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12화 (12/94)

12화. 목걸이의 비밀2016.02.11.

거울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셔츠 단추를 풀던 설은 의아한 얼굴로 욕실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설이 갑자기 당황한 얼굴로 어깨 쇄골에 두 손을 얹으며 목 주변을 더듬거렸다.

할아버지가 주신 펜던트가 사라졌다!

민준이 준 목걸이는 그대로 있는데 할아버지가 주신 목걸이만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설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욕실 바닥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욕실 문을 벌컥 열고 나가 바닥을 샅샅이 살펴보며 걷기 시작했다.

설의 발걸음이 마침내 침대에 이르렀고, 설은 이불을 옆으로 한껏 젖힌 후 침대 위를 두 손으로 바삐 더듬기 시작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목걸이가 아닌데.

설의 심장이 두려움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젯밤에도 분명 목에 걸고 있었으니 어딘가에 떨어졌다면 그래도 집 안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먹었어도 시간이 흐를수록 설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일부러 빼지 않는 이상 목에서 떨어질 일이 없는 목걸이였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몸에서 떨어뜨려 놓은 적이 없었는데.

침대 위를 두 손으로 더듬거리는 설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

일요일 오후 1시.

설의 아파트 앞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있던 민준은 코트 주머니에서 은색 펜던트를 꺼내 손에 쥐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쯤 설은 목걸이가 사라진 걸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설을 위해서도 설은 모르고 지나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지켜야 할 비밀이 생긴다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과 시련도 자연적으로 생겨날 테니.

설은 그냥 지금처럼 이렇게, 평범한 회사원으로 그렇게, 예전 기억과 상관없이 살아가면 될 일이다.

마침내 민준이 자동차 문을 열고 내려 설의 아파트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딩동.

민준이 설의 아파트 현관 벨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띠리-’ 하는 전자음 소리 뒤로 무거운 철문이 앞으로 천천히 열렸다.

“…….”

설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민준은 말없이 설을 내려다보았다.

민준을 보자 설의 눈에는 서러운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걸이를 ……잃어버렸나 봐요.”

아이처럼 울먹거리는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민준이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 떴다.

“할아버지가……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했는데. 분명히 어젯밤 내가…….”

“……여기.”

“……?”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기에 주머니에 넣었는데, 계속 가지고 있었네. 미안.”

민준이 코트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 설의 앞에 천천히 내밀었다.

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민준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찰나의 침묵이 흘렀고, 설은 말없이 다시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몇 초 후, 설은 무심하게 중얼거리며 민준에게서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연결 고리가 없기 때문에 헐거워지거나 벗겨질 일이 없는 목걸이를.

일부러 빼거나 끊지 않고서야 설의 목을 벗어날 일이 없는 목걸이를.

하지만 설의 목걸이는 끊어진 흔적 없이 깨끗했다.

“나 밥 줘.”

“…….”

기분이 좋지 않은 느낌이 들려는 찰나 민준이 그 기운을 끊어내며 불쑥 말을 꺼냈다.

설은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었고 오른손으로 동그란 은색 펜던트를 천천히 매만졌다.

겉은 그대로인데 무언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낯선 기분을 들게 하는 걸까.

“밥.”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민준이 다시 힘주어 말했다.

“……무슨 밥이요.”

설이 두 눈을 들어 민준을 바라보았다.

“아무거나.”

“집에…… 먹을 만한 게 없어서 마트에 다녀와야 해요.”

하지만 기분이 좋지가 않다.

“같이 장 보러 갈까?”

“그보다…… 나는 좀 더 자고 싶은데요.”

할아버지와 관련된 좋지 않은 기억들.

“그럼 목록만 알려줘. 내가 사올 테니까.”

“……그래요. 그럼.”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주신 목걸이를 민준이 일부러 가져갈 이유가 없다.

그러니 이른 새벽 내가 습관처럼 잠결에 매만졌던 펜던트의 서늘한 촉감은, 그냥 나의 착각이었겠지.

“그런데 일요일 아침부터 어딜 다녀왔나 봐요?”

민준의 옷차림이 어딜 다녀온 것 같은 모습이다.

“응. 아버지한테.”

“아버지랑 많이 친한가 봐요? 저번 평일 오전에도 다녀오더니.”

“좋은 분이시지.”

좋은 분이시다. 직장 상사로서도 아버지로서도.

“많이 급한 일이었어요? 아침 일찍 간 거 보니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은데.”

억양 없는 설의 목소리는 어쩐지 냉담하게 들렸다.

“……갑자기 나한테. 궁금한 게 많아졌네, 강설.”

“…….”

