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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45화 (245/475)

〈 245화 〉 236화 : 뜻밖의 미로 (1)

* * *

드래곤의 사원에서 내려와, ‘끝없는 장서관’을 향한 지 어언 사흘이 지난 오늘.

쏴아아아아—

……별안간 쏟아져내리는 비를 피해 가까운 동굴에 들어간 뒤로, 벌써 반나절이 훌쩍 지나 있었다.

돌겠네, 진짜.

“아니 뭔 비가 이렇게 하루종일 내리냐? 출발할 땐 분명 날씨 맑았고, 이 근처 오기 직전까지도 해가 쨍쨍 내리쬈는데!”

분통을 터뜨리는 나를 향해, 두 크고 작은 아가씨가 눈을 깜빡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이름은 메린과 로나.

생긴 건 전혀 다르지만 성격이랑 행동은 똑 닮은, 서로 생판 남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두 아가씨였다.

“산이잖아.”

“그리고 여름이고요.”

“너네 둘이 짰냐? 아무튼,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잖아, 정도가!”

중간에 엘프의 숲으로 간다고 한 번 산맥을 넘어서 그렇지, 이 산맥에 머무른 지 거의 한 달이 되어간다.

산 위에선 날씨가 쉽게 맛탱이가 간다는 사실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어제부로 8월에 접어들었지?

그러니 비가 마구 쏟아지더라도 이상할 거 없긴 해.

한여름이니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어떻게 반나절이나 계속, 그것도 처음부터 장대비로 마구 퍼붓냐고!

처음엔 투둑, 툭, 하고 한두 방울 떨어지다가 쏟아지는 법이잖아!

무슨 물뿌리개를 냅다 부은 것도 아니고, 진짜 어이가 없네!

답답한 심정에, 나는 기세가 수그러들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있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구 퍼붓고 있는 비를 향해 고함쳤다.

“씨바아아아아아!!”

“시끄러, 미친놈아! 귀 울리잖아!”

“악.”

……그리고 곧바로 메린에게 뒤통수를 쳐맞고 말았다.

아니 뭐, 그다지 아프진 않아.

그저 녀석의 장갑이 비에 푹 젖어 있는 탓에, 기분이 좀 나쁠 뿐이지.

축축해진 머리에서 물기를 털어내면서, 나는 녀석을 향해 투덜거렸다.

“하루 공쳐버렸잖아. 성질나는 걸 어떡해. 게다가 이 동굴, 천장은 높아도 폭이 좁아서 답답하단 말야.”

높이는 말 두 마리를 쌓더라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높은데,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으면 통로가 꽉 찰 정도로 좁다.

덕분에 말들과 엘크를 동굴 안쪽에 일렬로 세워두고, 우리는 그 앞쪽에서 모여 앉아 있었다.

그래도 위슨의 정령 덕분에 모닥불을 피울 공간은 확보했기에 망정이지…….

으으, 하마터면 불 없이 밤을 보낼 뻔했어.

끔찍한 상상에 몸을 부르르 떠는 나를 향해, 메린은 뭐가 대수냐는 듯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내일이면 그치겠지. 어차피 그 장서관인가 하는 곳까지 얼마 안 남았다며? 여기까지 길이 좀 험했는데 마침 쉬고 좋지, 뭘 그러냐?”

“하하, 참 쓸데없이 긍정적이야. 진짜 어떻게 하면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거냐? 정말 부럽다, 임마.”

“그냥 네 사고방식이 글러먹은 거다, 임마. 그렇게 소리지르고 싶을 만큼 답답하면 밖에서 하고 오든가.”

자연히 내 시선은 바깥을 향했다.

하얀 빗줄기…… 아니, 비가 아니라 무슨 대바늘이 마구 쏟아지고 있는 저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하, 하하하하하.

절대 안 해.

죽어도 못해……!

“……나가면 옷 젖잖아. 여기서 다 젖으면 바로 감기 걸려서 죽는다고.”

