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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425화 (425/475)

〈 425화 〉 401화 : 마지막 준비 (2)

* * *

신전은 몬스터 때문에 출입이 막혔던 것 치고는 말끔한 편이었다.

바닥과 의자에 먼지가 조금 쌓여 있고, 제단 위에 있어야할 성광(?光)이 없어서 좀 허전할 뿐이다.

신전 안쪽의 사제관도 썩은 냄새가 조금 나는 것 외엔 별 문제없었다.

창고에 생긴 벌레 둥지를 치워버린 후, 율리아는 나와 메린을 테이블에 앉히고서 차를 내오겠다며 선반 여기저기를 여닫았다.

사제가 지내는 곳이니 자신이 대접을 해야 한다는 논리로.

“과자는 없네요……. 어휴, 손님이 언제 올지 모르니 과자를 항상 구비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나? 역시 멍청이라니까! 물도 없잖아아아!”

율리아의 고함이 텅텅 빈 물항아리 속에서 메아리쳤다.

공주 때려치면서 기품도 같이 버린 모양이다.

“그야 며칠간 폐쇄되어 있었으니까요…….”

“으으, 어쩔 수 없네요.”

율리아는 항아리에 처박은 고개를 들고 뚜껑을 닫았다.

그런 다음, 그 앞에서 성호를 긋고 무언가 달싹이며 박수를 두 번 짝짝 쳤다.

그리고서 그녀가 눈을 뜨고 뚜껑을 열더니, 항아리에서 물을 퍼서 주전자에 담는 게 아닌가!

“우와?!”

“물 생겼어!”

메린에게도 이건 엄청나게 놀라운 일인지, 나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면, 율리아는 지극히 태연하게 물을 끓이며 말했다.

“대언자는 여러가지를 할 수 있어요.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의식을 잃은 사람을 깨우고, 심지어 비를 내리기도 하죠. 가만히 있다가 예언도 하고요.”

스스로 사람이길 버려야 하는 사제와 달리, 대언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창조주와 연결된다.

때문에 세상에 허락된 한도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이룰 수 있으며, 심지어 명상으로 창조주와 문답을 나눌 수도 있다.

대언자의 동반자인 까마귀, 림의 힘으로 세계 어디든 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왕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제들에게 연락을 넣는 것도 가능하다.

신의 대리자인 만큼, 사제들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복종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대단하죠?”

“예에…… 대단하긴 하네요…….”

쪼르르.

찻잎을 넣은 찻주전자에 끓인 물을 붓고, 찻잔과 함께 테이블에 내려놓는 율리아.

그녀는 자리에 앉아 손가락으로 찻주전자를 쓸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 특권들 중에는 이 세계의 구조를 아는 것도 있어요. 사람의 운명을 읽는 것도 있고요.”

“운명을 읽어요……?”

율리아는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젓고서 찻잔을 하나하나 채우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런 특권들이 있어요. 창조주를 섬기는 수많은 사람 중, 딱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어마어마한 특권.”

“……”

“단 하나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 공들여서 만든 도구. 그게 대언자예요.”

도구.

불현듯, 사제는 모두 창조주의 도구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절대자를 대리하는 대언자조차도 그러한 도구에 불과한 걸까?

……로나에게 들은 적이 있어.

사제들은 훈련과정에서 감정을 덜어낸다고.

창조주의 힘을 받아들일 공간을 만들어야 해서 그렇다고 했던가?

로나는 메린처럼 태어날 때부터 감정이 없었던 거라 조금 다르지만.

즉, 평소에 사제들이 보이는 감정표현은 어느 정도 만들어낸 것이다.

희로애락처럼 지극히 단순한 감정만 지닌 그들의 진짜 얼굴은, 진중한 상황에서 보이던 그 무감정하고 무심한 표정이다.

그리고 율리아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한 사제들 틈에서 살아왔다.

아무 의문도, 불평도 없이 도구의 삶을 살아가는 사제들을 보면서 자란 것이다.

율리아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눈앞에 들이밀 듯이.

“굉장히 지루했어요.”

“음…… 말상대가 없다고 말씀하시긴 했죠?”

“그건 한몫도 안 돼요.”

찻잔을 들고 살짝살짝 돌리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는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제 자신이 뭘 위해 태어났는지 알고 있어요. 역사나 사회처럼 사람이 만들어낸 것을 제외하곤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바다 저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하늘을 올라가고 또 올라가면 무엇이 보이는지, 전부 다.”

