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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249화 (249/475)

〈 249화 〉 240화 :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2)

* * *

철커덩.

……그대로 다시 문을 닫고 문에서 두 발짝 정도 떨어진 후, 나는 머리를 감싸면서 가능한 조용히 소리쳤다.

“저것들 다 뭐야?!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고?!”

말도 안 돼, 분명히 문 열 때까지만 해도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

특히 가고일!

지금도 문 너머에서 특유의 날갯짓 소리랑 그우우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저만한 숫자를 조용히 불러모은 거야?!

거미는 이해할 수 있어. 원래 움직일 때 소리 안 나잖아.

그러니 모르는 새에 우글우글 모여도 그렇게 이상하진 않지.

하지만 가고일은 말이 안 되잖아!

게다가 어째 내가 문을 여니까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한 거 같고 말이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왜, 뭔데? 이 소리는 또 뭐고?”

메린이 뒤에서 나를 툭툭 건드리며 물었지만,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탓에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나를 대신하듯, 블루벨이 고개를 살짝 기우뚱거리며 말했다.

“나 봤어. 가고일이랑 거미가 쫙 깔려 있던데?”

“엥? 가고일에 거미? 거미는 어쨌든, 날갯짓 소리는 전혀 못 들었는데? 대체 어느 틈에……?”

메린에게도 굉장히 뜻밖인 이야기인 듯했다.

드물게 놀란 목소리로 말한 그녀에 이어, 블루벨이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나도 못 들었어. 그런데 여기에 아무 소리 없이 음식도 차린 놈이잖아. 아마 같은 방법을 썼겠지. 내 귀를 피하다니 제법인데?”

……아, 맞아.

무슨 목적인지 몰라도, 흑막 놈은 이 방에 진수성찬을 한가득 차려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신의 수하들에게 영양분을 잔뜩 먹은 먹이를 던져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근데 왜 하고 많은 몬스터 중에 하필 가고일에 거미……

아냐아냐, 그딴 건 나중에 생각해도 돼.

일단은 저 놈들을 해치울 생각부터 하자.

“뭐 얼마나 있길래 그래? 흠………”

메린은 문고리를 아주아주 살짝 당긴 후, 그 문틈에 얼굴을 바짝 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문을 닫으면서 나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별 거 아니네.”

……잔뜩 올라왔던 긴장이 툭 꺼져버릴 정도로 담백하고 시원한 말투였다.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

“……그래, 뭐, 놈들 자체는 위협적이진 않지. 인정해. 근데 숫자가 좀 많지 않냐? 응? 그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놈들은 지금 문 앞에 몰려 있지만, 그 너머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도 우글거릴 게 분명하다.

게다가 가고일은 날개도 달려 있잖아.

공중에 숨어서 기습할 때를 노리고 있는지도 몰라!

내 말에, 메린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말했다.

“많아서 뭐.”

“……”

음, 숫자만 많은 게 무슨 문제냐는 말투로군.

하긴, 저 녀석은 양치기용 지팡이 들고도 오크 무리들을 휩쓸었었지.

게다가 지금은 그때와 달리, 그녀 혼자 싸우는 것도 아니다.

만에 하나, 메린이 싸우다가 지치게 되더라도 그녀를 뒷받쳐줄 다른 동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걱정할 게 없긴 하다.

……그래도 좀 놀라면 안 되나?

적어도 ‘좀 많긴 하다’고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어째 나만 호들갑 떤 것 같잖아, 젠장할!

속으로 투덜거리며, 나는 메린에게 비키라고 손짓한 뒤 문고리를 잡았다.

“블루벨은 활로 가고일 좀 맡아줘.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잡을게.”

“우리? 너도 나가려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블루벨에게, 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 명이라도 더 껴야 빨리 끝날 거 아냐.”

뭐, 그래봤자 나는 후방이겠지만.

아마 이 문을 열자마자 메린이 가장 먼저 뛰쳐나가면서 마구 베기 시작할 거고, 그 다음에 로나가 중간을 치우겠지.

놈들이 내 쪽으로 오기나 할까 모르겠다.

……나 참, 조금 전까지는 그럭저럭 긴장이 막 올라와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아가씨 덕분에 긴장감은 죄다 박살이 나버리고, 대신 한숨만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여튼 분위기 깨는 데엔 선수라니까.

“진짜 넌 최고야.”

“엉?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의아해하는 빛이 떠올라 있는 두 주홍빛 눈동자.

언제든 나를 봐주는 그 눈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든 썰어버리는 메린 아가씨, 튀어나갈 준비는 됐어?”

