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화 〉 276화 : 갈매기 절벽 (1)
* * *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어째 피난민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그 행렬을 피하려고 길에서 약간 떨어져서 가고 있었는데, 어느 지점부터는 우리도 말에서 내려서 행렬에 끼어야 했다.
왜냐하면, 쭉 평원과 숲 사이에 나 있던 길이 난데없이 협곡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달리 돌아갈 길도 없는……!
“젠장, 완전 천연의 요새구만. 거참 든든하기도 하지.”
그렇게 툴툴대자, 위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절벽에서,”
“싫어.”
칼같이 잘라버렸다.
절벽 얘기가 나온 걸 보니 뻔해.
엘크의 힘을 빌려서 뛰어내리자고 하려던 거겠지.
눈에 띄는 거 이전에 심장 쫄려서 죽는다.
“근데 카엘 님.”
“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지금 우리가 들어선 협곡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는 탓에, 말이 날뛰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으면서 조심조심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왜 말에 타서 가야 되는 거죠……?”
로나의 눈을 보면서 저 질문에 답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으, 얼굴을 안 보이는데도 사실대로 말 못 하겠어.
아무리 솔직함이 미덕이라지만, ‘네 키가 너무 작아서 밟힐 거 같으니까’라고 어떻게 말해?
좋은 말로 포장해봤자 소용없을 거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전투사제인 로나에겐 거짓말은 통하지 않으니까.
괜히 화만 더 돋울 거야.
그렇다면……
“내 대답은 네 마음속에 있단다.”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제가 땅꼬마라서 밟힐까봐 여기 태웠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카엘 님의 답이 되나요?”
“그렇지.”
완전 정답이야.
하하, 역시 다 알고 물어봤구나. 이 녀석, 하하하.
그럼 이제 ‘도착하고 보자’면서 벼르겠지?
“흐음…… 그럼 ‘교단 사제들이 저를 알아볼 수 있도록 일부러 눈에 띄라고 한 것’이라고 생각할래요.”
“그래, 그럼.”
……와, 봐줬나봐.
보답으로 마을에서 뭔가 사줘야겠군.
조용히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시 앞에 집중하려는 찰나,
“……카엘.”
이번엔 블루벨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지금 그녀는 로나가 탄 말의 고삐를 잡고 있으니, 본래라면 이렇게 작은 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데……?
“저 앞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무슨 소리?”
괜히 나까지 속삭이듯이 말하게 되었다.
뭐, 블루벨은 엘프이니 이 정도의 목소리도 잘 들리겠지.
“싸우는 소리.”
“허?”
“고함이랑 뭔가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
싸운다고?
이 좁은 골짜기에서?
대체 어떤 미친놈이……
“……! 카엘 님, 벽 쪽으로……!”
“어? 뭐? 왜?”
“빨리요! 다른 분들도 얼른요!”
다급히 재촉하는 로나의 기세에 밀려, 이유도 모른 채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마침 살짝 패인 곳이 있었고, 로나는 말들을 포함해 우리 모두를 그 벽에 모이게 한 다음, 안장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지존자시여, 보호하소서!”
그런 뒤, 힘찬 목소리로 기도를 올리며 자신의 발치에 철퇴를 쿵 내려찍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가운데, 은은한 빛의 막이 나타나 우리 모두를 감쌌다.
갑자기 웬 보호막……?
“왜 그러는데?”
“앞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요. 자세한 건 모르지만요.”
“뭐 어땠길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어요. 뭔가 있는 게 분명해요!”
뭐가 몰려오기라도 한다는 건가?
그럼 이렇게 피해 있을 게 아니라 조사해야 되지 않나?
블루벨을 구슬려서라도 말야.
그렇게 말을 꺼내려는 찰나, 갑자기 블루벨이 얼굴을 찌푸리며 크게 소리쳤다.
“으, 비명 소리야!”
“비명……?”
싸우는 소리가 비명이 됐다고……?
………설마 습격인가?!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순간,
“꺄아아아아!!”
“사, 사람……! 사람 살려어어어!”
“비켜비켜비켜, 비켜어어!! 으아, 으아아악!”
비명이 협곡을 가득 채우면서, 사람들이 사색이 되어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역시 습격이었어!
반사적으로 몸이 앞으로 움직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억센 힘이 내 팔을 꽉 붙잡아 세웠다.
고개를 돌리자, 메린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깔린다.”
“알아!”
사람들이 새파랗게 질린 채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다.
자신의 바로 뒤에 누가 있었건 개의치 않고, 마구 밀치면서 달리고 있다.
옆길로 샐 수 없는 좁은 골짜기에 북적이고 있었으니,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장일 터.
그러니 로나가 우리를 한쪽 벽으로 몬 거겠지.
눈앞에 난리가 났는데, 그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들리고 있어.
바위벽에 가려진 곳에서 계속 들리고 있다고!
공포에 질린 고함소리,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가 피를 토하며 죽는 소리……!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가만히 있어?! 나, 난 못해, 메린. 그렇게는 못해!”
