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2화 〉 364화 : 어깨가 무거운 휴식 (1)
* * *
여러모로 뜨겁고 눅진한 시간을 보낸 뒤, 나는 덧창까지 꼭꼭 닫았던 창문을 다시 활짝 열었다.
마치 그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시원한 바람이 곧바로 얼굴을 스치며 방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으니 원래는 덥다고 느껴야 할 텐데.
왠지 창문 바깥으로 수증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야 당연하지. 한여름에 창문을 꽉 닫고 있었으니까.
……뭐, 습기는 다른 이유 때문이겠지만.
자조하듯 쓴웃음을 지으며, 탁 트인 바깥을 향해 긴 숨을 내쉬었다.
“후우……”
멍하니 내다본 하늘 저 끝엔 붉은빛이 섞인 노을이 펼쳐져 있다.
그 빛깔을 머금은 조각구름들 사이로, 약간 어두운 끼를 두른 파란 하늘이 얼굴을 비추고 있다.
노을 덕분에 하늘은 아직 환히 빛나고 있지만, 저녁은 저녁.
땅에는 이미 어스름이 그득히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초라한 행색의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마시고 있다.
거리가 좀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아마 수프이겠지.
수프……
………아.
배가,
고파졌다.
“……”
그러고보니 슬슬 저녁 먹을 때이지?
본의 아니게 기운 써버렸으니 뭔가 좀 든든한 걸 먹고 싶은데, 여관에서 고기 요리 팔고 있을까?
저녁 주문하면서 목욕이나 뭐 그런 것도 물어봐야겠군.
꼬르륵.
……아무튼 뭐 먹으러 가야겠다.
지금 당장 먹을 걸 넣어달라고 요동치는 배를 붙잡고 한숨을 쉬었다.
“뭐하냐?”
그때, 뒤에서 메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곤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평소 그대~로의 덤덤한 음색.
진짜 어이가 없을 만큼 활력이 넘치는 목소리이다.
거참 희한하네.내가 분명히 녹초로 만들었는데 말이지?
난 좀 기운 없는데 얘는 왜 멀쩡한 거야?
아무리 기초체력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
……아, 혹시 뿌리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차이인가?
그럼 왠지 말이 되는 거 같기도 한데.
“그냥 바람 쐬고……… 히익?!”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자마자 기겁했다!
으아아악, 이 녀석이 미쳤나?!
황급히 침대 쪽으로 녀석을 밀고 가다가, 아예 번쩍 안아들고 그 위에 던지듯이 놓아버렸다.
“엉? 뭐야? 또 하려고?”
“안 해! 야, 이 자식아, 너 제정신이야?! 어떻게 그 꼴로 창가에 올 생각을 해?!”
“내가 뭐.……아, 이거? 어차피 쇄골까지만 보일 텐데, 뭐 어떠냐?”
“시끄러, 임마, 빨리 옷이나 입어!”
침대 한켠에 놓아둔 옷가지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니, 아무리 부끄러움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알몸으로 창문 가까이에 올 생각을……!
하, 진짜 돌아버리겠네.
한숨을 푹 쉬며, 녀석에게 등을 돌린 채 건너편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메린이, 천이 스치는 소리 속에서 작게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좀생이 새끼. 안 보일 텐데 괜히 지랄이야.”
“보이건 말건 무조건 옷 입고 침대에서 나오는 게 문명인이다, 이 자식아. 네가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야생아라는 거야, 임마.”
“웃기시네. 그냥 못 볼 꼴이라서 그런 거잖아. 그러니까 뒤돌고 있는 거 아냐. 아까는 예쁘다고 넋 놓고 봤으면서.”
……응? 어째 이야기가 좀 샌 거 같다?
고개만 살짝 돌려서 힐끗 쳐다보니, 메린이 입을 비죽 내민 채 속옷으로 가슴을 동여매고 있다.
지난번처럼 그냥 흔들리지 않게 받칠 정도로만 묶는 것 같았다.
근데 진짜 신기하네.
원래는 저렇게 손 안에 다 안 들어올 정도로 큰데, 평소 길을 갈 땐 주먹만 하게 보이니 말야.
