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1화 〉 Epilogue (2)
* * *
눈을 뜬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한 호숫가, 그 근처에 덩그러니 놓인 테이블에 앉아있음을 깨닫는다.
이어서 눈에 들어온 건, 테이블 위에 차려진 소소한 다과.
두 찻잔에선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고, 테이블 중앙에 놓인 접시엔 수수한 모양의 과자가 담겨 있다.
여기가 대체 어디인가?
어째서 내가 이런 데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인가?
그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과자를 보던 시선을 들자마자 답을 알아차렸으니까.
멍하니,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로브 비슷한 긴 옷을 입은 남자가 깍지를 낀 채 가만히 앉아 있다.
후드를 쓰고 있어서 코와 입만 보이지만,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뒤에는 비슷한 차림을 한 두 사람이 양옆을 지키듯이 서 있는데, 역시 후드를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저게 복장 규정인 모양이다.
“또 뵙네요.”
“그래, 또 보는군.”
남자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알고 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절대자의 대적을 물리치는 ‘검’이고, 평소엔 찬란히 빛나는 광원 주위를 희뿌연 연기 같은 형태로 맴돈다는 것을.
그리고 몇 년 전에는 성검의 형태로 지상에 내려왔었다는 것도.
그뿐 아니라, 나는 이 호숫가를 보는 게 이번이세 번째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한 것들을 알고 있는 이유까지도, 전부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그 결과,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테이블을 쾅 내려치고 말았다.
“뭐야, 나 또 죽었어요?!”
당연하지. 매일 밤, 그것도 한 달 내내 적게는 세 번, 많게는 다섯 번씩 일을 치렀는데 안 죽고 배겨?
“………”
아니, 중간중간 죽을 것 같긴 했는데 진짜 그 이유로 죽었다고?
왜 꼭 그딴 불길한 예감만 들어맞는 건데?
지극히 황당하긴 하지만…… 저 존재가 말하는 거니 진짜 그런 거겠지.
나름 행복하다면 행복한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이제 해방인가……
……라고 할 줄 알았어?!
지랄하지 마, 씨발!
하고 많은 사인(死?) 중에 왜 하필 그딴 게 걸리는 건데?!
아니, 애초에 내가 죽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주마등도 뭣도 안 봤고, 그냥 평소처럼 의식이 아롱아롱해진 채 메린의 온기를 느끼면서 잠에 빠졌구만!
“게다가 일단 자고 나면 그럭저럭 멀쩡했다고요! 근데 왜 갑자기 죽냐고요, 이게 말이 돼?!”
말이 안 되지? 당연해. 내가 농담한 거거든. 자네가 죽긴 왜 죽어? 그냥 자는 동안 잠깐 면담하려고 영혼만 불러들였을 뿐이야.
“……………”
아, 존나 때리고 싶다.
낄낄거리면서 과자 집어먹는 거 진짜 열받네.
근데 내가 뭘 어쩔 수 있는 존재가 아니잖아?
아오, 진짜 천상에 편지 보내고 싶다!
“그래서 뭔데요? 사후관리 뭐 그런 겁니까?”
과자를 와작와작 씹어 먹는 걸로 분을 삭히면서 묻자, 그가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약간 달라. 스카우트…… 그러니까, 일자리를 소개하러 온 걸세.
“아, 안 해요.”
말도 안 들어주고 거절하는 건가? 이런, 우리 사이에 너무 매정하군 그래.
상처받았다는 듯이 가슴을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검’.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시종 중 하나가 그의 어깨를 위로하듯 가볍게 두드렸다.
다른 시종은 왠지 좀 마뜩잖아 하는 분위기이다.
얼굴은 안 보이지만.
그나저나 ‘우리’는 무슨.
나는 눈가를 닦는 시늉을 하는 그에게 톡 쏘아붙였다.
“이 정도면 꽤 친절한 편 아닌가요? 내킬 때만 힘 빌려주면서 맘대로 남의 속을 들여다본 상대인데.”