“어.”

“좋아. 셋에 연다.”

손목을 탈탈 털고서 검을 뽑는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나, 둘…… 셋!”

아예 문짝을 떼어버릴 기세로 문고리를 홱 당겼다.

콰앙, 문짝이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메린이 튀어나갔고,

“키이이이이!”

“기야아아아!”

그와 동시에 놈들의 새된 단말마가 마구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덤벼라, 잡것들아!! 식후운동으로 놀아주마!!”

크게 호령하는 소리와 함께 번뜩이는 푸른빛 일섬.

두 동강, 세 동강이 난 채로 흩뿌려지는 커다란 거미의 몸뚱이.

깔끔하게 잘려 날아가는 가고일의 두 팔. 점점 수가 줄어가는 놈들을 대신해 자리하는 비명들.

그 속에서 그녀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른 소리에 묻혔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는 웃지 않고 있었다.

……진짜로 무뚝뚝한 얼굴로 칼질하고 있으면 좋겠는데.

“히히, 그럼 저희도 갈까요! 식후운동 팍팍 하자고요!”

“식후운동 좋지~”

역시나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두 아가씨가 각각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내 공중에 떠 있던 가고일들이 차례차례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놈들의 발이 땅을 딛는 순간, 머리 위에 철퇴가 내려꽂히면서 곧바로 곤죽이 되어버렸다.

……사실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탓에 가고일이 떨어지는 것밖에 안 보인다.

하지만 콰직 소리가 나면서 살점이 막 튀고 있으니 아마 그러지 않을까?

허공에 떠오르는 푸른빛 궤적과 육중한 철덩어리를 피해, 몬스터들이 점점 더 안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즉, 내가 있는 이 신비한 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 행태를 멀거니 바라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갈 생각이긴 했는데, 막상 그럴 때가 되니 기분이 무거워지는군.

나는 검을 뽑아 들고 터벅터벅 바깥으로 나가며, 뒤에서 넉살 좋게 하품하고 있는 엘크를 돌아보았다.

“……그럼 벤투스, 말들 좀 부탁할게.”

“그려~”

……진짜 하나같이 긴장감 없는 녀석들이야.

고개를 저으며 문을 쾅 닫아버렸다.

본의 아니게 하게 된 거미와 가고일 사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순조로웠다.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쩌억.

나를 깨물려는 거미의 대가리를 세로로 가르자마자, 그대로 몸을 한 바퀴 돌면서 횡으로 휘둘렀다.

푸슈우우—

“키이이이!”

옆에 있던 거미가, 똑 잘라진 다리에서 녹색 피를 마구 뿜으며 소리를 질러대었다.

소음 공격을 해오는 놈의 대가리를 사선으로 베어버린 후, 내 등에 붙으려 하는 놈의 눈을 발로 차버렸다.

중간중간에 공중에서 떨어진 가고일의 목을 벤 후, 그 몸뚱이를 거미 떼들에게 던져버리는 건 덤이다.

“아오, 진짜 더럽게 많네!”

“그래도 네 쪽은 적은 편 아니야? 네 앞에 있는 둘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데!”

문 위쪽 벽에 서서 활을 쏘던 블루벨이 큰 소리로 딴죽을 걸어왔다.

……나도 안다. 내 앞쪽에 있는 로나와 메린이,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놈들이 얼마나 득시글대고 있는지, 그 두 사람의 모습 대신, 조각나고 으깨진 몬스터들의 사체가 여기저기 날아가는 것만 보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처럼 잠깐잠깐 숨 돌리고 있지만, 그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계속 무기를 휘두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당연히 알고 말고.

그래도 말야……

휙, 휙.

푸슈우—

“그우아아악!”

“많은 건 많은 거잖아!!”

내 머리를 씹으려 입을 쩍 벌린 가고일을 삼등분내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대체 얼마나 몰려왔길래 베어도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냐?

그나마 칼날이 잘 들어서 놈들을 신나게 썰어제끼고 있으니 망정이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한참 전에 힘 빠졌을 거다!

제기랄, 성검이었으면 한 번에 죄다 쓸어버렸을 텐데!

근데 평범한 몬스터라서 성검이 안 나와!

……근데 생각해보니까 웃기네?

이거 왜 악마나 이런 놈들을 상대할 때만 튀어나오는 거야?

용사의 무기이자 증표라며, 그럼 상시로 튀어나와야 맞는 거 아니냐!

아~ 나도 알아, 안다고.

성검이 평소에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면, 어디를 가든 주목받아서 다니기 힘들었겠지.

