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326화 (326/475)

〈 326화 〉 316화 : 그저 의무이기에 (1)

* * *

일행이 모인 지 십 분만에 개판이 된 후, 불안정한 평온을 되찾은 지 오 분이 지난 예배당 위층.

나는 의자에 앉아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를 껴안은 채 새근새근 자고 있는 메린을 토닥이고 있었다.

지금은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이야.

그러니 그만 노닥거려.

……마음속에서 그런 잔소리가 들린다.

아니, 나도 그러고 싶거든?

평소처럼 손가락을 두드리면서 머리가 깨지도록 굴리고 굴리고 또 굴리고 싶다고.

근데 어떡해?

오 분 전에 들은 여러 해괴망측한 소리에 질겁해서 넋이 가출해버렸는데.

그렇게 혼자 탈출해놓곤 아직도 안 돌아오고 있다.

뭐, 마지막 게 좀 충격적이긴 했지?

다른 애인 만드는 걸 허락하는 남자에, 그 남자가 한 ‘벌받을 줄 알라’는 말을 상기하면서 헤죽거리는 여자라니…….

와하하하,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엘프 뭐야, 무서워……!

“우응…….”

그때, 메린이 작게 소리를 내면서 몸을 꼼지락거렸다.

혹시 내가 무섭다고 생각한 게 전해진 걸까?

무서운 건 맞지만, 그래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는 아닌데.

“괜찮아. 더 자.”

작게 속삭이며 머리를 쓰다듬자, 메린이 배시시 웃으며 입을 오물거렸다.

젤리 실컷 먹는 꿈이라도 꾸나보네.

그 모습을 보는 내 얼굴도 저절로 풀어져갔다.

그와 동시에, 망연했던 마음에 활기가 조금 돌아오면서 머릿속이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아마 방금 떠오른 웃음 덕분이리라.

나 참, 진짜 난 이 녀석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구나.

“……”

………음, 아니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안 그럼 이 녀석에게 또 정신머리가 글러먹었다고 혼날 거다.

그렇지, 메린?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게 아니야.

네가 있어서 뭐든 할 수 있는 거지.

넌 희망이니까.

내가 말했던 것처럼 말야.

……부디 네가 좋아하는 젤리보다도 더 달콤한 꿈을 꾸길.

그렇게 바라면서 머리에 입을 맞춘 뒤, 고개를 들고 다른 녀석들을 살펴보았다.

나이값 못하는 변태 할망구는 바닥을 보며 훌쩍훌쩍.

나이값 하길 간간이 땡땡이치는 마법사는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그리고 나이값 할 생각이 아예 없는 빨간 사제님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웃냐?”

“보기 좋아서요. 부끄럽다고 꼭 그렇게 부루퉁해지시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요.”

“으. 아, 아무튼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야, 위슨.”

톡톡, 등받이에 기대어 졸고 있는 위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흠칫 놀라며 멍하니 나를 보는 모습이 조금 안쓰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았으니까.

“블루벨 말이 사실이야? 벤투스가 마차 끌면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어?”

“말 두 마리가 끄는 것보다도 빠르지.”

“그리고 바람의 정령이니까 돌풍도 막을 수 있을 거고. 안 그래?”

물의 정령인 거북이가 비 맞는 걸 막았었으니, 바람의 정령인 엘크는 바람을 잠잠하게 할 수 있을 터.

그러나 크게 기지개를 켜던 위슨은, 내 말을 듣자마자 바로 얼굴을 찌푸리더니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세차게 긁적였다.

“지금 불어대는 바람은 좀 힘든데. 못한다는 게 아니라 힘이 너무 들어가. 위슨 오늘 눈 못 뜬다.”

아까는 그저 잠깐 눈을 붙인 거지만, 이번엔 완전히 뻗어버릴 것이다.

파랑새는 위슨의 말을 대신 전하며 몸을 탈탈 털었다.

“이 다음에 위슨이 없어도 되면 몰라, 인어 새끼들의 둥지 쳐들어갈 거잖아. 아쿠아 없이 거기 어떻게 가려고? 아까 쉰 것도 그 촉수 새끼들 때문에 다 날려서 졸려 죽겠는데……

……하, 이거 걸작이군. 쉬는 건 글렀다, 위슨.”

투덜대던 파랑새의 말투가 돌연 딱딱하게 바뀌었다.

녀석은 위슨이 자신을 놀란 눈으로 보는 것에아랑곳하지 않고, 내 눈앞으로 곧장 날아와서는 날개를 파닥거렸다.

“야, 아래로 내려가라. 일이 더 꼬였다.”

“어? 왜?”

“내려가면 알아. 이래서 물적 존재들은…….”

파랑새는 그렇게 툭 내뱉은 뒤, 다시 위슨의 어깨로 돌아가 앉았다.