아니지. 필요적절한 때에 힘을 빌려주고, 자네가 엇나가지 않도록 따뜻이 지켜봤지. 그러니 아직 감이 무딘 자네를 구할 수 있던 것 아니겠나? 이따금 몸을 움직여주기도 하면서 말야.
“……뭐, 그거에 도움 많이 받긴 했죠.”
뜬금없이 고개를 숙이라는 둥 경고한 것 외에도, 갑자기 몸이 옆으로 틀어지거나 팔이 움직이는 때가 간간이 있었다.
메린 덕에 싸움 실력이 오르면서 차츰차츰 없어졌는데, 그게 전부 이 ‘검’이 일으킨 기현상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여기 앉아서 알게 된 거지만.
“그래서 무슨 일자리인데요?”
이거 읽어보게.
그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스윽 내밀었다.
양피지라니 참 고풍스러우시네.
어디 보자……….
<모든 시공간의="" 중대사건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기록할="" 수="" 있는="" 특대의="" 기회!="" 영구히="" 보존될="" ‘끝없는="" 장서관’에="" 당신의="" 저작물을="" 전시해보세요……=""/>
……뭐지, 이거. 계약서가 아니라 그냥 광고지 같은데.
그보다 기록에…… ‘끝없는 장서관’이라고?
어, 이거 설마……
종이에서 눈을 떼고 정면을 바라보자, 찻잔을 기울이던 그가 나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장서관 기억하지? 거기 책장을 채워줄 기록가가 필요해. 자네 이것저것 적는 거 좋아하니 적임일 것 같은데.
“흠…… 근데 여기 잘못 쓴 거 아니에요? <기념비적인 첫="" 채용자="">라는데, 제가 처음이 아니잖아요.”
그때 식당에서 본 기록자만 열 명이 족히 넘었었는데 말이지.
설마 이거 재활용한 건가?
세상에, 다른 곳도 아니고 천상에서 계약서 문장을 재활용하다니……!
아니, 제대로 쓴 걸세. 자네가 최초의 기록자가 될 거거든.
“네? 제가 왜 최초예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죠?”
말이 안 되잖아.
내가 방문했을 땐 이미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상태였다고.
당연히 ‘최초의 기록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말야.
그런데 내가 최초의 기록자가 될 거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원.
어리둥절해서 눈만 끔벅이는 나에게,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간단해. 자네의 영혼을 장서관이 막 문을 열었을 때로 보내는 걸세. 천상은 지상의 시공간에 구애되지 않거든.
“그럼 그때 있던 ‘최초의 기록자’는……”
맞아. 자네야. 허나 그건 나와 면담하고 있는 자네가 아닐세. 완전한 별개의 존재로 생각해도 되니 신경 쓸 것 없어.
“그럼……”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제가 이걸 거절해도 아무 이상도 없다는 말씀이죠?”
먼지만큼도 상관없어. 거기 있는 건, 다른 곁가지…… 평행세계의 자네이거든. 용사가 되어서 아트라토스를 보내버린 후, 메린과 결혼해서 살다가 이 계약서에 서명한 카엘 에스트렐을 한데 모은 존재일세.
빙그레 미소를 띤 채,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건 장서관에서나 해당되는 이야기야. 기록 일은 자네가 오롯이 하게 될 걸세.
뭔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어…….
내 표정에서 그걸 느꼈는지, ‘창조주의 검’은 하하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리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쉽게 말해, 자네를 비롯한 여러 평행세계의 카엘 에스트렐이 각자 현장을 뛰면서 기록하면, ‘완전체 카엘 에스트렐’이 며칠에 한 번씩 장서관에 가서 그걸 죄다 편집하고 출판하는 거야.
즉, 카엘1와 카엘2는 각각 맡은 시대의 사건을 계속 기록한다.
그 일이 끝나면 조금 쉬다가 다른 걸 쓰러 가는, 그냥 평범하게 일하러 다니는 모습으로 비치겠지.
