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무얼 먹는 게 중요한 남자와 누구와 먹는 게 중요한 여자2016.02.09.
빨간 배경에 검정 글씨로 굵게 ‘북경’이라고 멋들어지게 휘갈겨 쓴 오래된 간판 아래, 출입유리문을 앞으로 잡아당기며 민준과 설이 중국집 안으로 들어섰다.
설은 익숙한 모습으로 창가 자리 테이블에 다가가 앉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판을 쳐다보지 않은 채 손을 들고 짜장면 두 개를 주문했다.
식당 안은 깔끔하고 정갈했지만,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어 한눈에도 꽤 오래된 집임을 알 수 있었다.
“여기 와봤어?”
설이 주문하는 모습이 처음 와본 것 같지 않아 민준이 조금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설이 사는 동네도 아닌데, 이런 곳을 알고 있다니 의외였다.
“네, 몇 번 와봤어요.”
“누구랑?”
민준이 접시 위에 놓인 하얀 물수건을 들어 손을 닦으며 설에게 물었다.
설은 언제 왔었냐고 묻지 않고 누구랑 왔었냐고 묻는 민준의 질문에 입가에 슬쩍 미소를 떠올렸다.
“가족이랑요.”
가족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외할아버지와 단둘이 왔던 곳이었다.
할아버지는 이곳을 좋아하셨고, 이곳에서 설이 모르는 누군가를 추억하셨다.
설이 컵에 따듯한 물을 따르며 대답을 했고,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민준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고급스러운 중국집은 아니었다. 옆 테이블을 곁눈질로 힐끗 보니 짜장면이 소담스럽게 담겨 나온 그릇은 투박한 플라스틱 그릇이었고 테이블은 좁았으며 의자는 삐걱거렸다.
“좋네.”
그래도 좋았다.
설과 함께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맛있는 짜장면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민준은 왠지 앞으로 이곳을 종종 오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친숙하고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아이고, 이게 얼마만이야. 아가씨 진짜 오랜만에 왔네!”
주방에서 나와 무심하게 홀을 지나가던 한 할머니가 설을 보고 반색을 하며 테이블 근처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설은 의자에서 일어나 할머니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많이 반가운 듯 설의 한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연신 손등을 쓸어내렸다.
“애인이랑 같이 온 거야?”
할머니가 곁눈질로 흘끔 민준을 쳐다보았다.
설을 봐온 세월이 벌써 이십 년을 넘었다. 이제는 다 컸다고 애인도 데리고 오고, 할머니는 그런 설이 마냥 신기하고 기특하기만 하다.
언제 이렇게 자라 어른이 되었는지.
할머니는 설과 민준을 애틋한 눈길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민준이 할머니를 향해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갑게 눈웃음을 지었다.
“아…….”
그러더니 갑자기 놀란 눈으로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 잘생겼네.”
“감사합니다.”
민준이 할머니의 시선을 피하며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덕담은 감사하지만 저렇게 뚫어져라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는 건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다.
“짜장면 먹으려고?”
민준을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할머니가 다시 설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네, 두 개 주문했어요.”
“짜장면 별로 안 좋아하잖아. 밥을 먹지그래.”
애정이 듬뿍 담긴 할머니 말씀에 설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설이 짜장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항상 볶음밥을 먹었던 걸 아직도 기억하신다.
“오늘은 먹고 싶어서요.”
“바쁘더라도 가끔 와. 내가 볶음밥 맛있게 해줄 테니까.”
“네, 할머니.”
이제는 기력이 예전만 못해 큰아들이 대부분 주방에서 팬을 잡지만, 아주 가끔 오래된 단골이 왔을 때에는 할머니가 직접 면을 뽑고 볶음밥을 만들곤 한다.
설이 온 줄 알았더라면 자신이 주방에 들어갔을 텐데.
“아이고 잠깐만 내 정신 좀 봐. 안에서 어떻게 만들고 있나 모르겠네. 짜장면에 또 계란 후라이 얹어줄까?”
“네.”
“네?”
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민준은 할머니를 향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이 고개를 돌려 민준을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짜장면에, 계란 프라이를 얹어 먹어요?
살아오면서 한 번도 그런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맛있어. 먹어봐.”
“…….”
