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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452화 (452/475)

〈 452화 〉 Epilogue (3)

* * *

겉에 기름을 발라 노릇이 굽고 소스에 졸인 닭고기, 버터 바른 빵에 삶은 달걀과 베이컨을 끼운 샌드위치, 어제 딴 신선한 산딸기를 듬뿍 넣은 케이크.

그리고 진한 흑맥주를 써서 만드는 특제 고기파이.

여기에 마을 특산품인 딸기 와인과 주스를 각각 한 병씩 곁들였으니, 가히 최고의 소풍용 도시락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걸 전부 담는 데에 바구니를 세 개나 써야 해서 그렇지.

“……”

준비가 끝난 바구니를 보니 진짜 헛웃음이 나온다.

이게 우리 식구 몫이라고?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위병들 힘내라고 선물하려는 거겠지.

그렇게 잠시 도피를 한 후, 아침식사 광경을 떠올리면서 다시 현실을 깨달았다.

선물은 무슨. 이거 다 우리 가족 거다.

원래 많이 먹는 메린과, 그 먹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아버린 세 아이의 뱃속에 들어갈 음식들인 것이다……!

“카엘, 다 챙겼어? 그럼 두 개는 내가 들고 간다.”

“아, 응.”

양손에 하나씩 바구니를 번쩍 들고 밖으로 나가는 메린.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굉장히 사뿐사뿐하게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려, 혼자 덩그러니 남은 바구니의 손잡이를 잡아 들어올렸다.

“……”

아아, 묵직해…….

이게 가장의 무게인가……?

잠시 그 무게감을 곱씹고 있는데, 불현듯 소매가 꾹꾹 당겨졌다.

고개를 돌리자, 여름의 화창한 하늘이 떠오르는 파란 눈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빠, 뭐해요? 안 가요? 다 나갔는데.”

“응, 아빠도 갈 거야. 카린도 먼저 나가 있지, 왜?”

“나가려 했는데, 아빠가 멍하니 있어서. 무거우면 내가 들게요.”

그러면서 자그마한 손을 내미는 마음씨 고운 딸아이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괜찮아. 별로 안 무거워. 그리고 넌 이거 들면 앞이 안 보일걸? 어쨌든 아빠는 있지, 그냥 일 열심히 하자고 다짐하고 있었답니다. 너희가 항상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으응, 아빠 열심히 하면 안 되는데. 엄마 또 시무룩해지는데.”

“응? 엄마가 시무룩해했어?”

“응. 나랑 멜이랑 케임한테 동생 만들어주고 싶은데 못한다고요.”

………이유는 일단 차치하고, 메린이 그간 울적해했다니 전혀 몰랐다.

항상 환히 웃고 있었으니까.

무언가 숨기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고.

­­일 년이나 참았으면 된 거 아냐? 너야말로 날 얼마나 더 팽개칠 셈이냐?

메린이 한 달 전 즈음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말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큰 쓸쓸함이 담겨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근데 진짜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으음, 혹시 내가 함께 있을 때는 그걸 잊어버린 걸까?

하지만 낮엔 내가 일하러 가고 집에 없으니까, 그 쓸쓸함이 다시 되살아난 거지.

……쭉 그러면서도, 지난 일 년간 나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둔 거야?

내가 잠자리를 피하는 이유를 혼자 여럿 떠올리고 납득하려 했던 거였어?

심지어 다른 여자가 생겨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조차도?

……난 진짜 몹쓸 남편이야.

새삼 메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난 한 달간 매일같이 짜내는 걸로 용서해준 게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어.

슬슬 진짜로 죽을 거 같지만.

“아빠? 아빠도 시무룩해요?”

조심스럽게 묻는 카린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되지, 안 돼.

이 착하고 귀여운 아이 얼굴에 그늘이 끼게 하는 건 천벌받을 짓이야.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엄마한테 되게 잘못했었다 싶어서. 아빠는 그동안 엄마가 시무룩해하는 줄 몰랐거든.”