“나 참, 별 걱정을 다한다. 방법이 다 있지! 특별히 도와줄게. 자.”

그렇게 말하며, 메린은 무슨 죄수를 연행하는 것처럼, 한 손으론 내 양 손목을 뒤에서 붙잡고, 다른 손으론 내 뒷덜미를 잡은 채 끌고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바깥으로!

이 자식, 옷 젖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대체 뭘 하려고……?!

아, 설마……!

“아아아, 아냐아냐아냐! 안 답답해! 이제 괜찮아졌어! 괜찮아졌다니까?!”

“그러냐? 그래도 머리 한 번 식히자. 아까 땀도 흘렸을 텐데 마침 잘됐지.”

“땀 흘린 건 아까 여기 오다가 다 씻겼다, 이 자식아!”

그보다 머리 식히자니, 역시 그럴 작정이구나!

굳은 확신이 든 나는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그녀의 신경을 더 건드린 모양이었다.

“영차.”

“꺄악?!”

메린이 뒷덜미를 잡은 팔로 내 가슴을 받치더니, 그대로 번쩍 들어올렸다!

으아아, 떴어, 발이 붕 떴다고!!

“우와, 으아아, 내려줘, 메린, 내려주,”

아아……! 소리가…… 빗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나는 눈앞에 닥친 운명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동굴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게 되었다.

그것도 대각선 위로.

즉, 쏟아지는 비를 향해 얼굴을 쳐든 꼴이 되고 말았다.

쏴아아아아—

“와아아아아! 꺄아아아푸, 어푸푸푸!!”

으아아악! 갑자기 이게 뭔 물고문이야?!

얼굴을 마구 때리며 코와 입으로 쏟아지는 빗물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 다음, 메린은 내 고개가 아래로 향하도록 팔을 내린 뒤, 굉장히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러면 물도 안 먹고 옷 안 젖지? 어때, 괜찮지 않냐? 응? 뭐해, 소리 안 지르고. 속이 아주 뻥 뚫리게 실컷 소리 안 지르냐, 새꺄!!”

“아파아아!! 비가 때리는 게 엄청나게 아프다고, 짜샤아아아!! 으아아아!!”

“그래, 그래. 좋지? 시원하게 머리도 식히고, 맘껏 소리도 지르고 말야. 안 그러냐?!”

“씨바아아아아!! 이거 놔, 이 새끼야아아아!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놔줘어어어어! 끄아아아아!!”

정말 답답했던 건 죄다 잊어버린 채, 실컷 소리를 지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목청이 터지도록.

……그렇게 한 차례 작은 소란이 있은 후, 나는 모닥불 앞에 쭈그리듯이 앉아서 차를 홀짝였다.

아…… 목 존나 아파…….

한동안 말 못할 거 같은데, 이거…….

근데 또 차 마시니까 살짝 목이 낫는 것 같기도 하고.

이따금 켁켁거리는 목을 따끈한 차로 달래는 동안, 메린은 내 머리를 수건으로 슥슥 문질러 물기를 닦아주었다.

그러다 무언가 느낀 건지, 내 얼굴을 살피면서 짧게 물었다.

“춥냐?”

“……”

옷이 살짝 젖긴 했지만, 차도 있으니 그렇게까지 춥진 않다.

그래서 고개를 저었는데도, 그녀는 담요를 가져와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무슨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진짜 어이가 없네.

제길, 살짝 잠이 오는 게 더 열받아.

속으로 툴툴대면서, 내 머리를 닦는 메린의 손길을 느끼며 호로록, 차를 마시고 있는 중,

“너희 진짜 평소대로구나…….”

동굴 안쪽에서 말을 토닥이고 있던 블루벨이,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말을 걸면서 모닥불 앞에 와 앉았다.

“크흠, 케흑…… 그럼 뭐, 특이하게 할 게 있나?”

와, 진짜 목 완전 쉬었네.

저절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입 안에 차를 한 모금 더 부어버렸다.

찻물이 따뜻해서 그런지, 목 안이 부어서 쏙쏙 아리던 느낌이 가라앉아 가는 것 같았다.

