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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426화 (426/475)

〈 426화 〉 402화 : 마지막 준비 (3)

* * *

율리아는 또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뜬 후, 옷에 먼지가 묻기라도 한 듯이 툭툭 털면서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관둬야겠어요.”

“뭘요?”

“사실 저 엄청나게 나쁜 짓을 하러 온 거거든요. 근데 역시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별일 아니라는 듯한 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가볍게 치부할 만한 게 아닌 듯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나쁜 짓… 어떤 거요……?”

“이 세상을 죄다 부숴버리는 거? 헤헷.”

“네?!”

헤헤 웃으면서 할 소리가 전혀 아닌데?!

우와, 입 안에 아무것도 없어서 망정이지!

율리아는 내 놀란 얼굴이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었다.

“관둔다니까요~ 안 할 거예요.”

“거참 다행이네요……. 근데 왜 관두는 건데요?”

“카엘 님한테 죽기 싫어서요.”

장난스러운 투로 말하며 찻잔을 기울이는 율리아.

그녀는 목을 살짝 축인 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여자도 슥삭해버리는 사람이니, 얼굴 좀 아는 여자는 아무 거리낌도 없이 슥삭슥삭 해버릴 거 아니에요? 후후, 어쩐지 창조주께서 ‘안 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말씀밖에 안 하신다 했어요.”

그 계획을 떠올린 당시엔 너무나도 울적해서 창조주가 매몰차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제들은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면 곧바로 제재를 가하면서, 대언자인 자신은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며도 그냥 말만 던지는 게 섭섭했다.

늘, 언제나 말만 던지는 게 진절머리 났던 것이다.

“근데 이제 보니까 아니네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데,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신 거였어요. 당신에게 막힐 거니까 하지 말라고, 앞날을 특별히 알려주신 거였네요.”

“……”

“그래서 그냥 열심히 제 일 하려고요.”

그렇게 말하며 긴 숨을 내쉬는 율리아는, 어딘지 후련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율리아는 이번 일을 위해 태어난 거라고 했지?

그럼 이 일이 끝나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계속해서 대언자로 살다가 가는 건가?

“율리아 님, 당신은 이번 일이 끝나면 뭐하실 거예요?”

“저요? 교황이요.”

“………네?”

교황?

뭐야, 그게?그런 게 있었어?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고 율리아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하하! 농담이에요! 으응…… 사실 잘 모르겠어요. 계속 대언자로 살게 되는지 아닌지 여쭤보지 않았거든요. 왠지 알기가 싫어서요. 뭐, 대언자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녀는 어딘지 먼 곳을 보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자그마한 시골에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기도 해요. 율이라는 이름으로.”

“평범…… 음, 절대 안 될 것 같은데요.”

“역시 그렇죠? 그냥 지금처럼 교단에서 떵떵거리면서 사는 게 제일 나을 거 같아요.”

율리아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찻잔을 기울인 후, 이번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알스 사제가 은근히 게으름을 피운다거나, 루크 사제가 저리 보여도 은근히 사람 챙기는 성격이라는 등, 전혀 믿기지 않는 뒷담을 들려준 것이다.

답례로 나 역시 이 자리에 없는 로나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녀석이 히죽거리며 나와 메린을 가지고 음담패설을 했던 거나, 싸움판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튀어나가서 구덩이를 엄청나게 만들던 것들 등등, 머릿속에 또렷이 남은 일들을 전해주었다.

그 결과,

“얏호~ 율리아 님, 카엘 님, 메린 님~ 저희 왔어요~”

로나가 위슨과 블루벨, 두 사람과 함께 사제관에 들어선 순간,

“로나 너 이 녀석, 온갖 망신은 다 뻗치고 다녔구나아아아!!”

“와아아악!!”

율리아가 유리창이 흔들릴 만큼 높디높은 고함을 내지르며 녀석의 뺨을 뜯어버릴 기세로 마구 쭉쭉 늘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로나는 두 볼이 완전히 빨갛게 부은 채 테이블에 엎어져 있게 되었다.

원리는 잘 모르나 녀석이 치유 기도를 할 수 없도록 막았다는 듯했다.

그걸 쿡쿡 찌르는 위슨의 손을 찰싹 쳐버린 후, 나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이 씩씩거리는 율리아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일 바로 출발하는 건가요?”

“여러분이 준비가 되셨다면요.”

그 말에, 위슨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꺼냈다.

“전 준비됐어요. 오늘 저녁에 물약 좀 만들어야 하지만.”

“나도 문제없어. 화살 조달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단검도 멀쩡하고 말야.”

뒤이은 블루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율리아는 테이블에 엎어진 채 훌쩍이고 있는 로나의 볼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럼 내일 아침 여섯 시에 북쪽 문 앞에서 모이는 걸로 해요. 원래 등산은 동틀 때 하는 거라고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후, 나는 차를 마시기 시작한 위슨과 블루벨에게 물었다.

“근데 둘은 잘 데 있어?”