민준의 태연한 대답에 그를 바라보던 할머니의 입술이 절로 떡 벌어졌다.
할머니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할머니가 다급히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총각! 총각 아버지가 혹시 운동선수 아니야?”
“아닙니다.”
민준이 정색을 하며 대답을 했고, 민준의 대답에 할머니의 얼굴에는 실망스러운 기색이 스쳐 갔다.
옛날 그 총각 아들이 컸다면 딱 저만 할 텐데. 얼굴이 너무 닮아 꼭 옛날 그 총각을 다시 보는 것만 같았다.
가끔 다쳐 오는 게 이상해 한 번 지나가는 말로 물어봤더니 무슨 운동 같은 걸 하는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들 손을 잡고 그렇게 자주 오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오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할머니는 미련이 남는 듯 주방으로 들어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 민준을 쳐다보았다.
“대리님 여기 와봤어요?”
“아니.”
하긴. 민준은 여기가 처음이라고 했다.
“근데 짜장면에 계란은 왜 얹어 먹어요?”
자연스럽게 얹어 주겠다는 할머니나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민준이나 둘 다 이상하다.
분명 오래된 단골은 민준이 아니라 설인데 말이다.
“오늘 먹어봐. 맛있을 테니까.”
민준이 물 컵을 들어 입가에 가져가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짜장면 두 개가 담긴 그릇이 민준과 설 앞에 각각 놓였다.
쫄깃해 보이는 면 위에 까만 짜장이 푸짐하게 얹어졌고, 한가운데 노랗고 하얀 계란 후라이 하나가 정성스럽게 올라와 있었다.
민준이 숟가락으로 계란 프라이를 여러 조각내더니, 짜장면 면발과 함께 들어 입안으로 후루룩 가져갔다.
“내 것도 줄까요? 난 솔직히 별로 먹고 싶지 않은데. 느끼할 것 같아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설이 자기 앞에 놓인 계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맛있는 건 같이 먹어야지.”
“맛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맛은 다른 집이랑 비슷한데.”
“근데요.”
“같이 먹으니까 맛있네.”
“…….”
민준이 설을 흘끔 보며 픽 웃었다.
그리고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까만 면발을 젓가락으로 들어 후루룩 입안으로 가져갔다.
설의 말이 맞았다.
중요한 건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먹느냐인 것이다.
**
아파트로 돌아오니 이미 어둑해진 밤이었다.
민준은 설의 아파트 동 앞에 주차를 하고 난 뒤 출입구를 향해 설과 함께 걸었다.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며 설은 졸린 듯 주먹을 말아 입을 가리며 조그맣게 하품을 했다.
“많이 피곤해?”
“그럼 안 피곤해요? 우리 아침 일찍부터 강원도까지 다녀왔잖아요.”
“가볍게 맥주나 한잔하려고 했는데.”
“지금요? 어디서요?”
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강설이 피곤하다니까, 강설 집에서.”
“…….”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맞거나 아니거나.
확률은 50%.
“안 되나?”
“……글쎄요.”
많이 피곤했지만 민준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설은 고민이 되었다.
“내일 일요일이잖아.”
“…….”
하여간 이렇게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니까.
설이 민준을 바라보며 곱게 눈을 흘겼다.
“맥주는 내가 사갈게. 먼저 올라가 있어.”
민준이 뒤를 돌아 아파트 단지 앞 슈퍼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고, 설도 뒤를 돌아 종종걸음으로 달려 출입구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민준이 돌아오기 전에 집 안을 좀 둘러보고 안줏거리가 뭐가 있는지도 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에 조금 전과는 달리 엘리베이터를 향하는 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민준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더니 아스팔트 어느 한 곳에 민준이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
강설에게서 파일을 찾아 NIS에 넘겨준다면 NIS도 더 이상은 설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취임식장에서 보았던 수상한 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요한 건 파일의 행방이지, 설이 목적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또한 설 곁에 더 이상 민준이 있을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설의 경호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담당하게 될 것이고, 민준은 아마 NIS로 복귀하여 다른 임무가 주어지길 기다리게 될 것이다.
막연하게 끝을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 끝이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몰랐다.
민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깜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집에 들렀다 왔어요?”
맥주를 사 오겠다던 민준은 헤어진 지 1시간이 넘어서야 설의 집 현관 벨을 눌렀다.