위슨 녀석, 차 끓여주는 건 좋은데, 재료를 도통 안 가르쳐준단 말이지…….

그리고 녀석은 차가 가득 든 주전자를 나에게 건네더니, 도로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버렸다.

뭘 그렇게 열심히 캐는 건지 모르겠네.

속으로 고개를 젓는 나를 향해, 블루벨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메린 말야. 메린 너, 여전히 가차없구나. 카엘한테 좀 부드러워진 줄 알았는데.”

“엥? 내가? 왜?”

“너희 둘이 사귀잖아.”

이 녀석에게 그런 자각은 별로 없지만, 나와 메린은 서로 사귀는 사이이다.

연인에게 물고문을 하는 건 이 녀석밖에 없…나……? 없겠지……?

거참 희한하네,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건 상식인데 말이지.

눈앞에 피학성애 변태가 있어서 그런가 확신이 안 들어!

“엉? 사귀면 깝쳐서 빡쳐도그냥 넘어가야 되는 거야?”

“그런 건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하나……. 손이 좀 주춤거리고 그러지 않아?”

블루벨의 말에, 메린은 아무 말없이 내 머리를 닦는 손만 움직였다.

그녀는 지금 내 뒤에 서 있는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 왠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목소리가 짧게 울렸다.

“아니, 전혀.”

“아, 그래.”

“……”

그렇구나. 사랑해서 아껴주고 싶은 거랑, 엿 같아서 조지고 싶은 거는 완전히 별개인 거구나.

그 두 마음이 서로 영향을 주거나 하는 건 전혀 없는 거구나!

오, 세상에, 이렇게 무서울수가……!

완전 평소 그대로인 메린의 모습에,나도 모르게 물잔을 꽉 쥐었다.

제길, 그렇다고 ‘연인끼린 무조건 욕하거나 때리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잘못된 게 있으면 고치라고 갈구는 게 옳으니까.

……그리고 평소 그대로이긴 하지만, 완전히 달라지지 않은 건 또 아니다.

“흠……”

물기를 다 닦았는지, 메린은 수건을 놀리던 손을 멈추더니 이번엔 빗질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엔 내 옆에 앉아서 날 물끄러미 보다가, 별안간 내 양쪽 뺨을 손으로 감쌌다.

“차갑네.”

“………괜찮아.”

“오, 조금씩 따뜻해진다.”

“으…… 그럼 됐잖아. 놔줘…….”

쪽팔리게 다들 보는 앞에서 이러지 말고!

……라고 말하고 싶은데, 목이 아픈 탓에 말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히히.”

“……”

그리고 메린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빙긋 웃으며 내 얼굴을 감싼 채로 손을 이리저리 살살 움직여대었다.

아니 뭔 반죽하는 것도 아니고…….

“어휴, 아주 그냥 대놓고 염장을 지르네.”

“왜요, 보기 좋잖아요. 아, 혹시 블루스타 씨 생각나서 쓸쓸하신가요?”

“아니거든! 쓸쓸하긴 누가……!”

히죽히죽거리는 기색이 만연한 로나에게 블루벨이 발끈하는 와중에도, 메린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내 뺨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 미소 지은 얼굴을 삼 초 이상 쳐다볼 수가 없는 탓에, 나는 계속해서 시선을 왔다 갔다 움직여야 했다.

아으……

얼굴 화끈거려…….

“………언제까지 이럴 거냐? 내 얼굴, 이제 안 차갑잖아.”

목이 부은 것과 창피한 것 때문에 개미만큼 작아진 목소리로 묻자, 그녀가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대답했다.

“음, 얼굴 데워주려고 한 건데, 왠지 계속 이러고 싶다.”

“………나, 차 마셔야 되는데.”

“마셔라. 입 막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하…… 좀 봐주라……….”

“……?”

애걸해봐도, 그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래, 메린은 달라졌다.

물론 말버릇은 여전하고, 조금 전처럼 빡치면 가차없이 날 응징하는 건 평소와 똑같다.