그 정도로 꽉꽉 싸매면 숨 쉬기 힘들지 않나?
그러고보니 고향의 몇몇 여자 자경단원들은 메린보다도 더 가슴이 컸었지?
전에 지나가다 만났을 때 엄청나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사과 한 알 정도 크기였던 게, 휴일이 되면서 사람 머리보다 커져 있는데 누가 그걸 보고 안 놀랄까?
더 놀라운 건, 그렇게 꽉꽉 누르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과 뒤쳐지지 않게 뛰어다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항상 숨 오래 참기 대회 우승을 다퉜던 건지도 몰라.
본의 아니게 호흡 쪽이 단련된 거지.
그건 어쨌든, 메린이 딱 봐도 삐친 것 같다.
근데 뭣 때문에 그러는 거지?
내가 잔소리해서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큰일났다, 전혀 모르겠어!
할 수 없지. 모르면 맞는 수밖에.
일단 내가 뒤돌고 있는 거에 불만이신 모양이니, 그 대답이나 던져버리자.
뭘 당하든 죽지는 않을 테니까.
곧 맞이할 운명을 예견한 덕인지, 굉장히 평온한 마음으로 녀석에게 대꾸할 수 있었다.
“아까는 꼴려도 되니까 실컷 봤지. 근데 지금은 아니란 말야. 뭐든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는 거 안 배웠냐?”
“꼴려……? 보기만 해도? 하지만 저번엔…… 아, 그땐 피곤해서 그랬던 건가? 그럼,”
혼자 중얼거리던 메린의 말이 별안간 뚝 끊겼다.
이윽고 퉁, 사뿐히 바닥을 밟는 소리와 함께 갈색 물결이 눈앞에 살랑이는 게 보였다.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그녀가 제자리에서 몸을 돌리더니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이것도 꼴리냐?”
가슴과 국부만 가린 속옷 차림으로.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머릿속이 그대로 멈춰버린 것 같았다.
“………”
“왜 아무 말이 없어? 이건 가려서 안 꼴리냐? 전에 내가 셔츠에 브리프만 입었을 땐 난리치더니.”
“………어흑.”
그대로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덮었다.
하…… 진짜 울고 싶다…….
이 자식이 지금 뭐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혹시 나 유혹하고 있는 건가?
저런 밋밋한 천 속옷으로?
최소한 얼굴이라도 붉히던가!!
“존나 덤덤하게 하고 있어……. 바보 아냐? 흑. 같잖은 짓 하지 말고 옷이나 입어, 멍청아…….”
“아, 그래. 근데 네 거기는 딴 소리하고 있는데?”
“………”
염병. 그걸 또 봤네.
나는 녀석이 앉아 있던 자리 근처에 있던 튜닉을 집어 던지며 빽 소리쳤다.
“시끄러, 임마! 내 입이 하는 게 공식 견해야, 얼른 옷 입으라고!”
“그래그래~”
“뭐가 웃기다고 실실거려, 웃지 마!”
“푸히힛.”
아니, 웃지 말라니까 더 킥킥대고 있네.
게다가 튜닉에 바지까지 입은 뒤엔,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고 뺨을 맞대며 부비기까지 하고 있다.
방금까지 토라져 있더니 그새 다 풀렸나?
아니, 애초에 뭣 때문에 삐쳤던 거야?
내가 뭘 했다고 풀린 거고?
진짜 도통 알 수가 없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이 와중에도 머릿속 한켠엔 메린이 귀엽다고 헤헤거리는 나 자신이었다.
아무리 홀딱 빠졌어도 그렇지, 너무 단순한 거 아니냐고.
“히히…… 야, 카엘, 배 안 고프냐? 난 고픈데.”
“아, 맞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배고픈 것도 까먹고 있었다.
그 사실을 다시 인식하자마자, 뱃속이 또 요란스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으…… 뭐 먹으러 가자. 여기 식당도 운영하지?”
“어. 하긴 해. 그럼 배 엄청 고프니까……”
메린은 또 무어라 혼자 중얼거리며 나에게서 떨어지더니, 벽에 둔 자신의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돈은 나한테 있을 텐데……?
그 얘기를 하려는 찰나, 메린이 찾았다고 말하면서 불룩한 자루 몇 개를 꺼냈다.