설이 현관문을 열어 주며 민준에게서 하얀 비닐봉지를 받아들었다.
“옷 좀 갈아입고 오느라고.”
이 많은 걸 언제 다 마시려는 건지, 봉지 안에는 맥주 캔이 그득했다.
“이걸……, 오늘 밤에 다 마시게요?
“마실 수 있는 만큼만 마셔. 나머지는 내가 다 마실 테니까.”
“…….”
“그러고 보니 또 있네. 강설이 잘 못하는 거.”
“뭐가요?”
“술. 맥주는 두 잔 이상 마시면 취한다며.”
“그 말도 기억해요?”
설만큼 기억력이 좋은 건지, 민준은 설에 관한 것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전부 다 기억하는 것 같다.
“관심이지. 기억이 아니라.”
“그래서 캔 두 개는 내 거고, 나머지는 전부 다 대리님이 마실 거란 얘기예요? 이 많은 걸 다?”
“난 안 취한다고 했잖아.”
설이 비닐봉지를 거실 소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을 때, 이미 민준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소파 앞 거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거기 앉지 말고 소파에 앉아요.”
“옆에 와서 앉아.”
민준이 고갯짓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자, 설이 맥주 캔 두 개를 들더니 민준의 옆에 나란히 등을 기댄 채 무릎을 세워 앉았다.
“여기요.”
설은 민준에게 시원한 맥주 캔 하나를 내밀었고, 민준은 캔 뚜껑을 따 다시 설에게 돌려주었다.
맥주 캔 뚜껑이야 설도 얼마든지 딸 수 있지만 무심한 듯 자연스러운 이런 민준의 행동이 설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민준이 설의 다른 손에 있던 맥주를 건네받아 캔 뚜껑을 따더니 바로 입에 대고 크게 목울대를 움직이며 맥주를 목 뒤로 넘기기 시작했다.
차가운 맥주의 알싸한 맛이 얼얼하게 식도를 건드리며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강설은 지금 이렇게 사는 게 좋나.”
민준이 불쑥 정면 거실 벽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 이렇게 사는 게 어떤 건데요?“
설은 고개를 돌려 민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매일 똑같이, 아주 평범하게.”
“왜요, 꿈이 평범하게 사는 거라는 사람도 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그러다 결혼을 하고 또 아이도 낳고. 다는 못 해도 웬만한 건 하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과 건강만 있다면, 그건 평범한 게 아니라 어떤 사람한테는 꿈이 되는 거죠. 가장 간절히 바라는 꿈.”
홀짝. 설이 맥주 한 모금을 목 뒤로 넘겼다.
“그게 강설이 가장 바라는 꿈이야?”
민준이 고개를 돌려 설을 바라보았다.
“…….”
내 꿈.
내가 마지막으로 꾸었던 꿈은, 할아버지처럼 기초과학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는 것.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의 훌륭한 이공계 인재들이 뛰어난 재능과 꿈을 접고 해외로 혹은 다른 직업군을 찾아 떠나는 걸 많이 아쉬워하셨다.
그래도 설이 있어 행복하다 하셨는데, 이제 설 역시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며 조용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유일한 바람이다.
“아니요, 가장 간절히 원하는 건 사실 따로 있죠.”
설은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남자를 만나 놀고먹으며 사는 것!”
“뭐?”
“베짱이가 되는 게 내 꿈이에요. 그러니 이제 겨울에 먹을 양식을 잔뜩 쌓아 놓고 나를 기다려 줄 개미만 찾으면 돼요.”
“그렇게 안 봤는데. 강설, 실망이야.”
민준이 픽 웃으며 강설을 바라보았다.
맥주 몇 모금에 설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럼 날 어떻게 봤어요?”
설이 재미있다는 듯 주먹을 동그랗게 말아 입에 대며 큭큭 웃었다.
-강설, 올해로 26세, K대 원자력공학과 평범한 성적으로 졸업, 강현석 당선인의 무남독녀.
“핸드폰 잘 빌려주는 친절한 여자.”
-다소 고집스러운 성격이지만 전체적으로 밝고 긍정적인 성격, 현재 사귀는 남자는 없음.
“맛있는 식당을 많이 알고 있어 꽤 많은 도움이 되고.”
