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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의 경호관-15화 (15/94)

15화. 네가 나의 바다가 되지 않아도2016.02.23.

민준은 서울 한복판 도로 위에서 정말 레이싱을 하는 것처럼 자동차 사이를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고, 안전벨트를 맨 걸로는 왠지 부족해 보여 설은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무심한 얼굴로 사이드미러를 흘끔거리며 운전하는 민준은 마치 영화에서 뒤쫓아 오는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도망치는 도망자처럼 보였다.

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민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 지금, 도망가는 거예요?”

“도망갈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끼이이이익-

민준의 자동차가 왼쪽 골목으로 급하게 접어들었고, 설의 몸이 급격히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다행히 민준이 설의 왼손을 꽉 붙잡고 있어 몸의 균형을 잃지는 않았다.

“이제 그만해요! 나 이런 거 싫어요.”

“…….”

민준의 자동차가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한가한 도로 위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대리님!!”

설이 화가 난 얼굴로 민준을 불렀고, 곁눈질로 거울을 쳐다보던 민준이 이윽고 천천히 자동차 속도를 줄여나갔다.

대통령이 붙여놓은 경호관들이었나.

기를 쓰고 따라오진 않는 걸 보니, 두 사람을 잡는 게 목적은 아닌 것이다.

그렇담 오늘 저녁 설이 무얼 했는지는 대통령께 보고가 되지 않겠네.

“난 레이싱 같은 거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그리고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렇게 운전을 해요?”

화가 많이 난 듯 설의 두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가 강설을 다치게 할 것 같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민준이 반문하며 웃었다.

“나 말고 대리님이요! 다치면…….”

설이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민준의 어깨와 팔에 남아 있던 희미한 흉터들.

오래된 자국처럼 보였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흉터들이라면 많이 아팠을 것이다.

쓸데없이 좋은 기억력이 설의 눈앞에 민준의 상처를 생생하게 재현시켰다.

“다치면 왜.”

“너무…… 속상할 것 같아서.”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릿해졌다.

어디에서 다친 거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민준의 몸에 남아 있던 흉터가 설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라 또 한 번 눈에 아프게 밟혔다.

“강설이 속상하면 안 되니까 다치지 말아야겠네.”

슬쩍 설을 쳐다보며 웃는 웃음 끝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설이 가만히 민준의 오른손에 제 손을 끼워 넣어 깍지를 꼈다.

늘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어 잘 몰랐는데, 웃고 있는 민준의 눈빛이 쓸쓸해 보였다.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고 좋네. 좋아, 내가 오늘 특별히 강설을 내 비밀 장소에 데려가 주지.”

“비밀 장소요?”

“응. 내가 찾아낸 곳인데, 당신도 아마 맘에 들 거야.”

**

민준의 자동차가 크게 커브를 돌며 천천히 도로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위로 올라갈수록 세상은 점점 더 고요해졌고,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선 싱그러운 풀 냄새가 났다. 풀 냄새를 맡자 설은 할아버지의 서재 생각이 났다.

설의 행복했던 유년시절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곳이.

설이 조수석 창문을 완전히 내리고 밖을 향해 손을 길게 뻗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바람도, 콧속으로 들어오는 짙은 풀 내음도, 찌르르 우는 곤충들의 울음소리도 좋았다.

그래도 가장 좋은 건, 설의 왼손 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어루만지는 민준의 손길이었다.

한참을 어둠을 가르며 달리던 민준의 자동차가 마침내 어느 한적한 공터 앞에 멈춰 섰다.

“도착.”

민준이 자동차에서 차 키를 빼내며 설을 바라보며 웃었다.

설은 고개를 조금 내밀어 자동차 밖을 바라보다, 안전벨트를 푸르고 민준을 따라 밖으로 내려섰다.

“…….”

그 흔한 운동기구 하나 없는 작은 공터에 낡은 벤치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서울에 이런 곳이 남아 있었나 싶게 낡은 가로등 하나만이 어둠을 희미하게 밝혀주고 있는 곳.

설은 고개를 돌려 의아한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해 주면 절대 안 돼.”

대단한 비밀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민준은 설에게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만 알려줘도 아무도 안 올 것 같은데.