저거 야채 담은 것들 아닌가?
녀석은 가장 홀쭉한 자루를 슬쩍 보더니, 그 안에 리크와 순무, 감자 몇 개를 더 집어넣고 묶었다.
그리고는 자루를 짊어지며 일어서는 게 아무리 봐도 가져갈 생각인 거 같았다.
대체 왜??
“가자.”
“어…… 식당 영업한다고 하지 않았어? 우리가 직접 해먹어야 돼?”
“아니, 돈이야.”
“뭐?”
야채가 돈……?이건 또 뭔 해괴망측한 소리야?
멀뚱거리는 나를 향해, 메린은 얼른 오라는 듯이 손짓하며 엷게 웃었다.
“배고파. 얼른 가자. 혹시 모르니까 돈 챙기고.”
“어? 어, 응.”
뭐, 내려가보면 알겠지.
서둘러 배낭에서 돈주머니를 챙기고, 메린과 함께 방을 나섰다.
간간이 민망한 소리가 새어나오는 복도를 걸어, 이 층 중앙에 위치한 나선형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층에 들어서기 전부터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린다 싶더니, 계단을 다 내려오자마자 날카로운 고함이 귀를 때렸다.
“이거 순 사기꾼 아냐!!”
화들짝 놀라며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자,웬 초라한 행색의 남자가 어떤 여인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남자의 손엔 노란빛이 도는 그릇이 들려 있는데, 그걸 여인에게 들이미는 걸 보면 요리에 불만이 있는 듯했다.
“그렇게 받아가놓고 허여멀건 국물만 줘?! 네년이 그러고도 사람이냐?! 그래,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 이거지?!”
“뭔 개소리야? 다들 그거 먹은 거 안 보여?”
그리고 여인은 남자의 윽박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한 술 더 뜨고 있었다.
“싫으면 처먹지 마, 거지 새끼야!”
날카롭게 쏘아붙이면서 남자가 들고 있던 그릇을 낚아채듯이 빼앗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리쳐버린 것이다!
파삭!
의외로 뭉툭한 소리를 내면서 그릇이 산산조각 났다.
나무로 만든 게 아니었나?
여인… 아마 이 여관의 주인일 사람은 그게 조금도 아깝지 않은지, 부숴진 그릇을 그저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오히려 사색이 된 건 여주인에게 윽박지르던 남자 쪽이었다.
“이, 이 미친년이 지금 뭐하는……!”
남자가 분통을 터뜨리며 손을 뻗으려는 순간,
“아아!! 진짜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여주인이 눈을 부릅뜨고 남자를 쏘아보면서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하도 불쌍하게 보여서 순무 하나로 그냥 쳐줬더니!! 뭐, 사기꾼?! 내가 미쳤지, 뭔 복을 받겠다고 이 짓거리를 시작했을까!! 아아!! 내일부턴 이 짓 때려치고 그냥 내 손님만 상대해야지!!”
“이 년이 뭐 잘났다고……!”
조금 전처럼 크게 윽박지르려던 남자가 돌연 주춤하며 입을 멈추었다.
아마 여관 바깥에 모여 있던 사람들……
남자와 비슷한 몰골의 피난민들이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한 탓이리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여주인이 하던 일이 피난민들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일제히 남자를 향해 원망의 눈길을 보냈고, 이내 누군가가 그에게 욕을 던지자 떼로 달려들어서 그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무, 뭐야! 뭐야, 당신들, 이거 안 놔?! 으아아악!”
……그리고 그대로 골목길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여주인은 그 모습을 무뚝뚝한 얼굴로 끝까지 지켜본 후,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피난민들에게 말했다.
“흥, 뭘 쳐다봐? 그런다고 하나 더 줄줄 알아? 손님들 길 막지 말고 저리 꺼져! 내일 아침에나 다시 오라고!”
상당히 매몰찬 말투임에도, 피난민들은 한결같이 고맙다고 인사하며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그 중엔 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리면서 아까 그 남자를 삼킨 골목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데.
그때, 메린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찌르더니 식당 한켠을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야, 괜히 나대지 마라. 가서 자리나 잡자고.”