그와 별개로, 카엘0는 며칠에 한 번씩 장서관에 나타나게 된다.
카엘1과 카엘2가 기록한 작업물들을 한꺼번에 편집 및 출판하기 위해.
물론 이 셋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결코 없다.
……그렇게 말을 마치고서 차를 홀짝이는 그를 보며 잠시간 눈을 멀뚱거린 후, 나는 멍하니 질문을 던졌다.
“뭘 그리 복잡하게 해요?”
자네에게 주는 특혜일세. 모든 세계의 처음이자 마지막 용사로 일한 뒤에도, 우리 아버지, 존귀하신 창조주의 뜻을 따라 계약을 체결해주는 보답이야.
아직 모르겠나? 자네는 지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자네 자신으로서 세상을 보고 듣고 접할 수 있다는 걸세.
생전에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도 지금 놀란 눈을 깜빡이고 있는 나 자신으로서.
즉, 죽은 뒤에도 내 삶은 끝나지 않는 것이다.
살아있는 게 아니니, 엄밀하게는 ‘삶’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는 건……!
“메린이랑 영원히 사는 거군요! 아싸!”
………
응? 어째 어이없어 하는 것 같은 분위기인걸?
그의 뒤에 선 시종 하나는 웃음이라도 참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고, 다른 하나는 한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엉뚱한 소리를 한 모양인데…… 그렇게까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메린은 굉장히 강하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왜요, 메린한테는 뭐 제안 같은 거 안 했어요? 성녀님이라 불린 적도 있는데.”
채용 관련 사항은 기밀이야. 그건 그렇고, 나 참, 어떻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메린과 사는 걸 떠올리나? 아내 사랑이 정말 지독하구먼.
“지극한 거겠죠. 메린에겐 아직 이런 특별한 제안 같은 거 안 하셨다면,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 녀석이 하겠다고 하면, 그래서 제가 아는 그 녀석의 모습인 채로 세상 끝날까지 존재하게 된다면…… 기록가의 일, 기꺼이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계약서를 다시 돌려주자, ‘창조주의 검’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켰다.
그 기침 같은 소리는 곧 너털웃음이 되었고, 이내 배를 잡아야 할 만큼 큰 폭소가 되어 호숫가를 웅웅 울렸다.
그와 같이 한참을 웃은 후, ‘검’은 숨을 고르는 중간중간 킬킬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나 원, 둘이 정말 천생연분이군 그래.
“그 말씀은……”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저은 다음, 계약서를 다시 품에 넣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기밀일세. 여하튼 자네의 뜻은 잘 알았어. 그럼 하나만 확인하지. 메린이 자네와 똑같이 대답한다면, 자네가 이 일을 받아들인 걸로 봐도 되겠는가?
“제가 하겠다고 하면 자신도 한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예에, 뭐. 그렇게 처리해주세요.”
명색이 천상의 존재이니, 일 부려먹겠다고 속여서 계약하게 하고 그러진 않겠지.
그래봐, 어림도 없는 짓이라 해도 반드시 따지고 들 테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모가지이든, 어딘가에 있을 광원이든 깃펜 꽂아버릴 거야!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게. 성질 여전하구만.
“……크흠. 아, 근데 얘기가 됐으면 또 알려주러 오실 건가요?”
아니, 징조를 내리겠네. 물론 자네나 메린은 그 의미를 모를 거야. 허나 영혼에 각인되었으니, 자네들의 삶이 끝나는 즉시 새 일을 시작하게 될 걸세.
흠…… 그래, 오늘 점심으로 맥주파이를 먹게 되면 계약이 성사된 것으로 알게나.
“……”
아니, 뭔 징조가 그래?
너무 생활맞춤인 거 아냐?
어이가 없어서 한 마디 하려는 찰나, 그가 씨익 웃으면서 먼저 손을 퉁겨버렸고,
“………”
멍하니 천장과 마주본 채 눈을 깜빡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지독하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커튼이 완전히 젖힌 창문으로 들어온 따스한 봄볕이 방을 환히 밝히고 있다.
