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432화 (432/475)

〈 432화 〉 408화 : 대재앙의 재림 (1)

* * *

깊은 솥, 그 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분노가 느껴진다.

이 자리에 우리가 들어온 것,

이 순간에 우리가 보이는 것,

그리고 이 상황에 말소리를 내는 것.

그 모든 것이 불쾌하고 불쾌해서 미칠 지경이라는 듯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린다.

­실을 끊을 기회를 저버린 어리석은 꼭두각시 주제에 나를 능멸하느냐……! 역할을 제대로 완수하지도 못하는 실패작 년이……!

“어머머, 누구 보고 실패작이래? 같잖은 반항심으로 쫓겨나서 화풀이하다 산에 박혀서 절여지고 있던 등신 도마뱀 주제에!”

기가 막히다는 듯이 대꾸한 율리아는, 곧 모멸과 조롱이 가득한 웃음과 함께,

“푸흐흣! 그렇구나~ 열받는구나~ 암, 그렇겠지~ 우리가 생각보다 엄청 빨리 왔죠? 원래는 우리가 저 문 열면 폼 재면서 불 뿜으려고 했죠? 당장이라도 밟아 죽이고 싶은데 몸이 안 움직이죠? 아직도 갇혔죠? 푸하하하! 꼴 좋다, 병신아!”

­크……!!

대언자는 차치하고,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이십 대 여인이자 최고사제이자 전직 공주로서도 지어서는 안 되는 표정과 말투로 놈을 비웃는 것이었다!

하하, 말만 들으면 누가 악당인지 모르겠는데?

그보다 이 대언자님, 표정이 너무 굉장해서 오래 보면 안 될 것 같아.

율리아는 창조주를 대리하는 대언자이고, 저 수정 속에 있는 건 그녀의 주인에게반기를 들어 쫓겨난 추방자 아트라토스이다.

그러니 서로를 원수처럼 대하는 게 당연하지.

근데 저 둘,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 아냐?

어째 십 년 이상을 서로 으르렁거린 것 같은 말투인데.

“아~하하핫! 아무리 빨라도 반년은 되어야 겨우 고개 움직일 수 있을 텐데! 근데 석 달 만에 와버렸네? 숙적을 앞에 두고 입 쫑알대는 것밖에 못하니 이거 불쌍해서 어떡하나! 사랑을 모르는 고독한 노인네라고 갇혔는데, 이번엔 쪽도 못 쓰고 그냥 뒈지겠네! 푸하하핫!”

­닥쳐라, 가증스러운 년아!!

지이잉—!

놈의 함성에 수정이 떨리면서 날카로운 진동이 느껴졌다.

율리아조차 그 울림은 조금 힘겨운지, 표정을 찡그리고서 자신의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놈은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한 걸로 모자라다는 듯이, 수정을 웅웅 울리면서 말을 퍼붓기 시작했다.

­네년이 절대자에게 교태를 부렸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냐!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용사가 발각되지 않을 수 있었으랴!

크고 작은 마을들에 난리를 일으켰다.

마을을 습격하도록 몬스터들에게 지령을 내리는 것부터 시작해, 공포에 질린 사람에게 악마를 보내어 이단으로 만들었다.

어느 영지의 성에서, 마을의 구석에서 산제물을 바치게 하여 지옥의 거주자가 강림하도록 만들었다.

용사를 꾀어낸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그러나 놈의 시도는 모조리 실패해버렸다.

악행에 물든 인간들을 통해 수배까지 했건만, 용사의 행방은커녕 이름과 생김새조차 알아내지 못한 것이었다.

­필시 네년이 빌었겠지! 용사의 얼굴이 밤의 자녀에게 기억되지 않도록! 그러니 나베리우스와 비네의 눈이 필시 멀어버린 것이리라! 그러지 않고서야 놈들이 ‘갈색머리에 미덥지 않은 인상인 인간 수컷’이란 말만 전했겠느냐! 사진도 얼굴에 그늘이 져서 보이지 않고!

울분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나타내듯, 수정이 한층 더 환한 빛을 내며 날카로운 진동을 마구 뿜어냈다.

나베리우스…… 부엉이탑에 있던 그 까마귀 잡놈 이름이었지?

근데 비네는 누구야? 그런 놈이랑 만났었나?

