴 해도, 어쨌든 그가 끔찍해마지 않는 엘프들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블루스타는 괜찮을 거라 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정작 그 말을 하는 블루스타 역시 내심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자신의 스승이 동족을 혐오한다는 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골든로드는 삼백 년 이상을 혼자서 살아왔다.

갑자기 많은 사람 앞에 서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왕이 되는 걸 수락했다.

자신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정해버린 장로들에게 이를 갈면서도, 어쨌든 거절하지는 않은 것이다.

‘어째서?’

지금 살고 있는 집과 묘지를 떠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아니면 권력을 잡을 수 있으니까?

블루벨은 그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골든 아저씨.”

“응?”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블루벨은 그의 목소리를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이 역시 어머니 나무에서 피어난 엘프의 권능 중 하나라고 들었던 걸 떠올리며,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왕이 되기로 하신 거에요?”

“시켜서.”

“저 진지하게 여쭙는 건데요.”

“나도 진지하게 답해주는 건데.”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의심스러운 대답이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쉰 후, 말을 살짝 바꾸어서 다시 물었다.

“왕 하기 싫다고 하셨었잖아요. 근데 왜 수락하신 거에요?”

“왜? 내가 하다가 튈 거 같아?”

“아뇨. 성격 더 버리실 거 같아서요.”

농담도 가식도 전혀 들어있지 않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의 성격이 더 뒤틀리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골든로드는 푸흡, 웃음을 내뿜더니 두 팔을 들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야, 너도 꽤 신랄해졌구나. 블루스타 녀석에게 나쁜 물이 들어버린 모양이지? 아아, 가엾어라.”

“아저씨한테 배운 건데요. 그리고 저는……”

“알아. 내가 걱정되는 거지? 하하, 근데 괜찮아. 이 아저씨는 말이지, 싫어하는 일을 하는 건 이미 익숙해져 있어요. 그러니 내 걱정은 말고, 네 걱정이나 하렴.”

“……”

싫어하는 일을 하는 건 이미 익숙해져 있다.

그 뜻을 되물을 만큼 그녀는 어리숙하지도 않고, 골든로드라는 엘프를 모르지도 않는다.

그가 답을 얼버무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묘지, 왜 계속 돌보신 거에요?”

“……일이니까 했지.”

“아저씨 여기 싫어하잖아요.”

이 묘지는, 그녀에겐 그저 쓸쓸한 분위기가 감도는 꽃밭일 뿐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수많은 엘프의 피가 흐른 것을 직접 본 데다, 옛 기억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에겐 전혀 다르게 보이고 있을 터.

……어쩌면 그는, 지금도 여름의 싱그러운 풀내음 속에서 피냄새를 맡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살랑이는 부드러운 소리 안에서, 그날 울려퍼졌던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엘프이다.

올해 봄에 딴 딸기의 맛을 생생히 떠올리며, 아무 맛도 안 나는 물을 즐겁게 마실 수 있는 기억력을 가진 엘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과거를 기억하는 그에게, 이 풍경이 어떻게 보이고 있을지는 자명하다.

담당교육자를 잃고, 지난 왕에 의해 목숨을 잃고 피어난 수많은 꽃들의 원한 어린 목소리를 들었다.

종국에는 이 공터에 자리하고 있던 옛 악우……

오랜 느릅나무의 광기마저 상대해야 했다.

어떻게 그 기억들을 품고서, 매일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곳을 찾은 것인가?

상황이 좋아지리라는 희망이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왜 계속하신 거에요? 여길 벗어나면 죽는 것도 아닌데.”

묘지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제약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니, 얼마든지 여기를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어째서 자신의 마음이 갈려가는 걸 느끼면서도 계속 버텼던 것인지,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되고 싶어서 용사가 된 것도 아닌 놈이, 떠맡은 일에 책임감 느껴선 때려칠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아.

……카엘이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것인지, 그녀는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데서 끈질기다니까. 오냐, 그래, 대답해준다. 나 참, 죽어도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그는 굉장히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별 이유 아냐. 누군가는 여길 돌봐야 하는데, 나만큼 여길 잘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계속한 거야. 그게 다야.”

“……그냥 해야 돼서 한 거다?”

“달리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어? 이거 한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교육상 안 좋아서 비밀로 한 건데, 나 참.

자조하듯이 웃으며 중얼거리는 그에게서, 카엘이 우물쭈물하게 대답하던 모습이 겹치는 듯했다.

­­그냥…… 누가 해야 되니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에, 마침 자신에게 능력이 있으니까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그 일이 지독하게 하기 싫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때문에 마음이 꺾여간다 할지라도 피하지 않는다.

……단지 그뿐이다.

그 뒤에 여러 자잘한 이유가 붙어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기저에 있는 건 단순한 의무감인 것이다.

‘……정말 이해가 안 돼.’

답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아니, 납득할 수 없는 두 사람을 향해, 그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둘 다 미쳤어요.”

“뭐? 둘? 하나는 나일 거고, 다른 하나는 누군데? 블루스타?”