-3년 전부터 혼자 살고 있음, 현재 주식회사 Boni 마케팅팀 홍보 담당, 주임.
“그리고 지금은요?”
설이 설핏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민준이 힐끔 설과 눈을 마주치더니 픽 웃으며 맥주 캔을 입에 가져갔다.
“나무하고 대화도 나누는 이상한 여자.”
-3년 전 이인호 박사의 연구 파일 행방을 알 수 있을 유일한 열쇠.
“그리고 너그러운 줄 알았는데 상당히 인색한 여자.”
-NIS 요원을 붙여 접근했으나 실패로 돌아감. 그리고 무슨 낌새를 챈 건지 3년 전 테러와 관련된 인물들이 최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있음.
민준은 자신을 향해 눈을 흘기는 설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손안에 든 맥주 캔을 가볍게 구기며 다른 캔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건배해요.”
설이 민준 앞으로 맥주를 든 오른팔을 쭉 뻗었다.
“뭘 위해 건배를 하지?”
“우리의 꿈을 위해.”
“…….”
훗. 설이 민준의 캔에 캔을 부딪친 후 웃으며 입가에 맥주를 가져갔다.
“이 나이에 꿈은 무슨. 난 그런 거 없어.”
피식 웃는 민준이 꿀꺽 다시 한 번 맥주를 목 뒤로 밀어 넘겼다.
“꿈이 뭐 별건가요. 확률은 희박하지만 언젠가는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거. 그런 게 다 꿈이겠죠.”
“…….”
언젠가는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라…….
‘강설이랑 살면, 참 좋겠네.’
민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
잠시 후, 다시 손을 뻗어 맥주 캔을 하나 더 집으려던 민준의 왼쪽 어깨에 무언가 ‘툭’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많이 피곤했는지 설은 민준의 어깨에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지금 자는 거야?”
“…….”
쌕쌕 설의 고른 숨소리가 작게 들렸다.
“남자 옆에서 잠이 들다니. 뭔 배짱이야.”
설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질까 봐 왼쪽 어깨에 힘을 주며 민준은 다시 맥주 캔을 입에 가져갔다.
“꼬리 흔들지 말라고!”
“…….”
고롱고롱 곤히 잠든 설을 힐끗 내려다보며 민준은 못마땅한 말투로 말했다.
민준이 인상을 작게 구기며 고개를 돌려 맥주 한 모금을 목구멍 뒤로 넘겼다.
“……예쁘다고 생각했어.”
“…….”
“처음 봤을 때 말이야.”
“…….”
“강설이랑 같이 먹는 저녁도 좋았어. 그래서 당신이랑 뭐가 안 돼도, 같이 밥 먹는 친구라도 되면 괜찮겠구나 생각했지.”
“…….”
“근데 잘못 생각했었어. 내가.”
욕심이 생겨 버렸다.
“……미안해.”
지금 할 수 있는 말이 미안하다는 말뿐이라서.
민준이 쓸쓸한 눈빛으로 마지막으로 손안에 남아 있던 맥주 캔을 서서히 힘주어 구겼다.
**
“아, 머리야.”
겨우 맥주 두 캔에 의식을 잃고 쓰러지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평소라면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어제 확실히 피곤하긴 많이 피곤했던 것 같다.
설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실 안으로 곧게 뻗어 들어온 햇살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응? 근데, 내가 언제 침대에 들어와서 잔 거지?
어제 분명…….
!!!
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무리 영상을 반복해서 거꾸로 돌려보아도 민준과 거실 바닥에 앉아 맥주를 마신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설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거실 테이블 주변은 평소와 같이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고 집 안은 고요했다.
고개를 돌려 거실 벽시계를 힐끗 쳐다보니 아침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모닝콜이라도 해주던가.”
설은 투덜거리며 욕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예쁘다고 생각했어.’
‘처음 봤을 때 말이야.’
어젯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저 멀리서 민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두근거리는 기억을 떠올리던 설의 뺨에 기분 좋은 홍조가 어렸다.
11시가 넘었으니 아침은 먹었을 것 같고, 같이 점심이나 먹자고 할까?
아니면 마트에 다녀와서 저녁을 먹자고 할까.
흐흠. 설은 기분 좋은 허밍 소리를 내며 욕실로 들어갔다.