“빈집 빌리기로 했어요. 물약 신나게 만들 수 있으니 참 잘됐죠. 이야~ 이 마을에 있는 숲, 좋은 재료가 엄청나게 많던데요? 굉장한 거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들뜬 얼굴로 말을 늘어놓는 위슨.

이 자식, 설마 숲에 있는 생물을 멸종시킨 건 아니겠지?

블루벨도 마을의 빈집에 머물기로 한 건 마찬가지이나,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하…… 술이 없다는 게 말이 돼? 맥주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면 사과나 벌꿀 술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우으…… 술 먹고 싶어어…….”

“……”

그냥 술 중독이 도진 거였다.

하긴, 안 마신 지 며칠 됐지?

말없이 위슨을 보자,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주겠다는 거군.

불쌍하기도 하지.

뭐, 술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물 구하기도 힘든 마당이었는데 뭔 술이야, 술은.

식량도 점점 더 구하기 힘들어지고 말이지?

“고향에서 안 가져왔어?”

“배 채울 것도 부족해지는 판에 뭘 취하려 드냐고 욕 먹었어…….”

음, 보호자가 멀쩡한 사람이라 참 다행이야.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블루벨의 앞에 찻잔을 들이밀며 말했다.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이거나 쭉쭉 마셔. 기왕 이렇게 된 거 술 좀 줄여라, 술꾼아.”

블루벨은 내가 내민 찻잔을 들고는,

“………이건 술이야, 이건 술이야, 술, 술, 술………”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한 모금 마시더니 헤벌쭉 웃는 것이었다!

돌겠네, 진짜.

“야, 카엘, 저것도 엘프의 힘이냐? 차를 술로 만드는 거.”

“절대 아닐걸.”

저게 바로 자기최면인가 뭔가 하는 거지?

이야……, 엘프 대단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날 저녁, 나는 메린과 함께 아버지를 찾았다.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버지가 김이 나는 솥을 들고 놀란 눈으로 우리를 멀뚱멀뚱 보시며 말했다.

“둘이 웬일이냐?”

“아버지 혼자 저녁 드실 거 같아서요.”

내 방을 빼앗아간 루크 사제는 율리아를 모시러 신전으로 돌아갔다.

마을 주변에 보호 결계를 쳤고, 또 율리아가 데려온 사제들도 있으니 자경단장 등의 다른 사람도 각기 가족에게 돌아갔을 터.

그래서 혼자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집 안엔 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에도 한 사람 분의 식기만 놓여 있는 걸 보니, 누구 손님이 올 예정도 아닌 것 같다.

오길 잘했군.

“메린이 구운 거예요. 같이 드시죠?”

손에 든 파이를 가리키며 묻자,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이며 테이블을 턱으로 가리키셨다.

“뭐, 안 될 것 없지. 앉아라.”

“수프 넉넉해요?”

“그럼. 식기 어디 있는지 기억하지?”

“그럼요.”

집을 떠난 지 반 년도 안 됐는데 까먹을 리가 있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찬장에서 두 사람 몫의 그릇과 접시, 그리고 스푼과 포크를 꺼내어 테이블에 놓았다.

그렇게 시작된 저녁 식사.

아버지는 파이를 한 입 먹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야, 메린, 석 달 전보다 더 솜씨가 좋아진 것 같구나. 카엘, 너 결혼하면 살찌겠다. 완전 돼지가 되겠어.”

“………될 리가 없잖아요. 조절할 수 있거든요?”

자신은 없지만 일단 객기를 부려보았다.

만약 이 녀석이 매일매일 밥을 해준다면……음, 살은 확실히 찌겠군.

그럼 나도 몸집이 좀 커지려나?

아버지는 파이를 마저 입에 털어 넣고 흐뭇이 웃었다.

“이런 날엔 맥주가 있어야 하는데. 뭐, 너희 둘 결혼식 때엔 신나게 마실 수 있겠지.”

“……”

“……네 엄마가 너희 둘이 그렇게 붙어 있는 거 보면 굉장히 좋아했을 텐데.”

무언가 여러 감정이 일렁이는 얼굴로 싱긋 웃은 후, 아버지는 크게 숨을 내쉬고서 말을 이었다.

“그거 아니? 네 엄마는 꽤 전부터 너희 둘을 짝지어주려 했다. 성격이 정반대여도 서로 의지하고 있으니 되게 잘 살 거라면서.

그 말을 들었을 땐 솔직히 못 믿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확신이 들더구나. 아, 카엘 이 놈, 메린 없으면 글러먹겠구나 하고.”

“아니, 뭐 그런 걸 확신하고 그래요?!”

여전히 아들에 대한 신뢰가 비뚤어져 있는 아버지였다.

더 기가 막히는 건, 그 얘기가 또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돌겠네, 진짜.

……근데 전부터 확신하셨다고?

그럼 내가 진짜로 꽤 옛날부터 이 녀석을 좋아했다는 거 아냐.

그걸 엄마와 아버지는 다 알고 계셨던 거고!

“………아으.”