민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설이 입술을 꾹 다물고 민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런 흔들림 없이 설을 향해 곧게 뻗어 있는 민준의 눈동자를.

마주친 시선에 흔들린 건 설의 눈빛이었다.

“나한테 알려줘야지.”

“……뭘 말이에요.”

“장 볼 리스트.”

“……잠깐 기다려 봐요.”

설이 민준에게서 등을 돌려 주방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 만들어줄 건데?”

민준이 설의 뒤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아무거나요.”

“뭐 먹고 싶냐고 안 물어봐?”

“뭐가 먹고 싶은데요?”

무심한 목소리로 반문하는 설의 대답이 어쩐지 무성의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민준도 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어색하게 남아 있는 기류를 모른 척하고 싶은 두 사람은 속내를 감추고 애써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

“아무거나.”

“무슨 말이 그래요.”

설이 민준을 힐끗 쳐다보며 웃었고, 그제야 비로소 안심이 된 민준의 입가에 설을 닮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내 맘대로 사온다?”

“…….”

민준이 장난스럽게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설을 바라보더니 등을 돌려 현관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같이 가요!”

설이 민준의 등에 대고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음속에 한 번 의심이라는 싹이 생겨나면, 그 싹은 끊임없이 어둠이라는 양분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기에, 의심을 해서는 안 된다.

이제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피곤하다며.”

“뭘 사올지 믿을 수가 있어야죠.”

현관에 있는 운동화에 발을 끼워 넣으며 설이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손.”

현관에 서 있던 민준이 설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설은 못 이기는 척 민준이 내민 손을 잡고 민준과 함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많이 울었어?”

설의 두 눈은 여전히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설의 부운 두 눈을 내려다보는 민준의 눈빛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낮게 가라앉은 민준의 목소리처럼.

민준은 엘리베이터 내려감 버튼을 누른 후 다시 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어디 봐봐.”

민준이 설의 뺨에 두 손을 올리고 빨갛게 충혈된 두 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

“괜찮…… 다니까요.”

민준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는 것 같아 부담스러워진 설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설의 얼굴은 여전히 민준의 커다란 두 손 안에 담겨 있었다.

민준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오자 설은 두 눈을 감았다.

서늘하지만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설의 감은 눈 위에 가만히 와 닿았다.

민준은 위로하듯 설의 어깨를 두 팔로 천천히 감싸 안았다.

“……미안해.”

민준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설의 귓가에서 나지막하게 들렸다.

한참을 열려 있던 엘리베이터 자동문이 스르륵 닫혀 아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민준은 여전히 설을 가슴에 안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민준의 품에 안긴 설이 두 눈을 감았다.

민준은 지금 놀라고 아팠을 설의 마음을 다독여 주고 있는 것이다.

설은 민준의 품 안에 고개를 더 깊이 묻었다.

**

“백건우!”

“잘 지내셨어요?”

김 국장이 국장실로 들어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국장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웃었다.

김 국장은 반가운 듯 건우에게 오른손을 내밀었고, 건우는 국장이 내민 손을 힘 있게 잡으며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거기 앉지.”

두 사람이 예전에 팀장과 팀원으로 일할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건우의 상사는 이제 국장이 되었고 건우는 일반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깥 공기 마시면서 사니까 기분이 어때? 하긴, 백건우 정도면 바깥 공기 마시면서 살 만하지.”

백건우 요원은 3년 전 NIS를 그만두고 떠났고, 떠난 건 NIS만이 아니라 고국인 한국 땅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건우는 얼마 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고, 3년 전 사건과 관련해 물어볼 것이 있다며 김 국장은 조용히 백건우에게 연락을 넣었다.

“왜 이제 와서 다시 그 일을 들추어내시는 겁니까. 이미 다 지난 옛날 얘기인데요.”

조용한 건우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깔렸다. 건우가 두 눈을 들어 김 국장을 바라보았다.

“옛날 이야기가 아니야, 바로 지금 일어나는 일이지. 3년 전 사건과 관련된 조직원들이 얼마 전 한국으로 다시 입국했거든.”

“우연이겠지요.”

“그리고 대통령 취임식 날, 영애의 주변에서 목격되었다.”

김 국장의 목소리가 한 톤 더 낮게 흘러나왔다.

“…….”

대통령 취임식 날에도 하나뿐인 영애의 모습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강조국, 아니 강설.

설은 지금 웃고 있을까.

3년 전 그 날 설은 소리 내 울지도 않았고 건우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내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처음부터 몰랐던 사람처럼 그렇게.

건우의 진심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고, 고통스러운 괴로움에 말라가면서도 설은 한 번도 건우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괴로워하면서도 설을 찾아갈 수 없었던 건 건우도 마찬가지였다.