그 때문에 지식을 쌓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감정을 덜어낸 사제들과 살았기에,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즐거움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게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결핍이 한탄스럽지도 않았다.

공주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구워 삶는 건 조금 재미있었으나, 그것도 뒤통수를 얻어맞으면서 정이 뚝 떨어져버렸다.

어차피 끝이 다가오는 만큼, 스스로의 각오를 다지는 뜻도 겸해서 공주를 때려친 것이다.

율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저는 있죠, 아트라토스를 멸하기 위해 태어났어요. 그 하나만을 위한 삶인 거죠. 근데 그게 언제 일어날지는 안 알려주시더라고요. 뭐, 덕분에 나름 바쁘게 살았네요.”

“그…… 무섭거나 하지 않으셨어요?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는데 터질까봐.”

“전혀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 세상의 구조를 알거든요. 설사 준비가 모자라서 아트라토스를 막지 못해, 이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사실 아무래도 좋은 일이거든요.”

“네……? 그게 무슨……”

율리아는 내 물음에 그저 고개를 저었다.

이 또한 말할 수 없는 사항인 듯했다.

뭐, ‘비밀이다’라는 그 진절머리나는 말을 안 한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자.

“아무튼, 최선은 다하지만 망해도 상관없다는 게우리입장이에요. 망하기 싫어서 아득바득 달려드는 악마들과는 마음가짐이 다르죠.

그래서 사람 중에서 대행자를 세워서 이번 일을 맡기신 게 아닐까 해요. 살기 위해서 열심히 할 테니까. 어차피 이 세상은 사람을 위한 곳이니, 직접 청소하게 하자는 뜻도 있고.”

그 일을 시키기 위해 세운 것이 바로 용사이다.

율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차를 홀짝였다.

아트라토스 때문이건 아니건, 이 대륙은 꽤 어질러져 있었다.

아마 엘프가 수호자의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악마에게 영혼을 넘긴 마녀들, 악마의 속삭임에 타락한 엘프, 역사를 잊고 계약을 깨뜨린 인어 등, 빛을 저버린 배신자들에게 용사를 보내어 심판을 받게 했다.

어둠과 혼돈 쪽으로 치우쳐진 세상의 균형을 바로잡는 것.

기울어진 천칭을 바로 세우는 것.

그것은 아트라토스를 물리치는 일 외에 용사에게 주어진 임무였고, 그렇기에 용사가 빛의 대행자라 불린 것이었다.

“그래서 알고 있었어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율리아가 말했다.

“메린 씨가 놈이 안배한 그릇이라는 거. 뭐, 손을 잡고서야 알았지만요.”

“……그래서 저희가 ‘재미있는 관계’라고 하셨던 건가요?”

석 달 전, 율리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메린을 데려가도록 권했다.

나는 용사이고, 메린은 용사의 적인 드래곤이 만든 그릇이니 옆에서 보면 재미있는 관계이긴 하겠네.

……어쩌면 율리아는 우리 둘이 이어질 것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사람의 운명도 읽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적끼리 사랑에 빠진다……

연애소설에나 나올 법한 얘기가 나한테 일어날 줄이야.

“아뇨.”

그러나 모든 것을 아는 대언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재미있어 한 건 용사와 그 적이라는 관계가 아니라,

“카엘 님이 용사가 될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머릿속을 텅텅 비워버릴 만큼 충격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허? 뭐라고요?”

“원래는 다른 사람에게 성검이 내려질 거였어요. 당신이 아니라.”

미소와 함께 들린 평온한 말.

그러나 그 무게는 상당했다.

나는 머리 위에 바위가 떨어진 것처럼 일순간에 멍해져버렸다.

내가 아니라고……?

아니, 물론 내가 칼 들고 싸우는 거랑은 엄청나게 안 어울리긴 해.

실제로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고.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왜 내가 용사로 뽑힌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근데 뭐?

원래 딴 사람이 할 거였다고?

그럼 왜 그 사람이 아니라 나한테 시킨 거야?

대체 나에게서 뭘 봤길래?!

“대체 왜 저를……?”

“글쎄요, 그건 안 가르쳐주시더군요. 저랑 상관이 없어서 그런가봐요.”

……그리고 여전히 그 이유는 감춰진 상태이다.

