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화 〉 281화 : 폭풍전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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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으로 들어서자, 제단을 정돈하고 있던 사제가 우리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로나 사제님, 방금 전에 동료분께서 전언을 남기셨어요. 블루벨이라고 하시던데, 아시는 분 맞으신가요?”
“네. 무슨 전언인가요?”
“묵을 데가 정해졌다고 합니다. 라는 여관이에요. 오후 1시쯤에 외출할 거라고도 전해달라 하셨어요.”
사제가 말을 마치는 순간, 묵직한 종소리가 예배당 안까지 대앵, 대앵 울렸다.
이제 막 정오, 즉 오후 열 두 시가 된 모양이었다.
위병소를 나왔을 때 열 시 조금 넘었던 거 같은데, 그럼 여관 찾는 데만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린 건가?
우와, 지금 이 마을에 사람이 엄청 몰려 있긴 하구만.
종소리가 멎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 사제에게 여관 위치를 물어본 후 바깥으로 나왔다.
커다란 문 바깥으로 나온 순간, 맑고 밝은 여름햇살이 사정없이 눈을 때렸다!
“앍!”
으악, 눈 부셔! 이거 진짜 장난 아닌데?!
생각도 못한 시야 공격에, 나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비벼야 했다.
“어이씨, 햇살 더럽게 세네! 산 아래라 그런가? 어째 더 밝은 거 같아!”
“바닷가라 그런 게 아닐까요? 게다가 남쪽이고요.”
“그런가…….”
그러고보니 왠지 날씨도 더 더운 거 같다.
들어갈 땐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정오가 되니까 온도가 확 올랐나보군.
한숨을 쉬면서 마구간으로 간 다음, 슥 둘러보았다.
심드렁한 얼굴로 건초를 씹는 말들 중에 내 말은 보이지 않는다.
메린이 같이 끌고 갔나보네.
“말 찾으세요? 동료분…… 갈색머리 아가씨가 데려갔어요.”
“역시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음, 본의 아니게 완전한 빈털터리가 되었군.
사기나 소매치기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애초에 당할 일도 없지만.
마구간을 나와, 나는 로나와 함께 로 향하기 시작했다.
신전 앞의 광장을 지나, 중앙대로보다는 좁지만 그럭저럭 큰 편인 길을 따라 쭉 걸었다.
어디를 가든 사람으로 북적대고 있는데, 행색이 그리 좋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 중엔 길가에 앉아 지나다니는 행인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도 있다.
퀭한 눈에 홀쭉한 뺨, 그리고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가락.
주머니가 텅 비어 있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그의 손바닥에 동전을 떨어뜨렸겠지.
괜히 눈이 마주치기 전에, 나는 곧바로 시선을 돌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카엘 님, 저기 보세요.”
“응?”
로나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바닷가에서 떨어진 곳에 성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아마 영주 일가가 사는 곳이겠지.
비록 평평한 곳에 지은 거라 해도, 영주의 거처인 만큼 꼭대기가 신전 종탑보다도 높다.
큰 발코니가 하나 보이긴 한데, 대충 4, 5층 높이 정도 되려나?
어째 높이가 애매하네.
“……”
……영주가 인어들을 보다가 잡혀갔다고 했던가?
그것도 바닷물로.
화살로도 닿기 힘든 거리에서, 바닷물을 보내어 사람을 납치했다…….
왜 굳이 그런 짓을 했던 걸까?
“힘을 과시하고 싶었나?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고, 높은 곳에 있던지 간에 죄다 처치할 수 있다고 말야.”
“영주님 잡아간 거요? 네, 아마 그럴 거에요. ‘싸워봤자 소용없다’고 기선 제압을 하려던 거겠죠.”
“그럼 거하게 실패한 거 같다. 아직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걸 보면.”
광장도 그렇지만, 마을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계속 오가고 있다.
피난민이야, 뭐, 미리 소식을 알 수가 없으니 계속 몰려드는 것도 당연하지.
하지만 원래 여기 살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거 아냐.