그리고 사진이란 건 또 뭐고?

얼굴에 그늘 운운하는 걸 보면, 사람 얼굴 생김새를 그리거나 하는 것 같은데…….

뭐, 어쨌든 그간 악마들의 습격을 받지 않았던 건, 놈들이 정말로 내 얼굴을 몰랐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

………설마 흔하게 생겨서 못 알아봤다는 건 아니겠지?

응, 아닐 거야. 그딴 이유는 절대 아닐 거라고.

율리아가 뒤에서 무언가 힘을 써준 덕분이었겠지.

그래, 그럴 거야!

그런 게 분명해……!!

“야, 카엘,”

불현듯 메린이 내 어깨를 쿡쿡 찌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저 말, 네가 잡스럽게 생겨서 놈들이 못 알아봤다는 뜻 맞지?”

“……아냐! 율리아 님이 어떤 조치를 취하셔서 못 알아봤다는 소리야!”

반사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부정했으나,

“저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

율리아가 생긋 웃는 얼굴로 단칼에 무너뜨려버렸다.

아냐…… 난 잡스럽게 생기지 않았어……!

왕자처럼 무지하게 잘생기진 않았지만, 그래도 인상에 아예 남지도 않을 만큼 흔한 얼굴은 아닐 거라고……!

상황에 걸맞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바닥에 엎드려서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내 등을 가볍게 통통 두드리는 손길과 함께, 로나의 다정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기운 내세요, 카엘 님! 못생겼다는 얘기도 아닌데요, 뭐. 그리고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악마들은 외견으로 인간을 구분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잘 못 봤을 거라고요. 아마 그 때문일 거예요!”

“로나…….”

감정이 별로 없는 자그마한 사제가 사람을 위로해주는 것에 비해,

“나 참, 뭐 그런 걸 가지고 호들갑이니? 너도 네가 흔하게 생겼다는 건 알았을 거 아냐. 덕분에 무사히 다녔다는 건데 자랑스러워하지 그래?”

“아니, 사제님 말이 맞을 거야. 저렇게 얼빵한 인상도 잘 없다고. 그런데도 못 알아봤다는 건, 놈들이 인간 얼굴 구분을 잘 못하는 거야. 확실해.”

“………”

감정 상태가 멀쩡한 두 새끼는 상당히 무정한 말을 툭툭 내뱉고 있었다.

나쁜 자식들 같으니.

덕분에 텅텅 빈 마음으로 다시 부스스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율리아는 그 말을 되풀이하며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방금 전까지 기품을 저 지하 바닥에 던져버리고 신나게 비웃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굉장히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저 바랐을 뿐이다. 네놈의 봉인이 풀리는 데에 걸리는 일 년 동안, 멸망의 징조를 보여주시기를.”

“……!”

멸망의 징조를……

보여달라고 했다고……?

심장이 죄이는 것 같다.

등줄기가 섬찟해지면서 온 몸에 오싹함이 감돈다.

잘못 들었을 리가 없는 그 말이 환청이길 바라며, 율리아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율리아 님… 방금 그 말, 정말인가요……?”

“……”

“지금 저 바깥에 일어나는 이상현상들, 당신이 일으킨 거예요?!”

“아니요.”

그녀는 단호하게 부정하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런 뒤, 교단 사제들의 그 무심하고 무정한 눈으로 나를 똑바로 마주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일으킨 건 창조주이지, 제가 아니에요. 저는 바랐을 뿐이니까요.”

“그게 그거잖아요!”

“다르죠.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저도 몰랐거든요.”

율리아는 작게 한숨을 쉬고서 수정을 올려다보았다.

“일이 언제 시작되냐고 여쭈었을 때, 그분은 그 답 대신 기간을 알려주셨어요. 언제 시작이 되든, 저 놈의 봉인은 일 년에 걸쳐 풀릴 것이라고.”

아트라토스가 봉인에서 풀려나는 순간, 지상은 또 다시 불바다로 변할 터.

육백 년 전엔 엘프들이 떼로 달려들어서 놈이 날뛰는 걸 어느 정도 막았으나, 이번엔 그러한 일을 기대할 수 없다.

그녀가 태어나기도 훨씬 더 전에, 엘프들은 수호자의 직무를 내버렸으니까.