끄덕.

설이 웃으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은 기분이 좋은 듯 설의 손을 잡고 저만치 놓인 벤치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 달리 민준의 두 눈이 기쁘게 반짝이고 있어 설의 마음이 포근해졌다.

“여기에 앉으면 말이야..”

민준은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앞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나무 벤치에 다가가니 서울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설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저 멀리 보이는 N타워의 불빛과 고가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빨갛고 노란 불빛들, 어두운 밤을 길게 가르며 휘어지는 아름다운 빛들의 향연이 눈앞에 가득 펼쳐졌다.

“……너무 예뻐요.”

설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서울의 화려한 야경을 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작게 숨겨진 공간에서 내려다본 적은 없었다.

“강설이 좋아할 줄 알았어.”

민준이 설의 곁에서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혼자만의 장소였는데 이제 둘만의 장소가 되었다. 강설과 김민준의 장소.

“이런 델 어떻게 찾아냈어요?”

“그냥 드라이브하다가.”

아무리 미소를 지으려 해도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 날이 있었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숨고 싶을 때가 있었다.

과분한 사랑을 받았어도 외롭게 느껴지던 날들이 있었고, 기억이 잘 나지 않아도 막연한 그리움에 문득 가슴이 뜨거워질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가끔 절로 발길이 향해 혼자 들렀던 곳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취하는 순간은 언제나 잠시뿐이었고, 형형색색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은 어둡고 컴컴한 이곳을 더욱 외롭고 쓸쓸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건너편 세상의 빛은 어두운 이곳까지 이어지지 않았고, 건너편 세상의 아름다움도 민준의 것은 아니었다.

허전한 가슴을 채우러 왔는데 정작 돌아갈 무렵에는 언제나 더 비워져 있었고, 그래서 돌아가는 발걸음은 그만큼 더 무거워졌다.

하지만 오늘은 이곳이 조금도 외롭지가 않다. 그리고 돌아가는 마음 역시 따듯한 온기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것이다.

내 옆에 강설, 당신이 있어서.

“추워?”

어딘가 모르게 조금 들떠 보이는 민준이다.

민준이 양복 재킷을 벗더니 설의 어깨 위에 재빨리 둘러준 후,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재킷의 앞 단추까지 꼭꼭 잠갔다.

“이러면 내가 팔을 움직일 수가 없잖아요.”

푸흡. 설이 웃으며 민준을 바라보았다.

“못 움직인다니 좋네.”

민준에게 꽁꽁 묶여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설.

민준의 커다란 손이 설의 두 뺨을 감싸자, 설이 아랫입술을 안으로 설핏 말며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러자 밤공기를 머금어 차가운 민준의 입술이 이내 뜨거운 기운을 흘리며 설의 입술을 입안 가득 삼켰다.

이미 설에게 흘러 버린 마음은 돌이킬 수가 없다.

설이 나의 바다가 되지 않아도, 이제 나는 설을 향해서만 흘러가는 강물이 된다.

**

설의 아파트 출입구 앞에서 어쩐지 조금 무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설을 민준이 빙긋 웃으며 바라보고 서 있다.

부어오른 입술이 설의 입술 색깔을 더욱 붉게 만들었고, 안 그래도 도톰한 입술을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많이 쓰라려?”

민준이 가운데로 눈썹을 모으며 설의 얼굴 가까이 얼굴을 대고 부풀어 오른 입술을 근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뭘 또 그렇게 가까이에서 봐요. 사람들 쳐다보게.”

설이 오른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민준을 흘겨보았다.

“지금 들어가서 잘 거야?”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설을 붙들고 싶어진다.

내일 아침이 오려면 또 몇 시간이 지나야 하는데.

“자야죠. 그래야 내일 회사에 출근할 것 아니에요.”

나무라는 말투로 말을 하긴 했지만, 설을 조금이라도 더 붙들고 있고 싶은 민준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 아무 데서나 잘 자는데. 베란다에서도 잘 수 있어, 정말이야.”

“김민준 씨.”

설이 어림도 없다는 듯 두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민준을 쳐다보았다.

쩝. 살벌한(?) 눈빛을 보니 베란다가 아니라 현관에서도 재워주진 않을 것 같다.

