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2화 〉 374화 : 조금 특별한 인형사 (2)
* * *
맑고 화창한 아침을 모독하는 두 아가씨를 그냥 내버려둔 채 그릇을 비우던 중, 오늘따라 여관 앞이 한산하다는 걸 깨달았다.
일곱 시만 되면 피난민들이 한 손에 야채를 들고 줄을 섰었는데 웬일이지?
나는 감자 향을 풍기는 순무 빵을 수프에 적셔 먹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왠지 사람이 별로 안 모인 것 같지 않아? 날씨 때문인가?”
“글쎄요, 오늘 바람이 차긴 한데요. 그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닐 거에요.”
찻잔을 살짝 기울인 뒤, 로나가 빙긋 웃었다.
“영주가 오늘 숲을 탐색하라고 했거든요. 멀쩡히 움직일 수 있을 피난민들을 대동해서요.”
“뭐? 미친 거 아냐?!”
바깥엔 아직 오크들이 있을 텐데 뭔 탐색이야?!
설마 우리가 여기 오다가 해치운 놈들이 전부인 줄 아는 건가?
아무리 남부 지역이 몬스터가 적다고 해도 그렇지!
오크들이 대장을 중심으로 뭉친다는 것, 그리고 둘 이상이 모이면 무조건 대장을 세운다는 건 상식이잖아!
경악에 찬 나와 달리, 로나는 항상 그랬듯이 헤실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도 이야기만 들었는데요. 오크들의 본진이 싹 쓸렸다나봐요.”
“엥? 요 이틀간 병사들이 움직이는 거 못 봤는데?”
“외벽 문의 보초 있죠? 어제, 하늘에서 갑자기 그 사람들 앞에 오크 시체가 툭 떨어졌대요. 그것도 바삭하게 탄 시체가요! 뼈목걸이 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 놈이 대장이지 않겠어요?”
뼈목걸이 차고 있었으면 확실하긴 하다.
그럼…… 갑자기 대장의 시체가 뚝 떨어져서, 척후병이라고 하나?
한두 명 보내서 대강 상황을 살폈겠구만.
만약 그렇다면, 이번 탐색은 오크 잔당을 찾아서 소탕하는 게 목적이라 봐도 될 것이다.
겸사겸사 사냥도 하고 말야.
그럼 더더욱 얘기가 이상한데…….
“근데 왜 피난민을 데려가? 밖에 있던 사람들은 다 비실비실하지 않았어? 미끼 말고는 써먹을 데가 없을 텐데.”
“표현이 좀 그렇긴 하지만 메린 말이 맞아. 여기저기 흩어진 잔당들이 각기 대장을 세운 상태일 텐데, 피난민들을 데려가도 죽기밖에…………
……………거지 같구만.”
그래. 죽기밖에 더 할 게 없지.
그걸 원하고 벌인 거야.
그 생각에 다다르자,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피난민들은 오크를 상대할 수 없다.
검을 들고 있어도 조심해야 할 판에, 고작 나이프나 가지고 있을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들 대부분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사람들이다.
도망치는 것도 안 될 거야.
……오크와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끝장인 것이다.
그런데 그걸 숲의 탐색을 명한 영주가 모르고 있을까?
피난민들을 이끌고 나갈 기사와 병사들은?
전부 알고 있을 거야.
아니까 일을 추진한 거겠지.
군식구들을 없앨 절호의 기회이니까.
“‘사람’보다 ‘영지민’을 우선하는 거야. 영주로선 대단히 훌륭한 행동이지. 치안 나쁜 것도 해결되고, 식량 사정도 조금은 좋아질 테니까.”
아마 이 마을 사람들도 환영하고 있을 것이다.
길거리의 피난민들은 마을의 골칫덩어리였을 테니까.
돈도 없고, 초라한 행색으로 구걸하면서 마을 분위기를 해치고, 종국에는 마을의 묫자리를 빼앗아가는 골칫덩어리.
실제로 어제 사람 여럿이 이 여관에 와서, 여주인과 말다툼을 벌였었다.
큰 소리가 마구 뒤섞여서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충 ‘당신이 밥을 주니까 이 놈들이 눌러 앉았다’는 식으로 비난했던 것 같다.
그러다 여주인의 남편인 듯한 주방장이 나와서 슥 쳐다보니까 다들 도망갔었지.
나 역시 그 사람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소 한 마리는 거뜬히 메칠 듯한 덩치가 여관 안쪽에서 쿵쿵거리면서 나오는데 어떻게 안 놀라?
손도 사람 얼굴은 족히 덮을 수 있을 것처럼 컸고 말야.
이 수프랑 순무 빵도 그 커다란 손으로 만든 거겠지?
진짜 상상이 안 가는구만.
여하튼 마을 사람들이 피난민들을 고깝게 여기는 건 분명하다.
그러니 죽음으로 내몰리는 피난민들을, 겉으로는 안타까워해도 속으론 이제 좀 살겠다고 안도하고 있을 거야. 뻔해.
“그게 어때서? 먹을 게 부족할 때에 입을 줄이는 건 당연한 거 아냐? 안 그럼 다 죽잖아.”