“그러니 봉인이 완전히 풀리기 전에 끝내야 했어요. 말씀드렸듯이, 천상은 열심이 없어요. 우리가 너무 불리하지 않도록, 그래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안배해주지만…… 그뿐이에요.”

미리 경고해주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과 판단에 따른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다.

다른 모든 생물들에게 그러듯이, 창조주는 자신의 대언자에게도 냉담했다.

“이 세상의 구조처럼,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것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도록 했으면서. 놈의 봉인이 언제부터 풀리기 시작하는지, 그냥 가서 때려잡으면 되는 건지 등등, 정말로 알고 싶었던 건 무엇 하나 제대로 가르쳐주시지 않았죠.”

그렇기에 늘 초조해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왕족의 신분까지 이용해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갖추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육백 년 전에 다섯 종족이 결속했던 것만큼 전력을 갖출 수는 없었다.

때문에, 율리아는 위기감을 조성하기로 했다.

“놈의 봉인이 풀리기 시작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징조를 내려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래야 다른 종족도 필사적으로 대항하고 협력할 테니까. 근데…… 그게 설마 태를 닫아버리는 것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멸망에 대한 징조답기는 하지만요.”

자신 역시 로나에게 보고를 듣고 나서야 알았다고 말하며, 율리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뒤, 피로가 엿보이는 눈으로 나를 보면서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오해는 마세요. ‘불구덩이’가 올라오는 건, 제 기도가 아니라 저 놈이 일으키는 거니까요. 그 커다란 구덩이 속에 있는 건 놈이 내뱉었던 불꽃. 즉, 저 놈의 의지예요. 이 주변에 내리쬐는 햇볕처럼, 대륙을 태우는 저주랍니다.”

­그러니 네년이 실패작이라는 것이다.

비웃음이 담긴 울림에, 율리아의 얼굴이 곧바로 딱딱하게 굳었다.

놈은 마치 그게 보인다는 듯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 패배와 멸망의 길을 걸었으니, 실패작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기도는 네년의 동족에게 크나큰 절망과 수없이 많은 죽음을 안겨주었다. 덕분에 꽤 많은 영혼이 지옥에 떨어졌지.

그러니 더더욱 원통하도다.용사의 인상이 이리 하찮지만 않았어도, 이곳에 결코 당도하지 못했을 것을……!!

“읏……!”

율리아가 이를 악물며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게 보였다.

살짝 엿보이는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다.

이 자식……!

곧바로 검을 뽑아, 낯빛이 창백해진 그녀의 옆에 서서 놈을 겨누었다.

“너 이 새끼, 말 다했냐?! 돌덩어리 주제에 누구 보고 인상이 하찮다는 거야?!”

­내 비록 이러한 모습이나, 그리하여도 네놈보다는 인상이 강하겠지. 하, 지금도 네놈 손에 들린 검만 또렷하구나. 하긴 그러겠지. 네놈은 그저 성검을 움직이게 하는 자루. 그 이상의 가치는 없으니!

“으으윽!! 절대 용서 못해!!”

사실(fact)로 공격하다니, 이런 비열한 자식……!

나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충격을 받진 않았다.

하지만 날 성검 자루라고 부르다니 용서 못해!!

“……어라? 그걸로 화내는 거예요? 저 놈이 저에게 한 말 때문이 아니라……?”

멍하니 중얼거리는 율리아.

나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정면의 커다란 수정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제가 왜 그걸로 화를 내요? 저 놈이 없는 소리한 것도 아닌데.”

“……”

“그 기도를 올린 게 죄로 판정되는지는 몰라요. 난 사제가 아니니까. 하지만 딱히 좋게 보이진 않네요. 그런 기도를 올리지 않았다면, 굶어 죽는 사람이 훨씬 적었을 테니까요.”

마을도 훨씬 더 적게 멸망했을 것이고, 절망에 빠져서 악마에게 영혼을 바치는 사람도 훨씬 적었을 것이다.

우유도 계속 마실 수 있었을 테고.

“하지만 이런 난리에 아이가 생기거나 태어나면 훨씬 힘들 테니, 차라리 안 생기는 게 낫긴 하죠. 저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봤으니까 더 서두른 것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그에 대해선 아무 말 안 할 겁니다.”