“나도 네가 개죽음 당하는 꼴은 못 보는데.”
“메린, 제발……!”
“안 돼.”
“으, 적어도, 앞에 무슨 일이 일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만이라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말을 맺으려 했는데,
쿠구구구궁—!!
엄청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이 피어났다.
로나가 펼친 보호막에 돌 파편들이 마구 튕겨 나가는 것과 더불어, 흙먼지 뒤에 거대한 그림자가 떠올라 있는 게 보였다.
따닥.
가벼운 발굽 소리가 나더니, 일대에 바람이 불면서 흙먼지를 모두 날려버렸다.
아마 엘크가 힘을 쓴 거겠지.
덕분에 훤히 개인 시야 한가득,
“키르르르르……!!”
“?!”
거대한 벌레의 모습이 들어왔다.
단단한 껍데기가 비늘처럼 달린 거대한 벌레.
대가리에는 더듬이가, 몸뚱이엔 수많은 다리가 달려 있는, 어디를 어떻게 뜯어봐도 벌레였다!
어우씨, 다리 꼬물거리는 거봐!!
놈의 모습을 보자마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 뭐야, 저거……?!”
“동굴벌레 아냐?”
“동굴벌레는 껍데기도 다리도 안 달려 있잖아!”
동굴벌레는 커다란 주둥이에 톱날 같은 이빨이 달려있어서 그렇지, 그냥 커다란 애벌레나 다름없다.
몸뚱이 자체도 연약해서 쉽게 내쫓을 수 있지.
하지만 저 놈은 다르다.
햇빛에 반짝이고 있는 저 맨들맨들한 껍데기, 엄청나게 단단해보이잖아!
칼날도 안 들어갈 거 같은데!
“키르르르르!!”
벌레가 우리를 향해 크게 울더니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았다.
설마, 방금 들린 굉음이랑 흙먼지는……!
아니나다를까, 놈이 그대로 우리를 향해 굴러왔다!
“우와, 온다!”
“문제없어요!”
로나는 힘차게 외치면서 몸을 약간 숙였다.
철퇴를 잡은 손에 힘을 주려는 거겠지.
그 기계장치의 포탄도 버텼으니 아마 괜찮을 거다.
머리는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는데,
쿠구구구궁—!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조금 심각하게 압박적이란 말이지?!
놈에게 깔리면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그대로 끝장날 게 뻔해!
로나가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실패하면 다같이 곤죽이 된다.
도망치기에도 이미 늦었어.
로나가 가진 사제의 힘을 믿을 수밖에……!
“으으……!”
벌레가 해를 가린 순간,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메린의 팔을 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투우웅!
“……!”
굉음이 뚝 끊겼다.
아직 머리가 돌아가는 걸 보면 의식이 끊긴 건 절대 아니야.
메린의 팔을 붙잡은 손의 감촉도 그대로 느껴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이 커다란 종이 울린 듯한 맑은 진동소리……!
틀림없어, 튕겨낸 거야!
곧바로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둥글게 말린 벌레의 몸이 공중에 붕 떠 있다.
등보단 상대적으로 연약할 터인 배를 훤히 드러낸 채로……!
“지금이다!”
크게 소리치면서 메린의 팔을 놓고 검을 뽑았다.
그러나 내가 무언가 하기도 전에, 거대한 벌레의 몸이 반으로 똑 갈라졌다.
그리고 그 중앙에, 검을 휘두른 메린의 뒷모습이 보였다.
뭐 저리 빨라?!
쿵!
녀석의 가공할 만한 속도에 새삼 경악하는 동안, 벌레 몸뚱이 두 조각이 노란 체액을 흩뿌리면서 바닥을 굴렀다.
한 조각은 완전히 뒤집어진 채로 다리를 마구 움직이고 있고, 나머지 한 조각은 벽에 처박힌 채 다리를 꼬물거리고 있다.
어느 쪽이든 수십 개의 다리가 마구 움직이고 있다!
으아악, 소름 끼쳐!
“벌레는 벌레이네. 끝장낼게요.”
위슨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벌레 반쪽들에게 다가가 병을 휙휙 던졌다.
쨍그랑 소리가 두 번 들린 후, 하나는 활활 불에 타고, 다른 하나는 몸뚱이가 완전히 녹기 시작했다.
살이 타고 녹는 냄새에 저절로 표정이 구겨졌다.
아무튼 이걸로 일단락된 것 같군.
나는 황급히 메린에게 다가갔다.
얼굴에 벌레의 체액이 묻었는지, 위슨의 거북이에게 물을 받아서 얼굴을 씻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
“엉. 그냥 체액인가봐.”
“그래…… 다행이다.”
독벌레는 아닌가보군. 정말 다행이야.
세간에는 슬라임처럼, 닿는 것을 녹여버릴 정도로 강한 독을 품은 벌레도 있다고 하니까.
나는 크게 안도하면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메린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고생했어.”
“새삼스럽네.”