“그 사람은 그냥 고지식한 거죠.……그나저나 아저씨는 좋으시겠어요. 집 고칠 수 있어서.”

“무슨 소리야? 집을 왜 고쳐?”

의아해하는 시선에, 그녀는 씁쓸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지금 집에 계속 사신다면서요. 임시이긴 해도 왕이 되시니까, 왕궁에 걸맞도록 여기저기 고칠 거 아니에요.”

집무실이나 알현실 등등, 왕이 자리해야 하는 방들은 물론이고, 왕을 모시는 시종들의 거처나 친위대의 시설도 필요하겠지.

아마 이전 왕이 기거하던 그 왕궁처럼, 골든로드는 이제 나무 위의 집이 아닌 땅에 지은 집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가 살았던 골든로드의 집은 이제 없어지겠지.

그녀가 머물던 방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못내 아쉬워서 어제 집을 한 바퀴 쭉 둘러본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살짝 울적해진 기분에 고개를 숙인 그녀의 귀에, 골든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안 고칠 건데?”

“……네?”

“안 고친다고. 고칠 거면 여기 산다고 안 했지.”

“어…… 그럼 집무실이나 그런 건 어쩌고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마주하며, 골든로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랑 마을 사이에 적당히 마련하기로 했다나봐. 왔다 갔다 해야 되니 좀 많이 귀찮아졌지만, 그래도 그 왕궁에서 살거나 이 집을 고치는 것보단 훨씬 낫지.

……그러니 블루벨,”

사라지지 않는다.

“네 방은 제대로 둘 테니까, 걱정 말고 무사히 다녀오기나 해.”

……이십 년 전,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채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녀를 그대로 받아주었던 이 안식처는, 이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마음속 깊숙이 퍼지는 안도감에 잠기려던 그녀는, 뒤이어 들려온 골든로드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아, 그리고 카엘 녀석도 잘 봐주고.”

“네? 제가요? 보긴 뭘 봐주라는 거에요?”

그녀의 눈에, 카엘이 어떤 보살핌을 받아야 할 것 같진 않았다.

용사라는 것 치곤 굉장히 약하긴 하지만, 그의 옆에 무시무시한 여자가 붙어 있으니 아무 걱정 없을 터.

게다가 그 여자뿐 아니라 살벌한 사제와 건방진 마법사까지 함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녀가 그 얼빵한 인간을 돌봐야 한다는 것인가?

‘미친놈이긴 하지만, 그건 내 영역이 아닌데.’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골든로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왜냐고? 나머지 세 명의 정신상태는 그 녀석에 비해 엄청나게 세거든. 인간 같지 않을 정도로 말야. 그 셋에 비하면, 네 정신력은 엄청나게 약하니까 아마 카엘과 잘 맞을 거야.”

“그거 욕하는 거죠?!”

“넌 다른 사람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거에 공감해줄 수 있어. 그게 그 녀석에게 힘이 될 거야.

……네가 나에게 귀마개를 줬던 것처럼.”

별 것 아닌 작은 공감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그가 조용히 덧붙이자, 그녀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어리숙한 마음으로 그에게 건넨 손길이 도움이 되었었다는 그 말에, 작은 기쁨과 쑥스러움을 함께 느끼면서.

“……그 미친놈을 공감해주긴 싫은데요.”

“맞아, 그 녀석, 괴상하게 뒤틀렸어. 얼마 안 봤는데도 알겠더라. 태어난 동네가 영 맞지 않았겠지. 그래도 좋은 녀석이야. 너도 그걸 아니까 도운 거잖아? 그 험한 꼴을 당하고서도 말야.”

“……”

“뭐, 내가 별 말 안 해도 너라면 알아서 돕겠지. 아무튼 잘 다녀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또 하나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골든로드는 빙긋 웃었다.

“네 예비신랑이 바람 안 피도록 잘 지켜봐줄 테니까 걱정 말고.”

“예, 예예, 예비신랑이라니 그게 뭔……!”

“어? 결혼할 거 아니었어? 저런, 블루스타 녀석, 따먹히고 버림당하는구나…….”

“이 아저씨가 진짜!!”

새빨개진 얼굴로 재차 그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면서도, 그녀는 마음 한편으로 깊이 안심했다.

이 짓궂을 대로 짓궂은 성격 나쁜 아저씨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 자신은 긴 여정 중에 무언가 변할지라도, 골든로드는 지금의 이 모습 그대로일 거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블루스타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그녀를 향한 사랑의 종류가 약간 달라졌다는 것만 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이 숲에서 버티며 살아가게 해준 두 안식처.

170년이 아닌 그보다 훨씬 더 길게 이어질 이 지독한 인연들이 그녀와 함께 해준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괜찮아.’

설사 바깥에서 길을 잃고 헤매더라도 돌아올 수 있다.

반드시 이 숲에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잘 다녀올 테니까, 무사히 계셔주세요.”

부디, 모두 무사하기를.

그렇게 속삭이며 자신을 끌어안는 그녀를, 골든로드는 말없이 웃으며 마주 안아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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