내 자잘한 걸 신경 써주는 거야 원래 그랬던 거고.

다만…… 그 사원을 나왔을 때부터 이따금 뜬금없이 나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아니, 들러붙는다고 해야 하나?

그저께는 산길을 걷다가 바닥에 앉아서 쉬는데, 갑자기 내 앞에 턱 앉더니 나한테 기대왔다.

당황해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고 물었더니,

­­할 말? 없는데?

굉장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거리기만 했다.

뭐……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대로 메린을 껴안은 채 졸아버렸지만.

그리고 어제도 뜬금없이 들러붙었지?

동굴에서 이 녀석의 글공부를 봐줄 때, 받아쓰기 답안 채점하는 내 목을 뒤에서 껴안더니, 얼굴에 막 뺨을 부비적댄 것이다!

그 탓에 깃펜을 부러뜨릴 뻔했을 정도로 당황하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응? 그냥.

무척이나 덤덤한 표정으로 그딴 대답을 해온 것이었다!

후우, 그 상태에서 끝까지 채점 다 하고 오답 고쳐준 나 자신, 칭찬해.

그런 뒤, 나를 심각하게 당황하게 만든 답례로, 녀석이 오답 복습하는 동안 뺨을 마구 주물러주었다.

뭐, 이 녀석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조금 열받을 정도로 지극히 태연했었지?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뺨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

물론 메린이 이러는 게 싫은 건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좋아. 진짜 좋다고.

사랑하는 사람이 애정표현을 해주는 건데, 그걸 누가 싫어하겠어?

하지만…… 이 녀석이 누가 보든 말든 신경을 안 쓰고 들러붙으니까 부끄러워서 죽을 거 같다!

실제로 전부 다 딴 녀석들 있는 데서 그런 거고!

아아, 왜 부끄러움은 항상 나의 몫이란 말인가……!!

“메린 님~ 카엘 님이 엄청 빨개져서 터질 거 같으니까 그만 풀어주세요~”

“엉? 우와, 그러고보니 얼굴도 엄청 뜨거워졌네. 뺨 만졌을 뿐인데 신기하다.”

별 게 다 신기하네!

젠장, 건너편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너무 거슬린다.

특히 어떤 빨간 사제님의 표정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르는 탓에, 세 배나 빠르게 수치심이 상승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메린 녀석은 아직 손을 놓지 않고 있으니, 진짜 미칠 지경이었다.

“얌마…… 빨리 놔 달라고오…….”

“흠…… 전부터 궁금했는데, 너 있잖아, 가까이에서 내 얼굴 못 보는 무슨 기준이라도 있냐? 너랑 나 둘만 있을 때만 잘 본다고 하기엔, 요즘처럼 동굴에서 잘 때는 다른 녀석들 있는데도 얼굴 잘 보고, 나 껴안으면서 잘 자잖아.

근데 또 지금은 도통 내 얼굴을 못 보네. 야, 대체 무슨 기준이냐?”

“………”

……말 못해.

그냥 그때는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부끄러운 걸 덮어버릴 만큼 클 뿐이라고.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네 온기를 느끼고 싶은 거라고 절대 말 못해.

다들 듣는 데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신경은 두툼하지 않다!

그보다 살려줘어…….

진짜 머리 익어버릴 거 같아……!

“얘, 메린, 그 놈 울기 직전인 거 같으니까 그만 놔줘. 아니면 저~기 안쪽에서 천막 치고 할 거 하든가.”

“하긴 뭘 해?! 아, 콜록콜록!”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지른 탓에 잔기침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그녀는 내 얼굴을 놓아주더니, 기침하는 내 등을 살살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내 기침이 멎자, 이번엔 머리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지극히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

……이것도 좀 있으면 익숙해질까?

건너편에서 느껴지는 히죽거림을 무시하려 애쓰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물잔을 기울였다.