서랍장 위에 올려진 도자기 인형 한 쌍이 무척이나 눈에 익다.
아니, 여기 공기 자체가 굉장히 친숙하다.
지금 멍하니 앉아 있는 침대도 그렇고.
“……”
……익숙한 게 당연하지. 우리집이니까.
이상한 꿈을 꾼 탓인가, 머릿속이 멍해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전에 눈이 잘 안 떠져.
으으, 잠이 안 깨…….
침대에 내가 혼자 있는 걸 보니, 메린은 이미 일어난 모양이다.
식사 준비를 하는지, 방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있다.
여전히 부지런하네…….
아니, 내가 게으른 건가……?
근데 솔직히 내가 지금 잠을 못 깨는 건 메린 때문이잖아.
어젯밤도 내가 지쳐 나가 떨어질 때까지 몸 안팎으로 놔주지 않았으니까.
아니, 어떻게 진짜 한 달 내내……!
어으, 출근 시간이 늦춰져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죽었을 거야.
터덜터덜 일어나서 세수를 한다.
느릿느릿 옷을 갈아입고, 여전히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방을 나섰다.
“어, 혼자 일어났네. 웬일이냐?”
“응……. 좋은 아침…….”
“그냥 눈만 떴구만…….”
그럼 그렇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메린을 지나쳐, 아롱아롱 보이는 테이블로 가서 의자에 걸터앉아,
“으.”
그대로 테이블에 턱을 대었다.
으으, 졸려……….
“그렇게 졸리면 더 자지, 왜 나왔어?”
“응……. 날씨 좋더라…….”
“아니, 말이 안 통하네.”
메린이 어이없어 하는 게 느껴진다.
그치만 어쩔 수 없는걸.
졸려서 뭔 말을 하는지 잘 머리에 안 들어온다고.
잠시 후, 옆쪽에서 드르륵,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나더니,
“히으.”
자그마한 신음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서 옆을 힐끗 보자, 첫째인 딸 카린이 테이블에 턱을 댄 채 졸고 있었다.
“카린… 버릇없게 뭐하는 거야… 똑바로 앉아…….”
“난 딸기잼…….”
“뭔 소리야…….”
아, 모르겠다. 졸려.
나부터 엎어져 있는 판에 뭔 훈계야, 훈계는.
그리고 또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이번엔 또 다른 쪽 옆에서 꺅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린과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눈을 뜨자, 둘째인 딸 멜과 셋째인 아들 케임…… 쌍둥이가 테이블에 턱을 올린 채 배시시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랑 카린을 따라하고 있는 듯했다.
이거 밖에서 보면 되게 웃길 거 같군.
“하, 나 참, 너네 나란히 뭐하냐?”
메린이 헛웃음을 켰다는 게 무엇보다 큰 증거이다.
“멜, 케임, 나 대신 아빠 깨워드려.”
뒤이어 녀석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아빠아~ 눈 떠어~”
“엄마가 일어나래애~ 일어나아~”
네 개의 자그마한 손이 나를 집중공격하기 시작했다!
손을 잡고 흔들고 뺨을 찌르더니, 이윽고 둘이서 하나씩 내 뺨을 잡고 쭉쭉 잡아당겼다.
그래도 내가 눈을 뜨지 않자, 테이블 쪽으로 굽혀진 등에 올라타더니, 내 머리카락을 꾹꾹 잡아당기는 게 아닌가!
등골이 섬찟한 느낌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안 돼!
머리를 그렇게 심하게 다루면 안 된다고!!
“으아아아! 안 돼, 이 녀석아, 머리는 건들지 마!”
기겁하며 등에 올라탄 녀석을 번쩍 안아들자, 두 손에 꽉 잡힌 케임이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와아~ 아빠 눈 떴다아~”
“눈 떴다아~”
바닥에 내려놓으니 제 쌍둥이 누나랑 같이 꺅꺅거리면서 엄마… 메린에게 쪼르르 달려간다.