인어들이 나타나서 복수전을 선포하고, 자신들의 적의가 진짜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영주를 잡아갔다는 걸 말야.
그럼에도 여전히 마을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
표정은 약간 어두울지언정, 늘 하던 대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혹시 피난민들을 보고 체념해버린 걸까?
살던 곳을 버리고 떠나봤자 좋을 거 없다고, 말 그대로 목숨만 겨우 연명하게 된다고 포기해버린 것인지도 몰라.
그리고 그 추측은, 메린과 다른 두 사람이 방을 구했다는 여관인 에서 확신으로 굳어졌다.
아직 한창 일할 시간인데, 여관의 테이블은 하나같이 술잔이 쌓여 있다.
아침 댓바람부터 마시기 시작했는지, 얼굴이 완전히 빨개진 채 졸고 있는 사람도 있다.
활발한 이야기소리, 쾌활한 웃음소리, 퉁투둥 하고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
술잔과 그릇을 나르며 웃음을 흘리고 있는 종업원,
카운터 자리에서 다른 손님들과 낚시 얘기를 하고 있는 여관주인.
서로 농담 따먹기를 하거나, 주사위를 굴리거나, 팔씨름을 하고 있는 손님들.
……내일 여기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머릿속에서 희미해질 정도로, 여관 안은 뜨거운 활기로 가득 차 있다.
“의외로 다들 신경 안 쓰나보네요.”
“반대야. 그러니 이 시간부터 이러고 있지.”
어찌할 수 없으니 그냥 술이나 먹자.
어차피 바다에 빠지게 될 거, 그냥 맥주거품에 먼저 빠져버리자.
그렇게 열심히 자포자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지금이 정오가 아니라 자정이었다면, 아마 이 왁자지껄함에 담긴 허망함을 알아채지 못했을 거야.
그나저나 메린은…… 아, 저기 있군.
그나마 덜 북적이는 안쪽, 거의 구석이나 다름없는 곳에 더듬이처럼 솟은 두 머리카락이 보였다.
로나의 손을 붙잡고, 북적이는 사람들을 비집고 헤치며 그쪽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다가가서 말을 채 걸기도 전에, 메린이 포크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뒤로 꺾어서 나를 보았다.
……내 발소리라도 알아듣나?
나를 향해 반짝이는 주홍빛 눈동자에 미소를 돌려주며, 녀석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런 뒤, 빈 자리에 앉아서 테이블 위를 슥 살펴보았다.
이제 막 먹기 시작한 건지, 하나를 제외하곤 요리들이 아직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은 채 하얀 김을 내뿜고 있다.
길쭉하고 두툼한 생선을 토막 내어 구운 요리, 등이 푸른 생선을 통째로 구운 요리, 길쭉하고 작은 생선을 말린 것, 거무튀튀한 종이 같은 거에 생선살을 싼 요리…….
그 외에도 여러 요리들이 테이블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야, 누가 보면 이틀은 쫄쫄 굶은 줄 알겠네.
그래도 음료 잔을 놓을 공간은 남겨놨구만.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점심 참 거하게 먹는다.”
“먹고 싶은 거 먹으라며.”
“먹을 수 있는 만큼만 주문해야지.”
“그렇게 한 건데?”
“아, 그래.”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거 진짜 다 먹을 수 있을까…….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지나가는 종업원을 불러 맥주를 주문한 다음, 허브가 올려져 있는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접시에 옮겨 담았다.
은근히 크네.
가시가 없는 건가?
포크로 찍어서 한 입 뜯었다.
으음…… 가시가 있긴 한데, 다른 생선들에 비해선 물렁한 편이라 굳이 뱉을 필요는 없는 듯했다.
근데 식감이 생선 같지가 않네. 꼭 육고기 씹는 기분이야.
소금으로 간을 했는지, 짭짤한 맛이 혀를 건드려서 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마침 종업원이 가져다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 입 안에 감돌던 기름지고 짭짤한 맛을 모두 목 너머로 삼켜버렸다.