“아빠랑 있을 땐 웃으니까. 우응, 그래도 요즘은 괜찮아요. 엄마, 매일매일 활짝 웃어요. 엄마 웃는 거 좋아. 예뻐요!”

“응, 아빠도 엄마 웃는 얼굴 무지하게 좋아.”

그러니 낮이고 밤이고, 앞으로도 계속 힘내자.

다시금 굳게 다짐했다.

“엄마랑 다 기다리겠다. 가자.”

“네에~”

자그마한 손을 잡고 함께 집 바깥으로 나갔다.

세 아이를 말에 태우고, 천천히 마을 밖으로 향한다.

지나가는 마을 사람을 볼 때마다, 쌍둥이가 말 위에서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불러댄다.

두 아이와 달리, 낯을 가리는 카린은 그때마다 얼굴이 빨개져선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다행히 나만 그 모습이 귀여워보이는 게 아닌 듯, 다들 푸근히 웃으면서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윽고 마을을 벗어나서 숲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지저귀는 새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길을 걷자, 이내 시야가 탁 트이면서 자그마한 공터로 나오게 되었다.

드문드문 사과나무가 있는 공터의 중앙엔, 졸졸 흐르는 개울과 이어진 연못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거기서 약간 떨어진 곳엔 갖가지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꼭 카펫을 깔아 둔 것처럼 보였다.

“와아~!”

공터를 마주하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들.

말에서 하나씩 내려주자마자 곧바로 꽃밭으로 달려가서는, 거기 쪼그려 앉아 자신들끼리 재잘거리기 시작한다.

역시 여기로 정하길 잘했군.

메린조차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걸 보니, 한결 더 뿌듯해지는 듯했다.

“이런 데도 있었구나. 몰랐어.”

“괜찮지? 낚시할 데 찾다가 발견한 곳이야.”

이곳엔 말을 묶어 둘 나무도 있고, 위험한 독초가 자라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이 찾지 않아서 무척 조용한 곳이기도 하고.

즉, 우리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 놀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아빠~ 엄마~ 이거 봐라~”

멜이 까르르 웃으며 소리치더니, 두 팔 가득 안고 있던 꽃을 하늘로 휙 던졌다.

그러자 꽃들이 허공에 똑바로 서더니 혼자 팽그르르 돌면서 세 아이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케임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자, 멜이 흥이 올랐는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그걸 지켜보던 카린이, 꺾은 꽃의 잎사귀를 하나 떼어내 풀피리를 부우 부우 불기 시작했다.

“짠!”

카린이 한손으로 멜을 가볍게 던지자, 공중에서 빙글 돌며 사뿐히 착지한 후 멋진 자세를 취하는 멜.

그렇게 짧은 공연을 마친 꼬마 춤꾼에게 박수를 치지 않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야~ 진짜 멋지다~! 멜 최고~!”

“에헤헤!”

멜은 방긋 웃으면서 다시 꽃들을 모아왔다.

물론 제자리에 서서, 두 팔을 활짝 벌리는 것으로.

……그렇다.

멜은 어째서인지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손으로 그 아이를 던진 것처럼, 카린은 메린의 얼굴과 함께 그 무지막지한 힘도 같이 물려받았다.

케임은 별 특이한 게 보이지 않지만, 어느새 내 등에 올라타 있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보통 몸놀림이 아닌 건 분명해.

그래서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마다 무슨 일이 터지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아직까지는 아이들의 힘 때문에 큰 사고가 터진 적은 없다.

아…… 하나 있구나.

작년에 영주의 어린 아들이 카린의 등에 몰래 큰 벌레를 붙여서, 그에 겁을 먹은 카린이 비명을 지르며 날뛰다가 성벽을 부숴먹었지?

거기서 끝났다면 그냥 헛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을 터.

근데 하필 영주의 아들이 그 파편에 얻어맞고 기절한 탓에, 영주의 일부 가신들이 들고 일어나버렸다.