“자네도 잘 알고 있잖아, 강설 씨.”

“…….”

조급한 마음에 경솔하게 일을 그르치고, 또 그렇게 그녀를 잃고 말았다.

바삭한 프라이드 치킨을 좋아하고, 술집에 가면 늘 오이와 당근을 오독오독 씹어 먹던 강 설.

초록색 유리병에 담긴 투명한 소주가 꼭 눈물 같아 마시고 싶지 않다던 강설.

맥주를 두 잔 이상 마시면 길을 가다 나무와 대화를 나누는 강설.

나의, 강설.

‘사람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기억하는 거예요.’

그녀는 사라졌는데, 그녀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건우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설이 말했던 것처럼, 건우의 가슴이 그녀를 여전히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

촤르르르르-탁.

촤르르르르-탁.

민준이 카트에 몸을 반쯤 기댄 채 설의 뒤를 따라다니며 카트로 레이싱을 하고 있다.

설의 옆을 쌩하니 지나갔다가 다시 무서운(?) 속도로 설을 향해 질주하기를 여러 번.

“그만 좀 하라구요! 사람들 쳐다보는 거 안 보여요?”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성인 남성이 마트 안에서 카트에 몸을 싣고 달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

부릉부릉 다시 한 번 시동을 거는 민준의 팔을 서둘러 붙잡으며 설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재밌는데.”

민준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쩝. 마른 입맛을 다셨다.

재미있다기보다 사실 민준은 지금 조금 들떠 있는 상태이다.

설이 천천히 마트 안을 거닐며 카트 안으로 물건을 하나하나 넣을 때마다 민준은 카트에 상체를 기댄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려 설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물론 그동안 마트를 가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요리를 하기 위해 장을 보는 여자의 모습이 이렇게 예쁠 수도 있다는 것을 민준은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다시 설 곁에서 천천히 바퀴를 굴리기 시작한 민준의 카트 자동차가 주류 코너 앞에서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오늘은 안 돼요.”

강설 님은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놓은 메모들을 눈으로 읽어 내리면서도 옆에도 눈이 달렸는지 슬금슬금 맥주 캔에 손을 올리는 민준에게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만 먹으려고, 나만.”

질 수 없다. 남자가 가오가 있지.

민준이 허리를 쭉 펴고 서더니 맥주 6캔이 들어 있는 종이 박스를 집어 당당하게 카트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설이 핸드폰에서 시선을 들어 민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다시 올려놔요.”

“…….”

“지금.”

“…….”

설이 다시 태연하게 고개를 돌려 핸드폰 목록을 들여다보며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맥주를 넣은 카트를 밀며 설의 뒤를 따라갈 것이냐, 아니면 맥주를 내려놓고 설의 옆으로 갈 것이냐, 민준의 얼굴이 못마땅한 듯 잔뜩 구겨졌다.

참나.

그렇게 목소리 깔고 말하면,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촤르르르르- 탁.

천천히 걷고 있는 설 옆으로 민준의 부릉부릉 카트 자동차가 멈춰 섰다.

설이 고개를 돌려 힐끗 카트 안을 들여다보더니 불만 가득한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픽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물건을 찾는 듯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뭘 만들어주려고 그렇게나 많이 사는 거야?”

민준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마저 굴복할 수는 없다.

“샤부샤부나 할까 하구요.”

“웬 샤부샤부?”

“안 좋아해요?”

“그런 건 아니지만.”

민준은 카트에 얹은 두 팔 위로 고개를 얹고 설을 올려다보았다.

“고기도 먹고, 채소도 먹고, 국수도 먹고, 밥도 먹으라고요.”

“뭐야 그게.”

“다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오늘 잠깐 민준을 의심했던 마음이 미안해서라도, 설은 오늘 민준에게 맛있는 점심을 해주고 싶다.

“내가 그렇게 좋아?”

민준이 웃으며 설에게 농담처럼 말했다.

“네, 그렇게나 좋아요.”

“…….”

설의 목소리는 마치 커피전문점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하는 것처럼 가볍고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한 목소리는 곧 사방으로 길게 꼬리를 늘이며 민준의 가슴속에서 어지럽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설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태연하게 물건을 카트에 담으며 걷기 시작했고, 민준은 카트 바퀴를 천천히 굴리며 설의 곁을 따라 걸었다.

**

식탁 한가운데 직사각형 모양의 검정 인덕션을 올려놓고, 그 위에 육수가 담긴 투명한 유리 냄비를 얹었다.

커다란 둥근 접시에는 여러 가지 채소를 종료별로 소담하게 담았고, 다른 접시에는 얇은 샤부용 소고기도 푸짐하게 올려놓았다.