잔에선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데, 입 안에 머금은 찻물은 어쩐지 약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근데 진짜 엄청 내리네요. 이대로 계속 장대비가 쏟아지면, 아래쪽은 완전히 잠기겠어요.”

“음…… 잠깐도 잦아들지 않고 계속 쏟아지는 게 좀 이상하긴 해. 혹시 이것도 그 재앙 아냐? 세계멸망의 징조 말야.”

“끔찍, 크흠, 끔찍한 소리하지 마…….”

안 그래도 곡물이 끝장나서 식량 상태가 안 좋아졌는데 비까지 마구 퍼붓는다고?

일 년 지나기 전에 다 죽겠다.

드래곤 전혀 필요 없잖아.

“메린 말대로, 내일이면, 콜록, 그치겠지……”

“그래도 가능성은 있지 않아? 너희도 무슨 징조가 나타나는지는 모른다며.”

어깨를 으쓱이며 묻는 블루벨의 말에, 모닥불을 쬐던 로나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래도 비는 아닐 거에요. 너무 재미없잖아요. 세계가 멸망해간다는 걸 알려주는 게 목적이니까, 좀더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나야죠!”

“재미 어쩌고는 차치하고, 예를 들면?”

“한여름에 눈이 펑펑 쏟아지거나, 갑자기 해가 안 뜬다거나…… 뭐 그런 거요!”

“얌마, 너무 그럴, 콜록, 그럴싸한 소리하지 마. 진짜 일어날 거 같잖아.”

무슨 일이 일어나건 날씨는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드래곤이 깨어나기 전에 진짜 다들 죽는다고!

“근데 위슨은, 크흠, 어디까지 갔길래 아직도 안 와?”

내가 메린에게 물고문 아닌 물고문을 받는 동안, 녀석은 한 번 동굴 안쪽을 둘러보고 왔었다.

거기서 유령버섯을 잔뜩 얻었다며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나에게 차를 타주더니, 녀석은 갑자기 정색하면서 다시 안쪽으로 들어간 뒤로,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보일 리가 없는 캄캄한 동굴 안쪽을 빤히 쳐다보는 내 귀에, 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흠, 제가 가볼까요?”

“음…… 아니, 크흠, 블루벨이 보고 와줘.”

“응? 나? 뭐, 상관없긴 한데, 왜?”

고개를 갸웃하는 블루벨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했다.

“슬슬 저녁 준비해야 되잖아.”

“근데?”

“댁이 있으면 저녁밥이 위험해. 그러니 댁이 찾으러, 악!”

와, 신기해라.

블루벨은 지금 씩씩대면서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이마가 혼자 욱신거리고 있어.

꼭 딱밤이라도 맞은 것 같아!

“으…… 보이질 않으니 막을 수도 없네…….”

후끈대는 이마를 문지르며 투덜거리자, 메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게 안 보이면 넌 진짜 한참 먼 거야. 야, 그래 가지고 나 죽일 수 있겠냐?”

“못할 게 뭐 있냐? 찔릴 각오, 콜록, 각오하고 덤비면 어떻게든 되겠지.”

“어휴, 퍽이나 되겠다. 지금보다 더 빡세게 굴려야지, 안 되겠구만.”

“안 돼, 나 죽어…….”

그렇게 약간 살벌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우리를 향해, 로나가 헤실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누가 보면 두 분 원수지간인 줄 알겠어요! 좀더 달콤한 얘기를 하셔야죠~

‘이렇게 어두침침한 곳에서도 네 미모는 조금도 바래지 않는구나’, 아니면 ‘조금 춥지 않아? 후훗, 내가 따뜻하게 해줄까?’ 같은 거요~”

“시끄러, 임마!”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키득키득 웃는 사제님을 있는 힘껏 노려보고 있는데,

“큰일이야!!”

다급한 외침과 함께, 블루벨이 눈 깜짝할 새에 다시 나타났다.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게, 어쩐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없어! 그 꼬맹이가 없어졌다고!”

“뭐?!”

충격적인 소식에, 바닥에서 튀어 오르듯이 벌떡 일어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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