돌겠네, 진짜.

여기까지 왔으면 그냥 알려줘도 되는 거 아냐?

한숨을 쉬며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자, 율리아가 생긋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당신이 존경스러웠어요. 그냥 선택받는 게 아니라, 당신을 선택하도록 만들었으니까요. 그건 누구도 못한 일이랍니다. 자랑하셔도 돼요.”

“무언가 한 기억은 전혀 없는데 말이죠…….”

난 그냥 평소 하던대로 살았다.

아버지를 도와서 필사 일을 하고, 이따금 메린과 같이 양을 치거나 낚시를 하면서 하루하루 지냈을 뿐.

뭐 특이한 일을 한 기억은 없다.

굳이 꼽자면……

결혼하기 싫어서 싸우다 죽으려 드는 메린을 막은 거?

혹시 그거 때문에 뽑힌 건가?

“나 구하려다 용사 된 거면 그래도 자연스럽지 않냐?”

“제대로 못 구했잖아. 성검 안 나왔으면 너나 나나 죽었어. 그리고 만약 구했다고 해도, 그거 이 동네 사람은 다 하는 거잖아. 자경단원들은 맨날 하는데, 뭘.”

“넌 자경단원 아니잖아. 힘도 없고. 그런데도 나섰으니까 된 거 아냐?”

“그런가?”

그럴싸하긴 한데……

왠지 또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나를 보며 율리아가 킥킥 웃었다.

“여자를 구하다 용사가 된다……. 흔한 이야기이긴 하네요. 근데 아니에요. 그전에 미리 깃들어 있었다고 들었거든요.”

“그럼 진짜 모르겠네요.”

더 생각나는 것도 없기에, 그냥 차나 마시기로 했다.

이제 와서 이유를 안다고 뭐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아, 혹시 사람의 운명을 읽을 수 있다면, 우리 결말도 알 수 있는 거 아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율리아 님, 혹시 저희가 이 싸움에서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있나요?”

“당연히 모르죠.”

“저런.”

역시 안 되는구만.

기대하고 물은 게 아니어서 실망감도 별로 없었다.

뭐, 행여 알 수 있다고 해도 안 들었을 것 같지만 말야.

죄다 망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는 건 당연히 싫고, 엄청나게 잘될 거라는 말을 듣는 것도 꺼림칙하다.

그 소리 듣고 방심하다가 망할지도 모르는 거 아냐.

그리고……

율리아가 일부러 말 안 해주는 게 아니라 아예 알 수 없는 사항이라서 참 다행이다.

일이 어떻게 되건, 괜히 이 사람을 원망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쩐지 약간 후련해진 마음으로 차를 홀짝이는데, 불현듯 율리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카엘 님. 말씀드렸듯이, 저는 메린 씨가 아트라토스의 그릇인 걸 알고 있었어요. 두 분이 은근히 끈적끈적하고 질척한 관계인 건 어렴풋하게만 알았고요.”

“……잠깐만요. 뭘 보고 그런 소리하는 거예요? 그때 저흰 그냥 엄청나게 순수한 소꿉친구 사이였거든요? 지금도 순수한 연인 사이이지, 끈적하거나 질척거리지 않다고요!”

누가 들으면 엄청나게 퇴폐적인 관계인 줄 알겠네!

나 참, 진짜 어이가 없어서……!

“밤,”

“조용히 해, 임마!”

쓸데없는 잡소리가 시작되기 전에 얼른 잘라버렸다.

메린 이 자식, 분명 밤에는 끈적이면서 질척거리지 않냐고 말하려 했을 거야. 뻔해!

실실 웃는 메린의 입을 틀어막고 있자, 율리아가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여하튼 그때와 달리, 당신은 지금 메린 씨를 연인이라 확언하고 있어요. 메린 씨가 아트라토스의 그릇인 걸 알면서도.”

“……”

“카엘 님, 예정대로라면 당신은 메린 씨에게 깃든 아트라토스와 싸워야 해요.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죽이면서까지 이 세상을 구하려는 이유가 뭐죠?”

누구도 건네지 않은 질문이었다.

사정을 아는 세 녀석이 물은 건, 메린을 정말 죽일 수 있냐는 것뿐.

그 이유는 묻지 않았다.

이유라……

메린 녀석에게 들려준 것은 있다.