**
비슷한 시각 NIS 국장실.
김 국장이 앉아 있는 짙은 갈색 소파 왼편에 민준이 굳은 얼굴로 앉아 있다.
똑똑.
“다 됐습니다, 국장님.”
박 팀장이 국장실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김 국장을 향해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데이터 손실은.”
“없습니다.”
“수고했다.”
김 국장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곧바로 문을 열고 판독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일찍 NIS로 들어와 작고 얇은 정사각형 모양의 금속 칩 하나를 김 국장에게 내밀었다.
설의 둥근 펜던트 안에 들어 있던 얇은 금속판으로 된 정사각형의 칩 하나.
김국장은 민준이 가져온 칩을 곧장 판독실로 보냈다.
“전에 제가 부탁했던 건 어떻게 됐습니까, 팀장님”
밖으로 나간 김 국장을 향해 목례를 하던 박 팀장이 소파에서 일어선 민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뭐가요.”
박 팀장은 민준에게 파란 서류 파일을 내밀며 말했다.
“이 사람 맞아? 찾아보니까 국제 무기상 끄나풀이던데. 3년 전에 한국에 잠깐 있었다가 얼마 전 다시 들어온 중국인.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동포지 동포, 조선족이니까.”
민준이 박 팀장에게서 낚아채듯 파일을 받아들더니 서둘러 페이지를 넘겼다.
“…….”
그러자, 날카로운 눈매에 낯이 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날,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설을 바라보던 남자.
사진 속의 남자는 모두가 정면을 바라보며 환호하고 있을 때 혼자만 고개를 돌려 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뭐 없어. 깨끗해 아주.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지.”
“…….”
민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 속의 남자를 보았다.
“그래서. 오늘 점심은 네가 사냐?”
민준을 향해 몸을 가까이 밀착시킨 박 팀장이 씩 웃더니, 한쪽 어깨로 민준의 어깨를 툭 쳤다.
“저 갑니다.”
민준이 파일을 소리 나게 덮어 박 팀장에게 건네준 후 곧바로 국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야! 고맙습니다, 한국말 몰라? 엉?”
쾅!!
거칠게(?) 항의하는 박 팀장의 눈앞에서 국장실 문이 참으로 버릇없이 세게 닫혔다.
“저 자식은 다 나쁜데 버르장머리 없는 게 젤 나빠, 아주.”
에잉!!!
박 팀장이 서류를 한 손에 대고 탁탁 두드리더니 민준의 뒤를 따라 국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
계단을 타닥타닥 뛰어 내려가는 민준의 발걸음이 조급해졌다.
‘국제무기상 끄나풀이 왜 이제 와서 설을 쫓는 거지. 이미 3년 전에 포기했던 게 아니었나. 그래도 설한테 파일이 없으니 이제 더 이상 위험하진 않겠지. 그들이 만약 아직도 찾고 있다면 그것은 설이 아니라 파일일 테니까. 하지만 뭔가 석연치가 않아…….’
그때, 골똘히 생각에 잠겨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민준이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아,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
“……?”
못 보던 얼굴인데.
남자와 민준의 시선이 허공에서 일이 초쯤 마주쳤다.
관심이 없다는 듯 민준이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사라지고 난 후 남자 역시 고개를 돌리며 국장실을 향해 익숙한 발걸음을 옮겼다.
“여어, 이게 누구야! 백건우!! 한국에 들어온 거야? 그런데 민간인이 이런 곳에 막 출입해도 되는 거야, 이거?”
국장실 문 앞에 서 있던 박 팀장이 반가운 듯 함빡 웃으며 남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런데 국장님은요?”
남자는 박 팀장이 내민 오른손을 힘주어 잡으며 웃었다.
자연스러운 갈색 머리칼에 온화해 보이는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잠깐 판독실 가셨어. 근데 네가 여긴 웬일이냐.”
“오늘 국장님 만나 뵐 일이 있어서요. 식사는 하셨어요?”
“역시 넌 싸가지가 있는 놈이야. 누구랑은 아주 다르지 암! 근데, 밥은 네가 사는 거지?”
박 팀장이 남자에게 어깨동무하듯 손을 올리며 앞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점심 가지고 되겠어요?”
남자가 박 팀장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백건우.
3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전 NIS 요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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