“뭘 혼자 갑자기 얼굴 빨개지고 그러냐? 하…… 메린, 이런 놈을 맡게 되어서 정말 안타깝구나. 그간 고생이 많았지? 근데 그게 끝나지 않게 됐으니 내가 무어라 할 말이 없다.”

고생이… 많았다고……?

누가 할 소리인데?!

처박았던 고개를 홱 들었다.

“저예요, 저. 제가 고생 엄청나게 했거든요? 앞으로도 고생하는 것도 저이고 말이죠? 이 녀석 말리는 게 얼마나 힘든데,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이 녀석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메린이 너 돌보는 시간이 훨씬 길었어. 언제는 메린이 자리를 비우면 발광하면서 울고불고 난리치기도 했잖아. 기억 안 나냐?”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뻥 치지 마세요!! 몰라, 기억 안 나!!”

아냐아냐, 말도 안 돼. 내가 그랬을 리가 없어.

메린이 없다고 난리를 피웠다고?!

내가 그런 미친 짓을 했을 리가……!

“아, 맞아. 어렸을 때 그랬었지? 모험가들한테 시달리고서.”

“………엉? 내가 그런 적이 있었어?”

했었다.

기억력이 끝내주는 메린이 그렇게 못을 때려박듯 확인을 해주었다.

“있었는데? 진짜 기억 안 나냐? ……와, 아저씨, 얘 진짜 기억 안 나나봐요.”

“뭐, 떠올리기 좋은 추억거리도 아닌데 잘됐지. 메린, 괜히 얘기해주지 마라. 내일 산에 간다며? 괜히 잠 설쳐서 상태 안 좋아질라.”

메린은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야?

진짜 기억 안 나는데?

그러나 아버지도 메린도, 그 일에 대해선 가르쳐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이후로 아버지는 그간 마을에서 일어났던 일을 들려주시거나, 나와 메린이 어렸을 때의 일을 꺼내며 나를 놀려대실 뿐이었다.

그 사악한 폭거에 대항하다보니, 어느새 내가 그런 망측한 짓을 저질렀었다는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래, 언제 출발하냐?”

저녁 식사 후, 아버지는 우리를 배웅하며 짧게 물으셨다.

“내일 아침 여섯 시에 북문에 모이기로 했어요.”

“뭐, 등산은 아침 일찍 해야 되는 법이니……. 배웅하긴 어렵겠군.”

“하지 마세요. 뭘 새삼스럽게.”

석 달 전에 조용히 여행을 떠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냥 그렇게 가고 싶다.

경계를 서고 있을 자경단원 몇 명만 보는 걸로 충분해.

사람들이 모이면 괜히 긴장만 되지.

“음, 마을 사람 다 모아서 ‘무사귀환을 빕니다, 용사님!’이라고 인사해주면 네가 말에서 떨어지겠지? 왠지 좋은 구경거리가 될 것 같지 않냐?”

“네, 안 될 거 같아요.”

“될 거 같은데.”

“안 된다니까 그러시네!”

진짜 변하질 않으시는구만.

정식으로 촌장이 되셔도 이러고 사실 거 같아.

“그래도 하는 게 낫지 않냐? 너 사람 많은 거에 익숙해져야지. 결혼식 때도 축 쳐질래?”

“………그건 그때 걱정하면 되죠.”

“뭐, 그것도 그렇구나. 일단은 저거부터 정리해야지.”

아버지는 산이 있을 북쪽을 내다보며 긴 한숨을 쉬셨다.

그런 뒤,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짤막한 인사를 건네셨다.

“잘 다녀와라.”

“끝날 때까지 무사하세요.”

“메린도, 이 놈이 미친 짓 안 하게 잘 봐주고.”

“걱정 마세요. 안녕히 주무세요.”

고개를 끄덕이고, 아버지와 집을 뒤로 하고 메린과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간 걷고 난 뒤, 나는 집이 멀어진 걸 확인하고서 나지막이 물었다.

“그걸로 됐냐?”

“뭐가?”

“아버지랑 인사하는 거. 껴안거나 뭐 그런 거 안 해도 돼?”

“왜?”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내 말에, 메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엥? 마지막일지도 모르면 껴안으면서 인사하고 그래야 되는 거냐?”

“꼭 그래야 되는 건 아닌데,”

나는 녀석의 손을 꽉 맞잡으며 말을 이었다.

“난 너 껴안을 거거든.”

"그래?”

“응.”

아주아주 꽉.

아버지는…… 뭐, 좀 섭섭해하시긴 해도 혼은 안 내실 거다.

우리 부자(?子)는 원래부터 그렇게 착 달라붙는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잠시 후, 우리는 오늘 머물기로 한 집에 다시 돌아왔다.

물을 한 솥 가득 끓이고, 함께 목욕을 한 다음, 나는 길에서 했던 말을 지켰다.

혹시라도 하루 일찍 없어져버리지 않도록, 메린이 아직 여기에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도록.

침대에 함께 누운 메린을 아주아주 꽉 껴안았다.

그게 굉장히 맘에 든다는 듯이 웃는 메린이, 정말 너무나도 가슴 시리게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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