“………그렇기는 해. 그래도 좋은 일이 아니야.”
“좋고 나쁘고가 중요해? 까딱하면 굶어 죽을 판인데. 진작에 안 한 게 더 신기하지.”
덤덤하게 말하며 수프를 마시는 메린.
그 표정에는 일말의 감정도, 다른 사람들처럼 ‘어쩔 수 없다’고 자기합리화를 하는 기색도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무정하게 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역시 피난민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안 하는구나.
원래 그런 애이긴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 감정이 풍부해졌으니 좀 달라졌을까 했는데.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소리를 했다면, ‘너나 네 가족이 당해도 똑같이 말할 수 있겠냐?’고 대꾸했겠지.
그런 식으로, 아무리 타당한 선택이라 해도 공공연하게 지지해선 안 된다고 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메린에겐 통하지 않는다.
녀석에게 그런 물음을 던져봤자, 오히려 ‘왜 못하냐’고 반문하겠지.
메린은 그런 녀석이다.
조금 많이 극단적이어서 그렇지, 지금처럼 힘든 시기에 살아남기엔 누구보다도 적합한 성격이라 할 수 있으리라.
“야박한 자식.”
“오냐, 호구야.”
“야, 이 새끼야, 죽으라고 내보내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갖고, 죽을 게 뻔한 곳으로 내몰리는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도 안 되냐? 이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거야, 멍청아!”
“아니, 그냥 네가 호구라고.”
“………”
“……”
“……이익!”
녀석의 뺨을 잡아당기려 손을 뻗자,
찰싹!
따악!
손등이 후려쳐지는 것과 동시에, 눈앞이 번쩍이면서 이마가 쪼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철푸덕.
그대로 테이블 위에 쓰러졌다.
“으어어……”
“너도 참 질리지도 않는다.”
신음하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메린.
내 손등이랑 이마를 박살내려 했으면서 말야.
그런다고 내 기분이 풀릴 줄 알았다면 정답이다, 빌어먹을.
……아니, 녀석이 좀 쓰다듬는다고 속이 풀어져?
나 진짜 등신이야?
“그래서 말이죠. 원래는 오늘 메린 님에게 대련해달라고 하려 했는데, 계획이 바뀌었어요.”
그런 우리를 보며 히죽거리던 로나가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메린 님, 저랑 같이 밖에 다녀오실래요?”
“엥? 왜?”
“쓸모없는 영주에게서 피난민들 지키게요.”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없이, 로나는 헤실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사람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는 게 저희 방침인데요. 맞서기를 포기한 사람의 뜻은 논외란 말이죠?”
처음에 로나는 이 영지에 병력이 없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니 문을 꼭꼭 닫고 방어에만 치중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틀 전, 영주의 요청으로 병사들의 전투훈련을 하러 갔을 때, 로나의 눈에 비친 건 썩 괜찮게 훈련된 병사들이 훈련장을 가득 메운 모습이었다.
“치유사제나 보호사제가 두세 명 낀다면, 오크가 얼마나 몰려오든 충분히 승산이 있을 텐데 말이죠. 그런 판단도 못 하고 문을 꼭꼭 닫아서는 식량난을 일으켰으니, 정말 무능하기 짝이 없어요.
그런 주제에 오늘 아침까지 버텨온 피난민들을 내버리다니, 사람을 지키기로 맹세한 자로서 용납할 수 없어요. 오크를 만나지 않으면 숲 속에서 피난민들을 슥삭슥삭 해버릴 가능성도 있으니, 교단 대표로 제가 따라가려고요.”
전투사제가 아닌 사제들도 호신술을 익히고 있으므로 여차하면 싸울 수 있지만, 정식으로 수련한 자들을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병사들이 정말로 피난민들을 해치려 한다면, 아무리 사제들이 몸소 막으려 해도 별 소용없겠지.
어쩌면 피난민들과 함께 숲 속에 묻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을의 담당사제는 마침 마을에 머물고 있는 로나에게 피난민들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고, 로나 역시 흔쾌히 수락한 것이었다.
“근데 혼자서는 방해를 받을지도 모르니까요. 메린 님이 같이 가주시면 확실하게 지킬 수 있을 거 같아요.”
“그 사람들 데리고 돌아오려고? 그럼 내일 또 그럴 텐데.”
내 말에, 로나는 빙긋 웃었다.
“괜찮아요. 다 생각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데, 반나절 정도 메린 님 빌려도 되죠?”
“본인이 간다면야 뭐……. 아, 저녁 전엔 와야 돼. 슐 누나한테 인사해야 하니까.”
“저녁 전? 진짜로?”
눈썹을 살짝 추켜올리며 재확인하는 메린.
녀석이 왜 그러는지 알기에,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진짜로. 여기 떠날 준비도 해야 되니까, 나도 나름 바쁘게 움직일 거야. 인형도 찾아야 하고.”
“그럼 가는 김에 이불집이랑 가죽집에도 가라. 시장에 있는 거 알지?”
“이불가게랑 가죽세공점? 왜?”