그뿐 아니라, 아트라토스를 신나게 돕고 있는 악마 새끼들이, 신나게 뒷공작을 펼쳐서 날 괴롭혀댔을 거야. 뻔해.

그래, 십중팔구 그랬을 거야.

그러니 그걸 피하려고 지금의 방식을 취한 거겠지.

아주아주 잘 알고 있고 말고.

……그래도 가끔은 서비스해줘야 되는 거 아냐?! 이러다 존재 자체를 까먹겠다!

‘어~림없는 소리.’

염병.

얼굴이 절로 일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거미의 녹색 피가 튀어서 그런 거지, 마음속에서 실실 웃으며 약올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튼 아니야.

……그보다 이 마음속 목소리 말야, 내 무의식이 속삭이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막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는데 말이지?

그게 아니라면…… 뭘까?

“알게 뭐야, 빌어처먹을!”

손톱을 뻗어오는 가고일의 손목을 자르고 모가지를 날려버리며 소리쳤다.

바빠 죽겠구만 지금 그딴 게 다 무슨 상관이야?!

방금 들린 것 같은 속삭임도 수상해 죽겠구만!

“슬슬 정신 놓아가니? 가고일 전부 쏜 다음에 도와줄 테니까 버텨봐!”

“으아아아! 그만 좀 나와아아!”

슥삭, 깔끔하게 잘린 거미의 가운데 몸뚱이를 뻥 차서 날려버리며 크게 외쳤다.

해가 떠오르면 반드시 저물듯이, 터져 나온 소리는 허공에 흩어져 사그러든다.

빛이 있으면 그 반대편에 어둠도 있다는 것과는 살짝 다르다.

이건 보다 더 단순한 이야기……

책의 첫 장을 넘겨서 펼치게 되면, 언젠가 반드시 마지막 장을 넘기며 덮게 된다는 이야기.

환히 피어난 꽃은 언젠가 반드시 시들며, 들판 위를 달리는 말이 언젠가 반드시 멈추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즉,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도 있다는 것이다.

시작이 있기에 끝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끝을 위해 시작을 만든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아마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만 알겠지.

아무튼 두 다리를 딛고 서 있던 내가 지금 벌러덩 누워 있는 것도, 그 이치에 따른 결과이다.

땅 위에 선 모든 생명은 언젠가 반드시 땅에 누워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누워 자도록 만들어져 있는 건, 그 ‘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연습하는 거지.

내가 통로에 남은 마지막 가고일을 두 동강 낸 반동으로 두 발짝쯤 움직이다가, 널부러져 있던 거미 사체에 발이 걸려서 중심을 잃고 바닥을 구른 건 순전히 그 이치 때문이다.

결코 내가 얼빠졌거나 허당이라서 그런 게 아닌 것이다!

“헤엑, 헤엑……”

어쨌든 드러누워 있는데, 기운이 없어서 못 일어나겠어.

아까 먹은 것들이 전부 소화되다 못해 아예 몸 밖으로 다 나가버린 기분이야.

그래서 그저 시커멀 뿐인 천장을 쳐다보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차박차박, 물기 어린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굳이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올 사람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야, 왜 그런 데에 누워 있냐?”

역시나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초록과 붉은 피로 얼룩진 메린의 얼굴이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진이 빠져서 완전히 흐느적거리는 나와 달리, 그녀는 얼굴에 약간 땀이 맺혔을 뿐, 숨 하나 차 있지 않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 많은 숫자를 상대하면서 조금도 지치지 않은 건가?

로나도 블루벨도, 정도는 다를지언정 숨은 가빠져 있었는데.

하……, 진짜 대단한 녀석이야.

그녀가 무지막지하게 강한 건 대재앙의 그릇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지만, 그래도 대단하다는 거엔 변함이 없다.

역시 메린이야.

언제나 항상 그랬듯이, 정말 굉장한 녀석이다.

“그만 드러눕고 얼른 일어나. 그러다 귀에 핏물 들어가겠다.”

무던히 말하며 그녀가 손을 뻗어왔다.

주홍빛의 두 눈동자에는, 아주 희미하긴 해도 나를 걱정하는 빛이 서려 있다.

……지친 탓에 감상적이게 된 걸까?

자주 본 구도인데 왠지 그리운 느낌이 든다.

게다가 녀석이 손에 든 야광석등의 불빛 때문인지, 바닥에 누워서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눈부시다.

거미와 가고일이 흘린 녹색과 붉은 피에 범벅이 된 얼굴.

몬스터의 피가 가득 튄 얼굴.

그 얼굴을 바라보는 내 머릿속에, 한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

……아, 그렇구나.