“………”

“제가 궁금한 건 이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걸로 저걸 푹 찌르면 끝나는 건가요?”

성검을 가리키며 묻자, 율리아가 크게 숨을 내쉰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예요. 놈을 봉인한 건 마법이지, 신성력이 아니거든요. 심장을 찌르는 게 가장 빠르겠지만…… 저 상태에선 어디가 심장인지 보이지 않으니, 그냥 찔러서 죽을 때까지 힘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어요.”

­내가 그러도록 내버려두리라 생각하느냐?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홀을 울리면서 수정의 빛이 꺼져버렸다.

그를 대신하듯이 바위로 된 기둥 곳곳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야광석.

햇빛이 없는 곳에서 빛을 내는 그 신비한 돌이 기둥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았다.

빛이 꺼진 덕에 보이게 된 수정 속엔, 거대한 드래곤이 두 눈을 감은 채 둥실 떠 있다.

심장을 찌르는 건 좀 힘들 거 같고, 발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겠는데?

­공략? 큭큭, 네놈은 하지 못한다.

“……!”

내 속을 읽었다는 듯이 울린 목소리.

뒤이어, 굳게 닫혀 있던 놈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불타는 듯한 주홍빛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감정에 치우쳐 그릇을 미리 처치하지 않은 네놈은, 절대로 해내지 못해……!

단번에 놈의 말뜻을 깨달았다.

“닥쳐!! 애인도 없는 놈이 뭘 알아!! 일분일초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심정을 네놈이 알기나 해?! 그리고 여기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당연히 같이 오지! 메린은 강하니까!!”

­크크크…! 그리고 이곳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서도 그를 베지 않았지! 네놈의 그 선택이 나를 승리로 이끄는구나, 용사여!

………그리고 놈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도.

­마침내, 때가 되었도다.

놈의 눈동자가 움직인다.

두 눈이 자아내는 웃음이 한층 깊어진다.

털썩.

“하……!”

크게 숨을 내뱉는 소리와 함께 들린, 무언가 쓰러지는 듯한 소리.

뒤를 돌아보자, 메린이 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은 채 엎드려 있다.

“메린!”

황급히 다가가려 했는데, 율리아가 갑자기 내 팔을 꽉 붙잡았다.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녀의 팔을뿌리치려고 해도, 힘이 세서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아니, 이해를 못하겠네.

왜 막는 거야?!

­밤의 시대가 도래하리니, 여명이 찾아오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야광석의 빛이 한층 더 진해진다.

무심코 천장을 올려다보자, 파란 하늘이 엿보이던 작은 틈이 시커먼 어둠에 삼켜져 있는 게 보인다.

밤이 되었구나.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크읏……!”

“……!”

괴로운 듯이 신음하는 메린.

그 주위에 붉은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근처에 있던 로나와 위슨, 블루벨이 곧바로 낯빛을 바꾸어 녀석에게서 물러난다.

옆에서 붙잡아줘도 모자랄 판인데.

나라도 가서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은데!

“이거 놔요! 메린이……!”

“지, 금……”

녀석이 힘겹게 고개를 든다.

창백해진 얼굴로,

호소하듯이 나를 바라본다.

“지금, 나를 죽여……!”

“윽……! 싫어, 멍청아! 미리 포기하지 마!”

율리아에게 붙들린 채, 녀석에게 손을 뻗으며 외쳤다.

“난 너 못 죽여! 내가 죽일 건 네 몸을 빼앗으려는 변태 도마뱀 새끼이지, 네가 아니야! 그러니,”

­그러니 나에게 내놓거라! 그것이 네 운명이니라!

내 말을 빼앗으며 놈이 크게 포효했다.

직접 입을 벌려서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뱃속을 뒤집을 듯한 울림이 홀 안에 가득 퍼졌다.

자연히 무릎이 꿇려 낮아진 시선 끝에, 메린이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닿기에는 너무나도 멀다는 걸 알면서도 마주 손을 뻗는다.

어쩌면 닿을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희망에.

그리고 늘 그랬듯이,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카엘…….”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하나 또르르 흘러내린다.

많은 감정이 담겨 있을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자마자,

붉은 기운이 그녀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메리이이인!!”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그녀의 이름만을 외쳤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