눈을 멀뚱거리면서 되묻자, 메린이 덤덤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곰 가죽 맡겼어.”
“야, 캐묻는 것도 일이야. 한 번에 쭉 말해.”
“곰 가죽 두 장 있었잖아? 하나는 깔개로 쓰게 가죽집에 마감처리 부탁하고, 다른 건 담요 만들어달라고 이불집에 맡겼거든. 둘 다 오늘 찾을 수 있댔어. 돈도 다 냈으니까 그냥 찾으면 돼.”
직접 만들겠다더니, 여기 며칠 머무는 김에 그냥 장인에게 맡기기로 한 모양이다.
뭐, 품질 생각하면 그 편이 훨씬 낫긴 하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메린에게 물었다.
“근데 언제 맡겼냐?”
“여기 도착한 날.”
“응, 그때밖에 없을 거 같긴 해. 그럼 나 기절해있는 거 내버려두고 싸돌아다녔구나?”
“아니? 너 말 위에 엎어져 있는 거 그대로 끌고 갔는데? 돈이 너한테 있으니까.”
“………”
여관 방에 버려져 있는 게 나았겠군.
어쩐지 어제 시장 상인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조금 따뜻하더라.
“야, 메린…… 너 진짜 내가 소중한 거 맞냐……? 어떻게 뻗어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써……?”
“뭐야, 두고 가도 안 되고 데리고 다녀도 안 되냐? 그럼 애초에 기절을 하지 말든가.”
“이 자식이, 지가 기절시켜 놓고 지금 뭐라는 거야?”
“뭐, 새꺄, 누가 같잖은 소리 지껄이래? 아무튼 정신 못 차리는 거 혼자 두고 왔다가 뭔 일 날 줄 알고? 괜히 신경 쓰다가 주문 잘못 넣을까봐 그랬어.”
……내가 걱정되어서 그랬던 거군.
안중에도 없는 게 아니라, 시야 안에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데리고 다닌 거였다.
그런 거라면 뭐, 어쩔 수 없지.
요즘 험한 시기이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러길 잘했지. 괜히 두고 갔다가, 내가 돌아가기 전에 먼저 눈 떴어봐. 막 발작해댔을 거 아냐. 그저께처럼.”
“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제길, 그저께 그런 추태만 안 부렸어도……!
“왜요? 그저께 뭐 있었나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로나.
나는 태연하게 보이려 애쓰면서 적당히 넘어가려 했지만,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 훈련을 받은 전투사제에겐 전혀 통하지 않은 듯했다.
“메린 님~ 그저께 카엘 님이 뭐 했었나요~?”
“아, 글쎄,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메린 너, 말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별 거 아냐. 그냥 혼자 있어서 외로웠다고으읍,”
“먹어먹어먹어, 제발 다물고 밥 좀 처먹어어어!!”
필사적으로 녀석의 입에 순무 빵을 쑤셔넣었다.
그 짧은 말만으로도 전말을 파악한 것처럼 히죽 웃는 빨간 사제님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 후, 두 아가씨를 배웅하고서 빨래를 챙기고 짐을 확인했다.
메린은 사야 할 거 없다고 했고, 나 역시 바닷가 마을에서 챙겼던 물자들이 넉넉하게 남아있다.
그냥 면포(??)나 좀 사두면 되겠군.
깨끗한 면(?)은 여러모로 쓸데가 많으니까.
그렇게 결정하고 여관을 나서려는 찰나, 별안간 여주인이 나를 불러세웠다.
추가 숙박비는 이미 냈을 텐데?
“무슨 일이세요?”
“다른 건 아니고…… 손님은 슐이랑 같은 고향 출신이죠?”
고개를 끄덕이자, 여주인의 미간이 좀더 찌푸려졌다.
“조심해요. 요즘 용사 잡아죽이겠다고 지랄 떠는 놈이 있거든요. 용사도 손님과 같은 고향 출신이라고 하니, 손님을 붙잡아서 캐물으려고 할지도 몰라요.”
“예에, 그 얘기는 들었는데……”
나는 표정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저 혼자 나갈 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어제는 안 하시고?”
“굳이 답을 들어야 하나요?”
무뚝뚝한 얼굴로 대꾸하는 여주인.
이미 답을 들은 거나 다름없었으나, 왠지 모르게 오기가 생겼다.
“네. 말씀해주세요.”
“그 아가씨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손님은 인상이 순해서요.”
“………만만하다는 건가요?”
“잘 아시네요.”
“……”
쿠웅.
마음속에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만만하게 생겼다고……?
아, 맞아…… 저번에 메린도 그랬잖아…….
잡스럽게 생겼다고…….
그러고보니 그 다음에 하인인 척할 때 의심 하나 안 샀었지……?
되게 자연스럽게 음식물 쓰레기 버리고 오라고 하고, 꽃병 옮기라고 시켰고…….
나, 그렇게나 만만하게 생긴 거야……?
“어쩌면 보복이 무서워서 건드리지 않을지도 몰라요. 아무튼 조심해요. 슐과 친한 사이인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에요.”
“네…… 감사합니다…….”
울적한 마음을 안고 여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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