­­반역이다! 영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근본도 모르는 네놈을 서기로 거두셨거늘! 어찌 도련님의 목숨을 노리느냐! 영주님! 저 반역자 일가를 처단하셔야 합니다!

­­아니, 경들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내 아들이 먼저 잘못한 것이지 않소!

우리를 잘 아는 영주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반박했지만, 평소에도 은근히 나를 마뜩잖아 하던 그 일부 가신들이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속으시면 안 됩니다, 영주님! 고명하신 도련님이 벌레 따위에 손을 댈 리가 없습니다! 저 어린 계집이 분명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저 자가 딸년에게 도련님을 해하라고 지시한 것이 틀림없으니, 엄히 다스리셔야 합니다!

­­괜한 트집잡지 마세요! 그리고 카린은 거짓말 안 합니다! 댁들처럼 글러먹은 사람이 아니라고요!

­­이런, 고얀……!!

놈들은 내 말에 불같이 화를 내며 검을 뽑자, 그 자리에 같이 있던 메린이 순식간에 그 중 하나의 검을 빼앗더니 가차없이 휘둘렀다.

댕겅.

그러자 철판갑옷의 가슴 부분만 똑 잘려서는 바닥에 뚝 떨어졌다.

갑옷 주인에겐 일말의 상처도 나지 않은 채.

그가 얼이 나가서 멍하니 뒷걸음질을 치자, 메린은 몇 걸음 더 다가가더니 바닥에 떨어진 철판을 콱 밟아서 가루를 내버렸다.

그런 뒤, 두통이 나서 죽겠다는 듯이 머리를 짚고 있는 영주에게 물었다.

­­반역해줘요?

­­아니요……. 하, 씨발, 저 새끼들 전부 감옥에 처넣어.

……그렇게 가신들이 감옥에 갇히는 걸로 상황이 끝나버렸다.

뭐, 그 다음에 나랑 영주 사이에 소소한 실랑이가 있긴 했지만.

­­내가 뭐, 당신한테 일 시켜달라고 했어? 아니잖아! 싫다는 나를 당신이 억지로 여기 앉힌 거 아냐! 근데 왜 나랑 내 딸이 그딴 소리까지 들어야 돼?!

­­미안해. 그 놈들이 자네를 몰라서 그래. 전부 엄벌을 내릴 테니 화 풀어. 자자, 한 잔 쭉 들이켜.

영주가 손수 따라준 술잔이었지만, 당연히 받아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안 마셔, 씨발! 더는 안 해, 때려칠 거야! 내일 당장 짐 싸서 여기 나갈 테니 그렇게 아세요, 마티아스 님!!

­­그러지 말고 진정해. 일단 앉아, 응? 자네 고생하는 거 알아. 내가 왜 모르겠나? 고의로 더 굴리고 있는데.

­­……나갈 거야!!

­­농담! 농담이야! 내가 자네 아끼는 거 알잖아!

뭐, 이러쿵저러쿵해서 결국 이 마을에 계속 살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영주, 마티아스 토레스햄 남작의 서기로서.

하…… 진짜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

정착할까 싶어서 둘러본 마을이, 하필 마티아스가 부임한 곳일 줄 누가 알았을까?

게다가 우리가 둘러보는 동안, 그는 여기저기서 진행 중인 공사 현장을 살피러 직접 나온 상태였다.

손수 시찰하다니 성실한 영주님이라고 감탄하면서, 어째 분위기가 눈에 익다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가 몸을 돌린 덕에 얼굴을 볼 수 있었고,

­­아.

그대로 눈이 마주쳐버린 것이었다!

씨익 웃는 얼굴에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메린에게 튀자고 하면서 도망가려 했지만,

­­하하하, 그렇게 급하게 어디를 가려고 그래~? 카엘~?

­­꺄아아아악!!

……곧바로 어깨를 붙잡혀버리고 말았다.

그 뒤, 그의 협박과 간청과 진지한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여기 눌러살게 된 것이었다.