그녀는 툭 내뱉듯이 대꾸하며 기지개를 켰다.
……정말이지, 이 녀석이 없었으면 여행 제대로 못 다녔을 거야.
그 생각과 함께, 문득 땅바닥에 눈이 갔다.
방금까지는 없던 붉은 자국이 여기저기 생겨나 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는 뻔했다.
“……”
로나가 없었다면 우리도 이렇게 됐겠지.
나는 붉게 물든 땅을 바라보며 잠시 묵념했다.
……이제 다시 출발해야지.
말들을 향해 다가가자, 블루벨이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뭐가 또 들리나?
아니나다를까, 블루벨은 내가 가까이 가자마자 입을 열었다.
“이상해.”
농담하는 기색 하나 없는 진지한 얼굴과 목소리.
……어이씨, 왠지 또 불안해지는데.
“또 왜?”
“저거 공벌레 비슷한 건데, 한 마리만 튀어나올 리가 없거든.”
“……”
순식간에 불안감이 가득 차올랐다!
으으, 누가 저런 얘기를 하면 꼭 나타나기 마련인데!
쿠아앙—!
“?!”
아니나다를까, 또 다시 굉음이 울리면서 돌 파편이 내 머리를 툭 때리고 지나갔다.
재빨리 뒤를 돌아보니, 몸을 둥글게 만 벌레가 땅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메린의 뒤쪽에서.
저 놈, 은근히 속도 빠르던데……!
“메린! 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아니, 아예 몸을 돌리고 놈과 마주서고 있었다.
당장 달아나도 모자랄 판에,오른손에 검을 쥔 채로.
……저 녀석, 맞설 셈인가?!
너무 위험해, 수틀리면 그대로 피반죽이라고!
그러나 그녀를 억지로 끌고 오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쿠구구구—!
피하라고 소리치기에는 벌레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빨랐다.
놈은 바닥에 닿자마자, 일말의 틈도 없이 곧바로 메린을 향해 구르며 질주했다.
늦었어.
단단히 굳은 확신이 마음을 울렸다.
동그랗게 말린 벌레의 몸이, 전차처럼 맹렬하게 돌진하여 메린을 덮쳤다.
“……!”
……쥐 죽은 듯이 고요한 협곡.
자욱하게 퍼진 흙먼지 속에, 그림자 하나가 떠올라 있다.
크기가 잘 가늠이 되지 않아, 누구의 그림자인지 알 수 없다.
이내 골짜기를 쓸어내듯이 세찬 바람이 불면서 흙먼지를 모두 걷어갔다.
맑아진 시야에 비치는 건, 은은하게 빛나는 검을 쳐든 검사의 모습.
맹렬히 돌진해오는 거대한 벌레를 세로로 쪼개버린, 메린의 모습이었다.
“휴우.”
짧게 숨을 내쉬면서, 그녀는 검을 거두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위슨이 그 뒤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다.
나도 아마 저 표정을 짓고 있겠지.
“또 튀어나오기 전에 출발하자. 얼른 이 골짜기를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
“어? 어, 응…….”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말하면서, 그녀가 내 앞에 서 있다.
이번에는 어느 곳에도 노란 체액이 묻어 있지 않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구르고 있던 걸 양단했으니, 그 단면에서 체액이 튀기 전에 그녀를 지나쳐 갔겠지.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게 조금이라도 빠르거나 늦었다면, 그녀는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때를 못 맞출 리는 없다.
알고 있어.
벌레의 껍데기가 아무리 단단하다 한들, 그녀에겐 종잇장이나 다름없다.
그녀의 검은 유니콘의 뿔이 들어간 덕분에 절삭력도 굉장히 높으니까.
잘 알고 있다고.
그러니 승산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메린이 피하지 않고 맞섰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승기가 있다는 이야기이나 다름없지.
알아, 안다고.
알지만……
누구보다도 그녀가 무사할 거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겁을 먹고 말았다.
벌레가 메린을 덮친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억누를 수 없는 안도감에 치닫아, 그녀를 깊이 껴안는 두 팔을 멈출 수 없었다.
“엥? 갑자기 뭐냐?”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허? 뭔 당연한 소리를……… 어어……, 응, 괜찮아.”
“진짜, 진짜 다행이야…….”
알고 있다.
내가 쓸데없이 겁이 많다는 것쯤 나도 알아.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내 목숨보다도 소중한 사람인데.
자칫 잘못하면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는데, 어떻게 겁을 안 먹고 배기냐고.
“카엘, 이제 됐으니까 가자. 또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니까?”
그녀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중얼거렸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놓아주자, 그녀의 두 주홍빛 눈동자가 나를 향해 빙그레 웃고 있었다.
“하여튼 쫄보야, 쫄보.”
“……”
미소를 띤 채 톡 쏘아붙이면서, 그녀는 내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그 모습에 쓴웃음을 돌려주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을 무렵,
“이야, 이게 이렇게 잘리기도 하는구나.”
어딘지 감탄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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