“농담이야 농담. 내가 얼마나 귀하게 자랐는데 설마 베란다에서 잠을 자겠어?”

한 발 물러서는 민준을 보며 설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잘 자고 내일 아침에 봐요.”

“당신도.”

설이 눈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아 멀어져갔고, 민준은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로 우두커니 서서 설의 아파트 층 현관 불이 켜지는 걸 바라보았다.

**

아파트 현관 출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설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설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아버지 강현석 대통령이었다.

“네, 아빠.”

핸드폰을 귀에 대는 설의 표정만큼 즐겁게 고조된 목소리가 복도에 낭랑하게 울렸다.

-이제 퇴근하는 거야?

“네. 오늘 일이 있어서 좀 늦었어요. 늦은 시간에 웬일이세요?”

-아무리 바빠도 우리 딸이 얼굴 좀 보여주고 살면 좋겠는데.

픽. 설이 옅게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무리 설이 바쁘다고 해도 대통령인 아버지만큼 바쁠까.

그러고 보니 요즘 통 전화도 드리지 않았고 찾아뵙지도 않았다.

사가에 계실 때에는 그래도 가끔 집으로 갔었는데, 부모님께서 청와대 사택으로 들어가신 이후로는 이래저래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한번 갈게요.”

-내일 회사 끝날 시간 맞춰서 사람을 보낼 테니, 와서 아빠 얼굴 좀 보고 가.

“내일이요?”

엘리베이터가 설의 아파트 층에 멈추자 설이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대통령의 목소리 톤이 방금 전보다 조금 낮아졌다.

“말씀하세요.”

띠띠띠띠- 설에 도어락 버튼을 누르자 띠디-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고, 현관등 센서가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아빠가, 미안하다.

“…….”

아파트 현관에 구두를 벗으려던 설이 움찔거리며 행동을 멈추었다.

예전에 한번 아빠가 지금과 같은 목소리로 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아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얼마 후, 설은 건우와 헤어졌다.

3년 전 건우가 설에게 접근했었던 일에 대해 아빠가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빠는 설에게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설 역시 그 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정치가로서의 아빠의 입장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남긴 중요한 파일을 찾아야 한다고 들었다.

할아버지인 이인호 박사가 돌아가시던 날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공교롭게도 설이었고, 이인호 박사가 연구실로 종종 부를 만큼 설을 각별히 여겼기 때문에 설은 파일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자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그날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 할아버지는 연구실 문 안쪽에 서서 무서운 얼굴로 지금 당장 돌아가라고만 말씀하셨다.

당분간 연구실로 오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어겨서 화가 많이 나셨다고만 생각해 서운한 마음으로 뒤돌아섰는데, 그게 설과 할아버지의 마지막이었다.

그날, 그들이 움직일 것 같다는 정보를 미리 전해 듣고 할아버지는 관련 연구원들을 조용히 집으로 귀가시키셨다.

설이 연구실로 오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아시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려는 할아버지를 NIS에서는 위험하다며 만류했지만, 중요한 파일의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는 말에 순순히 할아버지를 보내주었다.

결과적으로는 파일을 지키지도 못했고, 저명한 박사마저 잃게 된 최악의 사건이었다.

사건 발생 직후 NIS에서는 제일 먼저 설을 찾아왔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설에게 무언가를 전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실제로 할아버지는 설에게 무언가를 남겨놓지도 않으셨다.

고맙게도 연구원 몇몇 분들이 설이 이렇게 가끔 연구원에 놀러 왔었다고 말씀을 보태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IS는 포기하지 않고 설의 곁에서 그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을 했고, 그 노력의 방법이 건우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제 다 지난 일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NIS가 설을 찾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아빠는 이렇게, 그때와 같은 목소리로 설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시면 안 되는 것이다.

“……미안한 일을 안 하시면 되잖아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농담처럼 가볍게 건넨 말에 한숨 섞인 낮은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내일 보자.

“…….”

현관에 켜 있던 센서 등의 불이 자동으로 꺼졌고, 설의 아파트 안에 깜깜한 어둠이 찾아왔다.