민준이 앞 접시에 놓인 둥근 라이스페이퍼를 젓가락으로 한 장 들더니 허공에 이리저리 비춰보고 있다.

“이거라도 먹을까? 강설이 밥도 안 주는데.”

“이제 진짜 다 됐어요. 물만 끓으면 되잖아.”

설이 민준의 맞은편에 마주 앉아 온도를 가늠하기 위해 투명한 유리 냄비 위로 오른손을 펴 올렸다.

“배 많이 고파요?”

“응.”

민준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설이 눈웃음을 지으며 집게로 채소를 집어 끓기 시작한 육수 속에 집어넣었다.

“안 받아요?”

조금 전부터 어디서 부르르르 진동음이 들린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민준의 재킷 주머니 안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설은 채소를 가위로 잘라 육수 안에 넣으며 민준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받아야지.”

받고 싶지 않았다. 이 핸드폰으로 이렇게 간절히 민준을 부르는 것은 틀림없이 NIS일 것이고, 그 말인즉슨, 민준이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그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민준은 씁쓸한 얼굴로 재킷 왼쪽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식탁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귀에 대고 거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네. 아버지.”

밖에서, 특히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민준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호칭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른 상황이다.

전화기 너머의 김 국장은 지금 온전히 민준의 아버지이기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아.

“그렇게 됐어요.”

힐끔 뒤를 돌아본 민준의 눈이 설의 눈과 마주쳤다.

-지금 좀 여기로 와야겠다.

“지금, 이요? 중요한 일 아니시면…….”

-USB를 복구했는데 파일이 열리지가 않아.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민준이 거실 베란다 유리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에 나가 유리문을 탁 닫자 아파트 내부와의 소음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유리문 너머로 단절된 설의 세상.

민준은 여전히 전화기를 한쪽 귀에 댄 채 유리문 너머 안쪽 식탁에 앉아 집게와 가위를 들고 열심히 채소를 잘라 넣고 있는 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기에 지금 KAERI(한국원자력연구원) 원장님 들어와 계신다.

“그럼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세요. 밥 좀 먹고 갈 테니까.”

민준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유리문 너머에서 설이 입 모양으로 ‘멀었어요?’라고 금붕어처럼 입술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대통령께서도 이곳에 도착하실 예정이야. 물론 비공식 방문이지.

“…….”

청와대로 들어가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NIS로 오겠다는 것은 사안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민준이 이렇게 한가하게 설과 마트를 가고 식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빨리. 안 오면. 내가. 다. 먹을. 거야.’

베란다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설이, 유리창 가까이 얼굴을 대고 입 모양으로 민준에게 뻐끔거렸다.

큭 설이 웃으며 혀를 메롱 내민 후 홱 뒤돌아 주방 식탁으로 다다다 달려갔다.

“……갑니다.”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누른 후 민준은 유리창 너머 설을 바라보았다.

설은 식탁에 앉아 민준에게 약을 올리듯 젓가락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민준이 거실 유리문을 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채소를 데친 게 아니라 삶은 것 같아. 이게 뭐야, 완전 흐물흐물.”

설이 냄비 안에서 은색 집게로 청경채 잎 하나를 꺼내더니 쯧쯧 고개를 옆으로 가로저었다.

“얼른 먹어요. 배 많이 고프다면서요.”

“…….”

설은 냄비 안에서 갈색으로 변한 소고기를 한 점 집어 민준의 앞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지금. 어딜 좀 다녀와야 하는데.”

민준의 낮은 목소리에 설이 두 눈을 들어 민준을 바라보았다.

“……어디요?”

아버지와 통화를 한 게 아니었나.

오늘 오전에도 찾아뵈었다는 민준의 아버지를.

“아버지께 급한 일이 생겨서.”

“…….”

“가급적 빨리 올 테니까, 먼저 먹고 있어.”

민준이 식탁 옆 의자에 걸쳐 놓았던 재킷을 손에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급한 일이라니. 어쩔 수 없죠.”

설이 실망스러운 얼굴로 씁쓸하게 말했다.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나가야 하는 걸까. 그것도 일요일에.

오늘 처음으로 민준을 위해 요리를 했는데.

“우린 둘이 같이 밥 먹을 팔자는 못 되나 봐요.”

“강설.”

민준이 많이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이해가 가질 않아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다.

“조심해서 다녀와요.”

마음 속 의문은 깊이 감춘 채 설이 두 눈을 들어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른팔을 내밀어 팔팔 끓고 있는 냄비 아래 인덕션 전원의 불을 껐다.

보글보글 맛있는 소리를 내며 끓어오르던 물이 곧 잠잠해졌다.

서늘하게 식어버린 설의 마음처럼.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