의아해하는 눈으로 녀석을 보던 위슨은, 이내 표정을 굳히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향해 가볍게 고갯짓을 한 뒤,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지……?파랑새가 뭐 들었나?

고개를 갸웃하면서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위슨을 따라 계단으로 가려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메린을 조심스레 의자에 앉힌 다음, 녀석의 검을 풀어서 내 허리춤에 묶었다.

그 다음, 녀석에게 후드를 씌워주고 내 등에 업으면서 일어섰다.

“영차.”

검을 빼니까 그럭저럭 업을 만하군.

아무리 이 녀석의 부탁이라지만, 사람들이 우글우글한 곳에서 안고 있을 순 없지.

쓴웃음을 지으며 위슨을 따라 계단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내 뒤를 따라서 발소리와 훌쩍임이 들리는 걸 보니, 로나는 물론이고 블루벨도 같이 내려오는 듯했다.

……누가 블루벨을 보고 이상한 오해 안 했으면 좋겠는데.

간절히 바라면서 아래층에 도착하자, 곧바로 큰 고함소리가 귀를 때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응? 알스 사제 목소리 같은데.

누구랑 말싸움하나?

눈을 깜빡이면서 신전 대문의 계단을 내려간 순간, 첨벙 소리와 함께 얼굴에 물방울이 튀었다.

“……?!”

물이, 정강이까지 올라와 있어……?

메린을 데리고 들어갔을 땐 발등에서 찰랑이는 수준이었는데?

아직 발목을 넘어선 상태이긴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야.

……물이 너무 빨리 불고 있어.

비가 더 거세진 것도 아닌데.

설마……

으, 아니야.

돌벽이 무너졌다면 정강이가 아니라 물이 머리 위를 덮었을 거야.

최악의 상황을 미리 떠올리고 쫄지 말자고.

눈을 질끈 감고서 그 생각을 머릿속 구석으로 밀어넣은 후, 다시 시선을 들었다.

알스 사제가 한 무리의 사람들과 대치하고 있는 게 보인다.

……아니,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

하나는 물고기 문장이 그려진 서코트를 입고서 말을 타고 있는 기사 엘레브 경,

“……용사님.”

그리고 텅 빈 수레마차와 함께 서 있는 위병대장이었다.

쏴아아아—

무슨 상황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마을 곳곳에서 적을 상대해야 할 기사와 병사들이 왜 여기 있는 것인가?

위병대장도 왜 부하들과 함께 신전으로 온 거지?

저 수레마차는 또 뭐고?

……일단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건 분명하다.

알스 사제가 뿜어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뒷모습으로도 이를 갈고 있는 게 여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알스 사제님, 무슨 일이에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 묻자,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저희를 데리러 왔답니다. 성을 포기했다는군요.”

“네?!”

아니, 갑자기 왜?!

설마 이족보행 생선에게 밀리고 있던 건가?

아니면 또 다른 몬스터가 돌벽을 건너왔다거나……!

어, 아니야.

그런 이유 때문에 성을 버리는 건 아닐 거다.

적의 공세로 위험해진 상태라면, 병사들과 위병들이 여기 우글우글 있을 리가 없지.

그럼 대체 뭣 때문에……?

그 성은 지대가 높아서 물이 몰려오더라도 끝까지 버틸 수 있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우우우우—!"

아잇, 진짜!

저 고래 새끼는 좀 닥쳐주면 어디가 덧나나?!

왠지 아까 들었을 때보다 소리가 더 커진 거 같기도 하고……!

나는 고개를 흔들어 놈의 음산한 울음소리를 귀에서 털어버린 후, 곤혹스러워하는 듯한 위병대장에게 물었다.

“던트 대장님, 정말이에요? 성을 포기한 겁니까?”

“사실입니다.”

내 물음에 답한 건 위병대장이 아닌 엘레브 경이었다.

그는 여전히 말 위에 앉은 채, 약간 부어올라 있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이 이상 성에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주님과 성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 모두 협곡 밖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하여, 용사님을 비롯한 손님 여러분을 모시러 온 것입니다.”

“성에 있을 수 없게 됐다뇨? 저기 멀쩡히 잘 서 있는데, 왜요? 설마 진짜로 공세에 밀린 겁니까?”

“적은 섬멸했습니다. 하지만 곧 새로운 적이 침입해오겠지요. 그것도 성벽으로는 막을 수 없는 적이.”

엘레브 경은 한숨을 쉰 후, 굳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바닷물이 넘치고 있습니다.”

“……!”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폭풍고래의 울음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소리가 크게 들린 건 착각이 아니었어.

놈은 기뻐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돌격을 막는 크나큰 장애물을, 드디어 부수는 데에 성공했다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거다.

결국, 돌벽이 무너져버린 건가……!