그간 먹던 물고기와는 전혀 다른 식감에, 나는 약간 놀란 눈을 깜빡이며 메린에게 물었다.
“이거 무슨 생선이야? 되게 맛이 특이하네.”
“글쎄? 쭉 읊을 테니까 알아서 생각해봐. 장어구이, 고등어구이, 훈제 청어 김말이, 말린 정어리, 대구 튀김, 도미 찜, 가자미 스튜, 참치 감자 케이크, 고래 스테이크.”
……무슨 주문 외우나.
근데 구이 요리가 둘이라서, 이게 장어인지 고등어인지 모르겠어!
뭐 아무려면 어때, 맛있으면 됐지.
남은 생선 토막을 한꺼번에 입에 넣어버렸다.
그나저나 바닷가 마을이라고 진짜 생선 요리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것도 처음 들어보는 생선 이름이 대부분이야.
메린 녀석, 그게 신기해서 그냥 메뉴 전체를 다 시킨 게 분명하다.
그보다 스테이크가 있길래 쇠고기나 양고기인 줄 알았는데 고래고기였구나.
약간 검붉은 게 꼭 사슴고기 같다. 맛있나?
먹어볼까 했지만, 블루벨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먹고 있는 걸 보고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메린이나 다른 녀석이 먹는 거 보고 그때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대신, 이번에는 아까부터 신경이 쓰이던, 거무튀튀한 종이 요리를 하나 덜어서 이리저리 살피며 말을 꺼냈다.
“그러고보니 여관 잡는 데에 시간 꽤 걸렸나보네. 아직 장 못 봤지?”
“아니, 방은 금방 빌렸어. 시장도 좀 돌았고. 그러다가 시간이 됐길래 점심 먹기로 한 거다.”
“그래? 사람 많길래 방 구하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뜻밖의 대답을 들은 내 눈이 약간 커졌다.
그런 나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위슨이 파랑새의 입을 빌려 말했다.
“생각보다 얼마 안 걸렸지. 그래도 사람 더럽게 많긴 해. 여관은 여기 말고 다른 한 곳이 더 있는데, 거긴 꽉 찼더라. 여기보다 방값이 싸다던데, 그래서 그런가봐.”
“여긴 얼마인데?”
“은화 다섯 닢에 둘.”
우와, 엄청 싸!
말리스나 그 근방 마을에서 묵었을 때를 생각하면, 방에 무슨 이상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저렴하다!
물론 냉정하게 따지면 여전히 비싼 건데, 이미 정신나간 물가를 겪어본 탓에 별로 비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근데 방 두 개만 빌린 거야? 남는다며.”
“방 크기를 보니, 위슨이랑 사제님, 귀쟁이 셋이서도 잘 수 있을 거 같더라. 만약 침대가 좁으면 귀쟁이를 바닥에 재우려고.”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사내자식이 되어 가지고, 지금 숙녀를 바닥에 재우겠다고 하는 거니? 내가 사양해도 억지로 침대를 내어줘야 할 판에, 참 뻔뻔하기도 하지.”
기가 막히다는 듯한 블루벨의 말에, 위슨이 곧바로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미쳤냐? 위슨이 왜 너한테 침대 양보해줘야 되는데?”
“너 나한테 한 짓이 있잖아! 이상한 약 먹여서 그런 꼴을 보이게 만들었으면서, 시치미 뚝 떼고 악몽 안 꾸는 약이라며 사후처방한 거 잊었어?!
하, 나 참, 진짜 기가 막혀서……. 난 또 보기보다 착한 애구나 싶었는데, 완전 병 주고 약 주고였다니!”
둘 사이에 그런 일도 있었구나.
아마 엘프의 숲에서 함께 활동하기로 했을 때나, 블루벨이 정식으로 일행에 합류한 뒤에 있었던 일이겠지.
그 전에는 블루벨과 적대 관계였으니까.
“아무튼, 나한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날 좀더 정중하게 대해. 그 귀쟁이라고 부르는 것부터 고쳐!”