**

이른 아침, 밤새 뒤척거린 탓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 설의 얼굴이 피로해 보인다. 설은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핸드폰에 손을 뻗어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오전 6시 30분. 설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다시 옆에 내려놓았다.

따르르르르-

그때 설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민준이었다.

“여보세요?”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일어났어?

지금 일어나긴 했지만, 타이밍도 기가 막히다.

꼭 설이 일어난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설이 일어나자마자 전화를 걸다니.

“지금 일어났어요. 대리님은, 벌써 일어난 거예요?"

-벌써라니. 아침까지 먹었는데.

“난 이제 씻고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데요.”

-내가 그쪽으로 갈까? 난 할 일도 없는데.

“지금이요?”

-응.

“……그럼. 한 30분만 있다가 와요.”

-거실에 얌전히 앉아만 있을 테니까 그냥 문만 좀 열어줘.

하아. 진짜 못 말려.

“알았어요.”

전화를 끊자마자 설은 침대에서 일어나 서둘러 욕실을 향했다.

미지근한 물에 세수를 하고 칫솔에 치약을 묻혀 거울을 보며 치카치카 이를 닦는 도중에 벌써 왔는지 ‘딩동딩동딩동’ 점잖지 못한 현관 벨 소리가 들렸다.

설은 서둘러 입안을 찬물로 헹구어 낸 후 마른 수건에 손과 얼굴을 닦고 곧장 현관으로 가 문을 열어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예요?”

“그냥, 잠이 잘 안 와서.”

“아침 식사는 했다고 했으니까. 과일 줄까요?”

“아무거나.”

민준과 설이 나란히 거실 안으로 들어왔고, 설은 주방 냉장고로 가 투명한 야채박스에 들어 있던 빨간 사과 한 개를 꺼내 흐르는 물에 깨끗이 헹구었다.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하던 준비 해.”

민준이 씽긋 웃으며 설의 손에 있던 사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 두 개를 사과 꼭지 부분에 대고 가볍게 눌러 사과를 반으로 정확히 쪼개더니 그중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먹을래?”

설이 민준을 빤히 쳐다보자 민준이 나머지 반쪽 부분을 설에게 불쑥 내밀었다.

“손 힘이 되게 세네요.”

“배도 똑같이 자를 수 있어.”

설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민준이 아삭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웃었다.

민준의 말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귀여운 허풍(?)에 설이 설핏 웃었다.

“오늘 저녁에는 어디 갈까.”

“아. 오늘 저녁은 안 돼요. 약속이 있어요.”

“무슨 약속.”

민준이 미간을 좁히며 다시 사과를 아삭 한 입 베어 물었다.

“아빠 만나러 가야 해요. 저녁에 뵙기로 했거든요.”

“……아.”

“그러니까 오늘 저녁은 혼자 먹어요. 늦을 수도 있으니까.”

“…….”

설이 씽긋 웃더니 옷을 갈아입으러 침실 안으로 사라졌다.

혹시나 엉큼하게 민준이 설의 뒤를 따라 들어오진 않을까 걱정(?)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민준은 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고요한 모습으로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출근 안 해요?”

까만 정장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은 설이 다시 민준의 눈앞에 나타났다.

민준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설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설의 눈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똑똑.”

설이 식탁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민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아직 추운데.”

민준이 의자에서 일어서 설의 셔츠 깃을 두 손으로 올려세우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통령께서 설을 부른 건 분명 그 파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함일 것이다.

“일찍 오면 우리 밤에 맥주 마실까요? 저번에 갔던 거기에서.”

오늘 밤, 강설은 나에게 돌아올까.

“……기다리고 있을게. 당신이 올 때까지.”

민준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설을 바라보았다. 불안한 마음이 보일까 봐 떨리는 입술 끝에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 올진 몰라요. 나도 가봐야 아는 거라.”

“그래도 기다릴게.”

당신이 나의 바다가 되지 않아도, 이제 나는 당신을 향해서밖에 흘러갈 수가 없으니.

“……그러니까, 너무 늦게 오지 마.”

민준이 나지막이 덧붙인 말은 한숨 같았다. 설은 민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기쁘게 웃었지만, 이 순간이 설에게 기쁜 기억으로 남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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