“나대긴 누가……!”
“아, 닥치고 빨리 와!”
메린은 단칼에 내 말을 잘라먹으며 팔을 잡아 끌고가기 시작했다.
있는 대로 표정을 구긴 걸 보니, 보기보다 꽤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이제 좀 싸울 수 있게 되니까 막 껴들고 싶냐? 호구 짓 하고 싶은 욕구가 막 샘솟아?”
……다른 거 때문이었군.
녀석이 빈 자리에 앉자마자 날 까대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그냥 난리가 난 거 좀 봤을 뿐이잖아.”
“웃기지 마, 너 골목길 쳐다봤잖아. 그 남자가 끌려간 거 신경 쓰여서! 내 말이 틀려?!”
“………틀려!”
오기를 부려서 돌아온 건 녀석의 딱밤뿐이었다.
으으, 그래도 따라갈 생각은 진짜 없었는데!
억울해!!
이마를 문지르며 혼자 투덜거리는데, 문득 발소리가 들리면서 누군가가 테이블 옆에 섰다.
고개를 돌리자, 방금 그 남자와 대치했던 여주인이 무뚝뚝한 얼굴로 테이블에 무언가 툭 두면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메뉴에요. 뭐 드실 거죠?”
“네? 어, 어어…….”
조금 전에 본 그 모습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허둥지둥 메뉴를 살피기 시작했다.
왠지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될 거 같아!
“스, 스튜 두 그릇이랑 돼지고기구이 반 마리요!”
“또 누구 오나요? 두 명이서 반 마리는 너무 많을 텐데요.”
눈썹을 추켜올리며 지적하는 여주인에게 괜찮다고 하려 했는데, 메린이 먼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대답해버렸다.
“괜찮아요. 다 먹을 수 있어요. 그리고 사과주 두 잔 주세요.”
“값은 뭘로 치를 거죠? 물건? 돈?”
“둘 다요. 일단 이거로.”
메린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자루를 건네자, 여주인은 그 안을 살펴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동화 열 닢 더 주세요.”
“아, 어어, 여기요.”
여주인의 손에 동전 열 개를 올리자,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만 살짝 까닥이고서 저쪽으로 가버렸다.
그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나는 크게 한숨을 쉬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런 나를 뚱하게 쳐다보면서 메린이 툭 내뱉었다.
“쫄보.”
“으…… 어쩔 수 없잖아, 방금 본 게 있는데. 음…… 근데 진짜 돈 대신 식재료를 받네. 방값도 그랬어?”
“어. 그래서 훈제고기 남은 거 죄다 줘버렸어. 어차피 여기 있는 중엔 안 먹고 상해버릴 텐데 잘됐다 싶더라.”
별로 많이 남지도 않았었는데 방값 이틀분을 낸 걸로 해줬다는 듯했다.
흠, 고기를 비싸게 쳐주는가보군.
메린은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지 위쪽을 쳐다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방값, 시트 바꾸는 거, 청소값은 식재료도 받는데, 빨래방이랑 목욕통은 돈만 받는다고 했어. 이유는 안 물어봐서 몰라.”
“빨래랑 목욕만……? 아, 공동우물 쓰나보네. 아버지한테 들은 적 있어. 우물이 있는 마을은 영주한테 내는 세금에 우물 사용료도 들어있다더라.”
그리고 일반 가정집보다 여관이나 식당, 목욕탕집처럼 물을 많이 쓰는 곳은 더 높은 요금을 내야 한다는 것 같았다.
아마 여기도 그런 거겠지.
내 이야기를 들은 메린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딴 건 왜 식재료로 때울 수 있게 하는 거지? 우물 말고도 세금내야 되잖아. 그것도 돈으로.”
“그야 뻔하지.”
나는 오늘 본 광경들을 다시 떠올렸다.
돈이 아닌 먹을 것을 구걸하던 사람들.
부숴졌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리던 노란빛 그릇.
여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쓰던 피난민들.
그리고 이 마을……
아니, 지금 이 세상의 상황과 같이 생각해보면, 이들이 왜 돈 대신 식재료를 우선하는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먹을 게 부족한 거야.”
……그 답을 읊조리는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