하지만 분명 한 가지 이유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겠지.

게다가 지금 내 대답을 들을 사람은 메린과 율리아, 단 두 사람밖에 없다.

내가 댈 다른 이유들과 관련된 사람은, 이 자리에 하나도 없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므로, 나는 생각하던 것을 그대로 입 밖에 내기로 했다.

“가장 큰 건, 이 녀석이 절 죽이기 싫어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드래곤 놈에게 몸을 빼앗기면, 놈은 메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어쩌면 그땐 메린의 인격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녀석의 손이 내 숨통을 끊게 할 수는 없다.

악몽으로 꾸고 벌벌 떨 정도로 싫어하고 무서워하던 일을, 그 몸이 저지르게 둘 순 없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요.”

왠지 모르게 조금 쑥스러워서, 그 다음 이유들은 찻물을 내려다보며 입에 담았다.

“제 동료들이 하고 싶은 일이 많대요. 위슨이라고 좀 까진 놈이 있는데, 마녀들이랑 살다가 이제 처음 밖으로 나왔거든요? 걔 평생 소원이 세계 구경하는 거래요.

블루벨이라는 엘프는, 대륙에 또 있을지도 모르는 엘프를 찾아서 돕고 싶다고 하고. 로나도 그렇게 좋아하는 전투하면서 사제 일 해야 되고요.”

그 외에도 또 있다.

아버지는 이 환장하는 마을의 촌장이 될 예정이다.

어쩌면 아버지 덕분에 놋지빌이 좀 달라질지도 몰라.

티치 형도 그 빡센 시절을 보내면서 겨우 사범이 됐으니, 전대 사범님까지는 아니어도 오래오래 일해야지.

두 아이 커가는 모습도 보고.

이상한 데에서 짓궂은 그 대마법사님은 수양딸들을 고쳐서 그 먼 옛날처럼 오순도순 살아야 한다.

메린을 좋아하게 된 걸로 고민하는 내 머리를 후려쳤던 그 애아버지도, 기사는 되어봐야 하잖아?

쓸데없이 목소리 크고 눈에 띄는 그 금발 왕자는, 안 어울리게 순애보인 애인이랑 결혼해야 되고,

임시 왕이 된 연노랑머리 엘프 아저씨는 책 써야 한다.

변태 관장이 있는 장서관은……

음, 거긴 좀 많이 특이하니까 세상이 망해도 어떻게 될 것 같진 않아.

바닷가 마을에 살던 그 꼬마아이는 커서 멋진 남편을 맞이해야 하고, 거기 있다가 공작령으로 간 귀족 아가씨도 집안을 일으킬 뿐 아니라 복수도 성공해야 한다.

그리고……

“슐이라고 친한 누나가 있는데, 최근에 결혼했어요. 아이가 생기면 저랑 메린 이름을 따서 짓겠다는데,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야죠.”

그 사람들이 바라는 일들이 전부 이루어질지는 모른다.

어쩌면 불행에 맞닥뜨릴지도 모르지.

설령 그렇더라도,

“자신의 삶과는 상관없는 일로 끝나게 할 순 없어요.”

갑자기 튀어나온 드래곤 때문에 멸망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의 결말을 직접 보고 품어야 한다.

가능하면 그 삶이 행복 속에서 이어지며 끝을 맺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 정말 예정대로 된다면, 반드시 끝을 낼 겁니다.”

마지막 말만은, 고개를 들고 율리아를 똑바로 마주하며 전했다.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그렇군요.”

율리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뜬 후, 또 다른 질문을 입에 올렸다.

“그럼 카엘 님은요? 예정대로 일이 끝나면 뭐하실 거죠?”

“저는……”

문득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나를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메린.

그 귀여운 몸짓에 빙긋 웃으며 녀석의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이 녀석이 없는 세상에서 뭘 할지는 이미 굳게 다짐했지만, 역시 그걸 이 녀석 앞에서 말할 수는 없다.

엄청나게 싫어할 테니까.

그렇기에,

“비밀이에요.”

율리아를 향해 웃으며, 나도 그 신물이 나는 말을 입에 담았다.

율리아와 메린뿐 아니라, 온 세상이 모두 듣기를 바라며.

누구든 내 계획을 알고 있다면, 끝까지 입 다물어줬으면 좋겠어.

메린은 귀가 밝으니까 말야.

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조용히 차를 들이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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