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그리고 그런 내 표정에서 뭔가 읽었는지, 엘레브 경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벽이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지만 물이 넘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앞도 벌써 이만큼 불어나 있으니, 부두나 해안가 쪽은 아마 더하겠죠. 돌벽이 완전히 무너지면 저 거대한 놈이 달려들 것이 뻔한데, 아무리 견고한 성벽이라 한들 놈의 돌격을 막진 못할 겁니다.”

게다가 불어난 바닷물을 통해, 또 다른 인어나 생선 몬스터들이 쳐들어올 것이 뻔하다.

엘레브 경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무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피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해가 되셨는지요?”

“아뇨, 안 되는데요. 피한다면서 수레마차 한 대만 끌고 와요? 여기 있는 사람이 몇 명인데?”

신전 앞에 모인 사람들을 가리키며 따지자, 엘레브 경은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일곱 분만 타시면 되는데, 무슨 문제가 됩니까?”

“뭐라고요?”

“용사님과 동료분들 합하여 다섯. 알스 사제님, 그리고 저 안에 계실 테레지아 님까지 더하면 일곱이지 않습니까?”

“………”

기사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불안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로 수군대며, 점차 매서워지는 눈초리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불온해질 만도 하지.

자신들을 버리고 우리만 구해서 가겠다는 소릴 들었으니까.

내가 만약 이 마을 토착주민이라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혀버렸을 거다.

외부인이어서 참 다행이야.

“미쳤어요?!”

이렇게 쏘아붙일 수 있으니 말야……!

“이 사람들을 두고 우리만 데려가겠다고요? 그게 기사가 할 소리입니까? 어떻게 그 입에서 영지민을 버린다는 소리가 나와요?!”

“제 의무는 시클로 가문을 섬기는 것이지, 이곳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물론 영지민 또한 영주님의 귀한 자산입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얼마쯤 잃더라도 별 수 없지요. 다시 못 늘리는 것도 아니고.”

“당신……!”

“어째서 불쾌해하시죠? 그 생각을 못하실 정도로 순진하진 않으신 것 같은데. ……아아, 당신도 평민이었지요. 죄송합니다, 잠시 잊었군요.”

비웃음 섞인 콧김을 뿜은 후, 엘레브 경이 재차 입을 열었다.

“여하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용사님. 피난 지점의 상황은 이미 들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애쓰셨으니, 이제 그만 몸을 피하시지요. 당신은 다른 중요한 사명이 있는 분 아닙니까? 대재앙…… 드래곤을 물리치러 가셔야지요.”

이만 네 본분이나 하러 가라.

성의 기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좌절과 절망이 차오르고 있는 시선들을 앞에 두고서.

……별안간 침묵이 찾아왔다.

들리는 건 오로지 빗소리뿐,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다.

알스 사제처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타박하지도, 기사의 말을 따르자고 넌지시 말을 꺼내지도 않는다.

자신들을 버리지 말라고 부탁하지도 않는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저 묵묵히 내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교단에서 파견한 만큼, 우리 중 누구보다도 사명을 중시하는 로나마저 잠자코 있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 따르겠다는 듯이, 그저 지그시 나를 보고 있다.

비슷한 말을 듣고 ‘말도 안 된다’고 성을 냈던 것일 알스 사제도, 저 말을 듣지 말라는 식으로 나를 만류하지 않는다.

사명을 수행해야 하니 떠나라고 등을 밀지도 않고, 그저 말없이 바닥을 살짝 내려다보고 있다.

……다들 내 선택에 맡긴다는 건가?

내가 뭘 고르든 상관없다고? 정말로?

그렇다면……, 난 내 마음대로 할 수밖에 없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나중에 불평하기만 해봐.

속으로 중얼거리며 내 선택을 입에 올렸다.

“싫습니다.”

나를 내려다보는 기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힘주어서 내 뜻을 전했다.

“제가 하기로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니, 언제 물러날지도 제가 정할 겁니다. 도와주지 않을 거면 그냥 가시죠. 괜히 시간 잡아먹지 마시고요.”

“이런, 오해가 있으시군요.”

세찬 빗줄기 속에서도 엘레브 경이 입을 이죽거리는 게 보였다.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천천히 검을 뽑더니, 그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건 권고가 아닙니다. 통보이죠. 저는 당신을 포함한 일곱 분을 모셔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주군의 명을 반드시 수행하는 게 제 의무이니, 순순히 따라주신다면 무척이나 감사하겠습니다만.”

“싫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뭐, 죽이기라도 할 겁니까?”

“설마요. 귀하신 분을 어찌 해하겠습니까? 설사 제가 그리 명하더라도, 제 부하들은 천벌이 두려워서 아무도 따르지 않겠지요. 하지만 이건 어떨까요?”

검을 든 그의 팔이 옆으로 움직였다.

자연히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신전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기사의 검 끝은,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다.

……이 새끼, 설마!

놈은 내 시선을 받고서 빙긋 웃었다.

“짐을 덜어드리지요.”

“……!”

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사들의 창이 사람들을 겨누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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