아빠 깨웠다고 재잘거리는 녀석들에게 빙긋 웃으면서 칭찬하는 메린.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훈훈해지면서 웃음이 나온다.
그나저나 한 명 빠졌네.
나는 여전히 테이블에 엎드려서 졸고 있는 카린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카린, 착하지. 일어나.”
“우응… 졸려어……. 후히히히, 간지러!”
눈을 못 뜨는 녀석의 겨드랑이를 간질였더니 곧바로 눈을 번쩍 떴다.
메린을 쏙 빼닮은 얼굴로 파란 눈을 깜빡깜빡거리는 게, 진짜 귀여워 죽겠어.
“어, 아빠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녕, 카린. 잘 잤어? 잠 깼으면 엄마 도와주러 가자.”
“네에.”
방긋 웃으면서 종종걸음으로 메린에게 가는 카린.
이내 쌍둥이들과 함께 세수하러 뒤뜰로 나갔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본 후,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메린에게 다가갔다.
“하암, 겨우 눈 떴네. 뭐 도와줄까? 그릇 놓으면 돼?”
“어. 거기 빵도 좀 놔줘.”
“알았어.”
곧바로 찬장에서 식구들 몫의 식기들을 챙기는데, 문득 메린이 오븐에서 무언가 꺼내는 게 보였다.
둥그런 틀 안에 담긴, 노릇하게 구워진 파이가 뜨거운 김을 마구 내뿜고 있다.
점심 때 먹기로 한 산딸기파이인 거 같은데…… 어째 냄새가 좀 다르다?
“메린, 그거 뭐야? 산딸기 아닌 거 같은데. 누구 주려고?”
“이거? 아니. 이따 우리 먹을 거야.”
메린은 잠시 파이를 내려다보더니, 조금 겸연쩍은 듯이 웃었다.
“왠지 맥주파이…… 어머님이 했던 파이가 생각나더라. 그래서 바꿨어. 마침 재료도 있더라고.”
“맥주파이………”
……뭐지? 왠지 가슴속이 꼭 죄이면서 마구 두근거린다.
엄마의 맛을 재현한 파이를 먹는 게 처음인 것도 아닌데.
진짜 희한하네. 왜 이렇게 기쁘지?
그것도 울고 싶을 만큼.
당황해하며 눈물을 참으려 눈을 끔벅거리고 있자, 메린이 내 눈치를 살피듯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산딸기파이도 할 수 있으니까 먹고 싶으면 해줄게.”
“아냐아냐, 괜찮아. 애들도 맥주파이 좋아하니까 안 해도 돼. 다음에 먹으면 되지, 뭐.”
“그럼 됐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조리대에 파이를 올려놓는 메린.
식기와 빵을 테이블에 놓고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솥 앞에 서서 나에게 등을 보이고 있다.
왠지 모를 충동에, 가만히 다가가 그녀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엉? 왜?”
“그냥. 왠지 좋아서.”
“오늘 소풍 간다고 들떴냐?”
“그런가? 하하, 몰라. 그냥 왠지 웃음이 나와~”
실없이 웃으면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간지럽다는 듯이 키득거리는 그녀를 다시 꼭 껴안을 무렵,
“아~ 나도~”
“나도나도~”
“……나, 나도.”
한결 말끔해진 세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서 내 다리에 엉겨붙었다.
으으, 더 이러고 있고 싶지만 어쩔 수 없군.
애들을 불가에서 떨어뜨릴 겸 상대해줘야지.
“그래그래, 이리 오렴.”
세 아이를 두 팔로 한꺼번에 끌어안으면서 테이블 근처로 향했다.
꺅꺅거리며 등에 올라타려 하거나 팔에 달라붙는 쌍둥이와 달리, 카린은 수줍은 듯이 허리를 껴안는다.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사랑스러운 작은 보물들에게 하나하나 입맞춘다.
수프가 담긴 솥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그녀에게도 짧게 키스한다.
웃음이 가득한 부엌.
여느 때와 같은, 행복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