“음……”
“……하나도 안 미안하다고 하기만 해봐. 뒤통수에 구멍내버린다.”
그러자 위슨은 손가락을 퉁겨 파랑새를 사라지게 하곤 식사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말 대신 행동으로 답하고 있는 걸 보니, 진짜 조금도, 전혀, 일말의 여지없이 미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블루벨도 녀석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씩씩대며 고래고기를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아무래도 이 둘의 사이가 좀 풀리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살짝 고개를 저은 후, 메린에게 물었다.
“좀 있다가 또 나간다며? 뭐 사려고?”
“가죽. 아, 맞다. 자, 네 돈주머니.”
갑자기 포크를 내려놓더니, 그녀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어 나에게 건넸다.
부피가 약간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두둑한 상태이다.
……나 참, 실컷 써도 된다고 했는데도 이렇네.
설마 값싼 거 찾아다니느라 시간 다 보냈던 건 아니겠지?
코로 약간 긴 숨을 내쉰 후, 나는 메린이 했던 말을 주워서 다시 물었다.
“가죽을 산다고? 뭔 가죽?”
“털 달린 곰 가죽 둘. 저번에 벗긴 생가죽으로 좀 값 깎아보려고.”
생가죽과 약간의 돈으로, 무두질이 끝난 곰 가죽을 사려는 모양이었다.
무두질엔 시간이 좀 많이 걸리니, 무두장이에게 직접 의뢰하는 것 다음으로 괜찮은 방법이긴 한데…….
“갑자기 곰 가죽은 왜?”
털 달린 걸 사려고 하는 걸 보면, 수선용 재료로 두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깔개라도 만들려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메린은 참치로 만든 피쉬케이크 몇 개를 덜며 대답했다.
“……저번에 산 탔을 때 보니까 생각보다 온도가 낮더라. 서쪽도 그런데, 북쪽이면 더 추울 거 아냐.”
“뭐, 그렇겠지. 그래서?”
“위슨은 정령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고, 블루벨은 엘프이니까 겨울에도 별로 안 춥겠지. 그래서, 로나랑 네 몫으로 깔개나 담요 만들까 해서.”
말을 마치고서 피쉬케이크를 먹기 시작하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어…… 그러니까 메린이, 나랑 로나를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가죽을 벗겼던 거라고?
버그베어들 때문에 행여나 가치가 떨어질까봐, 굳이 맨손으로 놈들을 상대하면서 애써 지켰던 거고?
그것도 나는 어쨌든, 만난 지 얼마 안 된 로나까지 걱정해서?
……정말 많이 변했구나.
고향을 떠나기 전과는 완전히 천지차이야.
아마 그 격차는 앞으로도 점점 더 커지겠지.
“……메린,”
이 여정의 끝에서, 너는 얼만큼 더 바뀌어 있을까?
끝이 찾아온 것에 아쉬워하고, 헤어져야 하는 걸 슬퍼하며 눈물을 떨어뜨릴까?
내가 맹세를 지켜야 하는 그 순간, 너는 얼만큼이나 ‘평범한 사람’에 가까워져 있을까?
씁쓸함이 섞인 기대감에 힘껏 웃으며, 그녀에게 딴죽을 걸었다.
“……그런 거면 세 장을 사야지. 네 건 왜 빼냐?”
“내 거? 필요 없으니까.”
“왜 필요없냐? 너도 추운 건 춥잖아. 저번에 보니까 비 맞았을 때 좀 떨더만.”
“너랑 같이 쓸 텐데, 뭐 하러 하나를 더 사냐?”
가, 같이……?
나랑 메린이……
깔개나 담요를 같이 쓴다…….
……으.
“……………그렇네.”
“그렇지?”
맥주잔으로 얼굴을 덮듯이 바짝 대고 홀짝였다.
……히죽거리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나는 도무지 맥주잔을 떼낼 수 없었다.
바깥 날씨보다도 더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으니까.
이 열이 좀처럼 식지 않는 건, 아마 여기 날씨가 더워서 그런 거겠지.
공허한 소란 속에서, 나 홀로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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