결혼하고서 두 주쯤 지난 뒤부터 살기 시작했으니, 여기서 산 지도 벌써 6년이군.

“하… 역시 그때 튀었어야 했어…….”

메린과 함께 자리를 펴면서 중얼거리자, 그녀가 건너편에서 어깨를 으쓱였다.

“왜? 여기 괜찮잖아. 영주님이나 마님,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다 우리랑 애들한테 잘 대해주는데 뭘 그래?”

“영주님은 빼. 신나게 나 부려먹는다고. 축제 기획을 매년 서기한테 시키는 악덕 영주님이야.”

“네가 계속 잘 해내니까 믿고 맡기는 거 아냐. 영주님 좋은 분이야. 너무 그러지 마. 하여간 사고방식이 글러먹었다니까.”

아니, 여기서 내 편을 안 들고 영주 편을 든다고?

남편이 아니라 딴 남자를 두둔해?

조금 울컥 솟았다.

“야, 내가 네 남편이잖아. 그럼 내 편을 들어줘야 할 거 아냐. 축제 때문에 매일같이 밤새던 내가 안 불쌍하디?”

“그래서 내가 찾아가서 너 일 작작시키라고 했는데? 그 부탁 들어줘서 네가 더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게 됐잖아. 얼마나 좋은 분이야.”

“……뭐? 그랬었어? 아니, 언제 찾아왔던 거야? 난 못 봤는데?”

“축제 때문에 네가 마을 대표랑 회의하고 있을 때였을걸. 방에 가서 얘기하니까 축제 끝난 뒤부터 조치해주겠다고 했어. 그리고 진짜 그렇게 됐고.”

“그렇구나.”

나는 바구니 속에서 병과 음식들을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때 방 문이 박살나 있었구나. 축제 끝나고는 영주님이 제발 집에 가라고 내 등을 민 것도 그 때문이었고.”

심지어 메린과 마시라며 좋은 포도주까지 한 병 안겨주었다.

고생했다는 뜻으로 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메린에게 바치는 뇌물이었군.

아무튼 그렇게 출퇴근 시간이 조정된 것도 무색하게, 나는 여전히 시든 안색으로 성 안을 돌아다니는 중이다.

왜냐고?

밤마다… 메린이……!!

갑자기 눈이 시큰해져서 눈두덩이를 문지른 후, 주의를 돌릴 겸 애들이 있을 꽃밭을 바라보았다.

꽃으로 만든 관과 목걸이를 걸고 꺅꺅거리는 세 아이와 한 마리.

멀리서 봐도 무척 즐거워하는 게 눈에 보인다.

“………”

………엉?

한 마리?

황급히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자, 잿빛 강아지…가 아니라 새끼 늑대가 아이들 틈에 섞여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아, 저 녀석…….

“이야~ 역시 손이 크시네요, 누나~”

“……”

귀에 익은 목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렸다.

어이없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홱 돌리자, 역시나 시커먼 머리를 한 다발로 묶은 남자가 싱글거리면서 메린과 함께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야…….”

“응? 저요? 왜요?”

왜 부르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녀석은 뻔뻔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어이가 없네.

“왜는 뭘 왜야, 가족 소풍에 뭘 자연스럽게 끼어들고 있어? 그보다 떨어져, 임마. 어디 남의 아내한테 친한 척이야?”

“친한 척이라뇨. 진짜 친한데. 그보다 귀한 따님의 스승이자, 이 가족 전담 치료사이나 마찬가지인데 너무 막대하는 거 아니에요?”

“정기적으로 밥 얻어먹으러 오는 군식구이지, 무슨.”

녀석은 투덜투덜대는 내가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린 후, 배낭에서 그보다 훨씬 큰 나무상자를 턱 꺼내더니 뚜껑을 땄다.

“짠. 이 지역에선 못 구하는 과일들이랍니다. 먹을 거 갖고 왔으니 소풍에 껴도 되죠?”

“하………”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요구하는 마법사, 위슨을 향해 깊은 한숨을 쉬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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