그때와 비슷한 얼굴이다.

달빛 속에 잠긴 숲에서 내가 올려다보았던 얼굴.

몬스터의 피로 얼룩진 채 싸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그 얼굴과 비슷하다.

십여 년 전에 비하면 조금 커지고 눈빛도 따뜻해졌지만, 그 눈동자를 보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여전히 똑같았다.

“뭐해? 안 잡고.”

“……”

재촉하는 그녀의 말에도 멍하니 있자,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내 손을 억지로 잡고 일으켜주었다.

“뭘 그리 넋 놓고 있냐? 머리 박았어?”

“아니……”

손을 놓지 않은 채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그녀를 마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되게, 예뻐 보여서.”

나 따위는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네가 무척이나 눈부셔서,

그리고 네 눈동자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니, 지금이 훨씬 아름답구나.

너에 대한 내 감정도, 그때에 비하면 한참 깊어졌고.

……그래, 여러모로 달라졌구나.

“이 꼴인데 예쁘긴 무슨.”

그리고 내 말에 살짝 샐쭉해진 표정으로 투덜거릴 만큼, 너 역시 많이 달라졌지.

“물론 씻으면 더 예쁘겠지. 근데 지금도 예뻐. 얼굴에 피 튀긴 상태만 아니었다면 키스했을 거야.

……하하, 역시 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야.”

“아…… 응…….”

멍하니 나를 보다가, 그녀는 돌연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왜 그래?”

“어……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살짝 붉어진 얼굴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미간을 약간 좁히면서,

“심장이 약간 조이는 것 같은 느낌이…… 음, 약간 빨리 뛰네. 뭐지? 이상해.”

난처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그리고 그 입술이 자아낸 말이, 내 가슴 속에 불을 당기며 활기를 불러 일으켰다.

……다른 녀석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한대로, 나나 그녀의 얼굴이 몬스터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분명 키스만으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안도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며, 나는 다른 두 사람이 말들을 끌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이상한 거 아냐, 바보야. 예쁘다는 말 듣고 좋아서 그런 거지.”

“좋아서 그런다고? 웃음이 안 나오는데?”

“네가 덜 들어서 그래. 기회 될 때마다 말해줄게. 그렇게 듣다 보면, 자연히 웃음이 나오게 될 거야.”

“그런 거냐?”

“어. 그런 거야.”

내 말을 듣고서도 고개를 갸웃하는 메린에게, 로나가 굉장히 유쾌한 듯이 방실방실 웃으면서 고삐를 넘겨주었다.

그런 뒤 나를 향해 히죽거리는 로나의 눈길을 애써 무시하면서, 나는 어딘지 심드렁해보이는 엘크의 등에 올라탔다.

“……아으, 축축해서 참말로 느낌 거시기하구마잉. 형씨, 옷 갈아입고 타면 안 되는겨?”

위아래 옷 모두 거미와 가고일의 피로 푹 젖은 데다, 나는 그 피웅덩이 위에 구르기까지 했다.

그 상태에서 엘크의 등에 탄 거니, 이 녀석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니겠지.

약간 미안했지만,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 상태에서 옷 갈아입으면 두 벌 버리는 거잖아. 위슨 찾을 때까지 참아.”

“옘병.”

툭 내뱉은 후, 엘크는 내 신호에 맞춰 다시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확연히 더 빨라진 걸음으로.

그렇게 위슨의 표식을 따라 길을 간 지 약 사십 분 뒤, 우리는 또 다른 문 앞에 다다랐다.

이번에도 둥그런 문고리가 달려 있는, 성벽에나 달려 있을 법한 커다란 나무 문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블루벨은 문 저편에서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고, 로나는 빙긋 웃으면서 아무 위험도 없다고 확인해주었다.

음…… 설마 또 소리를 죽인 채로 뭐가 숨어 있는 건 아니겠지?

얼굴을 찌푸리며 문고리를 잡으려는 찰나, 엘크가 뿔로 내 등을 쿡쿡 찌르더니 문가를 가리켰다.

“요기 뭐 적혀 있는디?”

“엥?”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어리둥절한 눈으로 엘크를 보자, 그가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말을 이었다.

“위슨 갸가 쓴 건디…… 흐음…… 목욕탕. 빨래도 가능.”

“……허?”

뜬금없이 뭔 소리야?

나는 엘크가 바라보는 지점에 손으로 그늘을 만든 뒤, 어둠 속에서 은은히 떠오른 글자를 읽었다.

“……진짜네?”

내가 듣기에도 완전히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푸른빛을 품은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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